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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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넌 자는 이제 무엇을 하는가.
5막에서 우리는 앎(知)과 덕(德)과 함량(量)을 이야기하며 강을 건너는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건넌다는 것은 이쪽 언덕의 습관과 판단 기준을 내려놓고 저쪽 언덕의 낯선 기준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장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강을 건넌 자는, 마침내 날아오른다. 걷던 존재가 나는 존재가 되는 것 — 장자 철학의 첫 페이지, 소요유(逍遙遊)는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노닐다, 라는 낯선 코드
소요유는 흔히 "자유롭게 노닐다"로 번역되지만, 이 번역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는다. 소요유는 목적지를 정해놓고 눈을 부릅뜨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노니는 상태, 대상과 내가 갈라지지 않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 그리고 시간이 가장 빨리 흐르는 몰입의 상태다.
서구 지성사에서 '놀이'를 통해 인간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1938년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에서 본격화된다. 하지만 장자는 그보다 약 2,200년을 앞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노는 것'으로 규정했다. 무엇을 하든 놀듯이 하는 것 — 이것은 일을 대충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실력이 극에 달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행하는 상태, 노력과 기교가 완전히 몸에 배어 더 이상 노력처럼 느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장자는 이 노님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가 감당하기 힘든 스케일의 우화 하나를 던진다.
북명(北冥)의 곤(鯤)
北冥有魚,其名爲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
북쪽 바다, 북명(北冥). 이곳은 생명이 소멸하고 다시 생성되는 어둡고 아득한 물이다. 그 물 밑, 빛도 닿지 않는 깊이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산다. 이름은 곤(鯤). 원래 '곤'이라는 글자는 작은 물고기 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장자는 그 작디작은 알의 이름을 가장 거대한 존재에게 붙였다. 그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물고기에게 말이다.
작음과 큼이 한 글자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 — 이것이 우연일 리 없다. 지금은 알처럼 작아 보이는 존재도, 그 안에 몇 천 리짜리 존재가 웅크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곤은 그렇게 첫 문장부터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 안에는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가.
곤은 오랫동안 그 어둠 속에 머문다. 몸을 키우고, 힘을 응축하고, 삼천 리의 파도가 밀려올 때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과 축적의 시간을 장자를 풀이하는 사람들은 흔히 적구지공(積久之功)이라 부른다 —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공력이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지가 아니라, 다음 도약을 위해 조용히 두께를 채우는 시간이다.
붕(鵬)이 되어, 구만 리 창공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온다.
化而爲鳥,其名爲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天池也。
물속의 곤이 변하여 새가 된다. 이름은 붕(鵬). 그 등짝의 크기 역시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한쪽을 다 가리는 구름과 같다. 바다의 기운이 크게 움직이는 때, 이 새는 남쪽 바다로 옮겨간다. 남명(南冥) — 그곳은 다름 아닌 하늘의 못, 천지(天池)다.
鵬之徙於南冥也,水擊三千里,摶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
붕이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 날개로 수면을 쳐서 일으키는 물보라가 삼천 리에 이르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솟구쳐 오르는 높이가 구만 리에 이른다. 그리고 한 번 날아오르면 여섯 달을 쉬지 않고 날아간다. 물속에 살던 존재가 하늘을 나는 존재로 바뀌는 것 — 이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질적 전환이다. 헤엄치던 물고기가 조금 더 잘 헤엄치게 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서 후대 사람들은 붕정만리(鵬程萬里)라는 성어를 길어 올렸다. 붕새가 날아갈 앞길이 만 리라는 뜻으로, 웅대한 앞날이나 원대한 포부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다만 이 네 글자가 원문에 그대로 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소요유 원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구만 리(九萬里)"이며, 붕정만리는 이 장면 전체에서 후대가 뽑아낸 말이다.
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而後乃今培風; 背負靑天而莫之夭閼者,而後乃今將圖南。
구만 리를 올라야 비로소 바람이 날개 아래 두텁게 깔리고, 그래야 비로소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남쪽 길을 도모할 수 있다 — 장자는 도약의 스케일만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도약이 가능하려면 무엇이 먼저 있어야 하는지를, 바로 다음 문장에서 말한다.
매미와 비둘기, 소지(小知)와 대지(大知)
그런데 이 거대한 비상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 매미와 산비둘기다.
