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국 지음

프롤로그: 삶이 힘들 때 니체에게 묻고 싶은 10가지 질문

저는 니체가 생각하는 운명과 우리 자신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인간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는 ‘사랑의 투쟁’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투쟁하고,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이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사랑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노인과 바다》에서의 노인처럼 자신의 운명에게 이렇게 소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운명의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주려는 시대입니다. 자연마저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간을 위한 것으로 길들이고, 사회도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안락한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근대의 경향입니다. 또한 근대는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면서 평온하게 사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깁니다.

니체는 이러한 근대적 경향에 대해서 온몸으로 저항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안락과 길고 긴 연명이 아니라 자신이 고양되고 강화되었다는 느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운명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은 그런 운명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가혹한 운명과의 대결을 통해 소수의 인간은 보다 강하고 심원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고양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니체 자신도 두통, 위통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험난한 운명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그런 질병을 통해 자신이 보다 심원해지고 보다 강해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니체의 사유도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험난한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했던 그리스 로마의 강건한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예수나 부처가 설파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György Lukács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약한 자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예수나 부처식의 사랑이나 자비의 정신도 아니고 제국주의적인 정신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주창하는 근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강건한 정신으로,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초인이란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에게 얼마든지 다시da capo 찾아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 편안함만을 바라는 사람에게 행복은 오지 않는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

사는 게 왜 고통인지에 대해 철저하게 파고들어간 철학자가 바로 쇼펜하우어입니다. 그는 인생의 본질을 다음과 같은 단 한마디의 말로 정리했습니다.

욕망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결핍감으로 괴로워하지만, 정작 그것이 충족되더라도 만족감과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욕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욕망이 채워지는 과정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것들은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런 것이 철학과 과학의 다른 점이자 과학이 줄 수 없는 철학의 묘미일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예를 들자면 생물학이 유전자를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는 유전자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따라서 철학적 진리를 담은 말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런 말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저 사람이 먼저 말해서 기회를 놓쳐버렸네’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삶의 가치는 아무도 평가할 수 없다

우리가 몰랐던 행복의 조건

우리가 힘이 증대되었다고 느끼려면 어떤 저항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저항을 극복하는 것에 의해서만 우리의 힘이 강해졌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항에는 가난, 전쟁터에서의 적, 또는 예술가가 자신의 앞에 두고 있는 소재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요. 인간은 이러한 것들과 싸우고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힘이 증대되고 고양되었다고 느낍니다.

니체는 바로 이렇게 힘이 증대되었다는 느낌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고 강화하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단순히 안락하게 오래도록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니체는 바로 이렇게 힘이 증대되었다는 느낌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고 강화하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단순히 안락하게 오래도록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힘에의 의지’가 쇠약해지고 지쳐 병들어 있을 때면 인간은 편안함과 만족을 찾게 되고 자신과 투쟁하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실에서 여러 곤경을 겪게 될 때 이 세계는 그들의 안락함을 방해하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지와 생명력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혹시 주위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아, 저 사람은 고귀한 인간이야’라는 느낌을 받은 사람은 있었나요? 그런 사람은 피곤하다고 아무데서나 드러눕는 인간이 아니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강한 긍지를 갖기에 외부의 상황에 쉽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항상 그 상황의 주인으로 존재하면서 상황을 압도하는 자신의 힘을 느낍니다.

