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의 장자 철학 강의.

Youtube Playlist

1강

2강

3강

기준

하늘의 명령을 인간이 받아서 살던 시대 - 은나라.

그러한 은나라를, 주나라가 멸망시켜버렸다. 하늘의 통치를 받던 은나라인데, 왜 망했지? 주나라가 만든 논리는, 은나라에, 덕이 없어져서 하늘의 뜻이 주나라로 옮겨왔다는 것. 그래서, 인간이 하기 나름에 따라서 하늘의 뜻이 움직이게 되었다.

철기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하늘이 내리는 명령을 받아서 살던 인간이, 하늘의 위치를 '도'로 대치하면서, 인간이, 인간을 벗어난 능력에 의존함이 없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인간이 가야 할 길(道)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이 가야 할 길 道와, 인간이 가져야 할 소양 德, 이렇게 두 가지가 그 시대의 범주(category)가 되었다.

철학의 범주

그래서 도와 덕에 대해 논한 책이라고 해서 도덕경인 것. 우리 시대의 도덕(윤리 등)과는 관련이 없음.

점점 인간의 지위와 책임감이 상승해가는 과정.

4강

00:00~03:45

천명을 극복하고 도가 출현했다. 역사의 책임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왔다.

무엇이 천명을 극복하고 도의 시대를 열게 했는가? 철기.

우리의 정신은, 물질적 토대가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중요한건 경제적 토대와 상공업 발전. 물질 문명에 대한 발전을 소홀히 하면, 사회와 인간이 진화하는데 불균형하게 된다.

산업에 철기가 투입되면서, 계급, 정치, 세계관을 흔들어놨기 때문에 가능한 것.

03:45~07:57

지금부터 3천년 전 얘기를 하고 있는 것.

殷나라는, 인간과 세계를 설명할 때, 하나의 코드를 사용하는데, 그게 上帝. 인간은 그림자 존재였다.

周나라는, 그 上帝가 天으로 바뀌고, 그 天 밑에 德이 생겼다.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코드가 두 개로 늘어난 것.

07:57~16:57

주나라는 두 시기로 나뉜다.

중국은 서북쪽 이민족들이 문제였다. 중국의 각 나라의 건국 초기에는 힘이 융성하여 이민족을 몰아내고 서쪽 장안에 수도를 정한다. 그러나 건국 중기 지나서 몰락할 때가 되면, 국력이 쇠하여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어렵게 되고, 그러면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 낙양으로 천도하곤 하다. 한나라도 서한, 동한. 진나라도 서진, 동진이 있다.

서주 때는 나라가 잘 나갈 때. 질서가 유지되고 산업이 번창하고. 계급이 안정되고 뒤틀림이 없이 잘 나갈 때.

동주 때는, 그게 흔들렸다. 동주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동주 앞부분을 춘추 시대, 뒷부분을 전국 시대라고 한다. 각 시대를 기록한 역사책이 춘추라는 책, 뒷부분을 기록한 책이 전국이라는 책. 그래서 동주 시대를 합쳐서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한다.

학자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하고 큰 혼란을 이 때 경험했다고 한다.

춘추 말~전국 초 시기가 철기가 등장. 이 시기가 공자와 노자가 활약한 시대. 철학이 생겨난 시대.

도는, 주나라 시대에서도 동주 시대. 춘추 말~전국 초 시대에 출현한다.

이 시대의 철학자. 노자, 공자, 묵자. 초기의 세 철학자들이다.

서주 시대에는 안정된 프레임이 있었다. 계급, 정치구조, 가치관이 큰 뒤틀림 없이 유지되었다.

동주 시대로 진입하면서, 철기가 산업에 투입되면서, 이 구도가 흔들리고 약해졌다. 소인이 강해지고 군자는 약해지고, 제후가 강해지고, 인간이 강해지고.

이제는,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 힘에 의하지 않고, 인간만의 힘(생각)으로, 인간이 가야할 길(道)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16:57~26:13

이 때 매우 예민한 두 사람이 나타난다. 보통 사람들은, 글공부를 하더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서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것보다, 시대가 아파하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런 사람들을 철학자라고 한다.

노자, 공자, 묵자.

이 중, 노자와 공자를 살펴보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노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장자를 이해할 수 있다.