蜩與鷽鳩笑之曰:「我決起而飛,槍楡枋而止,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奚以之九萬里而南爲?」
매미와 산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에 닿을 뿐이고, 때로는 거기도 못 미쳐 땅에 곤두박질치고 만다. 그런데 저 새는 무엇 하러 구만 리씩이나 올라가 남쪽으로 간다는 것인가?"
이 웃음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매미와 비둘기는 그저 자기가 아는 세계의 척도로 붕을 재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척도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장자는 이 대비를 소지(小知)와 대지(大知), 소년(小年)과 대년(大年)의 차이로 확장한다.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爲春,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爲春,八千歲爲秋,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久特聞,衆人匹之,不亦悲乎!
아침에 돋아났다가 하루 만에 스러지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한다. 여름 한철 우는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짧은 수명, 소년(小年)이다. 반면 초나라 남쪽의 명령(冥靈)이라는 나무는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으며, 아득한 옛날의 대춘(大椿)이라는 나무는 팔천 년을 봄으로,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 이것이 대년(大年)이다. 그런데 겨우 몇백 년 산 팽조(彭祖)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장수의 표본으로 떠받들며 견주려 드니, 이 또한 슬프지 않은가 — 장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존재에는 그릇의 차이가 있다. 작은 새가 작은 것을 잘못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그릇의 크기가 곧 세계의 크기라고 믿는 순간, 그는 자기 바깥의 비상을 비웃는 매미가 된다. 6막의 질문은 결국 여기로 모인다. 당신은 지금 자신의 나뭇가지를 세계의 전부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두께가 없으면 뜨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매미와 붕을 가르는가. 높이가 아니다. 장자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높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즉 두께(厚)다.
且夫水之積也不厚,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則芥爲之舟;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
물이 깊게 고여 있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루의 우묵한 곳에 술잔 하나 엎지른 물을 부으면 지푸라기 하나쯤은 배처럼 띄울 수 있지만, 거기에 술잔을 얹으면 바닥에 달라붙어 버린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도 마찬가지다. 붕의 날개 아래 바람이 구만 리만큼 두텁게 쌓여야, 비로소 그 거대한 날개를 떠받칠 힘이 생긴다. 자유란 하늘이 거저 내려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아래에 쌓인 두께가 밀어 올리는 결과다. 당신의 자유가 구속받는다면, 그것은 하늘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딛고 설 두께가 아직 얕기 때문이다.
최진석 교수는 이 두께의 문제를 진(眞)·선(善)·미(美)의 층위로 풀어 설명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진(眞)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고, 좋고 나쁨을 가리는 선(善)은 그 위에 놓인 윤리와 도덕의 단계이며,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미(美)는 가장 높은 지성과 문명의 단계다. 이 셋은 나란히 병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두께가 쌓여야 다음 단계를 품을 수 있는 포함 관계에 있다. 흙을 계속 쌓아 산을 이루면 그 산에서 저절로 바람과 비가 생겨나듯이(적토성산·積土成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의 덕과 실력을, 하루하루, 두텁게 쌓는 것뿐이다.
뱁새와 두더지, 그리고 명(名)이라는 손님
두께의 문제는 곧 그릇의 문제이기도 하다.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넘겨주려 했을 때, 허유는 이렇게 거절한다.
鷦鷯巢於深林,不過一枝;偃鼠飮河,不過滿腹。
뱁새가 깊은 숲에 둥지를 틀어도 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것으로 그만이다. 허유는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는 천하라는 이름을 짊어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名者實之賓也。吾將爲賓乎?
이름(名)이라는 것은 실제(實)에 딸린 손님일 뿐이다. 내 어찌 손님의 자리를 탐하겠는가 — 허유는 이렇게 되묻는다. 뱁새는 나뭇가지 하나로 충분하고, 붕은 구만 리의 하늘로 겨우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릇을 실제로 채워가는 것이다. 이름이나 자리는 그 실질을 뒤따르는 손님일 뿐, 손님이 주인 노릇을 하는 순간 존재는 뒤틀린다.
혜자의 박, 고정관념 너머의 시선
붕이 매미의 눈을 벗어난 것처럼, 창의성 역시 기존의 눈을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장자와 오랜 논쟁 상대였던 혜자(惠子)의 일화가 이를 보여준다.
