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iscoVarela의 저작.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해제: 몸으로 생각한다
이인식(지식융합연구소장)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몸을 뇌의 주변장치로 간주하는 견해에 도전하는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몸의 감각이나 행동이 마음의 인지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신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마음이 신체화되어 있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이른바 제2세대 인지과학의 대표적 이론가로는 미국의 언어철학자인 마크 존슨 MarkJohnson 과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 GeorgeLakoff 를 꼽는다.
1987년 마크 존슨은 현대 철학에서 마음의 신체화를 처음으로 다룬 저서로 평가되는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을 펴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서양의 주류 철학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몸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 곧 '몸을 마음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존슨은 이 책에서 '몸은 마음 속에 있고, 마음은 몸 속에 있으며, 몸, 마음은 세계의 일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코프와 공동 작업을 통해 체험주의(experientialism)라는 새로운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1999년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Philosophy in the Flesh)'을 펴냈다. 책의 부제인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The Embodied Mind and its Challenge to Western Thought)'처럼, 두 사람은 2002년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신체화된 철학, 즉 몸 안에서의, 몸의 철학을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연구의 배경을 설명했다.
1970년 말부터 레이코프는 1957년 노엄 촘스키 NoamChomsky 가 펴난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으로 언어학의 주류가 된 형식언어학을 비판하면서 인지언어학 CognitiveLinguistics 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하였다.
'몸의 철학'은 레이코프와 존슨이 제안하는 신체화된 마음이론을 집대성한 성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인지과학의 세 가지 주요한 발견'에 입각해서 신체화된 마음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두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의 과학에서 이 세 가지 발견은, 서양 철학의 핵심적 부분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 첫째,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 (마음의 신체화).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마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아서 어떤 적절한 컴퓨터나 신경 하드웨어에도 작용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 둘째, 인간의 인지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인지적 무의식 cognitive unconscious). 의식적 사고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모든 사고의 95%는 무의식적 사고이다.
- 셋째,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은유적(metaphorical)이다. (은유적 사고). 우리는 가령 '사랑은 여행'이나 '죽음은 무덤'과 같은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를 수천 개 사용하여 생각하고 말한다. 이러한 은유는 신체화된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은유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마음의 신체화, 인지적 무의식, 은유적 사고는 한데 묶여서 이성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면서 특유의 신체화된 마음이론을 정립했다.
한편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진보적인 이론가로도 유명하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도덕, 정치를 말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정치적 마음'은 인지언어학의 연구 성과를 미국 정치와 선거에 적용하여 진보 진영의 정치적 좌절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1987년 '마음 속의 몸' 출간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된 신체화된 인지 개념은 1991년 세 명의 학자가 함께 펴낸 이 책 '몸의 인지과학'에 의해 인지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FranciscoVarela, 미국의 철학자인 EvanTompson,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인 EleanorRosch는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융합 연구를 통해 독특한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정립했다. 이들은 동서양의 사상가를 각각 한 명씩 끌어들여 몸과 마음의 관계를 흥미롭게 분석했다. 한 사라마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인도의 승려인 용수이다.
메를로 퐁티는 프랑스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작가인 장 폴 스르트르와 함께 활동하면서, 현상학 창시자인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의 후기 학설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실존주의적 현상학을 전개하였다. 주관과 객관, 자연과 정신 등의 이원론적 분열을 배격한 메를로 퐁티에게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 속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인 '신체적 실존'이다. 1945년 펴낸 '지각의 현상학'의 서문에서 메를로 퐁티는 "세계는 나의 모든 사고와 나의 모든 분명한 지각의 자연스런 배경이며 환경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신체적 실존에 있어서 마음은 '신체를 통하여 체현된' 것이며 지각이야말로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실존의 현상을 강조한 메를로 퐁티는 마음에 관한 연구인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경험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서기 2세기 후반에 대승불교 사상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용수는 중관론中觀論의 창시자이다. 중관론 혹은 중론은 주관과 객관, 대상과 속성, 원인과 결과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배격한다. 용수는 독립적인 존재성을 지닌 어떠한 것도 결코 발견될 수 없으므로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공空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완전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용수의 논증은 연기의 이론에 관한 그의 저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연기는 '여러 방식으로 발생하는 조건들에 의존함' 또는 '상호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연기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용수의 중론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극단을 배격하는 중도의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메를로 퐁티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메를로 퐁티와 용수가 언급된 이유는 자명하다. 인지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지는 감각 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하는 것"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저자들은 독특한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제안했는데, 다름 아닌 발제주의enactivism 또는 발제적 인지과학 enactive cognitive science 이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그 의미를 천착하는 독서 여행을 떠나면 될 것 같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에 대표 저자인 FranciscoVarela는 그의 스승인 HumbertoMaturana와 함께 '앎의 나무'를 펴냈다.
신체화된 인지이론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과학적 증거가 없어 한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사례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가령 뜨거운 커피잔을 들고 있거나 실내 온도가 알맞은 방안에 있으면 낯선 사람을 대하는 사람의 기분도 누그러졌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협상을 하면 마음이 부드러운 남자도 상대를 심하게 다그쳤다.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산에 오르면 비탈이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목이 마르면 물이 들어 있는 병이 더욱 가까이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이런 실험 결과는 몸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사소한 움직임, 예컨대 부드러운 물건을 접촉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 사회적 판단이나 문제해결 능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깨끗함, 따뜻함, 딱딱함과 같은 감각도 인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셈이다.
신체화된 인지이론의 입지를 강화해준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멕베스 부인 효과의 발견이다.
서문
이 책은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이 책의 두 주인공, '인지과학' 그리고 '인간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밝혀지고, 이들 사이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관한 대략적인 구도가 제시된다.