공자와 노자는 어떤 뜻을 펼치려고 했는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려고 하며, 어떤 세상을 꿈꿨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자를 앞에 쓰고 노자를 뒤에 쓰는데, 노자를 앞에 쓰고 공자를 뒤에 써야 한다. 노자가 20세인가 더 나이가 많다. 그리고 특성도, 노자 철학이 더 오래 되었고, 공자 철학이 신흥 학문에 가깝다. 노자 사상은 하나라 문명을 계승하고 있고, 공자 철학은 은나라 문명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서는, 익숙한 공자 사상부터 살펴보자.

아래의 내용들은 모두 틀린 말이다.

한국 사람들도, 중국 사람들도, 이걸 많이 틀린다.

공자나 노자 모두, 신이 정해준 길이 아닌, 인간이 만든 길을 가겠다고 한 사람들이다. 천명을 극복하고 도를 건립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다만, 공자는, 인간의 길을 만드는데, 인간의 내면성(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해서 만들고, 노자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보고, 그것(자연의 운행 원칙)을 본떠서 만들려고 했다.

노자나 공자 모두, 교육을 강조한 사람이다. 다만 어떤 교육을 하느냐가 달랐을 뿐. 노자나 공자 모두 문명을 건설하려는 사람이었다. 공자는 이런 식의 문명을, 노자는 저런 식의 문명을 건설하려 했다. 공자나 노자는 모두 현실에 개입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이런 식으로, 노자는 저런 식으로 개입했을 뿐이다.

26:13~46:55

공자는, 도를 건립하려 했는데, 인간의 내면성, 본성, 본질에 기반을 두려 했다.

논어라는 책에서 에셋스만 끄집어 낸다면? 뭐가 남을까?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

ex. 팔만대장경의 에셋스는?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니 이것도 사라진다'

그 이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신에게(하늘에게) 있다'.

공자의 그 주장은, 당시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급진적이고 과격한 것이다.

그,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仁이다. 그러나 이 仁은, 어질다는 뜻이 아니다. 이 글자를 우리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철학하지 않고 수입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善이라는 말도, '착하다'라는 뜻이 아니다. 도덕경 안에 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축구 선수가 뛰어난 플레이를 펼친 것. 그것도 아주 善하다라고 한다. 아주 탁월하다는 것. 고기가 아주 맛있다. 이 고기가 아주 善하다고 한다. 훌륭하다, 탁월하다, 착하다는 뜻이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면 仁이란 무슨 의미인가? '씨앗'이라는 뜻이다. 살구 씨앗을, 행인(杏仁)이라고 한다. 인간의 씨앗.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고 인간으로 사는 씨앗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신이 준 것인가 vs 인간에게 원래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원래 있다는 것이다.

仁은 인간의 본질이다. 본질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본질이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이게 하는 성질이다.

본질(essence)은 아래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

다른 어떤 동물에게는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 인간에게만 있는 것, 인간이게 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공자의 관점에서는, 이런 인간이게 하는 성질을, 키워야 한다. 논어의 모든 내용은, 어떻게 하면 仁을 보존하고 인을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내용.

공자는, 나라와 나라 사이, 음악과 음악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구분을 해야 한다고 할까 하지 말라고 할까? 구분을 긍정할까 반대할까? 긍정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구분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공자의 모든 생각과 사유 방식과 철학이 태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은 仁이다. 인간의 존재 근거. 인간의 본질. 본질이라는 개념에는, 본질을 인정하면 따라올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배타성과 동일성. 따라서, 구분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유학 시스템 안에서는 구분을 한다. 촌수를 구분하고. 친하고 안친하고를 따지고. 왜? 공자 사상의 모든 것은, 仁을 보존하고 확대하는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仁은 도덕적 자각 능력과 연관된다.

공자는, 음악은, 어떤 음악이든지 좋다고 말할까, 들을 음악과 안들을 음악이 있다고 할까? 구분을 강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는, 이단을 부정할까 수용할까? 이단을 배척한다. 왜? 공자는, 기본적 사유 구조가,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름을, 개념적 활동을 긍정할까 부정할까? 긍정한다. 개념을 분명히 하자고 주장한다. 언어 활동에 긍정적이다. 이런 내용이 모두 논어에 나와있다.

46:55~63:53

그러면, 이 仁은 어떻게 생겼는가?

仁은 어디에서 가장 仁같이 발견되는가? 부모와 자식 간에. 공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유대감에서 출발한다.

親親仁也(친친인야).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더 가깝게 생각하는 그 마음. 이것이 仁에 가까운 마음이다.

