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나를 장례 지내다

곤(鯤)은 붕(鵬)이 되었고, 붕은 구만리 바람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올랐다. 6막의 끝에서 우리가 본 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바꾸어 마침내 날아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정작 붕새의 날개를 가장 오래, 가장 무겁게 붙잡는 것은 바깥의 바람이 아니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새를 비웃던 그 좁은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 — 자기 자신이라고 믿어온 굳어진 마음이다. 날아오르기 위해 대붕이 마지막으로 벗어야 했던 것은 하늘이 아니라 자기였다.

장자는 이 마지막 관문에 이름을 붙였다. 덕(德), 그리고 오상아(吾喪我). 하나는 날아오르게 하는 힘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 자기 자신을 장례 지내는 일의 이름이다.

덕(德), 도와 기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장자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도(道)나 기(氣)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최진석 교수는 장자 철학의 실질적인 중심은 오히려 덕(德)에 있다고 말한다. 도가 세계가 움직이는 이치의 이름이고 기가 그 이치가 드러나는 방식이라면, 덕은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장자 철학의 모든 초점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어떻게 하면 자기 덕을 단단하게 만들 것인가.

덕이라는 글자의 오래된 모양은 직심지기(直心之氣)를 담고 있다고 한다. 곧을 직(直), 마음 심(心), 갈 지(之), 기운 기(氣) — 곧게 뻗어 나오는 마음의 기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곧다'는 것은 외부의 짧은 목적이나 눈앞의 이익, 주어진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안에서 직접 발출되는 성숙하고 정련된 마음, 다시 말해 진심을 가리킨다. 덕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주(周)나라 무렵이었고, 이후 이 말은 동아시아 사유 전체에서 인간의 내면적 역량을 가리키는 가장 무거운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목할 것은, 덕이 도덕적 품성이나 인격의 훌륭함 같은 얌전한 뜻으로 다 담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자에게 덕은 차라리 힘이다. 기성의 관념, 즉 명(名)의 지배를 이겨내고 이제까지 없던 세계를 새로 여는 힘.

명(名)의 감옥, 혜자와 장자의 박

이 힘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장자는 절친이자 논쟁 상대였던 혜자(惠子)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혜자가 어느 날 장자에게 말한다. 위나라 왕이 준 큰 박씨를 심었더니 다섯 섬들이나 되는 거대한 박이 열렸다.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고, 쪼개어 바가지로 쓰자니 너무 납작하고 커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다. 쓸모가 없어 부수어 버렸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 말을 듣고 혜자를 나무란다. 그대는 큰 것을 쓸 줄 모른다고. 왜 그것을 허리에 묶어 강이나 호수에 띄우고 둥둥 떠다닐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이 짧은 일화 안에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

구분

혜자(惠子)

장자(莊子)

관점

명(名, 이미 있는 개념)에 갇힘

명에서 자유로움

판단

박은 표주박이나 허리병으로나 쓰는 것인데 너무 커서 못 쓴다 → 무용(無用)

기존 용도가 맞지 않으면 새로운 용도를 찾으면 된다 → 배로 쓰면 된다

행동

쓸모없다고 여겨 박을 깨버린다

박을 물에 띄워 배처럼 타고 노닌다

결과

기존 관념의 노예가 된다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고 세계의 주도권을 쥔다

혜자는 박을 '박'이라는 이름, 그 이름에 이미 정해져 있는 용도의 틀 안에서만 보았다. 표주박이나 물동이로 못 쓰면 그 박은 실패작이다. 반면 장자는 같은 박을 보면서 '박'이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물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결과 배라는, 이전에는 그 박에 속하지 않았던 새로운 쓰임이 태어났다.