2부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의 인지과학(인지론)을 탄생시킨 마음의 계산론적 모델이 소개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지과학이 어떻게 인지 주체의 비통일성을 밝혀내고, 이 비통일적인 자아에 대한 발전적인 이해가 어떻게 불교적 명상수행과 불교적 심리분석의 기반이 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3부에서는 자아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자아라고 흔히 생각하는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논의한다. 이 문제는 특별히 인지과학의 연결론적 모델과 관련하여 인지과정의 자기조직과 창발적 속성의 설명으로 이어진다. 불교심리학에서 이 문제는 경험의 한순간에 나타나는 심적 요소의 창발적 구성과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결정론적 인과연결의 발생을 포함한다.
4부에서는 인지과학의 새로운 접근법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는 보다 일보 전진한 논의가 검토된다. 이 새로운 접근을 위해 우리는 발제적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소개한다. 이 발제적 작업에서 우리는 세계와 독립해 존재하는 인지체계가 지각과 인지능력에 분리하여 존재하는 세계를 표상하는 데서 인지과정이 성립한다는 가정(인지과학에 널리 퍼져 있는 가정)에 분명히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가정 대신에 우리는 인지를 체화된 행위(embodied action)라고 보는 견해를 살펴보고 우리가 이미 논의한 체화라는 개념을 다시 검토한다. 또한 우리는 진화가 최적의 적응성이 아니라 적절한 임시변통적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진화론의 맥락에서 이 체화적 입장이 인지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본다. 4부는 우리가 현대 인지과학에 제공하는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될 것이다.
5부에서는 체화의 역사를 떠나서 인지는 어떤 궁극적 기반이나 근거도 지닐 수 없다는 발제적 견해의 경험적, 철학적 함축들이 논의된다. 먼저 객관론과 기반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현대 서구사상의 맥락에서 이러한 함축들이 논의될 것이다. 그 후 인간 역사에서 가장 극단적인 비기반론이며 타 불교 종파들조차 그 영감을 따르고 있는 대승불교의 중관론이 논의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이 탐구하고 있는 주장의 윤리적 함축을 숙고하면서 우리는 우리 논의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5부는 서양인들이 속한 문화적 환경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될 것이다.
우리는 경험변형에 대한 명상적 관심과 물리적 자연에 존재하는 마음에 대한 과학적 관심 모두를 포함하는 확대된 지평 내에서, 경험과 마음 탐구의 계속적인 대화로서 이 책의 다섯 부분을 생각하고 있다. 이 대화는 궁극적으로 한 가지 관심을 공유한다. 그것은 매일 살아 있는 인간경험의 연관성과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현대 인지과학의 힘과 정교함은 일상생활과 마음에 관한 과학적 개념을 산출할 수는 있겠지만, 일상적이고 살아있는 자기이해를 간과하는 분열된 과학문화를 산출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따라서 이 문제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인 동시에 인간생활의 품격에 관한 심각한 재고찰을 요청하는 깊은 윤리적 관심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다.
1. 출발점
Chapter 1. 근본적 순환성: 반성하는 과학자의 마음
이미 주어진 조건
인지과학이란 무엇인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인지과학 내에서의 다양한 시각을 강조하고자 한다.
인지과학은 세 가지 연속적인 발전단계를 거치고 있다. ... 우리는 이 세 단계를 세 동심원으로 만들어진 극polar지도로 그려보았다. 이 세 단계는 중심에서 주변부로의 연속적인 움직임에 상응한다. 각각의 원은 인지과학의 이론적 구조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낸다.
우리는 2부를 일반적으로 인지론cognitivism이라고 알려진 인지과학의 중심부 혹은 핵심부에서 시작하려 한다. 인지론의 주된 도구는 디지털컴퓨터다. 컴퓨터는 물리적 변화가 논리적 계산이 되도록 만들어진 장치다. 계산이란 기호, 즉 지시체를 표상하는(예를 들어 기호7은 숫자7을 표상한다) 요소로 실행되거나 수행되는 조작을 말한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인지론은 디지털컴퓨터가 하는 방식으로 기호를 처리하는 것이(인간의 인지를 포함하여) 전체적 인지현상의 참모습이라고 가정한다. 인지는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의 처리과정이다. 마음은 세계의 속성들을 표상하거나 세계를 표상하는 기호들을 조작하는 작업을 한다. 인지론자들의 가정에 따르면 심적 표상을 통해 인지를 연구하는 것은 인지과학의 고유영역, 즉 한편으로는 신경과학과 구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 그리고 인류학과 구분되는 고유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
연구기관, 학술지, 응용기술 그리고 국제무역 등으로 잘 개발된 연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지론의 장점이다. ... 과거 몇 년 동안 인지연구에 몇 가지 대안이 나타났다. 이런 새로운 접근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노선에서 인지론으로부터 일탈한다.
- 표상의 적절한 처리과정으로서의 기호처리에 대한 비판
- 인지과학에서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표상 개념의 적절성에 대한 비판이 그것들이다.
우리가 창발론emergentism이라고 부르며 3부에서 보다 자세히 논의할 첫 번째 대안은 '연결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름은 많은 인지작업(시각 그리고 기억과 같은 작업)들은 목표하는 작업의 거시적 기능을 산출하도록 구성된 단순한 요소들의 체계에서 가장 잘 해결되는 듯이 보인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기호처리는 반대로 국부화되어 있다. 기호조작은 기호의 물리적 형태를 이용함으로써 규정될 수 있는 것이지 기호들의 의미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가 물리적 형태를 갖는다는 특징 때문에 우리가 기호를 조작할 물리적 장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기호나 기호처리의 손상은 전체 체계에 심각한 고장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연결론적 처리는 국부화된 기호처리 대신에 분산된 조작과 구성요소들의 협동적 조작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국부적인 마비에도 유연성을 보이는 거시적 속성을 만들어낸다. 연결론자들에게 표상이란 그런 창발적인 거시적 속성들과 외부세계의 속성들 간의 상응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국부화된 기호들의 작용이 아닌 것이다.
4부에서 탐구할 두 번째 대안은 기호처리에 대한 연결론자들의 불만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다. 이 대안에서는 인지가 근본적으로 표상이라는 생각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인지가 표상이라는 생각의 배경에는 세 가지 가정이 존재한다.