혈연적 유대감을 기본으로 한 원초적 정서, 정감을 지키는 것. 이것이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길이라고 공자는 본 것이다.

이러한 혈연적 유대감을 기본으로, 먼 촌수에 대해 대하는 것과 가까운 촌수에 대해 대하는 것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仁을 키워가는 것이라고 본 것.

그 仁은, 키워져야 하는 대상이다. 가장 높은 단계로 키워지는 상태가 있을텐데, 이것을 禮라고 한다.

禮라는 것은, 仁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확대되어 가장 높은 단계까지 확대된 것이다.

"禮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

공자는 보편적 이념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보편적 이념은, 누구나 지켜야 하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념이다. 공자는 보편적 이념을 긍정한다.

禮라는 것은 나만 지키면 되는 것인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다. 仁은 나한테만 있는가? 누구에게나 있다.

공자는,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특성을 단련하고 단련해서 (학습),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이념의 틀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구도를, 주자는, 공자 사상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 극기복례. 나의 개별성(仁)이 확대되어서, 禮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부단한 훈련 과정을 겪어야 한다. 논어 첫줄에서 그것을 學習이라고 한다. 아직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내가, 부단히 노력해서, 계속 상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다. 무게중심이 己보다는 禮에 있다. 己는 보편적인 禮로 진입해야 하는 존재이다. 도달해야 할 이상은 禮. 여기에 있는 것은 己.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나는 여기서 지금 누려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단련시켜서 저곳으로 가야 하는 존재이다. 유학은 이곳을 꿈꾸는게 아니라, 저곳을 꿈꾸는 것이다. 무게중심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있다. 유학 시스템에서는, 가치론적으로, 내가 중요한가 우리가 중요한가? '우리'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유학 사상은 가족 중심 사상, 집단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이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이 仁이라는 본질을 가진 존재라고 가정한 것에서.

유학 안에서는, 공자는, 키우자고 할까 줄이자고 할까? 키우자고 한다. 채우자고 할까 비우자고 할까? 채우자고 한다.

이것이 논어의 전체 구조다.

이 구조를 가지고 논어를 읽어보라. 그러면 '아, 공자가 이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구나'라고 알게 될 것이다.

63:53~

주희는 공자 사상을 克己復禮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다르게 생각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노자.

윤복희씨의 미니스커트. 어떠한 질서가 형성되어 있는 것. 격(格). 그 질서를 깨는 것. 파격(破格).

질서를 깨는 것은,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파격적 현상이 수도 없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어떤 파격적 현상은, 그 시대에 설득력을 가지고, 어떤 파격은 도태된다.

미니스커트는 시대를 설득한 파격이었다. 사람들이 막 따라한다. 초반에는, 그걸 따라하는 사람들은 주변이다. 파격은, 주변에서부터 힘을 받는다. 그 중간 시기에는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들과 안입는 사람들이 섞이면서 사회가 생동감있게 된다. 그런데 그,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 '유행'이라고 규정되는 순간, 기준이 되는 순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과 안입은 사람으로 구분되게 된다. 무시하고 억압하거나. 구분하면, 그 다음 행동은,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억압한다. 또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 예뻐지거나, 적게 예뻐지거나, 별로 안예뻐지거나 하는 등으로, 차등이 생기게 된다.

어떤, 하나의 패션, 유행도. 유행이라고 합의되면, 그게 권력이 되고 기준이 된다.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한다. 그리고 사회는 차등화 현상이 나타난다.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선하다고 하니까 그것을 선한 줄 알면, 이는 추하다.'라고 한다.

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패션이, 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냐, 우리 모두가 합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냐?

각자가 아름다움을 표현해서 이룬 사회의 아름다움이 강하다고 보는 것이다. 모두가 합의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그것을 수행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아름다움은 매우 약하다.

노자 생각 안에서, 나의 아름다움은 여기 있는가 저기 있는가? 합의된 아름다움은 저기에, 나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는 것.

나의 아름다움은, 각각의 아름다움끼리 차이가 나는가 다른가? 다르다. 이 각자의 다른 아름다움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서 이루는 전체적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노자는 본 것이다.

노자는 여기에 무게중심을 두는가 저기에 두는가? 여기에. 노자는 '여기'를 지키자고 한다. 여기를 취하고 저기를 버리자. 거피취차(去彼取此). 노자는 극기복례를 강조했다면, 노자는 거피취차를 강조했다.

