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장자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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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에서 우리는 장자를 기(氣)의 철학자로 만났다. 노자가 유무상생과 거피취차로 세상을 평면 위에 펼쳐놓았다면, 장자는 그 평면에 숨결을 불어넣어 입체로 세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장자》라는 책을 펼치면 낯선 풍경이 기다린다. 원리를 증명하는 정연한 논증도, 명제를 순서대로 쌓아올린 체계도 없다. 대신 소가 나오고 거북이가 나온다. 물고기가 새가 되고, 나비가 사람이 되어 꿈에서 깨어난다. 장자는 왜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이야기로 말했는가. 이 물음이 4막의 문을 연다.
곽상의 서른세 편, 그리고 유실된 나머지
지금 우리 손에 들린 《장자》는 위진남북조 시대 곽상이 정리한 33편본이다. 내편 7편은 장자 본인의 저작으로 인정받고, 외편 15편과 잡편 11편은 후학들의 손을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자의 글이 십만 자에 이른다고 적었지만, 지금 전해지는 것은 6만 5천 자 남짓이다. 3만 5천 자가 시간의 강물에 씻겨 나갔다.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장자를 이렇게 평했다.
其學無所不闚,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 故其著書十餘萬言,大抵率寓言也。 (그 배움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요점은 노자의 말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책 십여만 글자는 대체로 우언(寓言)을 따른다.)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무소불규(無所不闚) —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학문. 춘추전국의 혼란 속에서 천자의 학문이 들판으로 흩어져 나가면서 수많은 제자백가가 태어났다. 대부분은 통치술을 논하는 정치철학에 머물렀다. 장자만이 그 너머, 미학의 높이까지 올라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정확히 짚어냈다 — 그의 글은 대체로 우언을 따른다고.
질문하는 사람만이 참된 사람이다
장자 철학의 출발점은 하나의 단순한 구별에서 시작한다. 대답과 질문의 차이.
대답은 기능이다.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실어 나르는 통로일 뿐, 거기에 '나'는 없다. 인격적 성숙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반면 질문은 다르다. 질문이 터져 나오는 순간은 내 안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새로운 제도, 새로운 생각, 새로운 물건 — 문명을 이끌어온 모든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에서 나왔다. 참된 사람이 먼저 있어야 참된 지식이 나온다. 장자에게 그 순서는 결코 뒤바뀔 수 없었다.
이 사람 — 질문하는 사람, 참된 사람 — 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막에서 가장 오래 곱씹어야 할 두 장면이다.
재상의 자리, 소의 운명
초나라 위왕이 사신을 보낸다. 장자를 재상으로 모시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그 시대 재상은 한 나라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자리였다. 누구든 탐낼 만한 부귀와 명예가 거기 있었다.
장자는 사신 앞에서 거절도 승낙도 아닌, 하나의 그림을 보여준다.
子見夫犧牛乎?衣以文繡,食以芻菽, 及其牽而入於大廟,雖欲爲孤犢,其可得乎! (그대는 저 제사에 바쳐질 소를 보았는가? 비단옷을 입히고 좋은 꼴과 콩을 먹이지만, 끌려서 태묘에 들어갈 때가 되면 비록 외로운 송아지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있겠는가!)
