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경영학 (최동석)
최동석 선생이 쓴 책.
Contents
서장
경영학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영 환경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경영자들뿐만 아니라 구성원들도 정신적으로 점차 고갈되어 가는 느낌을 갖는다. 육체적으로도 지쳐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노동생산성은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50~6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노동시간은 그들보다 대략 50% 정도 더 길다. 말하자면, 일은 많이 하는데 산출물이 신통치 않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서 경영자가 실행할 수 있는 전략은 대략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더 쥐어짜기’ 전략이다. 현실에 대해 눈을 질끈 감은 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조직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마른행주도 짜면 물이 난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래서 학자들이나 실무자들은 마른행주 짜는 방법을 고안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수단이 당근과 채찍이다.
교묘한 두 번째 방법도 있다. ‘이중장부 쓰기’ 전략이다. 예를 들어 정직과 창의를 사훈으로 삼은 어떤 회사가 있다고 치자. 구성원들은 “정직하라” “창의적으로 생각하라”는 공식적인 훈시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면서 경영자가 영업담당 임원과 경쟁업체가 뒷구멍에서 담합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탈법과 불법으로 영업하는 것을 눈감아주는 경우, 구성원들은 표방하는 가치와 행동하는 가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이것이 전형적인 경영의 이중장부 쓰기 전략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세 번째 방법은 ‘다시 시작하기’ 전략이다. 처음부터 그리고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여 올바른 토대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계산기에 숫자를 잘못 입력해서 헷갈릴 때 리셋 버튼을 눌러 새로 시작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앞의 두 가지 전략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구성원들을 선발할 때도 역량에 맞는 인재를 선발하고 선발한 후에는 자율성을 부여한다. 더욱 학습하여 성장하도록 촉진하고,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도록 자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길을 일깨워 준다.
오늘날 기업에서는 성과지표들을 스코어링scoring한다.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량화되는 것도 있지만, 계량화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경영자의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의식,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염려와 신뢰, 종업원들의 비전에 대한 높은 몰입과 탁월한 역량 수준, 상사와 부하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수준, 조직구성원 간의 협력 의지 등은 조직성과에 결정적인 변수들이지만 쉽게 계량화되지 않는다. 설사 계량화되었다 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모인 세상에서, 더구나 공동의 목표를 가진 조직에서 서로 염려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나누는 일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영혼이 없는 뼈다귀 같은 매출액, 당기순이익, 시장점유율 등만 남는다. 여기에는 생명이 없다. 이런 뼈다귀들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조직의 변화에 대한 나의 경험
이 모든 과정은 내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2013년 현재 나는 시스템이론가로서 그동안 했던 모든 노력이 거의 성공하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구조와 시스템을 바꿨지만, 그 구조와 시스템의 취지대로 조직이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아무리 세심한 배려를 한다 해도 조직의 구조와 시스템의 변화는 조직구성원들의 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관점의 근본적인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구조와 시스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은 오히려 구성원들의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냉소적으로, 이기적으로, 때로는 파괴적으로 변한다.
경영자의 정신적 토대의 변화, 즉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 어떤 구조적ㆍ시스템적 변화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을 자원resource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조직의 구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은 자원 이상의 대접을 받을 수 없다. 매출이나 이익을 내는 수단으로 간주될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앵벌이쯤으로 여긴다. 인간은 그저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충전된 건전지를 편의점에서 사서 쓰다가 효력이 다 떨어지면 내버리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도 그런 운명이다. 조금 더 인정한다면, 인간은 그저 노동하는 노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즉 인간의 존재being를 실존existence으로 바라볼 때 조직의 구조와 시스템의 변화가 비로소 생산성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이 놀라운 진실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생산성을 강조하는 기업조직은 인간을 자원의 관점resource-based view이 아니라 실존의 관점existence-based view에서 바라보는 치유의 경영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진정으로 생산성을 강조하는 경영학이라면 당연히 구성원들의 마음을 치유하여 타고난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각종 철학적 질문과 개념들, 심리학적 이론과 처방들, 그리고 경영학적 관행과 제도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산성이 높은 민주적 경영, 즉 경영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기업조직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각 부의 주제와 요약
이런 과정은 경영학의 성립 초기에도 일어났다. FrederickTaylor는 청교도적인 엄격한 가정 훈육을 통해 자랐다. 그는 모든 것이 정리정돈 되어 있어야 했다. 심지어 야구장에서 친구들과 노는 시간에도 모든 것을 정확한 숫자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직장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노동자들의 게으름을 바로잡아 생산성을 높일 방법을 고안했다. 불철주야 연구하여 생산성 향상의 과학적인 방법들을 발굴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남긴 책 '과학적 관리의 원칙 ThePrinciplesOfScientificManagement'이다.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계량화된 숫자로 표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는 측정하여 숫자화 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모든 공정을 숫자로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라는 굳은 신념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과 이념은 미국 경영대학원 MBA 과정의 효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 공산당이 가혹한 노동자 통제를 하는 데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과학적 관리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생산성 숫자와 혁신 스토리는 많이 조작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육체노동자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신념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가차 없이 해고토록 했다. 관리자들이 계획한 것을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실행해야 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숫자로 정리정돈하려고 했던 것은 유년 시절부터 무의식에 켜켜이 쌓여 왔던 항문기적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그는 철저한 이원론자였다. 겉으로는 노동자들 편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자본가 또는 경영자를 위한 위계질서를 확립하도록 도왔다. 테일러의 사상은 미국 경영학의 방향을 정립했고, 이것은 곧바로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후 진행된 경영학의 전개 과정은 테일러리즘의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 권력의 공고화에 기여했던 것처럼 테일러는 기업가와 자본가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이중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01.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혼의 능력을 외면하는 시대
서양 정신사에서 철학자들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크게 세 번 정도 바꾸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당시에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커다란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섭리로 영혼을 가리다
그러나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는 달랐다. 그는 해박한 도덕주의자로서 당시 로마 시민과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펠라기우스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고, 원죄 개념을 부인했다.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신의 은총이란 인간이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한 자기 완전성에의 자연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았다고 가르쳤다. 바르게 행동하고, 이웃과 진정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덕행을 쌓을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평범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한편 펠라기우스는 시민에게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쳤고, 부자들을 향하여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설교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제국의 위계질서와 마찬가지로 수도원과 교회도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하기보다는 수도원에 기부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은 부자들의 기증품과 영향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중세 사람들에 비해 현대인들의 지식의 양은 더 많아졌다. 그러나 현대인이 고대와 중세를 살았던 사람들보다 도덕과 윤리의 측면에서 더 진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아직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많은 통찰을 얻고 있지 않은가? 지식은 축적되어 진보하지만, 지혜는 축적되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영혼의 도움을 받아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기술 문명이 더 발달했다고 해서 중세 사람들보다 우리의 정신세계가 더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11
내가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가 경영학의 역사에서 테일러와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모든 행동을 계량화하여 기업경영을 온통 숫자로 물들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세를 온통 신의 섭리로 물들게 한 것처럼 말이다.
이성의 힘을 인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민
중세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사상이었는데, 이 사상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철학체계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플라톤이 내세운 이데아의 세계를 기독교에서 신의 세계나 하늘나라로 이상화했던 것이다. 이 모든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최종적인 원인이 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세상 어딘가에, 즉 신이 계신 곳에 존재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막에서 낙타나 탈 줄 알던 낙후된 이슬람 세계가 수준 높은 문명으로 발전하게 된 비밀을 기독교의 지식인들이 알게 되었다. 그 비밀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과 그 문헌들이었다. 이 사상은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론과는 배치되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자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절대로 읽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강력한 신학적 도전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을 읽었고,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최종적인 원인은 그 세계 자체 내에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일원론을 주장했다.
이런 시대에 신의 은총을 개입시키지 않고 인간의 이성 작용으로도 사태의 진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굳이 이성을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신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은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믿었다. 이성에 의한 철학적 진리와 계시에 의한 신학적 진리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은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규명할 수 있지만, 성육신과 삼위일체, 최후의 심판과 원죄설 등은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신의 은총으로 해석했던 시대에 이런 주장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약 800년간의 중세는 신앙이 이성을 압도해 왔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는 신앙과 이성이 비등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성의 힘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 결과 세 가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첫 번째는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대를 본받자는 운동인 르네상스(문예부흥)이고, 두 번째는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운동(종교개혁)이며 마지막이 과학 분야의 혁명적인 변화(과학혁명)이다.
