지하 철도(Underground Railroad)를 타면서

◆ 해결중심적 접근의 기원과 미래에 대한 Insoo Kim Berg와의 인터뷰 ◆

John: 선생님들께서는 밀워키에 미국 중부의 MRI(Mental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하고자 하는 포부를 갖고 시작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MRI에서 하는 것과 다른 방법,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만한 가치가 있고 새로운 명칭이 필요한 방법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셨나요?

Insoo: 우리가 처음 BFTC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갖고 시작한 것은 1978년입니다. 그 당시 우리에겐 사무실이 없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거실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MRI에서 하는 것을 그대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그저 있는 자원들만을 갖고 진행했지요. 1978년이 다 지나서야 우리는 이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는데 만일 사무실을 임대할 경우 3년 동안 계약을 해야 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요.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3년 동안 생존해 나갈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사무실을 얻어 이사를 했고, 일방경이 있는 사무실을 마련하여 기본적으로는 MRI 모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인가 81년쯤에 이르러서 우리는 무엇인가 매우 다른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BFTC에는 많은 방문객이 왔었는데 그 이유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고 불리는 우리의 뉴스레터(newsletter)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지하 철도라는 용어를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이는 노예 시절부터 내려오는 용어입니다. 지하 철도는 노예들이 한 집에서 또 다른 집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돕는 비밀의 네트워크였어요. 우리가 그 이름을 택한 이유는 우리가 하는 것이 기존의 방법과 무척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은밀히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Steve가 그 뉴스레터 최초이자 유일한 편집자였지요. 그 뉴스레터 덕분에 우리 센터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게 되었고, 그들은 우리가 일하는 방법이 MRI 와는 좀 다른 것 같다고 계속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가 무엇인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무언가 조금씩 다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John: 그러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MRI 모델을 잘못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정통’에 가깝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텐데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다르게 해 나가셨군요?

Insoo: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정통’이 되고 싶었고, 몇 년 동안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점차 우리가 MRI 모델에서 주장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거지요. 우리가 제일 먼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예외라는 개념이었는데, 이는 전체 해결중심적 접근이 발전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문제 대신 해결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지각하게 된 해는 1982년이었고, 그 후 계속해서 많은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지요. 1982년 후반에 기적질문을, 뒤를 이어 척도질문을 추가하였고, 곧 이어 다른 종류의 질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제일 먼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Steve의 논문 “저항의 사망”은 1985년경에 출판되었습니다. 초기에 우리는 ‘두개의 시각(double vision)’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클라이언트는 문제를 보고 우리는 해결책을 보는데, 그와 같은 클라이언트의 시각과 실천가의 시각을 나란히 함께 고려하는 것이었지요. 이것이 Steve의 첫 번째 저서 ‘단기가족치료의 패턴(Patterns of Brief Family Therpy)'를 탄생시킨 최초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역시 우리는 해결책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MRI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던 것이죠.

John: 그러한 변화가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 정진하게끔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Insoo: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직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무엇인가 매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는 단서가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외”와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때”라는 거대한 영역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죠. 예상했던 대로 클라이언트들의 삶에는 그들이 변화를 원치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 당신이 달라지지 않길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What don't you want changed)?”라는 질문을 하였고, 또 다양하게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첫 세션 끝 무렵에 가서 내담자들에게 그들 가족이 계속해서 유지했으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삶 속에서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지금 그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났으면 하는 어떤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첫 세션이 끝나는 시점에 말입니다. MRI에는 ‘불변의 동일제안 (invariant homo suggestion)' 이 있었는데 Steve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이언트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잘 된 부분은 이 것입니다.”라는 답을 갖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John: 전 그 질문 그 자체에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물어 보셨겠습니까?

Insoo: 예, 정확히 바로 그거예요. 우리는 무언가 흔적을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 못했었거든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발견하고자 노력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클라이언트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시 왔고, 우리가 질문을 할 때마다 클라이언트들은 무엇인가 할 이야기가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John: 그러니까 바로 그러한 점들이 선생님들이 무언가 의미 있는 질문을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강화시켜 주었군요?