혜자에게 어느 날 커다란 박 씨앗이 생겼다. 심어 키웠더니 다섯 섬들이 큰 박이 열렸다. 그런데 너무 커서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가 없고, 바가지로 쪼개자니 얕고 평평해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혜자는 이 박을 쓸모없다며 부숴버렸다고 장자에게 투덜댄다. 장자는 혀를 찬다. 어째서 그것을 배로 만들어 강과 호수에 띄우고 그 위에서 노닐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같은 이야기가 손 트지 않는 약의 일화에도 반복된다. 어떤 집안은 대대로 그 약을 손에 발라가며 겨우 솜 빠는 일에만 썼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약을 병사들에게 발라 겨울 수전(水戰)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공으로 영지를 하사받았다. 기술은 똑같았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 곧 생각의 크기가 달랐던 것이다.
혜자는 바가지라는 기존의 개념 안에 갇혀 박을 보았다. 장자는 그 개념 바깥으로 나가 배를 보았다. 창의성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내면의 두께가 두터워져 인식이 질적으로 전환되는 순간, 눈앞의 사물이 전혀 다른 쓰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 그것이 창의성이다.
함량을 키우는 세 가지
그렇다면 이 두께는 어떻게 쌓는가. 장자 철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더 치열하게 살아내기 위한 실천에서 시작된다. 강의는 존재의 두께를 키우는 세 가지 조건을 짚는다.
- 큰 뜻(志) — 자신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거대한 방향을 세우는 일.
- 자기만의 율(律) —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정한 엄격한 규율을 지켜내는 일.
- 지식과 심력(識) —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그것을 견뎌내는 정신의 힘.
이 세 가지가 쌓이는 만큼, 웅덩이는 못이 되고 못은 바다가 된다. 그리고 바다가 충분히 두터워졌을 때, 곤은 비로소 붕이 된다.
주변부에서 시작되는 역사
두께를 쌓는 자리는 중심이 아니라 대개 주변이다. 최진석 교수는 자신이 기획한 '노자와 베토벤' 콘서트를 서울이 아닌 부산 같은 지역에서 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는 언제나 소외된 주변이 중심을 전복하고, 그렇게 전복해 스스로 중심이 된 자리가 다시 새로운 주변에 의해 전복되는 순환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흐름은 기득권을 쥔 중앙에서 나오지 않는다. 지역이 중앙을 흉내 내는 데 그치는 순간, 역사의 진보는 멈춘다.
"광주, 너는 누구냐." "부산, 너는 누구냐." 이 물음은 지역 비하가 아니라 촉구다. 기존 구조의 한 귀퉁이를 빌려 쓰는 대신, 자신이 딛고 선 땅 위에 스스로의 세계를 세우라는 요구다. 이것은 곤이 북명의 어둠 속에서 몇 천 리의 몸을 키운 것과 다르지 않다. 변방은 초라한 자리가 아니라, 두께를 쌓기에 가장 정직한 자리다.
지적 착각과 개인의 책임
다만 강의를 듣는 것과 자유롭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자유와 소유, 인간적 완성에 관한 강의를 두 시간 듣고 나서, 마치 자신이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듯 착각하는 순간이 있다. 강연자는 지식을 전달할 뿐이다. 청중이 강의실을 나서며 느끼는 짧은 감동이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20년이 헛되이 흘러갈 수도 있다. 두께는 듣는 것으로 쌓이지 않는다. 두께는 오직 자기 자신의 실천으로만 쌓인다.
유대(有待)에서 무대(無待)로
소요유 편은 이 두께의 문제를 존재의 단계로 다시 펼쳐 보인다. 매미와 산비둘기처럼 자기 지위나 지역에 갇혀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남을 분석하는 눈은 밝지만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눈은 어두운 이들이다.
그 위에 송영자(宋榮子)가 있다. 그는 세상의 칭찬에 우쭐대지 않고 세상의 비난에 기죽지 않는다. 안과 밖을 분명히 나누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뚜렷이 그을 줄 안다. 그러나 여전히 안과 밖을 나누는 그 경계 자체에 기대어 서 있다는 점에서, 완전하지는 않다.
그 위에 열자(列子)가 있다. 그는 바람을 타고 가볍게 다니며 보름을 지나서야 돌아온다. 세속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여전히 '바람'이라는 외부 조건에 기대어 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는 날 수 없다. 이것이 유대(有待) — 무언가에 기대야만 하는 상태다.
최고의 경지는 이 모든 기댐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若夫乘天地之正,而御六氣之辯,以遊無窮者,彼且惡乎待哉!
천지의 올바름을 타고 여섯 가지 기(氣)의 변화를 몰아 무궁한 곳에서 노니는 자, 그는 대체 무엇에 기댈 것이 있겠는가 — 이것이 무대(無待)다. 이 경지에 이른 인간을 장자는 세 이름으로 부른다.