인식의 근거를 마련한 르네 데카르트의 유산
데카르트는 오감을 통한 경험적 인식보다는 수학과 같은 연역과 직관을 통해 명석판명明晳判明, clear distinct한 진리에 도달하는 사고가 정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생각하는 개인의 정신이 이 세상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인류의 정신사를 두 가지 측면에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구별하는 이원론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말은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온 이원론의 전통이 데카르트에게서 그대로 고착된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개인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이 말의 핵심은 인식의 주체가 절대화되지 않으면 인식의 객체인 타자the others에 대한 정보의 확실성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존재가 절대화되기 시작했다. 중세 교회가 가르쳤던 신앙중심의 공동체적 이상과 가치는 점차 사라지고, 개인의 주체적 인식이 보편적 객관성을 얻어야만 진리가 된다. 이러한 진리 추구 방식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성이 신앙을 완전히 압도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그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는 많이 희석되었다. 이렇게 중세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인간에 대한 관점을 더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역사 또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성이 신앙을 압도해가는 사상적 흐름 속에서 인류가 경험한 핵폭탄과 같은 충격이 세 번이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충격적 사건을 통해 이성은 스스로 과학적ㆍ분석적ㆍ실증적 사고로 발전해 나아갔다. 이제는 완전히 이성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인류는 영혼의 능력이 충분히 발현될 기회를 상실했다. 위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떤 충격적 사건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지동설과 칸트
이렇게 과학주의 시대, 경험주의 시대, 분석주의 시대가 장엄한 막을 올렸다. 영국을 중심으로 경험주의 사상이 꽃을 피웠다. 오감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인류는 이렇게 매우 위험한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분석적ㆍ합리적ㆍ경험주의적empirical 과학사상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칸트ImmanuelKant(1724~1804)였다. 칸트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으로서 경험과학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분석적 경험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감각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세계가 있으며 이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순수 이성, 실천 이성, 판단력 등을 통해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체계를 세웠다. 칸트는 기독교적인 영혼개념, 즉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이나 신과 같은 관념은 인간의 인식체계를 넘어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경험 이전의 세계, 즉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세계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라고 보았다.
이것은 칸트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다. 경험을 통한 인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칸트는 (경험 이전에) 사물을 인식하는 형식category이 인간의 본성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으며, 인간은 그 형식에 의해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사물의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그물과 같은 인식의 형식을 사물(대상)에 능동적으로 조명(또는 투사)함으로써 그 형식에 걸려든 것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선험적 인식론의 지평을 열었다.
칸트의 이런 위대한 사유는 인간이 진리를 지향하고, 도덕적이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생명체로 거듭나게 하는 철학적 토대를 인류에게 선물했다. 진선미眞善美를 분별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고유한 영혼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칸트가 내린 철학적 사유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은 결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 관한 칸트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한다면, 미국인들이 쓰고 있는 인적자원Human Resource이라는 용어가 얼마나 천박하고 위험한 의미를 내포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진화론과 키에르케고르
인간은 결코 생물학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고, 그 정신의 핵심인 자기self는 관계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상태connectedness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이다.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으며, 이 절망이 바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다. 핵심은 이렇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질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지만, 그 물질적 본질을 넘어서는 정신 능력인 영혼을 다루려면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대한 철학자 한 명을 꼭 이해해야 한다. 그는 덴마크의 우울한 철학자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1813~1855)다.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사유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인간은 결코 생물학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고, 그 정신의 핵심인 자기self는 관계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상태connectedness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이다.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으며, 이 절망이 바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다. 핵심은 이렇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질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지만, 그 물질적 본질을 넘어서는 정신 능력인 영혼을 다루려면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이성의 힘이 사유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인간 이성으로 해명할 수 없는 세계는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렇게 이성의 힘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오늘날 학문 방법론은 거의 완벽하게 환원주의reductionism로 바뀌었다. 이것은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되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상태까지 분해하여 그 개체들을 분석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체계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문헌들을 보면, 대부분 사람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물들이다. 설득 심리학에서부터 괴짜 심리학까지, 청소년 심리학에서 노인 심리학까지, 안전한 심리학에서 위험한 심리학까지 죄다 “○○심리학”으로 나온다. 그래서 인류는 다시 인간의 심연을 향하여 이성의 날을 세우고 분석해 들어가고 있다. 오늘날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은 대부분 분과학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인간을 통합적으로 조망하기에는 부족하다.
무의식과 사르트르
이러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환원주의적 학문 활동에 정면으로 도전한 철학자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였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비웃었다. 그는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리고 그 자리에 이성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지를 성찰했다. 그는 어떤 특정한 것으로 만들어지거나 조종될 수 있는 수동적 인간상을 거부했다. 키르케고르가 상정했던 것처럼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불안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주체적으로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적극적이고 실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 자신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조직했고, 사회 변혁을 위한 다양한 현실 참여 활동(앙가주망)에 매진했다.
제1장을 끝내며
어떻게 된 일인지 신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의 이성이 발달할수록 인간 자신은 자원화되었다. 오늘날 인간을 자원resource으로 보는 관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무엇을 위한 자원인가? 돈을 위한 자원이다. 천연덕스럽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자원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스스로 쓰고 있는 인적자원Human Resource이라는 말은 이런 전통 속에서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용어다. 근본주의적 이념들, 논리로 포장되어 있는 파편화된 개념들, 분석적 틀에 의해 편협해진 이론들, 상업주의에 편승한 사상들이 오늘날 지성계를 감싸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이러한 모든 신앙의 이데올로기와 과학적 분석의 틀을 넘어선다. 영혼의 능력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하고, 타인과 연결되어 있도록 하며, 사태의 진선미를 분별하여 행동하게 하는 가장 고도한 정신 능력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이 위대한 정신 능력이 그동안 어떻게 억압되어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신앙이라는 도그마가, 이성이라는 논리가, 과학이라는 칼날이 영혼의 능력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오늘날 과학적ㆍ실증적 분석의 틀 안에 인간은 갇혀 있다.
02. 경영학은 인간을 무엇으로 보는가
경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환원주의에 사로잡힌 경영자나 경영학자들은 기계론적 인간관에 근거하여 경영개념과 이론을 세운다. 이것이 미국 경영학의 특징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테일러리즘이다. 테일러는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생각했다. 노동자의 근육을 기계 장치와 가장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동작과 시간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훈련시켰다. 그 결과 생산성이 높아지긴 했다.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기업조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산 활동을 계량화하여 숫자로 경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은 뉴턴이 생각했던 것과 동일하다. 이 우주가 거대한 시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기업조직 또한 복잡한 기계 장치로 보고 노동자들을 이 장치의 부속품으로 생각했다. 이런 믿음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치를 무의미하게 하는 계량화
이러한 생각의 끝에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1929~2007)가 말하고 있는 선물의 개념이 있다. 선물에 담긴 의미는 결코 거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 어디에도 동일한 가치의 물건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가능한 교환』을 이렇게 시작한다.
- 모든 것은 불가능한 교환에서 출발한다. 세계의 불확실성은 세계가 어디에서도 자신의 등가물을 갖지 못하고, 그 어떤 것과도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 세계의 등가물은 없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정의이거나 세계에 대해 정의할 수 없음이다.