- 첫째는 길이, 색, 움직임, 소리 등과 같은 속성들이 존재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 둘째는 우리는 그런 속성들을 내적으로 표상함으로써 그것들을 지적하고 마음속에서 재현한다는 것이다.
- 셋째는 이런 일들을 하는 독립된 주관인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정은 세계의 존재방식, 우리의 존재 그리고 세계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실재론 또는 객관론/주관론에 대한 강하면서도 동시에 자동적인 동의를 의미한다.
세계에 포함된 존재들의 구조와 그 구조들의 차이점들에 따라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다는 점을, 다시 말해 경험의 세계는 특별히 이런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아무리 엄밀한 생물학자라 하더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인간의 인지에 관한 것으로 제한한다고 해도 세계가 취할 수 있는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다. 이런 비객관론적(또는 비주관론적) 확신은 인지연구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대안적 방향전환은 확정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대안은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하고 있는 비교적 작은 연구집단들을 포괄하는 총괄적인 견해인 것이다. 우리는 이 견해에 '발제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인지가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이미 완성된 마음의 표상이 아니라 세계 내에서 한 존재가 수행하는 다양한 행위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마음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따라서 발제적 접근에서는 "마음은 자연의 거울"이라는 생각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접근은 그런 철학적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의 핵심부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순환의 내부에 존재하는 인지과학
구조 <-> 행동과 경험
(구조 <-> 인지와 경험) <-> 과학자의 인지구조
((구조 <-> 인지와 경험) <-> 과학자의 인지구조) <-> 생물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믿음과 관행의 배경
(((구조 <-> 인지와 경험) <-> 과학자의 인지구조) <-> 생물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믿음과 관행의 배경) <-> 체화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철학적 사고
이 그림은 에셔의 그림에서처럼 무한정 계속될 수도 있다. 이 마지막 그림은 계속되는 추상구조의 층을 덧붙이기보다는 우리가 시작한 곳으로, 즉 우리 자신의 경험이 구체성과 특수성(반성적 사고의 노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책에서 탐구되는 발제적 접근의 근본적 통찰은 경험 자체를 초월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우리의 활동이 우리가 지닌 구조의 반영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주제
이 책은 이런 깊은 순환성을 탐구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우리는 경험의 직접성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 존재의 구조에 관한 이론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지과학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교차점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에 관한 긴장관계는 인지과학에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 교차로에 서서 두 갈래 길을 모두 다 굽어보고 있는 인지과학은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학문이다. 한쪽 얼굴은 자연을 보면서 인지과정을 행위의 측면에서 이해한다. 다른쪽 얼굴은 인간세계를(또는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생활세계'를) 보면서 인지를 경험으로 이해한다.
일상세계의 근본적 순환성을 접어놓고 본다면 이런 인지과학의 이중성은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난다.
- 우리는 인간의 자기이해는 단순히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자기이해가 완성된 인지과학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든지,
- 아니면 과학이란 항상 인간경험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세계에 관한 과학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경험과 과학적 이해는 그 중 하나만 없어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두 다리와 같다.
인지과학과 경험 사이의 공통의 기반을 깨달을 때만이 인지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보다 완전해지고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Chapter 2. 인간경험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현상학적 전통
메를로 퐁티는 과학과 경험 혹은 경험과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중도를 탐구하는데 전력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또한 요즘의 인지과학에 해당하는 당시의 학문, 즉 당시 프랑스에서 선구적으로 연구되고 있었던 신경심리학의 입장에서 이런 근본적인 순환성의 문제를 탐구하는데 전력했었다. 그의 첫번째 주요저작인 '행위의 구조(The Structure of Behavior)'에서 그는 살아 있는 경험에 대한 현상적 집적성과 심리학 그리고 신경생리학 사이의 상호교류와 협력을 역설했다.
메를로 퐁티는 전 저술을 통해서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초기 저작을 논하고 있다.
후설이 생각하기에 문제에 대한 해결은 과학의 개념 자체를 확장하여 한편으로는 갈릴레오적 양식의 객관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주의의 비이성주의에 굴복함이 없이 과학과 경험을 연결시켜줄 생활세계에 대한 새로운 학문, 즉 순수현상학을 이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현상학의 붕괴
실제로 후설 현상학에 대한 이런 비판은 메를로 퐁티의 생활세계 현상학 분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실존적 현상학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이성의 사고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이성이 마음을 탐구하는 도구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면 이성 대신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직접적인 체험의 측면과 반성적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경험의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전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비서양적 철학 전통
경험의 탐구에 관한 비서양적 전통을 포함하기 위해 우리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인도철학에 대한 관심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인도적 전통에서 철학은 결코 순수추상적 작업이 아니다. 철학은 지식을 얻는 특정한 수련방법(여러가지 명상법)과 연결되어(전통적으로 이 둘은 '얽매여') 있다. 특별히 불교적 전통에서 집중止, mindfulness은 근본적인 것이다. 집중이란 마음이 체화된 경험변형에 항상 현전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은 마음을 이론과 관심에서, 즉 추상적인 태도에서부터 이끌어내 경험 그 자체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현대적 상황에 비추어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점은 이 전통에서 발전한 마음에 대한 기술과 해석들이 실제적 사용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과 기술들은 각 개인들이 개인적인 상황 혹은 대인관계의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알려줄 뿐 아니라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수준에까지 그 수행이 널리 알려지고 습득되어 있다.
지관의 방법을 통한 경험탐구
명상meditation이란 단어는 영어의 일반적 사용을 놓고 볼 때, 다음의 몇 가지 서로 구분되는 통속적 의미를 갖는다.
- 의식이 오직 한 가지 대상에 주목할 때 나타나는 집중 상태
- 심리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유익한 긴장의 이완 상태
- 초경험적 상태(trance)가 나타나는 분열된 상태
- 고차적인 실재나 종교적 대상이 경험되는 신비저거 상태.