공자 안에서 己는 '여기'. 禮는 '저기'. 노자와 반대. 공자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취하자고.

공자는 무게중심을 나에게 둘까 우리에게 둘까? 우리에게.

노자는 무게중심을 나에게 둘까 우리에게 둘까? 나에게.

그러면, Carpe diem은, 공자에 가까울까 노자에 가까울까? 노자에 가깝다.

이제, 장자로 들어갈 초보적인 준비를 한 것이다.

공자가 극기복례를 주장하는가 주장할 수밖에 없는가? 주장할 수밖에 없다. 仁을 긍정하는 한, 극기복례로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을 긍정하는 한, 극기복례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노자도, 거피취차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어떤 무엇이 있지 않겠나? 공자가 仁이라는 것을 주장했다면, 노자가 그 반대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노자는, 본질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노자는, 비본질을 긍정한다. 그래서 거피취차로 갈 수밖에 없다.

5강

00:00~07:55

극기복례라는 것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는, 공자의 철학이 시작된 최초의 지점이 仁이다. 인간의 존재 근거, 본질.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것이게 해주는 성질.' 배타성과 동일성이라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질성에 대한 구분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본질을 긍정하면, 이상적인 단계를 설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노자는 이렇게 비판한다. 이 예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고 있고, 역사를 통해 수정 보완되었으며,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들이 만든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善이라고 합의한 이상, 그것은 권력이 된다. 기준이 된다. 기준이라는 말은 항상, '구분'과 같이 다닌다. 기준이 없는 구분은 없다. 아무리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이라고 해도, 그것이 기준으로 형성되는 이상, 구분한다, 배제하고, 억압한다. 권력이 된다.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저것'을 포기해서 '이것'을 살리자는 것.

모두가 합의하여 '기준'이 되는 한,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한다.

07:55~17:07

타조 사냥을 할 때, 타조를 계속 쫓아간다. 일정 거리를 두면서. 타조가 빨리 가면 빨리 가고, 느리게 가면 느리게 가고. 계속 쫓다 보면, 타조가,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머리를 모래 바닥에 처박아버린다. 그러면 가서 주워 온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도, 그 사람의 욕망, 의지, 의욕, 수준에 따라서, 감당할 양의 긴장이 정해져 있다. 이 감당할 양이 자기 능력을 벗어나면, 머리를 처박는다. 그 뒤로는 사고가 멎는다. 그때까지 가진 자기 생각으로 평생을 살려고 한다. 자기 함량이 작기 때문에, 그 함량 이상의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 믿고 있던 것을 주구장창 지키는 수밖에 없다. 타조가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타조가, '저게 뭔지나 알고 죽자'라고 생각해서, 갑자기 뒤돌아본다 (플라톤 '국가'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과 같은. 강유원씨가 말했던.). 그 때 처음 반응이 어떨까? 깜짝 놀란다. 경이.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놀라는가? 몇 달만에 한번 놀라는가?

타조가 놀랄 때,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1. 자기 반성.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
  2. 반성이 일어나고 난 이후의 첫 반응. 깜짝 놀라는 것. 여기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
  3. 그러면, 저 지프차의 정체가 무엇인가? 저것이 뭐냐? 이것이 형이상학.
  4. 저것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아는 과정을 인식론이라고 한다.
  5. 제대로 알기 위한 생각의 과정, 질서, 규칙을 말하는 것을 논리학이라고 한다. 이것을 정확히 알아서, 이것이 무엇인가 판단이 되었다.
  6. 그 이후에는, 저놈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행위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것이 윤리학. 철학적 결단.

우리는 세계로부터, 부단한 대답과 반응을 강요받는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하는 것이, 철학적 태도.

이 과정이 없는 삶...

막 살기 싫은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야만 그 나라가 발전한다.

이 지프차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공자는 인간으로 봤다. 그것이 무엇이다가 판단이 되면, 그 이후의 진행이 전개된다.

노자는 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가?

17:07~25:52

그런데, 이렇게 반성을 하고 사는 삶. 이런 삶을, 철저한 삶이라고 한다.

과학적이고 철학적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

한 사람 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자연은, 우주는, 한 사람이 움직인다. 기독교? 예수 한 명이 만들었다. 중국의 혁명? 모택동 한 명이 만들었다. 불교. 부처 한 명이 만들었다.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 혼자 만들었다. 이것이 인간의 신비. 혼자가 전체다.