이렇게 기품 있고 고귀한 인간에게는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어둡고 우울하게 나타날까요? 니체는 ‘이러한 인간에게는 단연코 세계가 아름답게 보인다’라고 말하면서,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니체의 이러한 사상은 공교롭게도 동양의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학唯識學에서는 각 존재자들의 정신상태에 따라서 동일한 세계도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니체가 말하는 ‘말세인’과 ‘초인’은 동일한 인간이지만 서로 전적으로 다른 정신적 차원에 있기 때문에 세계 또한 서로 다르게 보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질문: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낙타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아무런 불만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나아가는 동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낙타는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라 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합니다.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지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붕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가치와 의미의 공백 상태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 명명하며,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했습니다.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살아라

니체는 니힐리즘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회복한 정신의 단계를 ‘아이의 정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지금처럼 살 것인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영원히 되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크고 작은 슬픈 일 또는 기쁜 일은 혹시라도 다음 세상이 있다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사상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곧 하나의 사상적 실험이라고 일컫기도 했는데, 이런 영원회귀 사상은 ‘모든 것이 영원히 되돌아오더라도 그대는 생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니체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정신력을 강화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드러나는 세계에서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사는 것, 매 순간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그 순간의 충일함을 즐기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된 세계는 플라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와 같은 서양의 전통 철학과 종교가 상정하는 피안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피안의 세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세계이며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초감성적 세계입니다. 반면 차안의 세계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감성적인 세계로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무상한 세계입니다. 이렇게 생성 소멸하는 차안의 세계는 영원불변한 피안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영원불변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성 소멸하는 세계일뿐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영원불변한 세계는 생성 소멸하는 현실을 흔쾌하게 짊어지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이른바 영원불변한 참된 세계를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생성 변화의 세계가 유일한 참된 세계임을 설파하면서 대지에 충실할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합니다.

(최진석의 장자 철학에서 말하는, '去彼取此(거피취차)'가 떠오른다.)

세 번째 질문: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니체는 왜 험난한 운명을 사랑했을까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니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운명은 일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자신의 운명처럼 험난한 것이었겠지요.

저는 니체가 ‘항상’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했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때에 따라 정신력이 저하되었다가 강해지고는 하는데, 아무리 니체라고 해도 정신력의 기복이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정신력이 고양되었을 때의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얼마든지 반복되어도 좋다고 큰소리칠 만큼 말이지요. 그러나 그의 운명은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평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니체의 운명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거라 생각합니다.

운명! 바꿀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긍정할 것인가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을 ‘단죄斷罪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얼마든지 운명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느냐’라는 질문에는 보통 어떤 사람들이 긍정적인 답을 할까요? 또 부정적으로 답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긍정적으로 답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 반면, 부정적으로 답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성공한 것은 모두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여기지만, 실패한 사람은 자신이 실패한 것은 부모를 잘못 만났거나 운이 없어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합니다. ‘그대가 실패한 것은 그대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2.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태도는 숙명론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로서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리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3. 운명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만일 공부 재능이 없는 아이들을 닦달하는 우리나라의 부모들을 니체가 봤다면 무척 어리석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반면 자신에게서 요리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면 자신이 그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운명애라고 보았을 테고요.

가혹한 시련은 나를 단련시키는 최고의 친구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운명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이용하고 승화시키라는 철학입니다. 특히 그는 고난의 운명이야말로 한 인간이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절호의 조건이라고 보았습니다.

나무가 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거친 폭풍우가 필요한 것처럼, 위대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좌절하고 말 정도의 열악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론을 신봉하는 사람은 운명을 부정하면서 운명에 대한 주체로 우뚝 서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신의 뜻을 이룬다면 그는 자신을 운명에 대한 승리자로 여기며 의기양양하겠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자기혐오에 빠질 것입니다. 자유의지론의 신봉자는 자신을 세계와 대결하는 자로 보고, 세계를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재료와 같은 것으로 상정합니다. 이에 반해 숙명론에 빠진 사람에게 있어 세계는 자신이 감히 함부로 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운명을 긍정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세계는 비록 우리에게 가혹한 시련을 가할지라도 우리가 자신을 단련시키고 성숙시키도록 돕는 친구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계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사랑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세계에 감사하고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세계와의 분열과 대립을 넘어선 상태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네 번째 질문: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 고귀한 인간을 자신의 적을 필요로 한다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힘을 겨루는 세계

인간들 간의 갈등과 투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일찍부터 종교와 철학의 중요한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런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잘 알려져 있지만 니체가 가장 존경했던 사상가 중의 하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지요.