이 세계에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등가물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KarlMarx와 프롬ErichFromm이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을 인간으로서만,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기업경영에서 일부의 성과들은 자연스럽게 계량화된다. 매출과 이익은 억지로 계량화의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런 숫자들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세일즈맨 A는 연간 10억 원의 매출을 일으켰고, 세일즈맨 B는 5억 원어치를 팔았다. A는 B보다 두 배 더 잘했는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A는 전국에서 가장 잘사는 부자 동네에서 팔았고, B가 배정받은 판매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면 어떨까?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 그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계량화된 숫자 자체가 객관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숫자를 해석하는 사람의 정신적 메커니즘이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매출과 같은 숫자도 해석 판단의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데, 하물며 직원들의 일하는 태도와 역량, 직원들 간의 배려와 신뢰, 의사소통의 효율성과 조직풍토, 경영진의 리더십 등을 도대체 어떻게 계량화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한단 말인가?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은 결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간관은 우리에게 심대한 폐해를 남겨 놓았다. 가치 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이윤을 남기는 데 필요한 공학적 효율성과 생산성이 되었다. 그 기준을 채우기 위해 당근과 채찍에 의해 경쟁시키고 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철저한 경험주의, 실증주의 또는 실용주의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뢰와 우정, 사랑과 몰입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측정하기 어려운 항목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재무제표에 이윤을 확대하는 항목들만 중시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본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기업조직은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판단 능력을 제한하는 이데올로기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돈을 번다. 돈은 삶의 풍요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단에 불과한 돈이 목적으로 전도됨으로써 삶의 풍요가 오히려 수단화되었다. 돈을 위해 삶의 풍요를 버려도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삶의 풍요를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돈의 이데올로기화 현상이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화
이데올로기는 이성적 판단 능력을 제한한다
경영학이 바라본 인간관
테일러와 아우구스티누스
경영학에서, 특히 미국 경영학에서 테일러만큼 중요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미국 경영학의 아우구스티누스라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나누어 해석함으로써(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서양의 중세가 현세의 신앙과 내세의 천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소위 ‘암흑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테일러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구분하고, 실행과 계획을 철저히 구분하는 이원론자였고, 당근(성과급)과 채찍(처벌)으로 구성원들을 쥐어짜는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경영사상과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서양 정신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심각할 정도로 이데올로기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기업조직에서 구성원들이 고유한 영혼의 능력이 발현하는 것을 저해했다.
테일러는 친구들과 야구를 할 때도 과학적 접근 방식을 그대로 따를 것을 고집했다. 모든 것이 규격에 맞아떨어져야 했기 때문에 야구장의 크기와 베이스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된다고 우기곤 했다. 화창한 날 오전 대부분을 1인치의 오차도 없이 제대로 측정했는지를 확인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테일러의 이런 상황을 조사한 모르간Gareth Morgan은 다음과 같이 썼다.
- 테일러의 삶은 무의식적인 근심과 집착이 실제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테일러가 창시한 과학적 관리론 전체가 곧 그의 불안하고 신경과민적인 성격의 내면적 갈등 과정이 만들어낸 산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놀이건 혹은 나중에 그가 창시한 과학적 관리시스템이건 간에, 세상을 정리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바로 자기 자신을 정리하고 통제하려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면, 테일러의 경우는 항문기-강박적인 타입의 성격the anal-compulsive type of personality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라 하겠다. …… 성인의 성격적 특성은 유년기의 경험, 특히 아이가 자신의 성적인 충동을 외부의 통제와 제약요소들이 미치는 힘과 조화시키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항문기의 강박적 타입이란 문자 그대로 무의식적 표상에 의해 모든 것이 타이트하게 조여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적 특성을 말한다. 항문은 평소에는 항상 조여져 있는 상태여야 한다. 만약 조여 있지 않으면 배설물이 흘러나와 문제가 생긴다. 그렇지만 이따금 풀어주어 정상적인 배설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항문이 조여 있는 상태는 무의식적 작용이므로 의식할 수 없다.
성격 발달이 이런 특성을 갖는 항문기에 고착되어 있을 경우, 사물이나 현상이 질서정연하게 조여 있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매우 불편해진다. 그래서 질서 잡기와 조임을 강박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이런 성격은 일하는 동안 내내 사람들과 대립과 갈등을 만들어냈다. 그의 아내 루이즈는 테일러와의 결혼 생활 동안 수많은 병으로 고생했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과학적 관리의 핵심은 측정하여 숫자로 통제하는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숫자였다. 테일러는 경영의 모든 것을 수치화하지 못하면 관리할 수 없다고 믿었다. 테일러는 일일이 숫자로 지시하는 경영방식을 좋아했다. 노동자에게 보일러를 청소하라고 시킬 때는 그냥 걸레만 주지 않았다. 청소하는 방법이 자세히 적힌 종이를 함께 주었다.
약 1600년 전, 그것도 전혀 다른 대륙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이원론과 원죄론이 서양 세계를 신앙의 도그마에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성서와 세계에 대한 해석 권한도 교황청이 독점함으로써 인간에게 고유한 영혼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앙과 천국이었다.
테일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엄격히 구분했고, 육체노동이 정신노동에 복종해야 하는 규율을 확립했다.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권한이 사제들에게만 허용되었듯이, 숫자를 만들어서 경영에 활용하는 것은 정신노동자인 관리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현세적 삶이 내세를 지향하도록 만든 것처럼, 테일러는 노동자들의 삶을 성과급에 연연해 하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테일러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합리화와 생산성이었다. 오늘날 경영학이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과급과 생산성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숫자에 대한 강박 관념은 그의 말년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는 잔디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완벽한 잔디를 만들기 위해 800회 이상 실험을 했다. 그는 1제곱센티미터에 심어진 잔디 잎을 늘 계산했다. 생애 마지막 한두 해 동안 테일러는 잔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만약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잔디에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관심은 ‘잔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공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절대 꺼질 줄 모르는 테일러의 숫자에 대한 강박 관념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 행위의 합리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바나드와 토마스 아퀴나스
테일러리즘은 포드자동차에서 꽃을 피웠다. 포드HenryFord(1863~1947)는 공장을 이동식 조립 라인으로 만들어서 과학적 관리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포드는 1914년 1월 5일, 수익 중 1,000만 달러를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는 데 쓰겠다는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당시 주급 11달러에 불과하던 노동자의 임금을 하루 5달러, 주급 30달러로 올렸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특히 언론에서 이것을 대서특필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아낌없이 주는 관대한 행위”라고 칭찬했지만, 유독 《월스트리트 저널》이 “산업계에서 시도된 가장 어리석은 행위”라고 혹평했다. 포드사의 생산성 향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나중에 밝혀졌는데, 이동식 조립라인을 통해 절감된 경비는 노동자들에게 하루 20달러, 주당 120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 중에서 약 1,120만 달러가 주주들에게 지급된 셈이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포드는 매우 큰 폭의 임금을 다시 삭감해 버렸다. 포드는 결코 박애주의자가 아니었다.
테일러의 성과급과 생산성이라는 복음이 휩쓸고 있던 시절인 1930년대 후반, 기업경영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나드ChesterBarnard(1886~1961)인데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대학에서 직업적인 학자로 연구한 적이 없다. 사기업에 입사해서 사장까지 지냈고, 공기업과 비영리단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경영자로서 인간에 관한 깊은 통찰력이 있었고, 미국의 경영학사에서 아마도 가장 탁월한 경영학자로 기억될 만큼 위대한 인물이다. 요즘 경영구루management guru라고 불리는 피터스TomPeters(1942~)와 같은 부류의 경영이론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부류의 이론가들은 대부분 인간과 조직에 관한 심오한 지식이나 통찰력이 부족하다. 다행스럽게도 바나드는 자신의 사상을 1938년에 『경영자의 역할TheFunctionsOfTheExecutive』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ChesterBarnard는 기업경영에서 스톱워치로 잰 숫자들로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나온 숫자들을 인간의 감정적 에너지에 조화를 시켜서 조직의 효율성과 구성원들 간의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 경영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오늘날까지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효율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협력 의지에 관한 문제다.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한 후, 그의 사상이 나중에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살펴보자.
효율성의 문제
경영자는 조직의 공동목적을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동기를 일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조직이 공동의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구성원의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효과성effectiveness과 효율성efficiency의 개념적 분리가 나타난다.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효과성은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는 정도를 의미하고, 효율성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구성원의 동기가 충족되거나 만족하는 정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효과성이 높아도 효율성은 낮을 수 있고, 효과성이 낮아도 효율성은 높을 수 있다.
나아가 ChesterBarnard는 효율성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판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충성심과 신뢰, 팀워크, 조직 목적에 대한 헌신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 즉 구성원의 태도 변화와 같은 요소들은 공학적으로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다. ChesterBarnard가 효율성이란 구성원의 만족감을 나타낸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그 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한결같이 공학적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인간이 숫자에 치명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사이먼HerbertSimon(1916~2001)은 효율성이라는 용어를 숫자로 대치시켜 버렸다. 바나드의 『경영자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지만, 측정할 수 없는 것보다는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이먼은 1945년에 『관리행동론Administrative Behavior』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여기서 효율성efficiency이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 중에서 최대의 이익을 조직에게 가져다 주는 대안을 선택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고 나서 주관적 가치가 제거된 소위 ‘무자비한 효율성’ruthless efficiency을 계산하여 관리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이고도 합리적인 효율성 개념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다.
