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건너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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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막에서 장자는 개념을 버리고 이야기를 골랐다. 붕새를 그리고, 우물 안 개구리를 그리고, 진흙탕에 꼬리를 끄는 거북이를 그렸다. 그런데 왜 하필 이야기였을까. 개념은 정지해 있다. 한번 정의되면 그 자리에 머문다. 그런데 장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애초에 정지시킬 수 없는 말이었다. 머물지 마라. 너의 작은 세계를 전부라고 착각하지 마라. 그리고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야말로 네가 도(道)와 마주 앉을 자격을 얻는 순간이다.
이 말을 개념으로 설명하면 훈계가 된다. 이야기로 보여주면 장면이 된다. 그 장면의 무대가 추수(秋水)편이다. 강물의 신이 바다를 만나고, 시골 청년이 대도시로 걸음걸이를 배우러 간다. 두 이야기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그 자리를 건너갈 수 있는가.
강물의 신, 바다를 보다
가을 물때가 되면 온 세상의 냇물이 황하로 흘러든다. 물줄기가 어찌나 불어났는지, 강 이쪽 언덕에서 저쪽 모래톱을 건너다보면 서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도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秋水時至,百川灌河,涇流之大,兩涘渚崖之間不辯牛馬。 於是焉河伯欣然自喜,以天下之美為盡在己。
강물의 신 하백(河伯)은 그 광경 앞에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다 자기 안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눈으로 본 것 중에 이보다 큰 것은 없었으니까.
하백은 물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북해(北海)에 이르렀다. 무심코 동쪽을 바라보았는데, 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수평선 너머는 그저 물이었다.
順流而東行,至於北海,東面而視,不見水端。 於是焉河伯始旋其面目,望洋向若而歎曰: 「野語有之曰:『聞道百,以為莫己若』者,我之謂也。 且夫我嘗聞少仲尼之聞,而輕伯夷之義者,始吾弗信, 今我睹子之難窮也,吾非至於子之門,則殆矣, 吾長見笑於大方之家。」
하백은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아득한 물결을 우러러보며 북해의 신 약(若)을 향해 탄식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도(道)를 백 가지쯤 들으면 자기만 한 사람이 없는 줄 안다.' 제가 바로 그 꼴이었습니다. 예전에 공자의 견문을 하찮게 여기고 백이의 의로움을 가벼이 보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의 끝없음을 직접 보고 나서야 알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문 앞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저는 정말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큰 도를 아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뻔했지요."
이 장면을 가리키는 말이 훗날 성어가 되었다. 望洋之歎(망양지탄) — 바다를 우러러보며 탄식한다. 자신의 앎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큰 것 앞에서 비로소 깨닫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북해약의 반응이다. 그는 하백을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인정한다. 자기 부족함을, 자기 '추함'을 스스로 알아챈 것, 그것만으로도 이제 함께 도를 논할 자격이 생겼다고. 강물이 불어나 우쭐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바다를 보고도 계속 우쭐해하는 것이다. 하백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았고, 그래서 이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세 개의 감옥
북해약은 하백의 탄식을 받아 인간이 갇혀 사는 세 개의 감옥을 짚어준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줄 수 없다. 그가 사는 장소가 그를 가두기 때문이다. 여름 한철을 사는 벌레에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그가 살아본 시간이 그를 가두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선비에게는 도를 말해줄 수 없다. 그가 배운 것, 그의 신념이 그를 가두기 때문이다.
- 공간의 감옥 —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 시간의 감옥 — 여름 벌레는 자신이 살아본 계절이 사계절의 전부라고 믿는다.
- 관념의 감옥 — 한쪽 가르침에 갇힌 선비는 자신이 배운 것이 앎의 전부라고 믿는다.
세 감옥의 공통점은 하나다. 갇힌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이 좁다고 느끼지 않는다. 거기가 세상의 전부이니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다. 하백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처음 강물을 보고 기뻐했을 때,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것을 가장 크다고 여겼을 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바다를 보고도 자신의 강물을 여전히 전부라고 우긴다면, 그때부터는 감옥이 감옥인 줄 알면서 눌러앉는 것이 된다.