Insoo: 네, 바로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클라이언트에게 공을 돌리죠.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격려해 주었고, 그들의 반응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해서 찾고 또 찾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반응은 과히 열광적이었고. 얼굴이 밝아지고, 에너지가 많아졌기 때문에 아마도 무언가 발견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John: 언제부터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일이 다른 실천가들에게 알려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나요?

Insoo: 1986년에 우리는 MRI에서 이전 논문에서 썼던 ‘문제의 형성과 문제해결의 모델’이라는 형식을 그대로 따서 논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형식을 땄지만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해결책의 형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BFTC]에서는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명하게 설명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인 1984년에 Steve는 ‘저항의 죽음’에 대해서 글을 썼었지요.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저항이라는 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이 모델을 따르면 거기까지 갈 필요조차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John: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알리기 시작했을 때 치료현장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Insoo: 일찍이 우리는 밀워키 지역사회 내 치료현장에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지역 밖과 외국 특히 유럽에서 ‘지하철도’에 관심을 가지고 오는 방문객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사람들이 매우 큰 관심을 가졌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치료 분야의 Lyman Wynn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정신분열병을 가진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였고, 정신분열병에 대한 글을 많이 써서 유명한 분이죠. 아무튼 우연히도 그의 딸이 밀워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딸을 방문하러 오곤 하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 대해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딸을 방문하러 올 때마다 우리에게 “선생님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일방경 뒤에 앉아 선생님들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곤 했지요. 우리는 Lyman Wynn같이 유명하고 존경받는 분이 그런 요청을 했다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해서 “네, 물론입니다!”라고 했죠! 그러면서 우리는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또한 MRI의 John Weakland도 계속해서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우리의 기원은 MRI 모델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John Weakland는 초창기부터 우리의 멘토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는 우리가 점차 그들로부터 분리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지만 여전히 우리가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크게 감탄하였답니다. John: 그러한 일은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한 대단한 시험이었겠네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누군가와 의견을 달리해서 분리되어 간다는 것 말입니다.

Insoo: 그는 계속해서 일 년에 한번쯤 방문을 하곤 했습니다. 방문하면 그는 일방경 뒤에 앉아 상담하는 것을 본 후 우리 집에서 묵어가곤 했답니다. 그럼 Steve와 John은 밤새 술을 마시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 했습니다. 바로 이런 중요한 인물들의 방문이 우리가 하는 일을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보는 방법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그것을 좀 다르게 부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것을 ....라고 불러 봅시다. 그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이건 어쩐지 다른 것 같은데요” 라고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우리에게 더 큰 자극이 되곤 했거든요. 우리가 밀워키에 자리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 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곤 했기 때문에 우리가 밀워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바로 그곳에 있다는 이유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밀워키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뉴욕, 로스앤젤레스나 보스톤과 같이 큰 도시에서는 실천가들이 주로 전통적인 모델을 따르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곳은 치료분야에서 오래 지속되어온 권력구조의 중심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밀워키 같은 곳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내 버려두었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피이드백을 주고받았던 방문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 나가는데 자신감을 갖게 하였고, 그러한 점들이 여러모로 매우 도움이 되었죠.

John: 지역에 있는 실천가들도 지하 철도의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았을까 궁금하네요!

Insoo: 몇몇 학생들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작할 당시에는 “관리 보호(managed care)"라는 접근이 처음 활용되기 시작했었고, 중부는 초기 단계에 있는 ‘관리 보호’의 온상 중 한 곳이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전까지 관리보호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관리보호를 담당하는 기업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한 사례 당 $500까지만 지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500에 해당하는 것보다 더 적은 수의 세션에 문제를 해결하면 남은 돈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면 우리가 그 비용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단기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죠. 그 때에는 이미 훨씬 더 많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지역사회에도 알리기 시작했어요. 특히 사회복지사, 보호관찰관, 그리고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 학교와 공적 지원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갖고 있는 가장 힘든 사례들을 보내 주십시오. 쉬운 사례들은 보내지 말고, 가장 힘든 사례들만 보내주십시오!”라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그들은 우리가 가장 힘든 사례들을 기꺼이 맡아주겠다고 하자 무척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제대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매우 효과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산층이나 상류층의 사람들과는 거의 일할 기회를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John: 그 초창기 시절에 이미 현재인 2006년을 내다보며 오늘날 해결중심적 접근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견하셨는지 궁금한데 어떠셨나요?