구분 |
개념 |
핵심 의미 |
지인(至人) |
무기(無己) |
감각과 경험에 갇힌 좁은 자아의 틀을 넘어선다. |
신인(神人) |
무공(無功) |
스스로 세운 공적이나 성공의 기억에 갇히지 않는다. |
성인(聖人) |
무명(無名) |
이름과 명예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으며, 자신이 그 이상의 존재임을 안다. |
성공 기억이라는 감옥
이 가운데 무공(無功)은 특히 현대인에게 매섭게 다가온다. 성공한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실패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 기억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한 사람이 과거에 통했던 방식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수 없다.
혁명가의 변질이 그 극단적인 예다. 혁명의 기억에 사로잡힌 자는 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꿔 차고, 스스로 새로운 권력이 된다. 진정한 혁명가는 혁명의 결과물 위에 눌러앉지 않는다. 체 게바라가 혁명 이후 다시 낯선 전장으로 떠난 것처럼, 공(功)을 이룬 자리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 것이 무공의 실천이다.
전문직의 함정도 다르지 않다. 어렵게 딴 자격증, 어렵게 붙은 시험 — 그 공(功)과 명(名)에 취하는 순간, 인격의 성장은 멈추고 존재는 기능의 자리에 고정된다. 붕이 구만 리를 오른 뒤 그 높이에 안주해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붕이 아니라 커다란 매미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과 목표, 존재론의 차이
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목표(目標)와 목적(目的)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대학 합격, 특정 직업, 특정 자격 — 이런 목표는 구체적이고 수단적이다. 목표에 매몰된 삶은 유대(有待)의 삶이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는 더 나아갈 곳을 잃는다.
반면 "이 세계의 폭력을 줄이겠다", "존재를 조금이라도 확장하겠다" 같은 목적은 존재론적이고 지향적이다. 목적을 가진 사람은 특정한 지위나 업적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한다. 정치가나 법조인이 '목적' 대신 '지위'라는 목표만을 가질 때, 사회는 정의를 세우지 못하고 진영과 진영의 다툼으로 흩어진다. 붕이 구만 리를 오르는 것은 구만 리라는 숫자를 목표로 삼아서가 아니다. 남쪽 바다, 천지(天池)라는 아득한 지향이 있었기에, 그 높이는 저절로 뒤따라온 것이다.
이름과 실재, 그 오래된 논쟁
이 모든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중국 철학사를 가로지르는 오래된 물음이 있다. 명(名, 이름·개념)과 실(實, 실재·실질)의 관계다. 철기가 보급되며 사회 구조가 흔들리고, 신분과 실질적 능력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이 명실(名實)의 관계를 다시 세울 필요가 생겼다.
공자는 정명(正名)을 답으로 내놓았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 개념을 분명히 하고, 실재를 그 개념에 맞추어 표준화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중앙집권적이고 근대적인 발전 방향과 맞닿아 있었다.
노자와 장자는 다른 길을 간다. 어떤 개념도 대상의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며, 언제나 일부만을 비출 뿐이라고 본다. 명(名)이라는 손님에 얽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뒤에 있는 실(實)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허유가 천하라는 이름을 손님의 자리로 돌려보냈던 것도, 이 오래된 논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
다시, 곤에서 대붕으로
익숙한 가치, 지나간 성공, 굳어버린 자아 —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무심코 기대어 서 있는 웅덩이다. 그 웅덩이의 물로는 지푸라기 하나쯤 띄울 수 있을지 몰라도, 삼천 리 파도를 일으키고 구만 리를 솟아오르는 존재를 띄울 수는 없다.
장자가 소요유의 첫 장에서 그려낸 것은 결국 하나의 물음이다. 당신은 매미와 비둘기처럼 눈앞의 나뭇가지를 세계의 전부라 여기며 머물 것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두께를 쌓아 마침내 붕이 되어 날아오를 것인가. 그리고 설령 구만 리를 올랐다 해도, 그 높이의 기억에 눌러앉지 않고 다시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자리로 자신을 비워낼 수 있는가.
건너간 자는 날아오른다. 그러나 날아오른 자가 다음으로 마주해야 할 일은, 그 날개마저,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장례 지내는 일이다. 다음 막은 거기서 시작된다.
관련 강의: 13강~14강 — 원 강의 재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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