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두 갈래 길

신이 물러난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하늘이 명령을 거두어들이자, 그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았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인간의 마음을 놓으려 했고, 누군가는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를 놓으려 했다. 이 시대에, 유독 예민한 두 사람이 나타난다.

보통 사람은 글공부를 하더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서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르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기보다,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먼저 알아채고 그것을 고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 그런 사람이 셋 있었다. 노자, 공자, 묵자. 그 중에서도 노자와 공자, 이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 뒤에 올 장자라는 인물이 비로소 또렷해진다.


흔히 하는 말은, 대개 틀린 말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공자를 앞에, 노자를 뒤에 쓴다. 하지만 사실을 따지면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노자가 공자보다 스무 살가량 많다. 사상의 뿌리도 노자 쪽이 더 오래되었다. 노자는 하나라의 문명을 이어받고 있고, 공자는 그보다 늦은 은나라 문명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니 나이로도, 계통으로도 노자가 먼저다. 다만 여기서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공자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먼저 치워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이 공자와 노자를 이야기할 때 으레 꺼내는 대비들, 사실은 전부 틀린 말이다.

한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이 틀린 대비를 곧잘 반복한다. 그런데 실상은 이렇다. 공자와 노자는 둘 다, 신이 정해준 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길을 가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하늘의 명령을 넘어서서 스스로 도(道)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차이는 그 다음에 온다. 공자는 인간의 길을 만들되, 인간의 내면성 — 인간의 본성 — 에서부터 출발해서 만들려 했다. 노자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먼저 보고, 그 운행의 원리를 본떠서 인간의 길을 만들려 했다. 그러니 두 사람 다 교육을 강조한 사람이고, 두 사람 다 문명을 세우려 한 사람이고, 두 사람 다 현실에 깊숙이 개입한 사람이다. 다만 어떤 교육을, 어떤 문명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려 했는가가 갈릴 뿐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

공자는 도를 세우려 했는데, 그 뿌리를 인간의 내면성, 본성, 본질에 두었다. 논어라는 두꺼운 책에서 딱 한 문장의 에센스만 남긴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런 문장이 남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

비교를 위해 다른 책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팔만대장경, 즉 불교의 핵심을 한 줄로 압축하면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니 이것도 사라진다'는 연기(緣起)의 문장이 나온다. 그런데 공자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신에게, 하늘에게 있다.' 그 시절 상식을 생각하면,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공자의 주장은 무척 급진적이고 과격한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仁(인)이다. 그런데 이 글자, 우리가 흔히 알듯 '어질다'는 뜻이 아니다. 이 글자는 우리가 만든 글자가 아니라 수입해다 쓰는 글자이기 때문에, 정작 우리는 이 글자를 제대로 철학하지 못한 채 쓰고 있다.

비슷한 예로 善(선)이라는 글자도 그렇다. '착하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경에 上善若水(상선약수)라는 말이 나온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일까. 아니다.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축구 선수가 훌륭한 플레이를 펼치면 그 플레이도 善하다고 한다. 고기가 아주 맛있어도 善하다고 한다. 훌륭하다, 탁월하다는 뜻이 착하다는 뜻보다 먼저다.

그러면 仁은 무슨 뜻인가. '씨앗'이라는 뜻이다. 살구 씨앗을 행인(杏仁)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仁이란 인간의 씨앗,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고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씨앗이 인간 안에 원래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 씨앗은 신이 준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원래 있던 것인가. 공자의 답은 후자다. 인간에게 원래 있다.

仁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본질'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본질이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하는 성질이다. 이 개념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특성이 따라붙는다.

인간에게만 있고, 다른 어떤 동물에게는 조금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성질이다. 공자의 관점에서는 이 성질을 키워야 한다. 논어의 모든 내용은 결국 어떻게 하면 仁을 보존하고 확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물어보자. 공자는 나라와 나라 사이, 음악과 음악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구분을 하자고 할까, 하지 말자고 할까. 답은 정해져 있다. 긍정할 수밖에 없다. 본질이라는 개념을 한번 받아들이면, 배타성과 동일성이 자동으로 따라오고, 구분은 필연이 된다. 그래서 유학의 시스템 안에서는 촌수를 구분하고,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따진다. 왜인가. 공자 사상의 모든 것이 仁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仁은 도덕적 자각 능력과 맞닿아 있다.

같은 논리로 물어보자. 공자는 모든 음악이 다 좋다고 할까, 들을 만한 음악과 아닌 음악을 가른다고 할까. 구분을 당연하게 여겼으니 후자다. 이단은 부정할까 수용할까. 배척한다. 왜냐하면 공자의 사유 구조 자체가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분명히 하는 것, 개념을 정확히 하는 것에는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긍정적이다. 언어 활동, 개념 활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이 모든 답이 논어 안에 들어 있다.