니체 역시 헤라클레이토스와 마찬가지로 인간들 간의 투쟁과 갈등을 긍정적으로 본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투쟁과 갈등을 마냥 긍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니체는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이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는 사회’는 꿈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힘을 추구하며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려 하기 때문에 세계에서의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세계에서뿐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도 투쟁은 존재합니다. 많은 동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습니다. 니체가 보는 세계에서 살아 있는 것들은 자신의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싸웁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서로 힘을 겨루는 세계이고, 니체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왜 경쟁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가

니체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달리 사람들 간의 호승심好勝心과 승부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심리나 욕망이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니체도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경쟁과 투쟁뿐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사회만 해도 경쟁과 투쟁만으로는 운영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협업이나 분업을 통해서 서로를 돕습니다. 농부가 만든 쌀이 없으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이고, 공장에서 만든 농기구가 없으면 농부는 농사짓는 데 애로가 많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협동과 협조는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경쟁은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니체는 경쟁이 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쟁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자신을 뛰어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친구에게는 정직하게, 적에게는 용감하게

니체가 모든 종류의 경쟁이나 투쟁을 긍정한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자들이 자신보다 약한 자들과 겨루는 것은 비겁하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경쟁과 투쟁은 내가 겨루어야 할 상대가 나와 비등하거나 나보다 더 우월한 존재여서 나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때만 정당화된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만 경쟁과 투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경쟁과 투쟁을 우리는 ‘사랑의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투쟁이 이렇게 ‘사랑의 투쟁’이란 형태를 띨 경우에만 사람들은 서로를 존경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상대방을 증오하거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의 힘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마도 니체가 말하는 네 가지 미덕을 갖춘 이들이겠지요.

욕망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승화시켜라

실로 성욕이나 경쟁에서 이기려는 호승심은 사람들 사이에 많은 갈등과 투쟁을 낳습니다. 특히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것을 보면 누구나 부아가 치밀어오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과 투쟁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니체는 강간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욕을 제거하려 하거나, 경쟁심이 인간들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경쟁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치통을 막기 위해 치아를 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경쟁과 투쟁을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람직한 형태를 갖도록 승화시켜야 하고, 우리 자신부터 바람직한 방식으로 경쟁과 투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과 대등한 사람과 투쟁해야 하지 비겁하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손쉽게 짓누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섯 번째 질문: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니체는 왜 신을 죽여야만 했는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야말로 니체가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또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신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중세 시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니체가 예수와 바울을 구별하면서 바울이 예수의 참된 이념을 왜곡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예수를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예수의 실제적인 모습을 가장 잘 파악한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Fedor Mikhaylovich Dostoevsky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와 같은 러시아 작가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무슈킨 백작처럼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천진무구한 사람이 예수와 유사하다고 보았습니다.

종교는 연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한 니체의 분류는 종교를 인본주의적 종교와 권위주의적 종교로 나누었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분류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의 종교관과 프롬의 종교관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양자 사이의 공통점은 종교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인간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에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이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설령 그리스도교를 모르더라도 목마르고 허기진 사람에게 물과 먹을 것을 아무런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하느님과 진정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주의적인 종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절대적 진리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이 되며 다른 종교나 사상은 모두 허위 내지 이단이라고 배격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편협한 인간이 됩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살아라

하지만 이런 공통점이 있음에도 니체와 프롬은 인간이 계발해야 할 잠재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보입니다. 이 점은 프롬이 인간의 잠재력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들로 부처와 예수와 같은 종교적인 성인을 내세운 반면, 니체는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er나 나폴레옹 같은 인간을 예로 들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믿는 신이나 불교가 숭배하는 부처를 거세된 신이자 여성화된 신으로 여깁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붕괴한 현실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을 대신할 새로운 이상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이상을 초인에게서 찾았고 모든 사람이 고난과 고통을 겪을 때 인격신에 의존하기보다는 강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닌 초인이 되어 어떠한 고난과 고통도 흔연히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초인은 강한 긍지와 용기 그리고 민활한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자신보다 강한 자에 대해서는 의연하고 도전적이지만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자를 가리킵니다. 니체는 신이 죽은 자리에 초인의 이상理想이 들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니체에게 이 세계는 무수한 힘에의 의지들이 맹목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넘어서는 피안이나 내세도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내세나 천국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에 의존하려고 합니다.