(《장자》 잡편 열어구列御寇)
장면을 그려보자. 외양간에 소 한 마리가 있다. 몇 해 동안 사람들은 이 소를 정성껏 돌본다. 가장 좋은 꼴을 먹이고, 가장 좋은 콩을 먹인다. 살은 오르고 털에는 윤기가 흐른다. 마침내 등에 수를 놓은 비단을 걸쳐준다. 이웃한 소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만큼 화려한 대우다. 그러나 그 모든 정성은 단 하루를 향해 있다. 태묘의 문이 열리고, 소는 끌려 들어간다. 칼이 기다리고 있다. 비단옷을 입은 그 순간부터 이 소의 목숨은 이미 정해진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되돌리고 싶어도, 차라리 어미 곁의 볼품없는 송아지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장자에게 관직이란 이 비단옷이었다. 화려할수록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옷. 권력이 주는 대우가 후할수록, 그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서 더 멀리 밀려난다. 재상의 자리는 소에게 채워진 비단과 같다 — 명예로워 보이지만, 그 명예는 이미 타인의 목적을 위해 사육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강가의 낚시, 진흙탕의 거북이
또 하나의 장면. 이번에는 초나라 왕이 대부 두 사람을 직접 보낸다. 장자는 복수(濮水)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대부들이 다가와 정중히 청한다. 나라의 정사를 그대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此龜者,寧其死爲留骨而貴乎?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二大夫曰:「寧生而曳尾塗中。」 莊子曰:「往矣!吾將曳尾於塗中。」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대접받기를 바랐겠는가,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랐겠는가? 두 대부가 답했다.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소.")
(《장자》 외편 추수秋水)
장자는 묻는다. 초나라에는 신령스러운 거북이 있다고 들었소. 죽은 지 이미 삼천 년, 왕은 그 거북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담아 종묘 위에 소중히 모셔두었다지요. 그 거북에게 묻고 싶소. 죽어서 뼈를 남기고 귀히 대접받기를 바랐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랐겠소?
대부들은 대답한다. 그야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끄는 편을 바랐겠지요.
장자가 말한다.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소.
여기 두 마리 거북이 있다. 한 마리는 죽어서 신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인다. 비단에 싸이고 옻칠한 상자에 담겨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다. 삼천 년이 지나도 그 존귀함은 바래지 않는다. 다른 한 마리는 살아 있다. 더러운 진흙탕에서 배를 끌며 기어 다니고, 꼬리에는 흙이 엉겨 붙어 있다. 누구도 그 거북에게 절하지 않는다.
장자는 후자를 택한다. 신전의 거북은 존귀하지만 죽어 있다. 진흙탕의 거북은 더럽지만 살아 있다. 살아서 자기 발로 걷고, 자기 뜻으로 방향을 트는 것 — 그것이 존귀함보다 앞선다.
치질을 핥고 얻은 수레
장자의 이러한 태도를 곁에서 비웃은 사람도 있었다. 조상(曹商)이라는 인물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수백 대의 수레를 얻어 돌아왔다. 그는 다 떨어진 신을 신고 사는 장자를 조롱한다. 장자는 되묻는다. 듣자 하니 진나라 왕은 병이 나면 종기를 터뜨리고 고름을 빨아주는 자에게 수레 한 대를 내리고, 치질을 핥아주는 자에게는 다섯 대를 내린다더군. 치료하는 부위가 더러울수록 수레는 늘어난다지. 그대는 대체 무엇을 핥았기에 그토록 많은 수레를 얻었소?
부귀의 크기는 종종 굴욕의 크기에 비례한다. 장자는 그 비례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
찰기시 —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
이 모든 거절과 조롱의 뿌리에는 장자 특유의 관찰법이 있다. 그는 이것을 찰기시(察其始)라 불렀다 — 사물의 시작을, 근원을 자세히 살핀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을 판단한다. 이미 주어진 인식의 틀에 사물을 끼워 넣고 좋다 나쁘다, 귀하다 천하다를 가른다. 그러나 관찰은 다르다. 관찰은 시선을 대상에 직접 갖다 대고 거기 머무르게 하는 집요함을 요구한다. 쪼개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훈련이 없으면 사람은 감성과 도덕이 미리 정해준 판단에 안주하게 된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곡을 하는 대신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내가 태어나기 전의 시작을 자세히 살펴보니, 본디 삶도 없었고 형체도 없었고 심지어 기(氣)조차 없었다. 무언가 흐릿한 것 사이에서 변화가 일어나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다. 이제 다시 변하여 죽음으로 돌아간 것 — 이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순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내는 지금 우주라는 거대한 방 안에 편안히 누워 있다. 그 곁에서 큰 소리로 곡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이치에 통하지 못한 것이다.