혼자의 힘을 믿어야 한다. 혼자의 힘을 믿는 상태를,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이걸 믿지 않으면, '누군가 해주겠지' 하다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고 시간은 가고 힘은 빠지고.

나 스스로가 우주의 책임자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내 일상에서의 각성. 타조로 쫓기는 삶을 살다가 한번 돌아보는 일이, 우주를 바꾸는 일이다.

25:52~56:25

본질이 있었다. 그게 키워지다가 이상적인 기준까지 왔다. 본질이 없으면 이상적인 기준이라는게 없다.

노자는, 이 구도 자체가, 폭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상적인 기준'이 없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그 '이상적인 기준'이라는게 생겨나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러자면, '본질'을 부정해야 한다.

노자의 지프차는, 비본질로 이해된다. 이 '비본질'을 요즘 우리 말로 풀어내면, '관계'라고 한다. 불교의 말로 하면 '인연'.

그 관계를 무엇과 무엇의 관계로 보는지가 그 철학의 특성을 나타낸다. 불교는, '모든 것'에 대한 관계를 말한다. 노자는, '유'와 '무'의 관계를 말한다.

노자는, 이 세계는 유라고 보여지는 것과 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주역을 쓴 사람은, 이 세계는 음과 양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내 몸이 음과 양으로 되어 있다. 인간도 음적인 인간, 양적인 인간으로 나뉜다. 남성은 또, 이 세계는, 양이기만 한 것과 음이기만 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남성도 음과 양의 조합이다. 여성도 음과 양의 조합이다. 이 세계는 음과 양의 조합으로, 비율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음적인 것과 양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분류된 그 안에서도 음과 양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이 세계는 모두 물질과 정신 이렇게 두 개의 핵심이 짜여져서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노자는, 이 세계는 유와 무로 되어 있다고 본다. 유적인 것과 무적인 것. 내 몸은, 有와 無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유무상생(有無相生). 우리 몸은 유적인 성질과 무적인 성질의 꼬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가 생긴다.

너와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내'가 관계적 존재라는 것이다. 공자도 너와 나의 관계를 말한다.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의 존재를 말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라는 것. 불교에서도, 하도 '너와 나'의 인연만을 얘기하니까, '너가 인연'이다라는 말도 한다(만들었다). 당체공(當體空: 바로 그것이 공이다).

관계론과 본질론. 이것이 이것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이것에 있다. (본질론). 이것이 이것으로 존재하는 근거가, 이것 안에 있는게 아니라, 이것이 존재하는 형식 자체가 이 안의 관계성으로 되어 있다. 이 안의 관계성을 노자는 有無라고 한다.

아무개가, 어떠한, 관계의 연합물이라는 것.

공자는, 어떤 건물이 있다면, 그건 가건물인가 등기된 건물인가? 등기된 건물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가건물로 본다. 가유(假有)라고 한다.

無 名天地之始

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는, 어떤걸 가리킨다는 것이다. 무명, 유명 개념은 잘못된 것. 노자때는 있지도 않은 개념이다.

始라는 것은, 처음 상태(初)라는 것인데, 옷감에 가위를 대는 모습이다. 옷감에 가위를 대고 자를 때, 조금 잘린 상태는 시작을 지나간 상태, 아직 자국도 안난 상태는 아직 시작이 안된 상태. 시작은 어디에 있는가? 시작은, 있기는 있는데, 자름을 준비하는 동작과 자르기가 시작되는 동작 그 사이. 시작이라는 이 순간이, 구체적으로 있는가 없는가? 구체적으로는 없다고 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러나, 그 시작이라는 그 도착점이 없으면, 그 순간이 없으면, 자름이라고 하는게 안일어난다. 준비와 자르기 그 사이의 어딘가.

'무'라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존재 자체는 구체적으로 없는데, 그것이 있어야만 다른 동작이 가능해지는 그런 것. 교실을 이루는 어떤 공간. 이 공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공간이 있어야만 교실이 있을 수 있다.

이 세계는, 자기의 존재 형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 세계를 존재 가능하게, 작용 가능하게 하는 그런 영역이 있다. 그런 영역을 無라고 한다. 시작 같은. '이 세계는 무에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이 아닌다. '그런 영역을, 시작, 출발, 그런 것을 無라고 한다'라고 하는게 맞다.