여섯 번째 질문: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가 신념을 만든다

확신은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이론 체계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체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위대한 지성인들은 모두 회의가懷疑家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 회의가는 아무런 진리도 의미도 없다고 절망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다양한 눈으로 세계를 볼 줄 아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니체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어떤 독단적인 확신에 의존할 때 우리는 확고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갖게 되고 이와 함께 살아갈 힘을 얻지만, 그 대가로 다양한 확신들을 자유롭게 비교할 수 있는 사고의 폭과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모든 종류의 독단적 확신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는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념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흉악한 연쇄살인범이라도 100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종교적인 이념이나 정치적 이념에 독단적으로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나의 군중을 형성하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이념에 의지하여 그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은 진리 대신 삶의 위안을 택한 사람입니다.

일곱 번째 질문: "왜 인생이 자꾸만 허무하게 느껴질까?" /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과학적 지식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뉴턴Isaac Newton과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이래의 근대 과학만이 진리를 알려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문제에 부딪힐 때에도 과학을 응용한 기술이나 공학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근대 과학은 모든 현상이 결국은 물리화학적인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근대 과학이 파악하는 세계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 없이 물리화학적인 원소들이 서로 인과적인 작용을 하는 세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삶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생명체들의 역사를 진화의 과정으로 보는 진화론이 그리는 세계상도 근대 물리학이나 화학이 그리는 그것처럼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은 살아 있는 개체들의 모든 활동은 맹목적인 생존의 욕망과 종족보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볼 때 개체들은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 없이 맹목적인 생존에 대한 욕망, 종족보존에의 욕망에 쫓겨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진화의 과정에서 개체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를 우연히 보유하고 있으면 살아남지만 보유하고 있지 못하면 도태될 뿐입니다.

저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야말로 진화론의 귀결을 철저하게 끌어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은 그것이 귀착될 수밖에 없는 끔찍한 결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입장이 갖는 무시무시한 귀결을 철저하게 끌어냈습니다.

진화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의 목적이 일차적으로 자기보존에 있을 경우, 인간 개개인은 자기보존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우리 인간은 길게 살아봤자 100년밖에 살지 못하니 이러한 노력은 필패必敗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함께 개체는 어떤 의미에서 개체 그 자체보다는 오래 존속하는 종족의 보존을 위해 이용당하다가 사멸하는 허망한 존재라는 귀결에 이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진화론이 봉착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염세주의적인 귀결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진화론과 많은 면에서 다르며 쇼펜하우어가 진화론을 수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진화론은 모든 생물체들이 단순히 자기보존과 종족보존만을 추구할 뿐이라고 보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며, 쇼펜하우어 철학은 진화론이 귀착될 수밖에 없는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인 귀결을 철저하게 끌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진화론은 동물의 세계뿐 아니라 인식과 윤리 그리고 종교 등 인간 삶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진화론에 입각하여 인간 삶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론이야말로 과학적 토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의기양양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실은 사람들을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봉착하게 할 뿐입니다. 진화론은 인간들의 삶이 단순히 자신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온갖 노고를 다하다가 죽어가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허무주의는 불가피하게 염세주의를 귀결로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을 통해 삶은 충만해진다

니체는 근대 과학이 제시하는 것은 세계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 과학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 과학이 인간의 생존을 확보하려는 의지와 관점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봅니다.