덕이라는 함량
여기서 장자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어떻게 하면 자기 감옥의 벽을 스스로 알아챌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강의의 답은 '덕(德)'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덕이라고 하면 흔히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뜻을 떠올린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덕은 그런 협소한 뜻이 아니다. 덕은 자기를 자기에게 발휘하는 내면의 힘이다.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을 읽어내는 눈이며, 자기가 가진 좁은 틀을 세상에 강요하지 않고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강의는 이 힘을 '함량'이라는 말로 다시 부른다. 그릇이 크면 담을 수 있는 것이 많다. 함량이 큰 사람은 부와 빈곤, 지위의 높고 낮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대답과 질문의 차이다.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이 통과하는 통로에 불과하다. 누가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온다. 그러나 질문은 다르다. 질문은 내 안의 궁금증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묻어난다. 함량이 큰 사람은 대답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함량의 차이가 갈라놓은 역사
강의는 이 함량의 차이를 역사의 승부로 확인시켜준다.
항우와 유방은 같은 시대, 같은 판을 두고 싸웠다. 항우는 귀족 가문에서 정통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배운 옛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유방은 항우만큼 배우지 못했지만, 새로운 시대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정확히 읽고 그 흐름을 받아들였다. 결국 판을 가져간 것은 더 많이 배운 쪽이 아니라 더 크게 받아들인 쪽이었다.
유비와 조조도 마찬가지다. 유비는 황건적을 그저 제거해야 할 도적 떼로만 보았다. 조조는 같은 대상을 시대가 보내는 신호로 읽었다. 그는 황건적을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다. 시대의 흐름을 코드로 읽어낼 줄 아는 능력, 그것이 곧 함량이었고, 그 함량의 차이가 역사의 승부를 갈랐다.
덕이란 결국 세상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며, 자기 한계를 스스로 돌파해서 나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의지다. 하백이 바다를 보고 자기를 돌아보았듯, 함량이 큰 사람은 늘 자기보다 큰 것 앞에 자신을 세운다.
향원, 덕을 훔치는 자
그렇다면 함량이 자라는 것을 가장 집요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강의는 뜻밖의 답을 내놓는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동네에서 존경받는 '좋은 사람'이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향원(鄕原)이라 불렀다.
향원은 일정한 범위, 이를테면 자기 동네 안에서 통용되는 공통의 신념과 상식을 충실히 따르며 사는 사람이다. 남들과 부드럽게 어울리고, 모나지 않고,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공자는 이런 사람을 '덕의 도적(德之賊)'이라고 잘라 말했다.
子曰:「鄕原,德之賊也。」(論語·陽貨)
왜 도적인가. 향원은 자기가 몸담은 좁은 범위의 신념을 세상 전체의 기준인 양 착각하고 산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갇힌 그 틀 안에 주변 사람들까지 붙잡아 둔다. 우물 안 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들에게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르치는 셈이다. 맹자는 진심하(盡心下)편에서 향원의 얼굴을 더 구체적으로 그린다.
非之無擧也,刺之無刺也,同乎流俗,合乎汚世, 居之似忠信,行之似廉潔,衆皆悅之,自以爲是, 而不可與入堯舜之道,故曰德之賊也。(孟子·盡心下)
비난하려 해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고, 풍자하려 해도 걸리는 게 없다. 세속의 흐름에 맞춰 살고, 더러운 세상과도 그럭저럭 어울려 지낸다. 겉으로 보면 진실하고 신의 있어 보이고, 행실은 청렴한 듯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과는 함께 요순의 큰 도(道)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덕의 도적이라 한 것이다.