찰기시는 관습적 슬픔을 거부하는 냉정함이 아니다. 근원까지 파고들어 얻어낸, 자기만의 해석권이다. 누구도 대신 살펴줄 수 없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살핀 사람만이 쥘 수 있는 권리다.
예술의 조건, 자쾌自快
장자는 정치의 높이를 넘어 예술의 높이까지 삶을 밀어 올린다. 예술의 첫째 조건은 의외성이다. 이미 정해진 집단적 관념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결코 뜻밖의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직 그 틀 바깥에 홀로 선 사람만이 자신만의 고유함을 발휘할 수 있다.
진흙탕에서 꼬리를 끄는 거북이의 삶 — 장자는 이것을 자쾌(自快), 스스로 즐거운 상태라 불렀다. 남들이 정해놓은 '바람직함'이나 '마땅히 해야 함'을 좇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진짜로 바라는 것,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에 붙어 있는 삶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있다. '우리'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람은 결코 그 울타리 바깥으로 손을 뻗을 수 없다. 반면 단독자로 우뚝 선 사람 — 무리에 기대지 않고 자기 발로 선 사람만이 오히려 누구와도 열려서 만날 수 있다. 장자가 부귀와 명예를 거절한 것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과 진짜로 만나기 위한 조건이었다.
개, 槪 — 됫박을 깎는 막대
이제 질문을 한 단계 밀어붙일 차례다. 장자는 왜 이 모든 통찰을 논증이 아니라 이야기로 풀어냈는가.
앞서 확인했듯 사마천은 장자의 십만 자에 이르는 글이 대체로 우언(寓言)을 따른다고 짚어냈다. 플라톤이나 조선의 퇴계, 율곡처럼 개념을 치밀하게 쌓아 올려 체계를 세우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글쓰기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개념'이라는 말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개념(槪念)의 '개(槪)'라는 한자는 원래 됫박에 쌀을 담을 때 고봉으로 수북이 솟은 부분을 밀어서 깎아내는 막대를 가리킨다. 됫박 위로 삐죽 솟아오른, 남는 것, 여분의 것, 그 됫박만의 고유한 굴곡을 밀대로 밀어 평평하게 만드는 것 — 그것이 개념이 태어나는 방식이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깎아 없애고, 공통의 틀 안에 들어가는 부분만 남겨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다.
그래서 일반명사와 고유명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이 있다. '산'이라는 말은 누구의 머릿속에도 있지만, 실제 세계 어디에도 '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무등산, 지리산, 저기 창밖에 보이는 저 산뿐이다. '꽃'은 없고 눈앞의 저 꽃만 있다. '아버지'는 없고 김철수 씨만 있다. 개념으로 무등산을 보는 순간, 우리는 무등산의 고유한 존재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의 틀로 무등산을 제압하고 소유하려 든다.
사랑조차 예외가 아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합의하는 순간, 각자 머릿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개념의 구조는 서로 다르다.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개념을 진리라 믿는 순간, 사랑은 곧 권력 투쟁으로, 폭력으로 변질된다. 진리라고 믿는 순간 인간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 이것이 개념이 가진 근본적인 속성이다.
논증에서 춤까지, 진실에 다가서는 계단
인간은 생존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결국 진실에 접촉해야 한다. 그런데 표현의 양식에는 위계가 있다.
논증과 논변은 개념을 치밀하게 쌓아 자기 주장을 방어하는 태도다. 성벽처럼 빈틈없이 쌓아야 하고, 그래서 배타적이다. 이야기는 다르다. 개념의 한계를 뚫고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통로다. 시(詩)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념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뒤집는다. 시인은 개념에 갇히는 대신 개념을 다룬다. 음악과 춤은 아예 문자를 벗어나 몸과 소리로 곧장 진실에 닿는다. 논증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시로, 시에서 음악과 춤으로 올라갈수록 인간이 서 있는 자리는 높아진다.