有 名萬物之母

有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유는 만물을 '낳았다'는게 아니다. 동양에서는, 자식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낳는다. 어머니는 기른다. 어미모 글자는,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나타낸다. 만물을 품고서, 이것을 有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고 하고,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것들을 존재하게 하고 작동하게 하는 것을 무라고 한다.

'묘'라는 것은,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것. 묘한 것. '무'라는 것은, 얼마나 묘한 것인가. 그런 묘한 영역을 '무'라는 글자로 가리킨다.

묘하지 않은 영역. '교'라는 것. 테두리, 실루엣이 있는 것. 이런 것을 '유'라는 글자로 가리킨다.

테두리도 없이 있으면서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상태. 시작, 출발, 공간, 허공. 이것을 노자는 묘한 영역이라고 하고, 경계가 있는 영역을 교한 영역이라고 한다.

주역을 쓴 사람은, 음의 영역과 양의 영역이 있다고 한다. 노자는, 묘한 영역과 교한 영역이 있고, 그 꼬임으로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출이이명)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온 것이다. 무와 유 사이에, 논리적 선후 관계가 없다. 존재적 선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름(역할)을 다르게 하고 있다.

同謂之玄 동위지현

같이 나와 있는 그것이, 매우 현묘하다. 현이라는 것은, '검다'가 아니라, 이것인지 저것인지 가물가물하다. 분명하지 않은 것. 같이 나와 있는 그 가물가물하게 나와 있는 그것이, 매우 현묘하다. (현관문. 바깥도 아니고 안도 아닌, 가물가물한 문) 유와 무가 가물가물하게 함께 있는 것이 매우 현묘하다.

玄之又玄 현지우현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모든 묘한 것들이 들락날락하는 문이다.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다. 이 안에서 모든, 생로병사, 만물의 발생 소멸 변화가 모두 이루어진다. 무엇 안에서? 유와 무가 현묘하게 가물가물하게 뒤섞여 있는 그 안에서. 이것이 대 원칙이다. 이것을 노자는 有無相生(유무상생)이라고 함. 유와 무가 서로 살게 해준다. 무가 유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유와 무 사이에 논리적 선후관계도 없다.

공자 사상의 핵심을 仁으로 생각하듯이, 노자 사상의 핵심은 有無相生으로 생각해야 한다.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 <도>라고 말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 천지의 시작과 같은 그러한 것들을 '무'라고 하며,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 만물을 어미처럼 품는 그러한 것들을 '유'라고 한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 그리하여, '무'라는 것은 얼마나 묘한 것인가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교) : '유'라는 것은 얼마나 교한 것인가
此兩者,同出而異名(차양자,동출이이명) :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름(역할)을 다르게 하고 있다.
同謂之玄(동위지현) : 같이 나와 있는 그것이, 매우 현묘하다.
玄之又玄(현지우현) :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衆妙之門(중묘지문) : 모든 묘한 것들이 들락날락하는 문이다

56:25~74:10

공자 사상을 이해할 때 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공자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자 사상을 이해할 때 有無相生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노자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자 사상을 왜 어렵다고 하냐? 有無相生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유라고 하는 한 가닥과, 무라고 하는 한 가닥이, 새끼줄처럼 꼬여있다.

그러면, 유는, 유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유가 가지고 있는가 무와의 관계가 가지고 있는가? 유는 유로 존재할 수 없다. 유는 무와의 관계로만 존재한다. 자기 존재 근거를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다. 대립명과의 관계에 의존해 있다.

내 키를 크다 작다라고 말하려면, 어떠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내 키는 큰지 안큰지는 아직 모른다. 이것이 짧은지 아닌지는 모른다. 이것이 내 키와 비교될 때 비로소 내 키가 큰 키가 된다. 내 키가 큰 이유가, 저것에 있다. 그 이유를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노자 사상의 어떠한 하나의 구조이다.

내가 고유한 나로 존재할 때는, 고향에 있을 때일까 서울에 있을 때일까?