향원의 문제는 악행이 아니라 정지다. 그는 자기 반성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산다. 세계는 끊임없이 흐르는 '유동적 전체성'을 띠고 있는데, 그의 지식과 신념은 한 시점에 고정된 채 굳어 있다. 탄성 있는 지성은 다르다. 그것은 수시로 제기되는 자신의 한계를 직시한다. 끊임없는 반성만이 덕을, 함량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량을 키우는 세 가지 길
그렇다면 함량은 저절로 크지 않는다. 만들어야 한다. 강의는 구체적인 세 가지 실천을 제시한다.
원대한 포부 — 자잘한 삶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완성되겠다는 큰 뜻을 품는 것. 포부가 크면 눈앞의 사소한 지적이나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여유가 생긴다.
좋은 습관과 루틴 — 자신만의 수양의 규율을 정하고, 스스로 정한 그 약속을 평생 지켜나가는 것. 방만해지려는 마음을 붙잡아주는 가장 실질적인 장치다.
강렬한 지식욕 — 부단히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갈증. 특히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는 주관적 신념을 약화시키고 객관적 사실에 눈을 뜨게 하는 과학적 인식이 필수적이다.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한 방향을 가리킨다. 포부는 방향을, 루틴은 지속을, 지식욕은 확장을 맡는다. 이 셋이 함께 돌아갈 때 함량은 조금씩 자란다.
도덕경 49장, 덕의 실천
이 함량이 실제로 사람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강의는 노자의 《도덕경》 49장을 빌려 보여준다.
聖人無常心,以百姓心為心。 善者吾善之,不善者吾亦善之,德善。 信者吾信之,不信者吾亦信之,德信。(道德經 49章)
성인은 고정된 마음을 갖지 않는다.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선한 자에게도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자에게도 똑같이 선하게 대한다. 그것이 참된 선함(德善)이다. 미더운 자도 믿고, 미덥지 않은 자도 똑같이 믿는다. 그것이 참된 믿음(德信)이다.
이 구절이 흥미로운 지점은, 상대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선하지 않은 자에게 선하게 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의 덕이 선해지고 신실해지기 때문이다. 덕은 상대를 향한 조건부 반응이 아니라, 나를 향한 일관된 발휘다.
함량이 큰 사람은 부유하다고 남을 함부로 부리지 않고, 가난하다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도 이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체념이 아니다. 가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도를 즐길 수 있는, 고도로 훈련된 인간의 능력이다.
우주에는 절대적인 크기가 없다
하백은 바다를 보고 자신의 강물이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북해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다 역시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크고 털끝이 작다고 정하는 것은 우주의 진실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일 뿐이다. 아무리 큰 것보다 더 큰 것이 있고, 아무리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것이 있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흐르며, 빠르다·느리다·짧다·길다는 판단은 전부 인간이 자기 경험에 맞춰 정한 잣대에 불과하다. 백 년을 산 사람에게도 인생은 짧게 느껴질 수도,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우주의 진실이 아니라 개별적 경험의 결과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한 기준으로 남을 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비정상적이거나 나쁘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우주의 진실은 수치나 속도 같은 '사실'에 가깝다. 도를 얻은 자는 시선을 극단으로 높여 자신의 주관적 믿음에서 스스로 거리를 둔 채 사태를 사실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사람은 작은 것을 얕보지 않고 큰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과거에 안주하지도, 현재에 허둥대지도 않는다. 얻었다고 기뻐 날뛰지 않고 잃었다고 마냥 울적해하지도 않는다. 이 태도를 노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불렀다. 자기 빛을 세상의 빛과 조화시켜 속세와 섞이되, 그 빛이 남의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진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일수록 말을 아끼고 세상을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흉내로 얻어지지 않는다. 발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고단한 수련과, 위대해지고자 했던 포부가 차곡차곡 쌓여야만 도달하는 선물 같은 경지다.