니체는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활동은 단순히 물리화학적인 작용, 또는 생존이나 종족보존에의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려는 욕망에 따라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성격을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라는 성격은 인간에게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이 목표하는 것은 단순한 연명이나 종족보존이 아니라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삶에 이렇게 충만함을 부여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봅니다. 예술은 세계를 단순히 물리화학적인 작용이나 생존, 그리고 종족보존을 위해서 모든 것들이 발버둥치는 삭막한 곳이 아닌, 아름답고 충만한 곳으로 보여줍니다. 세계와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니체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보려면 우리 역시 건강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예술가는 이렇게 건강한 생명력이 충일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서 자신에게 아름답고 충만하게 드러난 세계를 다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표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예술가가 건강한 힘으로 충일해 있는 상태를 ‘도취’라고 일컫습니다. 예술가가 예술적인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머릿속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도취라는 고양감으로 충만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예술로 만들어라

니체는 인간이 그때마다의 힘의 상태에 따라 사물과 세계를 달리 보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약한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빈약하고 추하게 보는 반면에, 힘으로 충만한 건강한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세계가 빈약하고 추하게 보일 때 우리는 세계 자체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력이 저하되고 추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가 추하게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도취를 크게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눕니다. 아폴론적 예술은 주로 시각에 호소하는 조형예술이기 때문에 아폴론적 도취는 무엇보다도 눈을 도취시켜서 눈으로 하여금 환상vision을 보게 합니다. 이 점에서 니체는 ‘화가, 조각가, 서사시인은 환상을 보는 데 탁월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적 도취에서는 감정 체계 전체가 흥분되고 고조되고, 그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표현수단을 한꺼번에 분출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일체가 되면서 그것들을 표현하고 모방하며 변형합니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모든 사물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고, 그것을 보다 높은 상태로 표현합니다.

여덟 번째 질문: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 나를 성숙시키는 최고의 기회

흔히들 자살은 죄라고 생각하면서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니체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자살은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승리일 수 있고,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의 긍정일 수 있다고 봅니다. 실로 우리는 품위 있게 자살함으로써 사람들의 외경심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니체가 염두에 두고 있는 ‘품위 있는 자살’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병들고 늙어서 매사를 남의 손에 의존하며 구차하게 사는 것은 자신과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욕입니다. 따라서 니체는 우리가 늙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거동이 가능할 정도라면 의사와 약에 의지하여 연명을 꾀하기보다는 자살을 하는 편이 낫다고 보는 것입니다.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이석태 옮김, 보리, 1992)에는 100세가 된 남편이 어느 순간부터 단식을 통해서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불쌍한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민을 받는 사람이 느끼고 있는 무력감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연민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은 당연히 누구나 좌절할 수밖에 없고 그래도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연민은 우리가 그 사람과 유사한 처지에 있으면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연민에 빠지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좌절한 사람과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은 거리의 파토스pathos에 의해서 발전한다’라고 말합니다.

거리의 파토스란 기존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탁월한 인간이 됨으로써 기존의 자신이나 저열한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거리를 넓히려는 열망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열망이야말로 바로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연민은 이렇게 우리를 보다 강해지고 보다 탁월한 인간이 되도록 채찍질하는 거리의 파토스를 제거합니다.

니체는 이 점에서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니라 채찍질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불쌍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뭐 그 정도를 가지고 힘들어하나. 너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채찍질하는 편이 그 사람을 훨씬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곤경에 처한 이에게 연민을 품기보다는 그 사람이 홀로 일어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채찍질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롭고 자각적인 죽음을 택하라

니체는 삶에도 품위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있듯이 자살에도 품위 있고 위대한 자살과 저열하고 비겁한 자살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종교가 자살을 죄로 봄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사람들의 비겁한 마음을 조장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홉 번째 질문: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 너만의 꽃을 피워라