예비군복을 입혀놓았을 때는, 고유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익명성. 사람은 서울에서 행동을 더 바르게 하게 될까 고향에서 더 바르게 하게 될까?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작은 조직에서 일할 때 내가 더 드러날까, 큰 조직에서 일할 때 내가 더 드러날까? 노자는, 조직이 커지면, 그 안에서 구성원이 하나의 부품으로만 이해되고, 자기 자신을 그 조직의 하나의 책임을 가진 존재로 자각하기 어렵다. 그러니 조직을 작게 쪼개서 관리해야 한다. 그것을 小國寡民소국과민이라고 한다. 단위를 작게 해서, 나라를 작게 해서 백성들 수를 적게 하자. 그러면 백성들이 그 안에서, 내가 이 조직에 항상 주인이나 책임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의 역동성이 더 적극적으로 발휘된다.

이것과 다르게 공자는, 나라를 큰 나라에 적용하겠는가 작은 나라에 적용하겠는가? 큰 나라.

공자가 더 중앙집권에 가깝고, 노자는 지방분권에 더 가깝다.

공자와 노자가, 중국 역사를 반씩 나눠가지는데, 나라가 작은 단위로 쪼개질 때는 노자의 사상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런 작은 단위의 나라들이 합쳐져서 규모가 커지면 공자 사상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왜 공자 사상은 중앙집권 거대 국가 시스템에 더 맞느냐? 공자는 기본적으로 본질을 긍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본질을 확대하게 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건, 노자쪽에 가깝다.

확충. 충실하게 키워서 거대하게 만들어간다는 개념은, 공자 쪽에 가깝다.

공자와 노자 철학 가운데, 노자 철학이 더 여성적이다. 공자는 굉장히 남성적인 철학. 도덕경 안에는 여성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공자와 노자의 150~200년 후에, 맹자, 순자, 장자 등의 철학자들이 나타난다.

장자 철학의 핵심 범주는 氣이다.

공자와 노자는,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다. 이 사회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떻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의 차이는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늙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공자 노자는 인간, 사회, 세계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노자는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다 라는 말은 해주는데, 어떻게 구성되고 있다는 말은 안해준다. 노자는, 이 세계는, 유로 해석되는 영역과 무로 해석되는 영역이 짜여져서 이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의 존재 형식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해명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해 말하는데,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어떻게 죽는지, 태어나서 죽어가는 이 과정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공자와 노자에서는 '변화'가 해명되고 있나 안되고 있나? 변화라는 개념이 없다. 변화란, 여기에 있다가 저기에 가면 달라져야 한다. 이 달라지는 것이 해명되지 않는다. 운동이라는 개념이 공자나 노자에는 없다. 철학을, 입체적이다 평면적이다 구분해보자면, 노자 철학은 평면적인 철학이다. 평면적인 철학에는, 시간이란 관념이 있을 수 없다. 노자 철학에는 시간이란 관념이 있지 않다.

그러면, 노자 철학을, 수양서로 읽을 수 있나 없나? 수양이라는 개념이 노자 철학 안에 있나 없나? 없다. 수양이란, 닦아서, 닦기 이전과 후가 달라지는 이 과정이 설명되어야 수양서로 읽을 수 있다. 노자 철학은 평면적인 철학이다. 장자 철학은 입체적인 철학이다. 그 입체성을 보여주는게, 운동, 변화라는 개념인데, 이 운동, 변화라는 개념을 보여주는 것이 氣라는 개념이다.

노자, 공자까지는 氣 관념이 없다. 氣라는 글자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주가 아니다.

직하학파라는 중요한 학파가 생기는데, 이 학파를 통해서 기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이것을 통해, 동양에서는 이 세계를 변화하는 세계, 운동하는 세계로 본다. 공자 노자는 인간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개별화, 개인을 보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운동과 시간 관념이 있어야 한다. 개별자들을 구분하는 어떤 범주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氣이다.

왜 장자를 들어가기 전에 불부터 이야기를 했는가? 인간이,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는 이 긴 여정을 技까지 끌고 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6강

氣라는 개념이 나올 때, 여기에 엄청나게 정치적인 변화가 있고, 생각의 변화가 있다. 사회 경제적 조건이 변하면 계급이 달라진다. 계급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면 욕구가 달라져서 정치, 정치 시스템-제도가 달라진다. 예전에는 왕이 모든 재화를 소유하고 분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생산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에, 잉여생산물이 남으면서, 그것을 개인들이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나중엔 사적 소유권이 침해 불가능한 절대적인 권리로 인정받게 된다.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 소유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계급의 속성이 달라지면, 계급이 달라지면, 생각이나 욕망이 달라진다. 다른 형태의 정치 제도가 필요하게 된다.

최진석의 장자 철학 (last edited 2021-05-12 04:02:38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