스스로 그러함 — 자화와 무방
우주가 이렇게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면, 그 안에서 만물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가. 북해약은 우주가 고정된 하나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以道觀之,何貴何賤,是謂反衍;無拘而志,與道大蹇。 何少何多,是謂謝施;無一而行,與道參差。 ……兼懷萬物,其孰承翼?是謂無方。 ……物之生也,若驟若馳,無動而不變,無時而不移。 何為乎,何不為乎?夫固將自化。(莊子·秋水)
도의 눈으로 보면 귀하고 천한 것이 반대쪽으로 계속 이어지니 이를 반연(反衍)이라 한다. 많고 적은 것이 기울어져 서로 자리를 바꾸니 이를 사시(謝施)라 한다. 만물을 두루 품에 안는데 그 무엇에 기대어 있겠는가. 이를 무방(無方)이라 한다. 특정한 방향이나 모서리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만물이 생겨나는 것은 달리듯 빠르니,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시시각각 옮겨가지 않는 때가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하겠으며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 만물은 본디 스스로 그렇게 변화해 갈 뿐이다.
이 마지막 구절, "夫固將自化" — 만물은 본디 스스로 변화한다 — 가 자화(自化)라는 개념이다. 우주는 누가 이끌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변한다.
이 원리는 인간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를 생각해보자. 부모가 자식을 자기 뜻대로 빚으려 할수록 자식은 자기 걸음을 잃는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안전과 사랑을 제공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 그리고 자식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관리가 촘촘해질수록 개인의 활동성은 오그라든다. 공정성과 자유를 허락해서 국민이 스스로 움직이게 할 때 나라는 오히려 부강해진다. 도덕주의적 통제가 강해질수록 삶은 좁은 통로를 억지로 지나는 것처럼 답답해진다.
무엇이 되고자 애쓰는 종속성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있을 때 진정한 위대함이 드러난다. 대관령은 대관령일 때 위대하다. 다른 무엇을 흉내 내려 할 때가 아니라.
도를 알아야 하는 이유
하백은 여기서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도(道)를 아는 것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북해약은 실질적인 효용 세 가지로 답한다.
知道者必達於理,達於理者必明於權,明於權者不以物害己。(莊子·秋水)
도를 아는 자는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고, 이치에 통달한 자는 반드시 임기응변에 밝으며, 임기응변에 밝은 자는 외물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
달어리(達於理) — 인간의 편견을 벗어나 사물 본연의 질서와 원리에 통달한다.
명어권(明於權) — 사태를 저울질할 줄 아는 안목을 갖는다. 잔머리가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가장 적절히 반응하는 임기응변의 능력이다.
불이물해(不以物害) — 외부의 사물이나 상황에 휘둘려 자신이 다치지 않는다.
도를 안다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효율적으로 살아남으며 조화를 이루는 실천적 지혜다.
건너간다는 것
여기까지 오면 이 막의 제목이 왜 '건너가기'인지가 분명해진다. 지혜란 무엇인가. 모차르트는 음악의 소리가 음표 그 자체가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에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고정된 음이 아니라 그 사이를 흐르는 유동적인 움직임이다.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말, 바라밀다(波羅蜜多)는 '건너간다'는 뜻이다. 지혜란 어떤 관념이나 신념, 감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건너가는 행위 그 자체다. 그리고 이렇게 건너갈 수 있는 준비된 상태, 그 내면의 유동적인 힘을 장자는 덕(德) 혹은 업(業)이라 불렀다. 자기를 표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덕과 함량, 그리고 지혜는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자리를 딛고 건너가는 힘.
앎은 몸부림이다
그렇다면 진짜 앎이란 무엇인가. 강의는 단호하게 말한다. 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아는 것을 딛고 모르는 세계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 그 몸부림 자체가 앎이다.
이 구분은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벼운 교육은 지식의 전달에 매달린다. 깊은 교육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고취한다. 지식을 강요하면 오히려 지적 호기심이 죽어버리는,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소탐대실의 함정에 빠진다. 아무리 방대한 지식을 쌓았어도 그 지식을 얻은 '다음'을 말하지 못한다면 소인(小人)에 불과하다. 지혜로운 자는 늘 지금의 앎 너머를 지향한다.