이 차이를 만든 힘이 바로 덕이다. 명(名)은 세계를 이미 완성된 개념의 목록으로 만들어 놓는다. 덕은 그 목록을 찢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쓰임을 찾아낸다. 장자는 같은 논리로 유비와 조조를 견준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옛 명분과 정통성에 기대어 살았던 유비보다, 낡은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 조조가 오히려 덕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유비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이름에 갇혀, 그 이름이 요구하는 대로만 움직였기 때문이다.

질문이 만든 세계 — 뉴턴과 지식 수입국

덕이 명을 넘어서는 힘이라면, 그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장자를 읽어 가던 최진석 교수는 여기서 뜻밖에도 뉴턴을 불러온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만들기 위해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궁금했다. 왜 저 사과는 옆으로나 위로 날아가지 않고 하필 땅으로 떨어지는가. 왜 물건은 지금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가. 풀리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만큼 집요했던 이 궁금증을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부산물처럼 만유인력의 법칙이 튀어나왔다. 법칙이 먼저 있었고 뉴턴이 그것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질문이 먼저 있었고 법칙은 그 질문의 흔적이었다.

여기서 장자적인 구분이 하나 생긴다. 대답과 질문의 구분이다. 대답은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지식을 다시 꺼내 뱉는 일이다. 그 안에서 덕은 작동할 자리가 없다. 반면 질문은 내 안에 있던 호기심이 처음으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사건이다. 세계를 바꾼 위대한 것들은, 돌아보면 거의 예외 없이 누군가의 훌륭한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요한 질문의 결과였다.

최진석 교수는 이 논리를 그대로 한국 사회의 지식 구조로 끌고 온다. 한국은 오랫동안 지식을 생산하는 나라이기보다 수입하는 나라였다. 수입된 지식은 이미 다른 누군가가 자기 문제를 풀고 자기 병을 치료한 결과물, 말하자면 남이 써 준 처방전이다. 처방전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그것을 쓰기까지 그 사람이 던졌던 질문과 시행착오는 함께 딸려오지 않는다. 문제를 발견하는 궁금증과 호기심 — 곧 덕의 훈련 — 없이 결과물만 습득하면,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마땅히 거쳐야 할 공적이고 윤리적인 단련도 함께 건너뛰게 된다. 그렇게 자란 지식인은 자기 세계를 스스로 설명할 능력 없이 남의 답만 외운 '헛똑똑이'가 되기 쉽고, 이런 부패하기 쉬운 지형 위에서 사회의 진화는 자연히 더뎌진다.

선자선지, 불선자역선지 — 덕을 벼리는 법

덕은 거창한 사변 속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장자는 타인을 대하는 아주 구체적인 태도 하나를 덕의 수련법으로 제시한다. 선자선지, 불선자역선지(善者善之, 不善者亦善之) —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마저 선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에게 굴복하는 처세술이 아니다. 상대가 무례하게 굴어도 나 역시 무례함으로 되갚는 순간, 나는 상대가 정해 놓은 방식에 끌려 들어가 내 덕의 활동 공간을 스스로 좁히게 된다. 반면 상대의 불선(不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과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은, 외부 상황이 무엇이든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덕을 두텁게 벼려 가는 반성적 수행이다. 무례함에 무례함으로 응하는 것은 쉽고, 그래서 아무런 힘도 남기지 않는다. 선함을 잃지 않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그 자리에 덕이 쌓인다.

향원과 정치적 신념 — 덕을 죽이는 것들

그런데 이 덕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신념이다. 특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은 덕이 움직일 공간을 극도로 위축시킨다.