이런 상태들은 의식의 변화된 상태들이다. 명상가는 그의 일상의 세속적인, 비집중적인, 비이완적인, 비분열적인, 하위 단계의 실재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불교적 지관止觀, mindfulness/awareness 수행은 이런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집중의 목적은 정신을 차리는 것,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이 하고 있는 바를 경험하는 것, 자신의 마음에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인지과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인지과학이 인간경험을 포함하는 작업이 되려면 인간경험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명상의 불교적 전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집중'의 명상법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마음이 산만해질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보통 우리는 마음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을 정신적 작업을 하려고 할 때나 산만한 마음이 그런 작업을 방해할 때만 깨닫는다. 혹은 미리 기대한 즐거움을 아무 의식도 하지 못하고 지나쳐보낼 때 깨닫는다. 실제로 마음과 몸은 따로 노는 때가 많다. 이런 이유로 불교적 의미에서 마음은 몸이 있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자신을 알아낼 도구가 되는가? 어떻게 몸을 뛰쳐나가고 마는 마음의 도주를 막을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경전은 두 가지의 수행법, 즉 마음을 고요하게 하거나 길들이는 것(산스크리트어로 샤마타shamatha) 그리고 통찰력을 기르는 것(산스크리트어로 비파샤나vipashyana)을 소개한다. 실제로 샤마타는 독립적인 수행법에서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모으는 것(고전적 의미로 '올가미를 맨다'는 뜻)을 배우기 위한 집중기술이다. 이런 집중은 궁극적으로 환희에 찬 몰두로 연결된다. 이런 상태는 불교심리학에서 자세히 분류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권장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목적은 무엇에 몰두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과 기능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마음이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불교학파는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독립된 기법으로 다루지 않고 고요와 꿰뚫어봄의 기능이 연결된 단일한 명상법으로 실천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명상을 그것의 경험적 목표에 따라 '지관의 명상'이라 부르기로 한다.
호흡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신체적 활동이다. 그러나 명상을 시작하는 초보자는 단순한 대상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그리도 어렵다는 것에 대부분 놀라게 된다. 명상가들이 마음과 몸이 따로 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명상가들은 마음이 온전하게 집중하는 상태와 마음이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명상가들은 그들의 마음이 벌어지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함을 깨닫고 마음을 일깨우는 순간을 그리고 집중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마음을 다시 돌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따라서 집중의 명상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큰 발견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총괄적인 통찰이라기보다는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경험에 대해서도 인간은 한없이 산만해질 수 있다는 뼈에 사무치는 깨달음이다. ... 명상가는 이제 메를로 퐁티와 하이데거가 과학과 철학에 부여한 추상적 태도가 실제로는 집중되지 않은 채 일상생활을 사는 우리의 태도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추상적 태도는 습관과 선입견으로 채워진 옷, 즉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습관적으로 거리를 두도록 만들어진 우주복이다.
명상가는 방만한 생각을 중단하고 그의 호흡과 현재의 활동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초조함을 점차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초조함에 빠져버리기보다는 초조함을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결국 명상가는 파노라마식 시각을 갖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각觀, awareness인 것이다. 이 상태에 놓이면 호흡은 더 이상 집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관을 어떻게 개발시킬 수 있는가? 두 가지 전통적인 접근이 있다.
- 첫째 접근법은 정신능력의 개발은 좋은 습관을 훈련하는 것과 같음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집중이라는 정신상태는 힘든 일을 쉬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도록 단련된 근육처럼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접근법에서는 지관은 마음의 기본적 본성의 일부라고 간주된다. 지관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마음은 다만 집착과 현혹의 습관적 패턴 때문에 잠시 혼란에 빠졌을 뿐이다.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끝없이 이어지는 자신의 움직임 속에서 무엇인가 안정된 지점을 끊임없이 잡아보려 하거나, 사고, 감정, 개념들에 마치 단단한 바탕이 되는 양 끊임없이 매달리려고 한다. 이런 습관들이 모두 사라지고 더불어 우리가 그런 습관을 버리는 법을 배울 때,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보는 마음의 자연적 속성은 빛날 수 있다. 이것이 지혜 또는 성숙, 즉 프라즈냐반야, prajnã의 시작이다.
이런 지혜가 추상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사상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지혜를 통한 지식은 어떤 것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경험 자체와 분리되어 있는 경험에 관한 지식은 없다. 불교사상가들은 경험과 자신이 일체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지혜의 내용 혹은 이 지혜가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무엇인가?
경험분석에서 반성의 역할
지관의 실행결과가 우리를 경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가깝게 하는 것이라면, 반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론적 반성에서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부분적인 반성만을 하고 있으며 질문은 신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말을 빌리자면 이 반성은 "입장이 없는 시각view from nowhere"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신체로부터 떨어진 '아무런 입장도 없는' 견해를 가지고자 하는 시도가 매우 구체적이며 이론적으로 통제되지만 곧 선입견에 빠지고 마는 견해가 된다는 점은 얄궂은 운명이다.
집중의 일반적 경우처럼 체화된 반성의 개발에 관해 두 가지 논의가 가능하다.