소승적 승리의 함정
인간은 곧잘 남과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세계를 넓히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구분 |
소승적 승리 |
대승적 승리 |
판단 기준 |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 통상적 기준 |
인간으로서의 위대함, 자기 내면의 기준 |
특징 |
다리 개수, 속도 같은 외부 조건에 집착 |
비교를 멈추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 |
비유 |
우물 안 개구리, 지네와 뱀의 다리 자랑 |
성인의 경지 |
깨어진 벽돌 끝에 앉아 쉬고 진흙 속에서 노는 우물 안 개구리의 작은 즐거움. 거기에 매몰되면 바다라는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풍요도 비슷한 함정을 품고 있다. 자기 확장 없이 일상의 소비적 즐거움에만 머무는 개인주의는, 겉모습만 다를 뿐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경험은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다음의 맥락 — 나는 이 경험으로 무엇에 공헌할 것인가 — 으로 이어져야 한다.
종속적 주체에서 능동적 주체로
미셸 푸코는 인간이 흔히 외부의 가치를 자기 것이라 착각한 채로 산다고 했다. 보편적 가치, 사회적 이념, 전통적 관념을 스스로 세운 기준이라 믿고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상태, 이것이 종속적 주체다. 유행을 좇는 미적 판단, 지역색에 갇힌 정치적 견해가 그 흔한 예다.
능동적 주체는 다르다.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정의하고, 스스로 행위의 기준을 만드는 자다. 남의 시선이나 이념을 살피는 대신 자기 내면을 살피고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것, 이 '자기 배려'를 통해서만 인간은 진정한 성취에 이른다.
한단의 걸음걸이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한 것이 한단지보(邯鄲之步)다. 북해약은 하백에게 묻는다. 연(燕)나라 수릉(壽陵)의 한 청년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且子獨不聞夫壽陵餘子之學行於邯鄲與? 未得國能,又失其故行矣,直匍匐而歸耳。(莊子·秋水)
수릉은 변방의 시골이었고, 한단(邯鄲)은 조(趙)나라의 수도, 당대 최고의 번화한 도시였다. 소문에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유난히 우아하다는 말이 돌았다. 수릉의 한 청년이 그 걸음걸이를 배우겠다며 먼 길을 떠나 한단으로 갔다.
청년은 거리에 서서 한단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발을 내딛는 각도, 팔을 흔드는 폭, 어깨의 흔들림까지. 그런데 아무리 흉내를 내도 몸에 붙지 않았다.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결국 배우지 못했다. 그 사이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새 걸음걸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기가 원래 걷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두 발로 걷지 못한 채,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의 걸음을 좇다가 자기 걸음마저 잃어버린 사람. 이 짧은 이야기가 향원의 초상과, 종속적 주체의 초상과 정확히 겹친다.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노력은 때로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자기 춤을 추라
강의는 여기서 마지막 매듭을 짓는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은 질문의 결과이지, 대답의 결과가 아니다. 좋은 춤을 배우려 하지 말고 자신의 춤을 추라는 것이다. 남의 춤을 흉내 내려 하면 스텝이 꼬일 뿐이다. 진짜로 위대해지고 싶다면, 남이 좋아하는 춤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춤을 추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가와 함께 춤을 춰준다.
하백이 바다를 보고 우쭐함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자기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강물의 크기를 정확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수릉의 청년이 한단으로 떠났을 때, 그는 자기 걸음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남의 걸음이 자기 걸음보다 낫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둘의 차이는 결국 하나로 좁혀진다. 함량이 큰 사람은 남의 큰 것을 보고 자기를 더 넓히지만, 함량이 없는 사람은 남의 큰 것을 보고 자기를 지워버린다.
앎이란 소유가 아니라 건너감이고, 덕이란 타고나는 본질이 아니라 쌓여서 만들어지는 함량이다. 그리고 그 함량을 키우는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한다. 향원처럼 동네의 인정에 안주하지 않고, 한단으로 걸음을 배우러 간 청년처럼 남의 스텝을 훔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강물은 바다로 건너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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