지적 활동의 핵심은 반성력, 곧 자기 생각을 다시 한번 뒤집어 보는 힘이다. 그런데 강한 정치적 신념은 바로 이 반성력을 마비시킨다. 확신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자기와 다른 입장에 선 사람을 대화 상대가 아니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게 된다. 그 순간 질문은 멈추고 판단만 남는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향원(鄕原)이라 불렀다. 향원이란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적당히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으며, 그 정도의 박수와 칭송에 안주해 더 이상 문제를 파고들지 않는 사람이다. 이들은 스스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을 그 물음으로 이끌지도 못한다. 그래서 향원은 단순히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덕의 파괴자'다. 덕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를 이탈해서, 즉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없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이 함께 다스리는 협치(協治)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진구비강 — 사소함 속의 절대 자유

그렇다면 이 덕이 다다르는 가장 먼 자리는 어디인가. 장자는 소요유편 끝자락에서 신인(神人)의 이야기로 이 물음에 답한다. 견오(肩吾)가 접여(接輿)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를, 연숙(連叔)이 다시 풀어 준다. 저 멀리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사는 신인은 피부가 얼음과 눈처럼 희고,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만 마시며, 구름을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세상 밖에서 노닌다. 홍수가 나 하늘에 닿아도 그를 빠뜨리지 못하고, 가뭄에 쇠와 돌이 녹아도 그를 태우지 못한다.

연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是其塵垢秕糠,將猶陶鑄堯舜者也,孰肯以物爲事!
(그 몸에 붙은 티끌과 때, 쭉정이와 겨 같은 사소한 찌꺼기만으로도
요와 순 같은 성군을 빚어낼 수 있는데,
어찌 바깥 사물 따위에 마음을 쓰겠는가.)
— 《莊子》 逍遙遊

진구비강(塵垢秕糠). 먼지와 때, 쭉정이와 겨. 신인의 몸에서 털어내면 그만인 하찮은 부스러기일 뿐인데, 장자는 바로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요순 같은 위대한 성군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설이면서 동시에 장자 철학 전체를 압축한 문장이다. '천하'라는 이름의 거대한 담론, 세상이 미리 정해 놓은 크고 훌륭한 목표는 신인에게 애초에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의 몸에서 굴러떨어지는 사소한 찌꺼기, 즉 자기 안의 고유하고 하찮아 보이는 궁금증과 호기심과 문제의식이야말로 새로운 요순을 만들어 내는 진짜 힘이다. 절대 자유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자기 안에 있는,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주체적인 삶의 비밀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이 덕에 관한 장자의 결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자기 안의 그 사소한 힘에 닿으려면, 대체 무엇을 먼저 치워야 하는가. 장자의 대답은 뜻밖에도 가혹하다. 가장 먼저 치워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이다.

오상아 —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제물론(齊物論)의 첫 장면으로 가 보자. 남곽자기(南郭子綦)라는 사람이 안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길게 숨을 내쉬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넋이 나간 듯, 자기 짝을 잃어버린 사람 같다. 곁에서 모시고 서 있던 제자 안성자유(顏成子游)가 이 낯선 광경을 보고 묻는다.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
顏成子游立侍乎前,曰:
「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
子綦曰:
「偃,不亦善乎,而問之也!
今者吾喪我,汝知之乎?
汝聞人籟而未聞地籟,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
— 《莊子》 齊物論

풀면 이렇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은 정말 마른 나무처럼 만들 수 있고, 마음은 정말 불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대신 분은 예전에 안석에 기대시던 그분이 아닙니다." 스승은 답한다. "언(偃)아, 참 좋은 질문을 하는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吾喪我). 너는 그것을 아느냐. 너는 사람의 피리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고, 땅의 피리소리는 들었어도 하늘의 피리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을 것이다."