계량화되는 효율성이론이 노벨상까지 타게 되자, 그 후의 경영학과 경제학에서는 소위 효율성 공학efficiency engineering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효율성 공학에는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해야 하며, 계산할 수 있는 숫자로 표현되어야 한다. 만약 측정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면 측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리 아닌가?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 이것은 테일러의 신앙이었다. 사이먼을 통해 숫자에 대한 믿음이 미국 사회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협력 의지의 문제
어떤 사태가 숫자로 표현되는 순간 구성원들 간의 협력 의지는 사라진다. 서로 비교하고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숫자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직구성원들이 숫자에 매몰될 때, 조직의 목적에 공헌하기 위한 협력 의지는 파괴되고 이기적 탐욕이 드러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숫자에 의해 발생하는 탐욕은 반드시 지배와 착취의 관계를 강요한다. 숫자는 결코 중립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제2장을 끝내며
결론은 이렇다. 경영(학)은 인간을 숫자로 본다. 인간이 만든 합리적ㆍ계량적ㆍ과학적 모델은 세상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천재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협력하지 않고는 높은 성과를 낼 수 없다. 숫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협력 의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적 연구가 진전되면 인간이 만든 합리적 모델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신념이 사라지지 않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세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합리화ㆍ계량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합리화되지 않는 영역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바나드가 제시한 것처럼 계량화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려서 조직에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위대한 경영학자 바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무엇이 개인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고, 조직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하는 인식은 개인의 내부가 아닌 외부 환경에서 생겨야 한다. 이 인식은 사회적ㆍ윤리적ㆍ종교적 가치다. 이 가치가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지성intelligence과 영감inspiration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이 지성은 공식적인 교육보다 협력의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다. 영감은 조직에 통일감을 주고 공동의 이상ideals을 창조하기 위해 필요하다. 구성원들이 이 이상을 지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여러 사건을 제대로 관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동의 이상에 대한 신념이 구성원들의 협동을 이끌어내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이미 1930년대에 조직을 오늘날과 같은 성과급의 ‘경쟁체계’가 아닌 ‘협동체계’로 파악했던 바나드의 혜안이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후학들은 인간의 협력 의지도 숫자로 전환시켰다. 인간의 사고력과 의지, 그리고 그에 따른 행위들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여 자본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돈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하여 인간의 행위가 인적자원으로 전환된 것이다.
03. 인간의 본질과 실존은 무엇인가
인간에게는 본질 이전에 실존이 있다
본질적 사고, 경영에 응용되다
계량화에 뒤처진 동북아
계량화해야할 것 vs. 해서는 안 되는 것
계량화 바이러스가 경영학을 점령하다
계량화 바이러스를 저지하고자 한 드러커
드러커는 테일러리즘이 추구했던 합리화 또는 계량화가 가져다주는 생산성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근로자 개개인에게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워서 일하게 한다면 더 높은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질적 사고의 한계를 인식하라
우리는 연결되었기에 실존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단락에서 인간, 정신, 자기, 관계라는 네 단어를 조합하여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 정신의 근원은 자기self이며 자기는 관계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관계 맺어진 존재이며, 관계라는 독립된 제3의 영역이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의해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이 뭐 어쨌다는 건가? 구성원들 간에 서로 관계가 맺어져 있을 때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관계가 파괴되었을 때, 인간은 절망한다. 이 절망이 곧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다. 인간이 생물학적인 존재가 아닌, 영혼과 정신을 갖춘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상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영혼의 능력은 인간의 실존성이다
이제 실존의 개념에 대해 좀 더 깊이 논의해보자. 여기 볼펜이 있다. 이 볼펜의 본질은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본질은 아마도 전자나 쿼크 알갱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역시 전자나 쿼크 알갱이 아니겠는가? 극단적인 요소 환원주의로 밀어붙이자면 볼펜과 인간의 본질은 같다고 말해야 한다. 본질주의로 설명한다면 인간은 작은 알갱이들이 특수하게 뭉쳐 있는 육체 덩어리일 뿐이다. 본질주의로만 인간을 설명하면 이런 엉터리 결론에 도달한다. 이 지점에서 실존적 사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물과 인간의 근본적 차이를 실존주의적 접근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볼펜의 본질이 아닌 존재 목적을 물어보자. 볼펜의 존재 목적은 글씨를 쓰는 데 있다. 만약 망가져서 더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면 그 볼펜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 그러면 우리는 그 볼펜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별로 비싸지도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을 사서 쓰면 된다. 어떤 사람은 다 쓴 볼펜 여러 개를 모아서 아이들 장난감으로 쓸 수도 있다. 몽당연필을 끼워 쓰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다. 그 볼펜은 더는 볼펜이 아니지만, 주인이 그 볼펜을 사용할 용도에 따라 무한한 변용이 가능하게 된다.
그 볼펜의 존재는 본래의 존재 목적이 있건 없건, 실존하는 (즉 실제로 존재하는) 주인의 의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볼펜은 주인의 부르심(또는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주인이 볼펜에 부여하는 의미, 가치, 목적에 따라 볼펜의 기능과 존재 이유가 달라진다. 요컨대,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은 실존하는 인간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사역하던 당시 유대인 고급 관료와 지식인들은 곤경에 처한 동족을 모른 체하고 지나갔지만, 그들이 천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은 오히려 그 유대인을 데려다 극진히 간호했다는 이야기다. 유대인이든 누구든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처럼 인간에게 변하지 않는 본질적 속성에 대한 죽은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의 살아있는 실천을 감행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바로 영혼의 능력이며, 이렇게 영혼의 능력이 발현되는 구체적 경험을 ‘실존적 체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04. 마음은 영혼을 담고 있는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의 기능
사람들이 때때로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상대방이 해주기를 바란다. 많은 경영자는 부하가 자신의 아바타avatar이기를 원한다. 이런 소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를 나타낸다. 인간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능력은 선천적인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과 육체의 일체성
무의식이 향하는 곳
마음과 영혼의 지향성
나에게 마음과 영혼에 대한 희미한 생각들을 잘 정리하도록 도와준 책이 샤노어KarenShanor가 편집한 『마음을 과학한다』이다. 그 책 내용 중에서도 특히 신경외과 의사인 스탠퍼드대학교의 프리브람KarlPribram(1919~)과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Bohm(1917~1992)이 뇌의 인지구조를 홀로그램모델hologram model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는 고사하고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경쟁에 내몰려 숨차게 살아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 경험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경영자가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첫째, 경영자는 구성원들의 마음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삶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야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조직구성원들의 영혼은 고통받고 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목표 달성의 압력과 스트레스, 지배와 착취구조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무력감, 장래 커리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고통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이나 기업조직의 환경은 영혼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다. 숫자로 나타난 성적과 실적 경쟁 때문에 잠시라도 맑은 영혼을 유지하기 어렵다. 경영자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들의 마음, 잠재력, 영혼의 능력을 맘껏 발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둘째, 기업조직에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들을 구성원들의 마음, 잠재력, 영혼이 맘껏 숨 쉴 수 있도록 풀어주어야 한다.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마음은 항상 더 큰 성과를 향하여 스스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인간의 영혼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셋째, 기업조직의 운영원리를 명령과 통제의 메커니즘에서 감지와 반응의 메커니즘으로 바꾸어야 한다. 조직 생활에서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감지하는 것은 영혼의 탁월한 능력이다.
이렇게 실존적인 체험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도록, 즉 마음이 영혼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의사가 있다. 뇌를 영혼의 하드웨어라고 비유한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인 에이멘Daniel Amen 박사가 바로 그다. 그는 『영혼의 하드웨어인 뇌 치유하기』라는 책을 썼다. 그는 수만 명의 뇌 스캔 자료를 연구한 결과, 뇌라는 하드웨어를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에게는 영혼을 담고 있는 마음이 있다. 경영자가 구성원의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경영성과는 달라진다. 마음의 이해는 지혜로운 경영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마음과 영혼, 그리고 그에 따른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마음을 사로잡는 치유의 경영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야 ‘인간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경영학’이 될 수 있다.