- 첫째는, 최초 상황 또는 초보자들의 접근에서 이 반성의 개발을 기술의 습득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체적인 움직임이 연주 의도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즉 마음으로는 무엇을 연주하려 하지만 몸은 그것을 할 수 없다. 연습을 해나감에 따라 의도와 행위의 관계가 점차 가까워져서 궁극적으로 그 둘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의도적인 것도 단순히 신체적인 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 이런 예가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이고 초보자들의 명상훈련에서 집중이 마치 기술의 습득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명상과정을 서술하는 것은 실제로 잘못된 설명이다. 특별히 지관에 관련된 수행은 명상기술을 완성하기 위한 훈련으로 (따라서 고도의 진보된 정신성의 개발로) 설명된 적이 없고, 오히려 마음의 분산습관을 쫓아내는 것으로서 학습이라기보다는 비학습으로 설명되었다. 비학습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새로운 무엇을 얻어내려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명상가가 결심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려는 큰 욕심을 가지고 집중을 개발하려고 하는 바로 그때, 그의 마음은 고착되고 경쟁을 일삼게 되어 지관은 매우 도달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이유로 지관명상의 전통은 노력 없는 노력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며, 명상을 현악기의 연주가 아니라 줄 고르기로 비유(현악기의 줄 고르기는 너무 바짝 죄어서도 안되고 너무 느슨해서도 안된다)하는 것이다. 마음을 모은 명상가가 일정한 활동상태에 억지로 노력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한 마음을 쫓아버리기 시작할 때, 마음과 신체가 자연적으로 모아지고 체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집중을 통한 반성은, 따라서 완전히 자연스러온 행위로 드러난다. 기술과 방기의 중요한 차이는 논의를 진행함에 따라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실험과 경험분석
과학에서 실용주의와 가장 가깝게 연합하고 있는 것은 실험적 방법이다. 만일 누군가의 말의 치아가 몇 개인지 알고 싶다면, 직접 치아를 세어보면 된다. 잘 다듬어진 가설은 어떤 이론 아래서 연역추리에 의해 관찰가능한 현상들과 연결된다. 이런 실험에 관한 철학적 이론은 역사적으로 신체경험과 독립된 지식의 객관론적 견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런 관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관의 명상을 마음의 본성과 행동에 관한 모종의 실험(체화되고 개방된 실험)으로 간주할 수 없을까?
불교의 스승들은 제자들이 이런 불교의 주장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스스로가 그 자신의 경험에서 직접 검토해보고 의심해볼 것을 요청하고 장려한다.
우리는 인지과학이 그 영역을 넓혀서 직접적 경험도 포함할 수 있는 인간경험에 관한 학문적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이 이미 지관이란 명상의 전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지관의 수행, 현상학적 철학 그리고 과학은 인간활동이다. 각각은 인간의 체화된 표현이다. 원래 불교적 교설들, 서양의 현상학 그리고 과학 각각은 수많은 대립적 견해와 논란을 일으킨 주장들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실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한 이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검토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지관의 명상은 인지과학과 인간경험 사이의 자연적 연결고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불교, 현상학 그리고 인지과학 사이에서 나타나는 수렴, 다시 말해 자아 그리고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 관한 연결의 현상이다.
2. 다양한 인지론
Chapter 3. 기호: 인지론적 가정
시작점
이제 우리가 시도할 인지과학과 인간경험에 관한 탐구는 인지론과 Cybernetics가 중심이 되었던 추기 인지과학 영역에서 인지론이 나타나게 된 역사적 연권을 조사하는 것이다. 2부에서 제시될 중심적 아이디어는 지관의 전통에서 제공되는 마음의 분석은 현재 인지론이 제공하는 마음에 대한 개념과 정반대되는 주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은 인지론적 시각을 논의하는 장이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우리는 지관의 방법으로 얻어진 결론과 흡사한 결론들을 논의하나 것이다.
인지과학의 역사에서 Cybernetics 단계는 그 긴 기간 동안의 영향력(대부분 실험적인 것들) 말고도 수많은 구체적 결과들을 제공했다.
- 신경체계의 이해에 수리논리학을 이용했다.
- 정보처리체계(디지털컴퓨터)를 발명함으로써, 인공지능 분야의 기반을 다졌다.
체계이론이라는 상위 차원의 학문metadiscipline을 세웠따. 이 학문은 공학(체계분석, 제어이론), 생물학(조절생리학, 생태학), 사회과학(가족요법, 구조인류학, 경영, 도시계획) 그리고 경제학(게임이론) 같은 많은 학문들에 영향을 주었다.
- 신호와 의사소통의 통로에 대한 통계이론인 정보이론을 제공했다.
- 자기조직적 체계의 최초의 예들을 제공했다.
이 Cybernetics 운동의 공공연한 목표는 마음의 과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의 눈에는 정신현상의 연구가 너무나 오랫동안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손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Cybernetics 연구가들은 수학적인 정식과 분명한 기계구조로 정신현상의 구성과정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절감했다.
1953년 사이버네틱스 운동의 주된 인물들은 그들이 최초에 보여준 단결과 활력과는 달리 각자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많은 연구가들이 이후 곧 명을 달리하고 만다. 하지만 마음을 논리적 계산으로 보는 생각만은 대체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인지론의 핵심가정
1956년 한 해 동안 케임브리지와 다트머스에서 두 개의 모임이 열렸는데, 거기서, 현대인지론의 주된 지도 노선이 된 아이디어를 담은 목소리들(HerbertSimon, NoamChomsky, MarvinMinsky, JohnMcCarthy)이 울려퍼졌다.
인지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핵심사상은, 인간의 지능을 포함한 인지현상은 근본적 속성이 계산과 흡사해서 실제로 인지현상을 기호적 표상들에 가해지는 계산적 처리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지현상이 계산으로 정의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1장에서 논의했듯이, 계산이라는 것은 기호들(지시체가 정해진 요소들)에 가해지거나 그것에 작용하는 조작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표상이라는 개념 또는 무엇에 관련됨이라는 속성을 철학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한 '지향성'이라는 개념이다. 인지론자들은 지적인 행위는 세계를 일정한 방식으로 표상하는 능력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행위자가 외부환경에 대한 표상을 바탕으로 행위한다고 가정하지 않고서는 인지적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 환경에 대한 행위자의 표상이 정확하다면 행위자의 행위는 (정상적인 상황 아래서) 그 목적을 달성하는 성공적인 것이 된다.
인지론의 등장
인지론의 등장은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인지론적 가설의 축자적 해설판인 인공지능 AI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인지론과 인간경험
인지론적 연구프로그램이 인간경험의 이해에 대해 갖는 함축은 무엇인가?
- 인지론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식할 수도 없는 심리과정 또는 인지과정을 상정한다.