장자는 이 계단의 두 번째 칸, 이야기를 선택했다.
구멍 뚫린 이야기가 사람을 부른다
논문은 구멍이 있으면 안 된다. 빈틈이 있으면 그 틈으로 반박이 들어오기 때문에, 논문은 성벽을 쌓듯 촘촘하게 방어선을 두른다. 독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읽는 사람은 그저 저자가 세운 결론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뿐이다.
이야기는 정반대다. 논리가 성글고, 때로는 횡설수설하며, 곳곳에 구멍이 듬성듬성 뚫려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허술함, 이 여백이 독자를 초대한다. 빈틈을 만나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기 나름의 상상으로 빈자리를 채운다. 이야기가 완결되는 곳은 지면 위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감동(感動)을 준다. 감(感)이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동(動)이란 그 움직임이 몸으로까지 번지는 것이다. 논증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만, 이야기는 사람 전체를 움직인다. 도덕을 조목조목 설명한 논문보다 피노키오 이야기 한 편이 아이의 행동을 바꾸는 데 훨씬 효과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사람을 붙잡는다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가 지닌 은밀한 무기가 있다. 완결이다. 정확히는, 완결의 거부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니크(Bluma Zeigarnik)는 식당에서 종업원을 관찰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종업원들은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은 복잡한 주문 내역은 정확히 기억하면서도, 계산이 끝나 마무리된 주문은 금세 잊어버렸다. 이후 실험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사람들에게 십여 개에서 스무 개 남짓한 과제를 주고 절반은 끝까지 하게 하고 절반은 중간에 끊었더니, 참가자들은 완결된 과제보다 중단된, 미완결의 과제를 두 배 가까이 더 잘 기억했다. 이것이 자이가르니크 효과다 — 끝나지 않은 일은 마음속에 긴장을 남기고, 그 긴장이 풀리지 않는 한 기억은 계속 그 자리에 붙들려 있다.
좋은 이야기는 완결을 향해 서두르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남긴 것은 명쾌한 결론이 아니라 여운이다. 노인은 청새치를 잡았는가, 잃었는가, 이겼는가, 졌는가 — 마지막 장을 덮고도 질문은 남는다. 이 미완결이야말로 독자를 이야기 밖으로 놓아주지 않는 힘이다. 궁금증과 집착이 독자를 진실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자기를 지키며 세계에 닿는 법
논증에 빠지면 결국 남는 것은 개념뿐이고, 그 개념을 쥐고 말하는 '나'는 사라진다. 반면 이야기에는 화자의 열망과 욕망이 그대로 살아 있다. 장자가 책 전체를 이야기로 채운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세계의 진실에 닿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는 감동을 교환할 수 있다. 논문은 단절과 폭력성을 포기할 수 없지만, 이야기는 함께 만나서 길을 가는 일이다." 장자는 개념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앞에 구멍이 숭숭 뚫린 이야기를 던진다. 그 구멍으로 들어가 스스로 채워 넣는 사람만이, 삶의 진실을 자기 것으로 얻는다.
우언, 중언, 치언 — 장자가 말하는 세 가지 방식
장자 자신도 이 원리를 스스로 밝혀놓았다. 《장자》 잡편 우언(寓言) 첫머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寓言十九,重言十七,卮言日出,和以天倪。 (우언이 열에 아홉이요, 중언이 열에 일곱이며, 치언은 날마다 새롭게 나와 자연의 결에 어우러진다.)
(《장자》 잡편 우언寓言)
우언(寓言)은 다른 사물이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자기 뜻을 비스듬히 전하는 말이다. 소를 빌리고 거북을 빌리고 나비를 빌린다.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말보다, 비스듬히 돌아오는 말이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진실에 더 가깝다. 장자의 글 열에 아홉이 이 방식이다.
중언(重言)은 노인이나 공자처럼 이미 권위가 세워진 옛사람의 입을 빌려 신뢰를 얻는 말이다. '거듭됨'과 '무거움'이라는 두 가지 뜻이 이 한 글자 안에 겹쳐 있다. 우언 가운데 열에 일곱이 이런 식으로 권위를 빌린다.