오상아(吾喪我) —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혹은 나는 나를 살해했다. 이 짧은 네 글자 안에 두 개의 '나'가 들어 있다. 뒤의 '아(我)'는 특정한 자리와 특정한 경험, 특정한 신념에 사로잡혀 굳어 버린 나, 몸에 딱 달라붙은 육체적이고 경험적인 자아다. 앞의 '오(吾)'는 그 굳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한 단계 더 깨달은, 보편의 눈에 이른 주체다. 남곽자기가 죽인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굳은 '아'다. 그리고 그 죽음의 결과, 지금까지 없던 '오'가 비로소 등장한다. 안성자유가 목격한 것은 스승의 소멸이 아니라, 스승이 자기라는 감옥을 부수고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왜 파괴가 아니라 해방인가. 우리는 대개 특정한 장소, 특정한 생각, 특정한 자기 규정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산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것을 믿는다, 나는 이런 편에 서 있다 — 이 문장들이 쌓여 우리를 지키는 담이 되는 동시에 우리를 가두는 벽이 된다. 오상아는 이 담과 벽을 허무는 사건이다. 자신을 가두어 온 문법과 논리를 스스로 깨부수고, 마치 제3자가 된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내려다볼 때,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진실과 만난다. 장자는 이 상태를 몸이 굳은 나무 같고 마음이 식은 재 같다고 묘사하지만, 그 정적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소멸이 아니라 황홀경, 자기 밖으로 나선다는 뜻 그대로의 엑스타시(Ex-stasis)다. 죽은 것은 나를 가두던 낡은 나였고, 살아난 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세 가지 피리소리 — 지뢰, 인뢰, 천뢰

안성자유는 스승의 말 뒤에 곧바로 다시 청한다. 그 이치를 여쭙고 싶습니다. 남곽자기는 대답 대신 먼저 소리로 말을 건넨다.

夫大塊噫氣,其名爲風。是唯無作,作則萬竅怒呺。
而獨不聞之翏翏乎?
山林之畏隹,大木百圍之竅穴,
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窪者,似汙者;
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
前者唱於而隨者唱喁,
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 《莊子》 齊物論

큰 대지가 숨을 내쉬면 그것을 바람이라 부른다. 평소에는 아무 일 없다가, 한번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성난 듯 소리를 지른다. 저 산림 사이 백 아름 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 — 어떤 것은 코 같고 어떤 것은 입 같고 어떤 것은 귀 같고, 대들보 구멍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웅덩이 같고 못 같다. 그 구멍마다 바람이 부딪히며 콸콸대고, 씽씽대고, 꾸짖듯 소리 지르고, 훅훅대고, 울부짖고, 곡하듯 울고, 웅웅대고, 깩깩댄다. 앞 구멍이 '우' 하고 노래하면 뒤따르는 구멍이 '우' 하고 화답한다. 산들바람에는 작게 어우러지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어우러지다가, 매서운 바람이 지나가면 모든 구멍은 다시 텅 빈다.

이것이 지뢰(地籟), 땅의 피리소리다. 바람이 나무의 구멍이나 땅의 빈틈을 지나갈 때, 그 구멍의 생김새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안성자유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땅의 피리소리는 온갖 구멍들이 내는 것이고, 사람의 피리소리는 나란히 엮은 대나무 관들이 내는 것이겠지요. 그럼 하늘의 피리소리는 무엇입니까.

地籟則眾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
子綦曰:夫天籟者,吹萬不同,而使其自己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 《莊子》 齊物論

하늘의 피리소리란, 만 가지 서로 다른 소리를 불어 내면서도 저마다 스스로 그렇게 소리 내게 할 뿐, 그 소리를 모두 자기 스스로 가져다 쓰게 한다. 성내어 저 소리를 내게 하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인뢰(人籟)는 사람이 대나무 피리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여닫으며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소리다. 사람의 의도와 기술이 개입한다. 지뢰는 그보다 한 겹 넓다. 바람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수많은 구멍을 지나며 제각기 다른 소리로 터져 나오는 것, 자연이되 아직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소리다. 그런데 남곽자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늘의 피리소리, 천뢰(天籟)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장자 사유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이 드러난다. 천뢰는 바람도 아니고 구멍도 아니고, 그 둘을 넘어선 어떤 제3의 주재자가 내는 소리가 아니다. 만물은 저마다 "내가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모든 소리가 스스로 그러하도록(自己) 내버려 두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관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소리를 내게 하는 자, 성내듯 불어 대는 그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怒者其誰邪 — 그렇게 하는 자가 대체 누구인가, 라는 이 반문 자체가 답이다.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상아와 세 가지 피리소리는 하나로 이어진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무수한 조건과 관계가 지나가며 잠시 내는 하나의 소리, 하나의 구멍에 지나지 않는다. 그 구멍의 모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믿고, 거기서 나는 소리가 '진짜 나의 목소리'라고 믿는 순간 사람은 인뢰와 지뢰의 차원에 갇힌다. 남곽자기가 장례 지낸 '아'는 바로 이 착각, 즉 소리 내는 구멍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어 온 착각이었다. 그 착각을 걷어 내고 나면, 자기 자신이 실은 더 큰 흐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임을, 다시 말해 천뢰의 일부임을 보게 된다.