비전을 설정하고, 조건을 정비하고, 행동을 유발하도록 하는 모든 조치는 구성원들의 마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결국 경영이란 마음을 사로잡아서 행동을 일으키는 과정을 말한다. 왜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가?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면 생산성이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적 다 경험했을 것이다. 집에서 스스로 방 청소를 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방 청소를 하라고 시키면, 영 기분이 나쁘고 청소할 맛이 나질 않는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그 일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있다. 반대로 왜 하는지 모르지만 돈벌이가 된다니까 하는 일,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하는 일,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하니까 하는 일은 결단코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창의성도 발휘되지 않는다.
교수가 나에게 해준 말은 아직도 선명하다. ‘기업경영을 위한 영혼의 치유자Seelsorger für die Unternehmungsführung’가 되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식을 조금 얻었을 뿐 그가 나에게 보여준 지혜의 깊이를 배우지는 못한 채 귀국했다. 이렇게 구성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영을 한 번도 실천해보지 못했다. 귀국한 후 20년 동안 이런 지혜를 한 번도 발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림 3]에서 보듯이 인간의 마음은 항상 ‘현재 상태current state’보다 더 나은 ‘원하는 상태desired state’를 상상해낸다. 그래서 ‘현재 상태’와 ‘원하는 상태’ 사이에는 항상 갭gap이 생긴다. 이 갭이 곧 결핍absence이며, 이것이 욕망desire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분석하려는 출발점은 바로 이 욕망이다. 동물들은 이 갭이 생리적 욕구에 의해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배가 고프면 갭이 생기고, 배가 부르면 결핍은 사라진다.
모든 욕구에는 욕망desire과 요구demand가 뒤섞여 있다. 예를 들어, 밥을 잘 먹지 않는 아기가 엄마에게 ‘사탕’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경우가 있다고 치자. 이것은 사탕을 먹고 싶다는 생물학적인 욕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마도 사려 깊은 엄마라면 아기의 이면에는 ‘엄마에게로 향한 사랑의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이때 엄마는 아기에게 사탕 대신 ‘따듯한 포옹과 함께 사랑의 확인’을 주면 될 것이다. 그 아기는 일종의 정신적 식욕부진일 수 있는 것이다.19
인간은 욕구needs에 의존하는 동물이다. 물론 욕구에는 생물학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욕구에는 욕망desire과 요구demand가 뒤섞여 있다. 예를 들어, 밥을 잘 먹지 않는 아기가 엄마에게 ‘사탕’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경우가 있다고 치자. 이것은 사탕을 먹고 싶다는 생물학적인 욕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마도 사려 깊은 엄마라면 아기의 이면에는 ‘엄마에게로 향한 사랑의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이때 엄마는 아기에게 사탕 대신 ‘따듯한 포옹과 함께 사랑의 확인’을 주면 될 것이다. 그 아기는 일종의 정신적 식욕부진일 수 있는 것이다.19
그런데 이 아기는 어째서 자신의 욕망을 명확하게 요구하거나 표현하지 못할까? 왜 사랑을 달라고 하지 못하고 사탕을 달라고 하는 걸까? 사탕을 주었는데도 아이에게는 아직도 충족되지 않은 그 무엇인가의 해소되지 않은 욕구가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고민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다. 욕망이란 욕구에서 요구를 뺀 것이다. 말하자면 ‘욕구need – 요구demand = 욕망desire’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 욕망은 어린아이처럼 애매하다. 인간은 이 애매한 욕망 충족을 향하여 성숙해 간다.
지혜로운 엄마는 아기의 욕망을 알아채서 사탕이 아닌 사랑의 결핍을 채워준다. 하지만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 ‘지혜로운 엄마’가 후견인으로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라는 주체는 험난한 타자의 세계를 헤엄쳐서 욕망하는 자아의 세계로 스스로 성숙해 가야 한다. 문제는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며, 주체가 일생을 통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욕망하는 자아를 향하여 헤엄쳐 나아가려면, 지속적인 실존적 체험을 통해 무의식에 튼튼한 주체인 ‘나self’가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히스테리는 부실한 주체가 ‘욕망하는 자아’를 견디지 못해 발생하는 신체적 증상이다.
그래서 라캉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인간의 주체적 삶이 상징계와 상상계를 빠져 나와 실재계에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질서인 상징적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은 삶의 주체적 즐거움jouissance(주이상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의 언어로 각인된 주체를 망각하는, 즉 타자의 그물에서 벗어난 몰입의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이상적인 실재계에 터를 잡는 일은 주체가 다시 태어나야 가능하다.
이런 해체는 정신분석학자인 라캉뿐만 아니라 데리다와 들뢰즈 등과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의 사유는 근대 문명을 정조준하여 정밀하게 타격했다. 이들은 논리와 합리로 무장한 각종 이성중심주의 이론들을 해체한다. 즉 주체와 객체, 중심과 주변, 원본과 사본, 탁월함과 평범함 등과 같은 이원론적 개념과 사상을 무력화시킨다.
우리 모두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중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원본이고 탁월함의 표상이다. 세상에는 오직 차이difference만 있을 뿐이다. 이 차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차이가 없다면 세상은 생명이 없는 무미건조함만 남는다. 인간의 영혼은 아무리 미세한 차이라도 분별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이 차이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프랑스 철학자들은 이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 미세한 차이가 커다란 차이로 발전하도록 반복repetition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사상과 철학이 기업경영에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경영자와 노동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론적 접근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실존적으로 평등하다. 다만 현실에서는 기능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차이를 매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생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반복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기능적 역할의 차이지만 그 역할의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 발견은 경영자와 구성원들 사이에서 민주적 논의를 거쳐야 하는 공동의 학습 과정이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거듭남의 실존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차이의 의미심장한 반복을 위해서 조직의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프로세스를 변화시켜야 한다. 지금까지의 기업조직은 그 구조와 시스템이 명령과 통제의 메커니즘에 부합하도록 단단한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더 높은 생산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구조로는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다. 기존의 구조와 시스템은 더는 기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피라미드구조와 상하의 종속 관계, 그리고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해체해야 한다. 해체된 후에 그것들이 인간의 실존성, 즉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체계로 다시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창조과정 역시 철저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의 단단한 질서를 만들어낸 주체는 기업가 또는 경영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그 상징체계로 기업조직을 구성해 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매트릭스에서 구성원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기업가나 경영자의 욕망(때로는 탐욕), 즉 타자의 욕망(때로는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하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명령과 통제, 지배와 복종, 그리고 억압과 착취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자살, 살인, 범죄, 이혼, 정신질환과 같은 사회적 질병은 지수적 상승을 보이고 있다. 이 체계가 해체되어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들은 자신의 주체적 삶에서 주이상스jouissance(즐거움)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나드ChesterBarnard(1886~1961)가 말하는 효율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고, 아울러 구성원들의 협력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다. 이 해체 작업이 우리가 ‘원하는 상태’desired state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고,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타자가 건설한 상징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세계를 빠져 나오는 의미심장한 반복을 거듭함으로써 라캉이 말하는 황홀경(주이상스)을 경험하는 실존적 체험(원하는 상태)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영자들은(물론 다는 아니다) 양립이 불가능한 권위주의적 방식과 민주적 방식을 동시에 추구하고 싶어 한다. 권위주의적 방식이란 각목으로 부하들을 패는 식의 조직폭력배 두목이나 쓰는 리더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재벌 2, 3세들이 그런 식으로 리더십스타일을 발휘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그런 정도로 파렴치한 수준은 아니다. 여기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란 타인의 의도와 능력에 반하여 심리적으로 강압하는 방식을 말한다. 경영자가 만들어 놓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경영자들을 가끔 만나는데, 긴장감은 성과를 낮춘다는 무수한 과학적 증거들이 있다. 이해하기 쉬운 예가 있다.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고난도의 트리플 악셀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은 긴장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다. 골프 스윙도 근육의 힘을 빼야 좋은 스코어를 유지할 수 있다. 선수들이 인터뷰에서도 한결같이 하는 말은 긴장하지 않고 연습하던 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근육이 긴장하면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근육도 마찬가지다.
한편, 권위주의적 방식처럼 겉으로 보기에 무자비한 것은 아니지만, 조직에 해가 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친화적 방식으로 자신이 부하들에게 훌륭한 리더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한다. 부하에게 쓴소리 못하고, 그렇다고 옳은 길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경영자들이다. 권위형과 마찬가지로 친화형affiliative style도 경영의 원칙과 도리를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경우인데, 경영자로서는 매우 부적합한 사람들이다.