치언(卮言)은 셋 중 가장 낯선 말이다. 치(卮)는 술잔인데, 술이 차면 기울고 비면 다시 선다. 담기는 술의 양과 자리에 따라 스스로 모양을 바꾸는 잔이다. 치언은 정해놓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과 사태에 맞추어 날마다 새롭게 솟아나는 말이다. 세 가지 말 가운데 이것이 우주의 본디 결, 천예(天倪)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
셋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그림이 보인다. 정해진 말을 거부하고, 대신 빌리고 빌리고 또 매 순간 새로 짓는 것 — 이것이 장자가 언어를 다루는 방식 전체였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앎은 거기서 멈추면 죽은 나무와 같다. 메디치 가문의 흥망을 안다고 해서, 허백련 선생의 화풍을 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진짜 질문은 그다음에 온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뉴턴이 남긴 것은 만유인력이라는 결과물만이 아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던졌던 궁금증, 그 내면의 활동성이야말로 배워야 할 것이다. 결과를 외우는 사람은 남의 앎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남지만, 궁금증을 되살리는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정도를 살피는 지성
정해진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쓰는 것은 세계의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리는 장벽이 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같은 '주의'는 반성 없이 사용되는 순간 자기 진영을 확인하는 깃발로 전락하고, 세계의 변화에 응답하는 능력은 오히려 떨어진다. 정해진 틀로 세상을 가르면 찬성과 반대, 이쪽과 저쪽의 극단적 대립만 남고 사태의 진실은 그 틈으로 빠져나간다.
비스마르크가 65세를 노인의 기준으로 정한 것은 130여 년 전 독일의 특수한 재정과 정치 상황 속에서 나온, 그 시대에 맞는 '적절한 정도'였다. 오늘날 그 숫자를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과 어긋난 것이다. 지성의 탁월함은 정해진 개념을 성실히 집행하는 데 있지 않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적절한 정도인지를 그때그때 살펴 잡아내는 데 있다.
시민, 자본가, 그리고 책임
나이만 앞세우는 사람은 진부한 사람이 될 뿐이다. 질서를 지키고, 책을 읽고, 신용을 쌓고,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젊은이보다 나은 모범을 실제로 보여줄 때에야 비로소 어른의 권위가 생긴다.
민주주의의 핵심도 마찬가지다. 자유나 권리보다 앞서는 것은 역사적 책임성이다. 한때 왕 한 사람이 짊어졌던 그 책임을 이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누어 짊어진다. 돈은 역사적 책임 없이 그저 쌓인 재화이고, 그것을 많이 가진 사람은 부자일 뿐이다. 반면 자본은 역사적 책임을 함께 짊어진 재화이며,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자본가다. 이 자본가들의 성숙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다.
결론 대신, 다음 걸음
정해진 말과 개념의 노예가 되어 남이 만든 이론을 그대로 집행하며 사는 삶은 결국 적과 아군을 가르는 싸움으로 끝난다. 장자의 언어 철학이 겨냥한 것은 바로 이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다. 감각과 본능에 머무는 대신, 정해진 개념을 넘어 자기만의 언어로 세계의 진실에 직접 접촉할 때, 그때 비로소 삶과 공동체는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사상의 소는 비단옷을 입고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진흙탕의 거북이는 더러웠지만 살아서 자기 발로 걸었다. 장자가 논증 대신 이야기를 택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개념은 죽어서 신전에 모셔지는 거북과 같다. 구멍이 숭숭 뚫린 이야기는 진흙탕에서 꼬리를 끄는 거북처럼, 살아서 계속 움직인다.
다음 막에서는 이 살아 있는 언어를 딛고, 장자가 '건너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 앎과 덕, 그리고 그릇의 크기에 대해 물을 것이다.
관련 강의: 7강~9강 — 원 강의 재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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