친친인야(親親仁也) — 씨앗이 자라는 자리

그러면 이 仁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가장 仁답게 드러나는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다. 공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유대감에서 출발한다.

맹자는 이것을 親親仁也(친친인야)라는 넉 자로 정리했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더 가깝게 여기는 그 마음, 그것이 仁에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혈연적 유대감을 기본으로 한 원초적인 정서를 지키는 것, 그것이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길이라고 공자는 보았다. 그러니 먼 촌수를 대하는 것과 가까운 촌수를 대하는 것은 마땅히 달라야 한다. 그래야 仁을 키워가는 것이 된다.

그 仁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키워가야 하는 대상이다. 가장 높은 단계까지 키워진 상태, 그것을 禮(예)라고 부른다. 禮란 仁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확대되어 도달하는 가장 높은 단계다. 논어 안연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안연이 인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공자는 보편적 이념을 긍정할까 부정할까. 긍정한다. 보편적 이념이란 누구나 지켜야 하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념이다. 禮는 나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고, 仁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자는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특성을 부단히 단련해서,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 이념의 틀에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자는 이 구도를 넉 자로 압축했다. 克己復禮(극기복례). 나의 개별성, 즉 仁이 확대되어 禮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 과정은 부단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논어의 첫 줄이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것도 그래서다. 아직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내가 끊임없이 노력해서 계속 상승해야 한다는 것, 그 상승의 과정이 극기복례다.

여기서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무게중심은 己(자기)보다는 禮(예)에 있다. 己는 아직 보편적인 禮로 진입해야 하는 존재다. 도달해야 할 이상은 저곳, 禮에 있고 나는 아직 이곳, 己에 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단련되어 저곳으로 가야 하는 존재다. 유학은 이곳을 꿈꾸는 사상이 아니라 저곳을 꿈꾸는 사상이다. 그러니 유학의 가치론 안에서는 내가 중요한가 우리가 중요한가. '우리'가 중요하다. 유학이 가족 중심, 집단 지향의 사상으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인간을 仁이라는 본질을 가진 존재로 전제한 그 첫 걸음에 있다.

그러니 유학 안에서 공자는 키우자고 할까 줄이자고 할까. 키우자고 한다. 채우자고 할까 비우자고 할까. 채우자고 한다. 이것이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다. 이 구조를 손에 쥐고 논어를 다시 읽어보면, '아, 공자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순간이 곳곳에서 찾아온다.


미니스커트, 파격이 격이 되는 순간

주희는 공자 사상을 극기복례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런데 이것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 사람이 있다. 노자다.

윤복희씨의 미니스커트를 떠올려보자. 어떤 시대에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질서가 있다. 그것을 격(格)이라 한다. 그 질서를 깨는 것이 파격(破格)이다. 질서를 깨는 것은 원래 사회가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파격적인 현상이 수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어떤 파격은 그 시대를 설득해내고, 어떤 파격은 그냥 도태된다.

미니스커트는 시대를 설득한 파격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 입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것을 따라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주변부다. 파격은 언제나 주변에서부터 힘을 받는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과 안 입은 사람이 뒤섞이는 그 중간 시기에는, 사회 전체가 오히려 생동감을 얻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 '유행'이라고 규정되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과 안 입은 사람으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무시하거나 억압하거나. 게다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예뻐 보이는 사람과 덜 예뻐 보이는 사람으로 차등이 생긴다.

패션이든 유행이든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순간, 그것은 권력이 되고 기준이 된다. 기준은 반드시 구분을 데리고 다니고, 구분은 배제와 억압을 데리고 다닌다.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줄로 알면, 이는 추한 것이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모두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한 줄로 알면,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

물어보자. 지금 내가 입은 옷이 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합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가. 노자는 각자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서 이루어낸 사회의 아름다움이 진짜로 강한 아름다움이라고 보았다. 모두가 합의한 하나의 아름다움을 좇아서 이루어진 사회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매우 약하다.

노자의 생각 속에서, 나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는가 저기에 있는가. 모두가 합의한 아름다움은 저기에 있고, 나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이 각자의 다른 아름다움이 억지로 통일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드러나서 이루는 전체적인 아름다움, 그것이 노자가 말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니 노자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까. 여기에 둔다. 여기를 지키고 저기를 버리자는 것, 이것을 去彼取此(거피취차)라 한다. 공자가 극기복례를 말했다면, 노자는 거피취차를 말한다.

공자의 구도에서 己는 '여기', 禮는 '저기'였고, 공자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취하자고 했다. 노자는 정확히 반대다. 노자는 저기를 버리고 여기를 취하자고 한다. 지금 이 순간, Carpe diem은 공자에 가까울까 노자에 가까울까. 노자에 가깝다.