권위형, 친화형, 이중장부 쓰기형 등의 리더십스타일은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조직의 성과에 치명적인 폐해를 가져온다. 조직 내에는 상호 간의 불신 풍조가 퍼져 구성원들 간에 이기적인 태도와 경영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또는 냉소적인 태도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한마디로 나쁜 조직풍토가 만들어져 구성원들의 직무 몰입도가 매우 낮다.
경영의 민주화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기업가나 경영자의 리더십이 민주적인 방식democratic style으로 바뀌기만 하면 가능하다. 민주적 경영이란 구성원 개개인이 개성과 잠재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민주형 리더십이 조직의 효율성, 생산성, 창의성, 효과성을 높인다. 권위형, 친화형, 이중장부 쓰기형은 구성원의 사고를 정지시키지만, 민주형은 조직구성원 개개인의 사고력과 지향적 의지를 높이고, 자율적인 실행력을 제고한다. 민주형 경영자는 경영의 본질을 “고객창조”와 “조직혁신”으로 인식한다. 드러커PeterDrucker의 저작을 읽지 않아도 경영자의 높은 사고력과 심오한 지식은 자신의 역할을 고객과 구성원에게 양질의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31
민주적인 경영자는 위대한 기업조직을 창조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정신적 토대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태풍과 지진이 일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정체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엄격한 ‘규율’이 있는 것처럼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한다. 짐 콜린스JimCollins(1958~)는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낸 경영자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발견했다. 자신의 책 『위대한 기업의 선택』에서 이렇게 말한다. 규율은 본질적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을 뜻한다. 가치, 장기적 목표, 행동기준, 일처리 방식 등에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다. 규율은 엄격한 통제와는 다른 것이다. 정책과도 다르다. 규율은 위계적 복종이나 관료적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도 다르다. 진짜 규율의 필수 요소는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기준, 장기적 목표를 거스르는 압력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정신적 독립을 말한다.34
라캉의 분석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명확하다. 첫째, 경영자는 주체적 자기인식을 통해 구성원들이 일에서 즐거움jouissance(주이상스)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즐거움은 일의 의미를 발견하는 민주적 논의를 거쳐야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거듭남의 실존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영자들이, ‘로렌조 오일’을 만들어낸 배관공 부부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상징적 그물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했듯이, 기존의 경영학이 제공하는 비인간적인 틀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이런 영혼의 능력이 작동하는 실존적 체험을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 시스템, 프로세스에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명령과 통제의 메커니즘을 걷어내고, 신뢰와 자율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우선 기업조직의 구조적 폭력성의 원인을 알아보자. 조직은 만들어지면서부터 폭력성을 띤다. 조직은 항상 위계구조와 위계질서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일단 조직이 만들어지면, 이 구조와 질서를 항구적으로 만들기 위해 시스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조직은 스스로 시스템화하려는 성향 때문에 폭력성이 나타난다. 가정과 같은 작은 단위조직에서부터 국가와 같은 큰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조직에서 시스템화 경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조직 내 구성원들이 자신의 노동을 인간화하려는 경향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직 내에서는 두 가지 경향성이 항상 대립한다. 시스템화 경향성과 인간화 경향성이 그것이다. 제2장에서 우리는 이미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통해 노동의 생산성 제고를 위한 시스템화 작업을 할 때, 인간화의 경향을 억누르면서 폭력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직의 시스템화 과정에서는 어떤 방식의 폭력성이 나타날까? 조직의 시스템화 과정은 일반적으로 구조설계의 시스템화와 운용방식의 시스템화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조설계를 시도할 때, 피라미드식 위계구조에서 오는 위계질서의 시스템화 때문에 폭력성이 발생한다. 둘째, 운용방식을 시스템화하는 과정에서 피라미드 조직이 경쟁력을 확보하려고 계량화를 통한 숫자를 산출할 때 그 숫자에 대한 믿음이 폭력성을 일으킨다. 이제 이 두 가지 폭력성의 원인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ServantLeadership' 개념을 창안한 로버트 그린리프RobertGreenleaf(1904~1990)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드로의 충고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뜻이다. 모세가 백성을 섬긴 자세에서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선천적인 권력욕을 억누르면서 섬김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리더십을 버리고, 이드로의 못된 충고를 받아들인 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 우리가 이드로의 충고를 이렇게 오랫동안 철칙처럼 인정한 것은 질서 있는 사회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1인중심체제가 질서를 담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기꺼이 치러 왔다. 이제 그 대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위계질서가 꽉 잡힌 조직에서는 불신, 갈등, 아첨, 텃세, 배신, 왜곡된 커뮤니케이션 등과 같은 기업조직의 ‘죽음에 이르는 질병들’이 존재한다.2 그러나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위계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심지어 천상의 세계에 있는 천사들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벤처를 창업하여 시작한 초기에는 위계질서 없이 사업하다가 규모가 커지면, 한결같이 위계를 만들어낸다. 조직을 위계질서로 채우는 것은 인간의 DNA 속에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속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가 복잡한 것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계적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계적 사고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하지만, 그 사고력이 조직의 위계구조로 전환되는 순간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경영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피라미드 위계구조에서 나타나는 비효율성과 정신의학적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조직구성원들은 자신이 최고경영자라 하더라도, “조직은 감옥이며, 그 안의 음식이 좋고 나쁜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4 나아가 조직은 구성원들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s으로 바라보고, 생산요소factors of production의 하나로 취급할 뿐이다. 그래서 구성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감옥과 같은 조직을 벗어나려고 한다.
위계구조가 그 구성원들에게 가하는 치명적인 약점과 명백한 폐해를 연구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난 100년간의 경영학 역사에서는 그래 왔다. 위계구조와 위계질서의 관행이 조만간 종말을 고할 것으로 예언까지 했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비효율성의 대명사처럼 된 대기업의 관료화된 위계구조는 교향악단과 같은 모델로 대체될 것으로 보았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위계구조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조직질서의 요구, 그리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직원과 리더가 느끼는 좌절감에서 나타나는 급박함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다. 무의미한 위계구조와 위계질서, 자기중심적인 리더십, 독재적인 의사결정, 관료적인 미숙함, 시간낭비와 노력낭비, 경영의 무능함, 옹졸하기 짝이 없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미성숙, 책임감의 결여, 비협조적인 직무수행 등에서 구성원들은 좌절감을 느낀다.”
고쳐야 할 이슈는 위계구조 자체의 문제점뿐만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위계구조와 위계질서가 있는 경우에는 정신적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위계구조가 지향하는 계량화에는 심각한 정신적 폭력에 따른 물리적 폭력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인기작가가 자신의 결혼생활을 토로하는 인터뷰에서 남편들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가정이라는 조그마한 조직에서도 남편이 위계의 정점에 일인자로 군림하는 순간,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외부의 인식과 가정에서의 실제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마음의 프로그램에 의해 이루어지는 매우 무서운 현상이다. 정신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권력이란 타인에게 미래에 대한 예측불가능성을 제공하는 힘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힘이 크면 클수록 두려움과 공포를 크게 느낀다. 두려움은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한다. 그러므로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에 상관없이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하도록 기업조직을 구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조직의 로마식 구조설계라 할 수 있다.
기업조직의 경영진을 위한 조직설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설명해온 피라미드식 위계구조다. 이것은 조직의 최상층부에 1인이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조직의 모든 운영과 책임이 1인에게 귀속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고대 로마 시대로부터 유래한 조직설계 원리인 로마식 수평구조다. 상층부의 지배권력을 1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등하게 나누되 그중 한 사람을 지명하여 선임경영자로 삼는 방식이다. 이러한 로마식 수평구조가 우리나라 사람들에는 낯설게 느껴질 테지만, 독일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로마식 조직설계가 일반적이어서 피라미드식 구조를 낯설어한다.