- 인지론은 자아 또는 인식의 주체가 근본적으로 단편화되어 있거나 비통일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시점에서 과학과 경험 사이의 긴장관계는 분명하고 직접적일 수밖에 없다. 인지가 자아 없이 진행된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자아를 경험하는 것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 경험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된 복잡성은 인지과학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한 저명한 인지과학자 RayJackendoff 는 최근에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저서를 내놓았다. 인지론에 의해 밝혀진 의식, 마음 그리고 자아 이들 사이의 문제성 있는 관계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RayJackendoff의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과학과 경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순수이론적인 접근이 얼마나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경험적으로도 불완전한가 하는 시범적인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우리의 목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이유로 이 장을 RayJackendoff의 계획을 간단히 고찰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경험과 계산적 마음
이제 인지론의 내부에서 인식주체가 둘로 나뉘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인식은 무의식적인 기호계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식은 의식적 경험이다. RayJackendoff는 그의 책에서 그가 계산적 마음과 현상적 마음이라 부르는 인지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제켄도프의 주장에서 이 책의 출발점이었던 근본적인 순환성의 문제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인지체계의 구조, 현재 논의의 맥락에서는 계산적 마음으로 이해된 인지체계의 구조를 탐구하게 된다. 하지만 경험으로서의 인지 또한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이므로 우리는 경험(현상적 마음) 속에서 얻어내는 구분들로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서야 우리는 계산적 이론을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지속할 수 있다. 이론 순환은 결코 악순환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개방적인 접근법 없이는 이 순환이 가능하지 않다.
이 결론에서 지향성과 의식의 분리라는, 인지론적 분리의 보다 극단적인 형태가 드러난다. 만일 인지가 의식 없이도 진행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식 그 자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세계와 자신 이 두 가지 모두를 의식적으로 지각하는가? 왜 인지과학은 경험을 단순한 부대현상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하는가?
어떤 인지론자들은 바로 이런 결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치 경험과 이론의 부정합성을 비난하며 '골치 아픈 경험은 그 정도면 충분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론적 연구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왓을 때 이런 결론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 결론이 살아 있는 경험의 흐름을 막기라도 하는가? 현대철학의 대부분의 논의에서 보듯이 철학적 결론 그 자체가 오히려 부대현상이 아닌가?
이미 이 두 가지 반응, 한편으로는 경험의 부정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의 무조건적 수용은 극단적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것임을 우리는 주장한 바 있다. 그런 주장을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방법 즉 중도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자아의 경험을 주제로 해서 이런 중도 탐험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이다. 자아 없는 마음과 인간경험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폭풍의 눈'인 자아에 대한 논의로 우리는 직접 들어가려고 한다. 곧 알게 되겠지만 현대인지론이 발견한 자아와 의식적 지각의 분열은 실제로 지관적 전통 전체의 중심점이 된다.
Chapter 4. 폭풍의 눈, 자아
자아란 무엇인가?
인생의 각 순간에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다.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한다. 또한 기뻐하고 화내고 두려워하고 피곤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고 흥미를 느끼고 초조해하며, 자신이 느끼고 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버림받았을 때, 나는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나타나며 사라지는 것, 튼튼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것, 낯익은 듯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이 자신의 중심 즉 자아는 무엇인가?
불교의 중심적 논쟁거리는 경험변형이 제공하는 자아라는 지속적인 느낌과 반성에서 나타나는 자아발견의 실패가 드러내는 대립이다. 인간 고통의 근원은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와 나 자신의 느낌을 만들고 그것에 집착하는 성향에서 기인한다. 명상가들은 불교에서 (존재의 세 가지 표징이라고 알려진) 비영속성, 무자아 그리고 고를 알게 되고, (첫 번째 고귀한 진리라 알려진)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은 (두번째 진리인) 자기집착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암시를 받으면서 마음에 대한 탐구를 감내해야겠다는 참된 동기와 절박함을 점차로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명상가들은 순간순간 마음에 일어나는 것들을 꿰뚫을 강력하고 안정적인 통찰력과 호기심을 개발하려 할 것이다. 이런 순간적인 사건이 마음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 조건들은 무엇인가? '내가' 그것에 반응하는 기본적 태도는 무엇인가? 어디서 '나'라는 경험이 나타나는가? 명상가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탐구하도록 재촉당한다.
지관의 수행에서는 사고, 감정 그리고 신체적 감각의 지각이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기본적인 산만 상태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런 경험을 꿰뚫어보기 위해서, 즉 그런 경험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별하기 위해, 집중명상법은 명상가가 가능한 한 정확하고 가능한 한 냉정하게 경험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실천적이며 개방된 반성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통 무시하는 이런 산만한 상태를 체계적이며 직접적으로 검토할 수 잇따. 경험의 내용(논증적 사고, 감정적인 색조, 신체적 감각)이 드러날 때, 명상가는 사고의 내용에 혹은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에 충실해지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생각한다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이런 끊임없는 경험의 과정에 마음을 곧바로 집중함을 통해서 산만한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에 집중하는 명상가들이 그의 마음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산만해져 있는가를 깨닫고 놀라는 것처럼, 자아의 존재를 문제삼기 시작한 명상가들의 첫 번째 깨달음은 보통 무자아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완전한 자아중독증의 발견이다. 마치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자아가 존재하는 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고 활동한다. 조금이라도 자아의 영역이 침해 받으면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거나 시끄러운 이웃이 생활을 방해하면) 두려움과 분노가 치민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명상에 잠기거나 하는 것처럼) 상황이 자아에 관련이 없을 일말의 기미라도 보이면 우리는 지루함으르 느낀다. 이런 충동은 본능적이고 자동적이며 지배적이고 강력하다. 이런 현상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당연시된다.