공자가 극기복례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노자도 거피취차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어떤 뿌리가 있다. 공자가 '본질'을 주장했다면, 그 반대편에 서기 위해 노자는 본질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노자는 비본질을 긍정한다. 그래서 거피취차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비본질'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타조가 고개를 돌릴 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자.

타조 사냥이라는 것이 있다. 사냥꾼은 지프를 몰고 타조를 뒤쫓는다.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타조가 빨리 달리면 빨리 쫓고, 느리게 달리면 느리게 쫓는다. 그렇게 계속 쫓기다 보면, 타조는 어느 순간 그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머리를 모래에 처박아버린다. 그러면 사냥꾼은 유유히 다가가 타조를 주워 온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 욕망과 의지와 수준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긴장의 양이 정해져 있다. 그 양을 넘어서는 긴장이 오면, 우리도 머리를 처박는다. 그 뒤로는 사고가 멈춘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붙들고 평생을 산다. 자기 함량이 작기 때문에, 함량 이상의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고 있던 것을 그저 지키는 수밖에 없다. 모래에 머리를 처박은 타조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타조 한 마리가 '저게 대체 뭔지나 알고 죽자'고 생각하고는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그때 첫 반응은 무엇일까. 깜짝 놀라는 것이다. 경이.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놀라며 사는가. 아니, 몇 달에 한 번이나 놀라며 사는가.

타조가 놀랄 때, 거기서부터 무엇이 시작되는가.

  1. 자기 반성 —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자각
  2. 반성 다음의 첫 반응, 깜짝 놀람 — 여기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
  3. 저 지프차의 정체가 무엇인가, 저것은 대체 무엇인가 — 이것이 형이상학
  4. 저것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 — 이것이 인식론
  5. 제대로 알기 위한 생각의 질서와 규칙 — 이것이 논리학
  6. 판단이 선 뒤, 저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 이것이 윤리학, 철학적 결단

우리는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대답과 반응을 강요받는다. 그 강요에 응답하려는 태도, 그것이 철학적 태도다. 이 반성의 과정이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막 살기 싫은 사람의 숫자가 많아져야만, 그 사회가 발전한다.

이 지프차의 정체를 공자는 '인간'으로 보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판단이 서면, 그 다음의 모든 사유가 그로부터 전개된다. 그렇다면 노자는 이 지프차를 무엇으로 보았을까.


유와 무가 꼬여 있는 세계

본질이 있었고, 그것이 자라나 이상적인 기준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본질이 애초에 없다면, 이상적인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노자는 바로 이 구도 자체가 폭력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상적인 기준' 같은 것이 아예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본질'을 부정해야 한다. 노자에게 지프차의 정체는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이다. 이 비본질을 오늘의 말로 풀면 '관계'다. 불교의 말로 하면 '인연'이다.

무엇과 무엇의 관계로 보느냐가 그 철학의 성격을 결정한다. 불교는 '모든 것'의 관계를 말한다. 노자는 '유'와 '무'의 관계를 말한다. 노자는 이 세계가 유라고 보이는 것과 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주역을 쓴 사람은 이 세계가 음과 양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이 세계가 물질과 정신, 두 핵심이 짜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노자는 이 세계가 有(유)와 無(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내 몸도 有와 無로 이루어져 있다. 有無相生(유무상생) — 우리 몸은 유적인 성질과 무적인 성질이 꼬여 있기 때문에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자처럼 '너와 나의 관계'를 말하기 이전에, '나' 자신이 이미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본질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라는 것. 공자에게 어떤 건물은 등기된, 실체가 분명한 건물이라면, 노자에게 그 건물은 차라리 가건물에 가깝다.

도덕경 1장을 함께 읽어보자.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 천지의 시작과 같은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무'라 하며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 만물을 어미처럼 품는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유'라 한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 그리하여, '무'라는 것은 얼마나 묘한 것인가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교) : '유'라는 것은 얼마나 또렷한 것인가(교, 경계 지어진 것)
此兩者,同出而異名(차양자,동출이이명) :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온 것이나,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同謂之玄(동위지현) : 같이 나와 있는 그것이 매우 현묘하다
玄之又玄(현지우현) :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衆妙之門(중묘지문) : 모든 묘한 것들이 들락날락하는 문이다

無는 '없음'이 아니다. 옷감에 가위를 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자름을 준비하는 동작과 실제로 잘리기 시작하는 동작, 그 사이 어딘가에 '시작'이라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자름이라는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존재 자체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이 있어야만 다른 작용이 가능해지는 영역, 그것을 노자는 無라 부른다. 텅 빈 교실 공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공간이 있어야만 비로소 교실이 성립하는 것과 같다.

有는 반대다. 만물을 낳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품고 기르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식을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기른다고 보았다. 어미 모(母)라는 글자는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그린 글자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하고,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들을 존재하고 작동하게 하는 것을 무라 한다.