드러커도 이미 1950년대 그의 책 책/경영의 실제에서 기업조직의 경영진 구성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최고경영진이 어떻게 구성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위원회’가 아니라 ‘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책임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팀의 각 구성원은 각자가 최종결정권을 갖는 고유한 업무영역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업무영역의 성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협의는 함께해야 하지만, 결정은 독자적으로 내려야만 한다.8
패전 후 1952년에 공동결정제도의 사상을 더욱 강력하게 규정하는 경영조직법을 제정하고, 최근까지 노사간의 공동결정뿐만 아니라 순수한 경영 사안에 대해서도 공동결정제도를 광범위하게 확립해 왔다. 이러한 정신이 조직설계에도 반영되어 경영층에서의 공동결정을 할 수 있는 신뢰와 협력의 문화를 조성해 왔다. 이런 과정을 수십 년 거치는 동안, 독일 기업조직의 경영 관행은 인간존중의 사상을 실현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9 물론 로마식 조직구조에도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존재하지만 상층부의 경영층에서부터 예측가능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명령과 통제,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착취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상사와 부하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피라미드구조가 갖는 심각한 부작용은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로마식 조직구조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은 민주적이라는 것과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민주적이라는 말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동료의 관계로서 서로 견제와 균형, 신뢰와 협력을 통해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해 나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피라미드구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다. 집단지성은 조직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 사안에 따른 의견과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문서화되고 그것이 결국은 통일된 공식적인 견해로 수렴된다는 좋은 장점이 있다. 이렇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면 실행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조직은 어떻게 폭력성을 드러내는가? 그것은 피라미드식 위계구조가 스스로 시스템화하고자 할 때, 위계질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폭력성을 드러낸다. 많은 전문가가 위계구조의 폐해를 지적해도 이 구조는 바뀌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피라미드식 위계구조는 그 장점에 비해 조직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폐해를 가져다준다. 이것은 아마도 조직이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착취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기업조직은 구성원들의 영혼을 무덤으로 끌고 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조직을 로마식 구조로 설계하는 것이다. 경영층에서 1인 지배하에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영진 모두 동일한 권한과 책임을 지면서 서로 견제와 균형, 신뢰와 협력을 통해 공동결정의 관행이 이루어지도록 설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미 독일 사회에서 지난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시행해 왔고, 조직의 효율성도 높다.
하지만 워런 버핏WarrenBuffett(1930~)의 논리, 즉 조직구성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큰 기업에만 투자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원칙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12 오늘날 기업에서 절대 권력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조직설계가 절대로 필요하다.
20세기 초기에는 조직을 기계론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조직구성원을 그 기계의 부품으로 생각했다. 이런 사상을 가장 정교하게 다듬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은 테일러FrederickTaylor였고, 그의 사상에 입각한 경영이념을 테일러리즘Taylorism이라 부른다
테일러의 시도는 조직설계라기보다는 직무설계에 가까웠다. 각 직무에서 노동생산성을 최고로 높일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기 때문이다.
MarxWeber 이래로 공식적인 조직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프로세스를 어떻게 설계하는 것이 좋은가에 많은 학자가 관심을 기울였다. 이렇게 공식적인 권한과 책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학파라고 부른다. 공식적인 구조와 체계와 절차를 정하는 방식은 마치 정교한 시계를 설계하는 것과 같고, 구성원을 몰개성적인 기계의 부품으로 생각했다. 조직구성원은 공식적으로 정해진 권한과 책임의 한계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개인의 잠재력 따위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나는 테일러리즘과 제도주의적 관점에 의해 경영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제1세대 경영학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기계적 관점에서 조직을 바라보는 것은 곧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인간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 실험을 통해 금방 밝혀졌기 때문이다.
공장 종업원들에게 근로조건을 아무렇게나 바꾸어도 생산성은 올라갔다. 당황한 학자들이 그 원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실험대상인 종업원들이 연구원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생산성이 좋아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호주 출신의 심리학자인 엘튼 메이요George Elton Mayo(1880~1949)가 아이디어를 냈다. 이 가설 검증 작업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호손 실험Hawthorne Studies 이야기다. 인간은 공식적인 구조보다는 비공적인 집단에 소속되고, 그곳에서 인정받을 때 높은 생산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부품이라고 생각했고, 인간관계론이 형성되었다.
ChesterBarnard는 오늘날에는 거의 상식이 되어버린 효과성effectiveness과 효율성efficiency의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히 구분했다. 명시적인 목표에 도달한 정도를 효과성으로 보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구성원의 동기가 충족되는 정도를 효율성으로 정의했다. 조직의 목적을 달성해서 높은 효과성을 이룩했더라도 구성원의 행위가 동기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불만족을 유발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조직이 구성원의 동기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조직의 목표를 달성해갈 수 있다면, 그런 조직은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협동을 통해 성장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14 그래서 조직을 협동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후대 경영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ChesterBarnard 이후에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서서히 나타나서 제2세대 경영학의 관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드러커PeterDrucker다. 그는 미국 경영학에 또 하나의 큰 산맥을 만들었다. 1954년에 출간된 '책/경영의 실제 The Practice of Management'라는 책은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물론 당시에 드러커 자신이 조직은 유기체여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목표와 자율에 의한 관리’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MBO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때 나온 것이다.
나는 조직에는 구성원들의 정신을 빼놓는 뭔가의 제도적 장치들이 유령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 그것을 제도의 폭정 또는 제도적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프로세스를 바꾸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제도적 장치의 합리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제도운영의 공정성, 구성원들 간의 신뢰, 비전을 향한 열정, 마음과 마음의 교감 등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제도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정해야 투명해지고, 거꾸로 투명해야 공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구성원들이 멍청한 짓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MBO의 기본사상은 근로 현장에서 구성원들에게 자율성을 확보해 주어야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목표를 부여해서 쥐어짜면 된다는 사상이 절대로 아니었다. 목표관리제도라고 해서 목표를 기록하고 상사와 부하가 합의하면 되는 그런 조잡한 사상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유한 잠재력이 있고, 그 잠재력을 잘 발현할 수 있도록 스스로 통제해 나가는 방식의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도 스스로 기획하고, 그 목표를 잘 달성했는지의 여부도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드러커가 의도했던 MBO였다. 그래서 책/경영의 실제에서는 목표Objective라는 단어와 자기 통제Self-Control라는 단어를 마치 한 단어처럼 사용했다. 자기 통제가 가능할 때, 조직 생활에서 오는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그리고 조직이 부여하는 목표 달성의 압박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드러커의 사상이 전파되면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로 대접받게 되었고, 조직운영의 주체로 해방되었다. 이윤은 기업의 존재 목적이 아니며, 기업의 생존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 후반부의 경영학은 제2세대 경영학으로서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했다. 이런 사상을 나는 드러커리즘Druckerism이라고 부른다. 핵심은 조직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외부 환경의 정보와 에너지를 받아들여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신진대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조직구성원은 조직 전체의 유기적 부분이고,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드러커리즘은 조직의 지속성에 기여하는 인과관계를 중시한다. 인과관계를 따져보니까, 조직의 성립과 지속성은 결국 고객의 지원과 충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드러커는 조직의 목적을 고객창조에 두게 되었다. 고객창조를 위한 유기체가 곧 조직이라는 사상이 20세기 후반을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구성원들의 모임인 조직을 조직구성원과 다른 독립된 실체로서 다루게 되었고, 이러한 실체를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할 것인가가 조직이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도요타자동차다. 도요타는 끝없는 자기혁신을 통해 생산성 혁명을 이룩했다. 여기서 혁신의 전제는 항상 자율과 창의성이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 조건이 신뢰다. 품질과 신뢰의 도요타를 이룩하게 된 시발점은 오노 다이이치大野耐一(1912~1990)라는 걸출한 인물의 공로였다.19 그가 초기에 누린 자율과 창의, 그리고 상사와 부하 간의 신뢰와 그것을 가능케 한 그들의 정신구조에 있었다. 물론 이것은 앞으로 곧 살펴볼 데밍EdwardsDeming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품질관리 전문가였던 데밍은 미국 경영학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 외교부 공무원들에게 미국의 경영기법을 우방 국가에 수출하지 말라고 했다. 통계학자였던 데밍 자신은 모든 것을 계량화하는 숫자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던 대로 맥나마라는 미국 사회를 온통 계량화하려고 했고, 그 사상을 다른 나라에도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국방 장관으로 재직했던 8년간뿐만 아니라, 그 후 세계은행World Bank 총재로 근무했던 13년간을 합치면 그의 영향력은 그 누구보다 컸다. 그러나 품질관리 전문가였던 데밍은 미국 경영학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 외교부 공무원들에게 미국의 경영기법을 우방 국가에 수출하지 말라고 했다. 통계학자였던 데밍 자신은 모든 것을 계량화하는 숫자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심리학의 유용성은 인간은 누구나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데 있다. 인간은 똑같은 경우가 없다. 어떤 패턴이 유사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동일할 수는 없다. 일하는 동기도 다르고, 학습하는 방법과 속도도 다르다. 따라서 경영자는 이 차이점을 심리학을 통해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의 능력과 성향을 적절히 조절하여 최적화함으로써 높은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심리학에 대한 이해의 결여로 노동에 대한 과잉 정당화overjustification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과잉 정당화란 보상 없이도 기쁨으로 일하려고 하는 근로자에게 노동의 대가로 추가보상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청소하려고 하는데, 부모가 청소를 깨끗이 하면 용돈을 올려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자발적으로 청소하려는 내재적 동기가 변질되어 용돈을 위해 일하는 경우를 말한다. 결국에는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e를 왜곡하고 노동의 즐거움을 앗아간다.