이것은 노자가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불교가 공(空)과 인연으로 말한 것과 다른 얼굴을 한 같은 통찰이다. 노자, 불교, 장자 — 이 세 사유는 저마다 다른 언어를 쓰지만 한 가지 점에서 만난다. 세계는 어딘가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장자에게 그 관계를 지시하는 말이 기(氣)다. 기가 모이면 존재가 생겨나고 기가 흩어지면 존재는 사라진다. 그러니 고정된 '본질'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세계에 근원이 있고 그 근원이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목적은 기준이 되고, 기준은 구분을 낳고, 구분은 결국 배제와 억압으로 이어진다. 장자가 천뢰의 주재자를 끝내 지목하지 않는 것은 서술의 게으름이 아니라, 바로 이 폭력의 연쇄를 원천에서 끊어 내려는 고도의 철학적 선택이다.

근사지심 — 죽음에 가까운 마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관계적이고 유동적인 진실을 마주하지 않고, 굳이 특정한 신념과 이념에 자신을 결박하는가. 장자의 답은 냉정하다. 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념 체계 안에 들어앉으면 더 이상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앞의 모든 사건을 이미 가진 틀에 대입해서 즉각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다. 이 손쉬움에 중독되면 사고 능력은 조용히 퇴화하고, 대신 목소리만 점점 커진다.

산 나무는 부드럽고 바람에 흔들린다. 죽은 나무는 뻣뻣하고,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서 있다. 장자는 생각이 뻣뻣해지고 확신에 차서 남과 시비 가리기에만 몰두하는 마음을 이렇게 부른다.

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近死之心,莫使復陽也。
(그 마음이 닫혀 봉해진 것 같으니, 이는 늙어 말라 버렸다는 뜻이다.
죽음에 가까운 마음이니, 다시 살아나게(陽) 할 길이 없다.)
— 《莊子》 齊物論

근사지심(近死之心), 죽음에 가까운 마음. 무서운 것은 이 표현 뒤에 붙은 말, 莫使復陽也 — 다시 살아나게 할 수가 없다는 진단이다. 한번 특정한 가치관과 굳게 결탁해 본래의 유연함을 잃어버린 마음은, 양기(陽氣)를 회복해 다시 살아 있는 나무처럼 흔들릴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확신은 편안하지만, 그 편안함의 대가로 사람은 서서히 죽은 나무가 되어 간다.

성견의 감옥, 그리고 도라는 이름

앞서 본 자기 장례, 오상아는 여기서 다시 한번 얼굴을 내민다. 이번에는 성견(成見) — 이미 굳어 버린 견해라는 이름으로.

장자는 말한다.