Insoo: 그럴 수 없었죠! 절대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임상센터가 되길 원했습니다. Steve와 저는 둘 다 실천가로서 시작했습니다. 일단 몸 안에 실천가로서의 피가 흐르게 되면 절대로 멈추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일을 잘 하면서 그것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포부였습니다.

John: 그러면 결과적으로는 선생님들이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이루게 되신 거군요?

Insoo: 네, 심지어는 바로 지난여름 Steve가 사망하기 직전에도 우리는 “정말 놀랍지!”라고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포부를 갖고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우리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그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어요.

John: 앞으로 해결중심적 접근을 더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이나 의견을 주시겠습니까?

Insoo: 전 이 모델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데 까지 도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 어떤 방향으로 갈 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제게 “선생님이 생각하는 기적 그림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종종 묻곤 합니다. 우린 이미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앞으로 또 어떤 것이 가능할 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이 분야에 입문하는 젊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먼저 그 일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해결중심적 실천을 적용해 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난 3월 해결중심모델 훈련가들을 위한 컨퍼런스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이 접근은 여러 다른 영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으며, 이제는 정말 치료의 경계를 벗어났습니다. 저편에는 엄청나게 큰 세상이 있기에 사람들에게 해결중심적 접근에 대해 전해 주고, 실천방법을 가르쳐 주고,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해결중심적 접근의 정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해결중심적 접근은 기술이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인 클라이언트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겸손한 마음입니다. 해결중심적 접근은 우리 실천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 곧 그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어떻게 더 나은 것으로 만들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John: 마지막으로 해결중심적 접근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아직 훈련을 받아 본 경험도 없지만 그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실지 궁금합니다. 그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야기 해 주신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Insoo: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만약 해결중심적 접근의 그 무언가가 관심을 끌었다면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관심을 계속 유지해 가면서, 해결중심 모델을 실천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관심을 갖는 부분이 각기 다른 것 같습니다. 전 훈련하는 사람으로서 그 부분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훈련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John: 그러면 그 물결은 계속해서 퍼져 나가게 되는 거구요. 감사합니다.

관리보호(managed care)란 보건분야 특히 정신건강분야에서 서비스를 전달할 때 보호(care)의 3가지 측면 즉 비용, 질 과 접근성에 대한 관리와 통제력을 발휘하고자 실시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보건서비스의 자금조달 방법이 비용을 상승시키고 비용 효과적인 예방 활동들보다 값비싼 또는 장기적인 치료방법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나타나게 되었다. 즉 전통적인 보건서비스 제도 하에서 의사는 예방보다는 치료에 초점을 맞추었다. 치료를 하면 비용은 보험회사에서 지불하였기 때문에 자세한 검사와 비싼 치료를 거리낌 없이 하였다. 또한 환자가 비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때는 “얼마입니까?”의 질문보다는 “그 치료는 보험에 포함된 것입니까?”로 특징 지워졌다. 따라서 보험에 든 사람에게는 예방활동의 증진보다는, 높은 질 또는 장기간의 치료가 높은 비용으로 제공되었고, 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치료가 주어지지 않거나, 저질의 치료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보호 제도는 비용을 통제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수준의 보건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관리보호 제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입증된 경우에만 값비싼 또는 장기적인 외래진료와 입원치료를 허용한다. 특별히 상담치료와 관련해서 이야기하면 관리보호 제도는 치료자에게 한 사례 당 일정 수의 치료세션에 대한 고정된 액수를 서비스 제공 전에 보상하고 그 선불된 액수 내에서 계약된 모든 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다. 따라서 관리보호 제도 내에서는 장기적 상담치료는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Petr, 1998)[역자 주].

해결중심치료/지하 철도(Underground Railroad)를 타면서 (last edited 2025-10-04 01:06:09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