妙(묘)는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상태, 徼(교)는 테두리와 실루엣이 또렷한 상태다. 유와 무, 이 둘은 논리적으로도 존재적으로도 선후가 없다. 같이 나왔을 뿐 이름(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 같이 나와 있는 상태가 가물가물하니 분명하지 않다는 뜻에서 玄(현)이라 한다. 현관문이 바깥도 안도 아닌 가물가물한 자리이듯, 유와 무가 가물가물하게 함께 있는 그 자리가 매우 현묘하다. 현묘하고 또 현묘한 그 자리가,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며 태어나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문, 衆妙之門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이 仁이라면, 노자 사상의 핵심은 有無相生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유는 서로 다른 실천으로 뻗어나간다.

유는 유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유는 오직 무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로 성립한다.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기가 쥐고 있지 않다. 대립하는 것과의 관계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어떤 기준과 비교되기 전까지는 정해지지 않는다. 내 키가 큰 이유는 내 안에 있지 않고, 나와 비교되는 저것 안에 있다.

내가 온전히 고유한 나로 있을 때는 언제일까. 고향에 있을 때일까, 낯선 서울에 있을 때일까. 익명의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고유함은 사라진다.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구성원은 하나의 부품으로 이해되고 자신을 책임 있는 존재로 자각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노자는 조직을 작게 쪼개서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小國寡民(소국과민)이다. 도덕경 80장은 그 풍경을 이렇게 그린다.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 하라. 온갖 도구가 있어도 쓸 일이 없게 하고, 백성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게 하라.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벌일 일이 없게 하여, 사람들이 다시 새끼줄을 매듭지어 쓰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라.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之老死不相往來
자기 밥을 달게 먹고, 자기 옷을 아름답게 여기고, 자기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자기 풍속을 즐기게 하라.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울음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늙어 죽도록 서로 오가지 않는다.

나라 단위를 작게 하면, 백성은 자신이 이 공동체의 주인이자 책임자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삶의 역동성이 더 적극적으로 발휘된다. 이와 달리 공자는 이 원리를 큰 나라에 적용하려 했다. 공자는 중앙집권에 가깝고, 노자는 지방분권에 가깝다. 실제로 공자와 노자는 훗날 중국 역사를 반씩 나눠 갖는다. 나라가 작은 단위로 쪼개질 때는 노자의 사상이 힘을 얻고, 그런 작은 나라들이 합쳐져 규모가 커지면 공자의 사상이 주도권을 잡는다. 왜 공자 사상이 거대한 중앙집권 시스템에 더 잘 맞는가. 공자는 본질을 긍정하고, 그 본질을 계속 확충해 나가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노자 쪽에 가깝고, 충실하게 키워서 거대하게 만들어간다는 '확충'의 개념은 공자 쪽에 가깝다.

공자와 노자의 철학을 성별의 감각으로 비유하자면, 노자 쪽이 더 여성적이고 공자 쪽이 더 남성적이다. 도덕경 안에는 여성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대목들이 여럿 있다. 만물을 어미처럼 품는다는 有의 정의부터가 그렇다.


평면 위의 두 철학

정리해보면 이렇다. 공자에게 己는 '여기'이고 禮는 '저기'였다. 공자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취하자고 했다. 노자에게도 똑같이 여기와 저기가 있지만, 노자는 정반대로 저기를 버리고 여기를 취하자고 한다. 공자는 무게중심을 나에게 둘까 우리에게 둘까. 우리에게 둔다. 노자는 무게중심을 나에게 둘까 우리에게 둘까. 나에게 둔다.

공자는 인간의 본질에서 출발해 극기복례로 나아갔다. 그 길 끝에는 언제나 '저기', 아직 오지 않은 이상적인 상태가 놓여 있다. 노자는 자연이 유와 무로 꼬여 돌아가는 이치에서 출발해 거피취차로 나아갔다. 그 길은 저기의 기준을 버리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키자는 쪽으로 향한다.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실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 한 사람은 안으로 파고들어 씨앗을 찾았고, 한 사람은 밖으로 눈을 돌려 세계가 짜인 결을 찾았다.

그런데 이 두 철학에는 공통적으로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늙고 어떻게 죽는지, 그 변화의 과정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자는 이 세계가 유와 무로 짜여 '있다'고는 말해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공자와 노자의 철학에는 아직 시간이라는 관념이, 운동과 변화라는 관념이 들어와 있지 않다. 두 철학은 말하자면 평면적인 철학이다.

이 평면적인 두 철학에, 훗날 氣(기)라는 개념이 끼어들면서 비로소 세계는 입체를 얻는다. 그리고 그 입체 위에서, 장자가 등장한다.


관련 강의: 4강(뒷부분)~5강 — 원 강의 재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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