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無師乎?
(자기 안에 이미 굳어 버린 마음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다 하겠는가.)
— 《莊子》 齊物論

성심(成心)이란 이미 완성되어 굳어 버린 마음, 자기도 모르게 스승처럼 떠받들며 사는 편견이다. 무서운 것은 이 성심이 유식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보조차 자기 나름의 성견을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온갖 '주의(Ism)'들이 이 성심의 확대판이다. 이런 주의들은 본래 특정한 시점, 특정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경일 뿐인데, 거기에 갇힌 사람은 변화하는 현실을 새로 관찰하는 대신 이미 완성된 틀을 꺼내 세상을 재단해 버린다. 자기 견해를 지키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남과 다투는 삶은 말을 달리듯 치열해 보이지만, 정작 이루는 것 없이 지쳐서 끝내 돌아갈 곳조차 잊게 만든다.

빠져나가는 길은 결국 다시 오상아다. 성견과 결탁한 '나'를 죽여야 그 자리에서 진짜 '나'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설명이라기보다, 16강에서 이미 본 그 장례식이 이번에는 신념과 이데올로기라는 구체적인 옷을 입고 되돌아온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장자는 근원(Origin) 그 자체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태도를 보인다. 우주가 어디서 오는지, 사람의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장자는 끝내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若有真宰,而特不得其眹。
(참된 주재자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조짐조차 잡을 수가 없다.)
— 《莊子》 齊物論

약유진제(若有真宰) —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형체는 잡히지 않는 것. 이것은 태만한 서술이 아니다. 근원을 분명히 세워 놓는 순간 그것은 기준이 되고, 기준은 구분을 낳고, 구분은 배제와 억압으로 번져 나간다는 것을 장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공자가 인(仁)을 인간의 본질로 세우고 그것을 지키고 넓히는 일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이름으로 목적화했을 때, 장자는 바로 이 목적론적 설정이 인간을 특정한 틀에 가두는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부모가 자녀에게 '의사'라는 기준 하나를 세우는 순간부터 그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 기준에 비추어 평가받기 시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근원을 흐릿하게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장자가 인간을 특정한 목적이나 이상적 단계에 함몰시키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도(道)란 무엇인가. 강의는 여기서 도를 다시 정의하며 마무리된다. 도는 실체가 아니다. 노자에게 도는 유(有)와 무(無)가 새끼줄처럼 서로 꼬여 있는 현상 그 자체에 억지로 붙인 이름, 이른바 강위지명(强爲之名)이었다. 주역에서는 그것을 한 번은 음하고 한 번은 양하는 변화의 원리,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불렀다. 어느 쪽이든 도는 세계 뒤편에 숨은 근원적 실체가 아니라, 유무와 음양이 서로 기대어 존재하는 그 관계와 흐름 자체에 붙인 기호이자 이름이다. 천명(天命)에서 도(道)로의 이행은 곧 신에 대한 믿음에서 인간의 사유로의 이행이었고, 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감각이 아니라 사유로 받아들이는 일과 같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애써 생각해서 도달해야 하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되짚어보며 — 호기심이라는 지표

15강에서 17강까지 이어지는 이 세 걸음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접힌다. 덕이란 명(名)의 감옥에 맞서는 힘이고, 그 힘을 기르는 유일하고 근본적인 방법은 자기 자신 — 굳어진 자아, 굳어진 견해 — 마저 장례 지내는 것이다. 남곽자기가 안석에 기대어 자기 짝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 있던 그 정적의 순간,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들려온 지뢰와 인뢰와 천뢰의 비유는, 자아라는 것이 애초에 거대한 바람이 무수한 구멍을 지나며 잠시 내는 한 가락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죽음이 아니라 해방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것을 실천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지표는 무엇일까. 최진석 교수는 그것을 호기심이라 부른다. 이미 가진 지식의 틀로 세계를 재단하고 판단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궁금해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는가. 시청률이나 합격률 같은 눈앞의 '목표'에 갇히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열린 '목적'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근사지심에 붙들리지 않고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살아 있는 나무로 남아 있는가. 대붕이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오르기 전에 벗어야 했던 마지막 무게는 결국 이것이었다. 자기라는 이름의 짐, 그리고 그 짐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는 소리.


관련 강의: 15강~17강 — 원 강의 재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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