경험된 것이 없는데 도대체 우리는 왜 자아가 있다고 생까하는가? 자아를 만들어내는 이 습관의 정체는 무엇인가? 경험에서 우리가 자아라고 간주하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온五蘊에서 자아찾기
이제 아비달마 阿毗澾磨, Abhidharma라고 하는 불교 가르침이 제시하는 몇 가지 범주를 살펴보자. 아비달마라고 하는 말은 불교경전을 크게 삼분할 때 그중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경전들의 모음을 지시하는 말이다. (다른 두 부분은 윤리적 계율을 모은 율律-, Vinaya~와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경~-經, Sutra이다.) 아비달마 경전들과 그 주석서에 따라 경험의 본성에 관한 분석적 탐구법의 전통이 나타났는데, 이 전통은 대부분의 불교 학파에서 연구되고 명상에 이용된다. 아비달마는 자아의 감각을 검토하는 데 이용되는 다양한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이 범주들 중 모든 불교학파에 공통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온五蘊이다.(蘊은 산스크리트어 스칸다skandha의 번역어인데 스칸드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더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처님이 최초로 경험을 검토하는 기본적인 틀을 가르쳤을 때, 곡식알의 더미를 각각의 온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온은 다음과 같다.
- 색色 - 형체
- 수受 - 느낌/감각
- 상想 - 지각/분별
- 행行 - 성향
- 식識 - 의식
오온 중 처음 것은 물리적인 것 혹은 물질적인 것에 바탕을 둔 것이라 간주된다. 나머지 네 가지는 정신적인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모두는 각각의 인격과 각 순간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심물心物 복합체를 구성한다.
찰나성과 두뇌
명상의 전통에 접하지 못한 현대의 독자들은 이 즈음 하여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두뇌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라고 그들은 질문할 것이다. 마음과 의식에 관한 문제를 두뇌에 관한 문제로 돌리는 것은 과학문화의 일반적 경향이다.
자아 없는 온蘊
3. 다양한 창발론
Chapter 5. 창발적 속성과 연결론
자기조직화: 새로운 대안의 근원
연결론적 전략
창발과 자기조직화
연결론의 현재
뇌세포와 창발
기호의 퇴장
기호와 창발의 연결
Chapter 6. 자아 없는 마음
사회로서의 마음
대상관계들의 사회
상호의존적 발생
기본요소 분석
집중과 자유
자아 없는 마음들: 분열된 대행자들
자아와 함께 사라지는 세계
4. 중도를 향한 발걸음
Chapter 7. 데카르트적 불안
불만감
표상, 재고찰
데카르트적 불안
중도를 향한 발걸음
Chapter 8. 발제: 체화된 인지
상식의 회복
자기조직화, 재고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지과학이 정보를 처리하는 입출력장치로서의 마음의 개념에서 떠나서 창발적이며 자기조직적인 그물망체계로서의 마음의 개념을 향해 나아갔는가 하는 점을 논의했다. 자율적인 체계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는 이 새로운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
색, 사례연구
체화된 행위로서의 인지
자연선택으로 돌아감
Chapter 9. 진화의 경로와 자연부동
적응론: 변모하는 사고
복수기재의 지평
인지와 진화의 대표이론들을 넘어서
진화: 생태와 발생의 조화
자연부동으로서의 진화가 주는 교훈
발제적 접근의 정의
발제적 인지과학
결론
5. 근거를 상실한 세계
Chapter 10. 중도
무근거성의 도입
용수와 중관 전통
두 가지 진리
현대사상과 무근거성
Chapter 11. 길 다지기
과학과 경험의 순환
허무주의와 지구 전체적 사고의 필요성
니시타니 케이지
윤리와 인간변형
결론
옮긴이의 글: 불교를 통한 인지과학과 인간경험의 대화
일상세계, 사회, 그리고 실재의 본성을 해명하는 역할을 하는 철학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도전과 영감을 과학으로부터 받았다. 현대 미국철학의 주류가 크게 보아 언어분석(언어/분석철학)과 심리현상(심리철학)의 연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현대 정보과학과 인지과학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FranciscoVarela, EvanTompson, EleanorRosch가 함께 쓴 이 책은 현대철학과 과학의 주된 논쟁점들을 인지과학과 불교의 입장을 통해 재해석하고 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이들이 동양의 불교사상을 서양의 현대철학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 저자들에 따르면 서양의 철학과 과학은 경험을 통한 마음의 변형적 능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아의 분열과 의식의 창발적 구조 그리고 마음의 발제적 능력 등은 현대심리학, 생물학 그리고 인지과학에서 간간이 논의되는 주제이기는 했지만 그 근본적 바탕, 구체적으로 말해 비실체성과 무근거성에 관해서는 깊은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서양철학과 과학에서 경험을 통한 마음의 변형적 과정이 논의되지 않은 탓에 잇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객관론이(세계의 객관적 존재가)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적 관념론이(주관의 영속적 존재가)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아마 실체성(존재를 그 불변적, 연속적, 무시간적, 본질을 통해 연구하는 입장)을 추구하는 서양철학의 기본적 성향인 동시에 한계라고 이 저자들은 진단한다. 이런 분석은 서양과 동양 그리고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저자들의 놀라운 비교철학적 통찰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동서양의 일반적이고 대략적인 차이만을 이 책의 저자들이 논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비실체성과 무근거성의 문제는 단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이며 동시에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의 삶의 문제라고 한다. 먼저 과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실체성에 관한 암묵적인 인정은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나 왜곡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인지과학의 주된 방법론 중 하나인 인지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한계를 가지는 방법론이며, 생물학에서 나타나는 진화론에 대한 고전적 해석도 마찬가지로 많은 제약을 안고 있다. 이미 확정된 주관과 대상 그리고 그 둘간의 관계를 통해 자연 현상과 심리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아제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생물현상이나 심리현상과 같이 복합적이며 비규칙적이며 비선형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배후에는 상호규정적 또는 상호구성적, 발제적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요점이다. 수많은 과학이론들과 연구프로그램들을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저자들은 이 새로운 방법론적인 시각(실체성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 발제성에 바탕을 두는 시각)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관적, 상호 규정적, 그리고 발제적 입장에서 우리의 삶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윤리적 사회적 상황을 바라본다면, 무근거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결여는 왜곡된 형태의 회의론과 허무주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사회, 문명, 윤리, 그리고 역사에는 그 기반에 뭔가(근본적인 이유, 가치, 존재,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 이후 서양 지성사의 대부분의 사건은 이런 기본적인 기대와 희망 혹은 암묵적 가정이 잘못되었음을 폭로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다다이즘, 해체주의 등의 사조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 삶과 문명은 아무 근거 없는 우연한 사건, 권력, 그리고 (실체성이 전혀 없는) 이미지나 그림자에 의해 소리소문 없이 나타난 알맹이 없는 장식이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은 허무주의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너무나 쉽게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궁극적인 근거가 없으니 이제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비관적인 혼돈과 무질서가 이런 허무주의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이해가 무근거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하지 못한 결과라고 한다. 