이제 제3세대 경영학으로서의 조직이론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이유는 명백해졌다. 이런 입장에서 나는 조직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정의하고자 한다. 조직은 조직구성원들 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들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삶의 수단이다.
아직 조직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생소하게 느낄 수도 있다. 제1세대와 제2세대 경영학의 입장에서 보면 공동의 목표도 없고, 협동도 없는 조직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조직운영의 현실을 보면 오히려 이러한 정의가 더 현실감이 있을 것이고, 더 생산성을 높여줄 것이다. 첫째, 구성원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의 느낌feeling of connected-ness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관심을 갖게 되는 첫 출발이자 신뢰로 나아가게 하는 바탕이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조직구성원들은 서로 사랑과 희망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보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정보와 에너지를 조직 전체에 잘 조화시켜서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기업조직에서 직업(직무)을 통한 자기실현의 길이다. 셋째, 조직이 구성원의 삶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조직은 목적이 될 수 없고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조직이 구성원들의 삶의 풍요로운 수단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또 다른 억압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간 경영학은 조직에 대한 관점을 커다란 정밀기계로 보았다가 드러커에 의해 인간적인 측면이 다소 가미된 유기체적인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도 역시 조직의 존재 이유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런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는 사상가가 바로 데밍이다. 경영학계에서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아니지만, 나는 데밍이야말로 위대한 경영사상가의 반열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본의 공산품을 세계 제일의 위상으로 올려 놓도록 한 장본인이다. 그의 사상은 일본인들에게 품질은 결코 숫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숫자에 영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인들은 전후 30~40년 만에 품질로 세계를 제패하는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이 깃든 숫자를 생산하는 사상체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정신적 토대를 굳건히 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적 토대는 돈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능력을 말한다.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는 사유의 능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사유의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데밍이 말하는 심오한 지식을 터득해야 한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조직 내에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구조와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이란 항상 삶의 수단이며, 어떤 경우에도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기업조직을 경영하는 것이 역량관리시스템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성과관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다. 조직의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성장은 성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각 직무의 성과책임accountability을 규명하고, 그 성과를 진단하여 피드백feedback과 동시에 피드퍼워드FeedForward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보상rewards도 적절히 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과를 매출과 이익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했듯이 매출과 이익은 구성원들의 영혼의 능력이 발현되어 나온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과란 무엇인가? 성과는 기업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은 성과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의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구성원들이 속한 조직과 동료에 대한 염려와 공감, 신뢰와 배려, 사랑과 희망, 공동의 목표와 협력 의지 등이 가장 근본적인 성과다. 이런 무형의 성과물들은 어떤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프로세스로도 창출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이 기업조직의 경영을 위한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토대 위에 각종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경영자는 이러한 근본적인 성과 요소들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리석은 농부가 보기에는 벼가 더디 자라니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싹을 조금씩 뽑아 놓았다. 빨리 자라도록 조장助長한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벼는 빨리 죽는다. 조장助長은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도와서 자라게 한다는 의미니까 좋은 말이다. 하지만 대상의 잠재력과 역량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조장하는 것은 오히려 죽이는 일이다. 그래서 조장한다는 말은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날 경영에서 구성원의 역량과 상관없이 당근과 채찍으로 성과를 내도록 몰아붙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제1세대와 제2세대 경영학은 사실 이런 조장助長의 기술을 가지고 경영하도록 경영자들을 조장해 왔다. 경영학은 이제 이런 조장의 기술을 포기하고 영혼의 능력을 보살피는 보다 차원 높은 방식을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직설계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 인간은 언제나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한다.
- 인간은 영혼의 능력을 일깨우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 인간의 잠재력은 서로 다르다.
- 인간의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세 회사의 특징은 민주형 경영자들이 굳건한 경영철학을 가지고 경영해 왔다는 점이다. 기업조직을 철저히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경영해 나가고 있다. 그것도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로 말이다. 이런 경영자들의 삶의 정신적 토대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강철 같은 믿음이다.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들도 환경을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올바른 교육자와 지도자를 만났다면 올바른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조직에서 인재를 채용할 때는 앞서 설명한 역량관리시스템의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멀 GaryHamel은 자신의 책 『미래의 경영』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어나 셈코와 같은 경영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이 파격적인 경영시스템이 수십 년 걸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경영혁신은 6개월 프로젝트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해방시키고 혼합하기 위해 개선된 방법을 끝없이 탐구하는 길이다. 그것은 모든 질문 중 가장 간단하게 시작한다. 왜? ... 당신의 회사가 경영에 얽힌 고정관념을 빨리 탈피할수록 진정으로 미래에 어울리는 회사로 재빠르게 탈바꿈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몇몇 회사는 시대에 뒤진 경영방식을 이미 20세기에 떨쳐버린 채 가벼운 몸으로 여행하고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내일의 경영 이단자들이 당신의 회사에서 믿고 있는 이론을 깨부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 그들과 협력할 수 있다.42
경영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과 조직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깊은 사유의 결과들이 모여서 정신적 토대를 이룬다. 정신적 토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굳건하게 만들어진 정신적 토대가 곧 영혼의 능력이 맘껏 발현될 수 있는 터전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역량competency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올바른 경영을 위해서는 오랜 철학적 질문과 사유, 나아가 심리학적 처방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거기에 약간의 경영학적 설계와 실행이 필요할 뿐이다.
영혼의 능력이 발현되는 방식인 역량개념을 통해 구성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반드시 그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량관리시스템이다. 이것은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배려하며, 공동의 목표를 향한 헌신과 협력 의지를 불사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높은 성과를 창출하기 위한 구조와 시스템, 전략과 성과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심리학적 응답, 그리고 경영학적 처방 등을 규정화해 놓은 것이 바로 성과관리시스템이다. 이 두 가지 시스템을 중심으로 기업조직은 움직인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철저하게 경영자의 경영철학과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경영자의 경영철학은 경영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영의 본질은 이익추구가 아니라 조직구성원들에게 영혼의 능력을 맘껏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기업의 이익은 그 경영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것이다. 경영자의 마음이란 구성원들에 대한 근원적 염려와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민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제 다른 예를 보자. 직무에 적합하지 않은 직원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게으르거나 일하는 태도가 돼먹지 않은 구성원 말이다. 이런 상황은 기업조직에서 늘 발생한다. 인간존중의 경영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슈다. 이것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잠재력(역량) 또는 영혼의 능력을 썩히지 않고 완전히 불살랐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잠재력(역량)을 맘껏 발휘하지 않으면서 그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기업조직에서 구성원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은 그 구성원의 잠재력, 즉 역량을 파악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직무에 헌신하도록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잠재력(역량)을 더욱 확장할 수 있도록 훈련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그 구성원의 성격적 특성과 역량을 고려하여 코칭 또는 멘토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잠재력(역량)은 자신이 가지고 싶어서 또는 노력해서 얻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잠재력(역량)은 그냥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다. 인류를 위해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그냥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재능’을 선물이라는 뜻이 담긴 ‘giftedness’라고 쓰는데, 이것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란 의미다. 우리말로는 뛰어난 재능 또는 영재성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잘 쓰라고 선물로 받은 재능인데,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고 썩히는 것은 인류에 대한 비도덕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비도덕적 행위가 구성원들에게서 발견되었음에도 그것을 못 본 체 하는 경영자 역시 비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따라서 경영자는 구성원들 각자의 잠재력(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잠재력(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을 통해 생산적인 조직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더욱 연마할 수 있도록 인사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영자가 구성원들에게 모질게 다루었느냐, 느슨하게 다루었느냐는 경영의 본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