나만의 개성을 만드는 법

니체는 ‘그대는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니체의 이 말과 운명애의 사상은 서로 상통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들이 갖는 성격은 이미 상당히 정해져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자는 사자의 성격을 타고나고 양은 양의 성격을 타고나는 것처럼, 인간도 저마다 서로 다른 성격을 타고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인간을 전적으로 부자유한 존재로 보면서 타고난 성격을 전혀 바꿀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성격이나 적성 등을 잘 파악하면서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잘 승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니체는 인정합니다.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성격과 적성 등을 타고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가 겪을 여러 사건들 역시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건들은 무수한 힘에의 의지들이 서로 맞부딪히고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생겨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건들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운명을 자신의 성격과 적성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남의 시선에 사로잡힌 노예가 될 것인가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특히 우리 청소년들을 특정 방향으로 길들이려고 합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교육과 선행학습을 강요하면서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사회와 부모가 아이들을 이렇게 길들이는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병적인 현상도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삶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염증을 느끼거나,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부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과 적성 그리고 환경 등을 잘 고려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항상 남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을 쓰고 남이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하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남의 평가에 민감한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노예근성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주인뿐이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잘했다’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못했다’고 지적하면 슬퍼합니다. 남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할 때 우리는 자신을 노예의 지위로 하락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권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신호

니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를 고양시키고 강화시키려는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으니 그것에서 비롯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보통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이면에 진정한 자기가 있다고 봅니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시키고 싶어 하는 의지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의지는 우리가 피상적인 삶에 자족해 있을 때 병에 걸리게 한다든지 아니면 지금의 삶의 방식에 대해 권태나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신호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질문: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 자신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라

약점조차 눈부신 것으로 만들어라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극복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는 말과 ‘자기를 극복하라’라는 말이 서로 모순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는 말에서의 ‘그대 자신’, 그리고 ‘자기를 극복하라’라는 말에서의 ‘자기’는 서로 상반되는 것입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하나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하고 희귀한 예술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지닌 강점과 약점의 모든 것을 조망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예술적 계획에 따라 변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들이 예술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약점조차 눈을 황홀하게 하는 것이 될 때까지 자신을 다듬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또한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면서 제2의 본성을 덧붙이고 제1의 본성 중 일부분을 변용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이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을 일정한 방향으로 길러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을 초인 내지 고귀한 자라고 일컫습니다. 초인 내지 고귀한 자는 자신의 약점이나 자신이 겪은 고통과 고난까지도 자기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때의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자기 멋대로 다른 이들을 다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명령할 수 있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자기 자신은 안일하고 자신감도 책임감도 없으며 긍지도 없는 존재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보통의 경우 초인이 아니라 안일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극복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니체는 또한 여기에서 공교롭게도 동양의 신독愼獨 사상과 유사한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독이란 단순히 홀로 있는 것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을 때에도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래도 생각과 행동이 흐트러지기 쉬운 법이지요.

본능이 건강한 사람이 되는 법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눕지 말고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니체는 섭생법의 한 예로 카이사르를 들고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병과 두통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엄청난 행군과 지극히 간소한 생활방식, 끊임없는 노천露天 생활 및 지속적인 혹사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신체를 엄격하게 단련하고 훈육해야 우리의 영혼이 강해지고 힘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모든 좋은 것은 본능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보고, 생각하고, 쓰는 법을 배워라

니체는 어떤 사람들과 교유交遊하느냐가 고귀한 인간이 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열한 사람들이 아닌, 고귀함을 느낄 수 있는 인간들과 교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보려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반응을 자제하면서 결정을 유예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니체는 우리가 그리스 문화를 배우려면 그것에 관한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배우면서 그들처럼 걷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에만 그리스 문화에 대한 교육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니체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도 한갓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어떤 공동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그 안의 각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나사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물자를 받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니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온갖 질병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했던 니체라는 사나이가 설파하고자 했던 건강한 삶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였는지요? 니체의 유명한 말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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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는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last edited 2022-03-02 15:05:53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