무근거성은 전혀 비관적이지도 무질서하지도 않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무근거성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놀라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대승불교의 '공' 사상에 따르면 세상은 기본적으로 근거성과 실체성을 결여한 텅 빈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뒤죽박죽 무질서의 세계라는 것은 아니다. 비관적 허무주의는 따라서 근거의 집착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우리가 무근거성의 소식을 접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나타나는 부정적 반응일 뿐이다. 비실체성의 깨달음을 통해서 허무주의의 보다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모델을 찾는 것이 필요한데 저자들은 그것을 불교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불교와 과학의 발전적 대화에서 찾는다. 저자들은 이런 대화만이 비관적 허무주의의 나락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들은 현대사회의 윤리적 문제와 개인적 소외를 다룬다. 현대사회의 자기집착과 고립된 이기심의 근저에는 존재하지 않는 궁극적 기반을 기대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태도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근거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그런데 문제는 서양의 철학과 과학은 무근거성을 폭로하기는 했지만 구조적으로 이런 무근거성의 참된 경험과 이해(깨달음)를 가능하게 해줄 기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순수경험의 개방적이며 순환적 자기조직화 과정을 놓친 결과다. 물론 이 점이 서양의 과학을 모두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영향력을 지닌 앎의 도구를 제공하며 또한 인간과 마음의 무근거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과학과 불교는 상호 보완적 대화의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근거성을 받아들이고 느끼며, 그것에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불교적 명상의 전통이 제공하는 경험의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무근거성을 철학적 혹은 과학적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편견 없는 순수경험으로 느끼고 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근거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는 철학(언어철학, 심리철학, 현상학, 실존철학, 불교철학), 인지과학, 인공지능, 생물학, 인류학, 유전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정보처리학 등의 학문들에 영향력 있는 이론들의 거의 망라되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이 책에서는 현대철학과 과학의 중요한 대표이론들이 거의 다 논의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핵심적 주제는 불교적 경험의 시각과 현대 과학적 분석의 시각 사이의 대화이다. 그것은 불교적인 혹은 일반적으로 동양적인 순환과 종합의 입장이다. 지식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대상에 관한 표상의 형성과 그것의 처리로 보는 협소한 시각에서 떠나서 지식 자체가 단순한 정보의 획득이나 저장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알려지는 대상을 규정하고 동시에 아는 주체(인지체계)에 깨달음과 변형을 일으키는 발제적이고 개방적이며 동시에 변형적인 과정을 포함한다는 시각이 이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새로운 과학의 모습이자 인간경험과 과학이 대화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지식은 정보의 집적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이며 성숙과 변형 가능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 저자들이 불교적 가르침에서 발견한 것은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런 앎의 새로운 차원이다. 앎은, 즉 성장하고 변화하는 지혜는 깨달음이며 지혜이며 성숙이다. 앎은 앎의 대상에서 시작되어서 앎의 주관에 끝나는 듯하지만 앎의 대상, 주관, 이 둘 간의 순환적이며 종합적인 변형 과정이다. 이에 덧붙여 이들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깨달음과 성숙과 변형의 앎은 몸과 마음의 분리에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체화된 마음에서 달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서양 근대철학의 시조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분리하고 지식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국한했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인지과학과 심리학의 여러 사례를 통해 이런 접근이 인지과학의 영역을 매우 제한하는 가정임을 주장한다. 지식에 대한 이들의 새로운 해석은 몸을 떠난 마음이 아니라 몸체화된 마음에서 참된 앎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이런 체화된 앎의 발제적 과정은 개방적이며 변형적인 인간경험의 과정과 같은 것이다. 불교적 전통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동양적 전통에서는 이런 변형과 성숙의 과정이 참된 앎(깨달음)의 과정이라고 간주되는데 이 참된 앎은 경험에서 시작된다. 이때 경험이란 단순한 감각경험이나 어떤 경력이나 사건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을 아무 편견 없이 들여다보는 것을 말한다. 정신적 집중을 통한 반성과 관찰을 말한다. 저자들이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마음의 개방적, 변형적, 그리고 실천적 과정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서양의 철학과 과학의 전통이 표상적 앎에 집중함으로써 깨달음의 앎을 간과했다면 이제는 불교철학적 영감을 통해 이런 개방적이며 변형적인 앎의 차원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탐구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이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 책의 전체 구조
이 책의 주제들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과학과 인간경험을 연결하고 있다. 이 세 그룹은 다음과 같다.
- 창발론: 사회로서의 마음, 오온, 자아 없는 존재, 근거 없는 세계.
- 발제: 자연부동으로서의 진화, 상호의존적, 연기적 발생, 구조적 연합.
- 체화: 인간경험, 개방적/변형적 경험, 조작적 폐쇄성, 회기적 과정, 지관의 명상과 자각, 각성, 깨달음.
저자들의 입장 |
경쟁하는 입장 |
창발론 |
환원론 |
발제론 |
적응론(진화), 최적화 이론(인지) |
체화된 마음(메를로 퐁티) |
독립된 마음, 표상적 마음(데카르트) |
개방적 변형적 인간경험(자각, 각성) |
분열된 마음, 부정적 허무주의 |
세 부류의 주제 1,2,3은 상호관련이 있는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엄격하나 의미에서 논리적인 함의 관계가 있는 것들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깁슨의 비표상적 지각이론에 관한 저자들의 논의에서도 드러나듯이 (지각이 표상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직접적이며 (지각이 유기체의 감각지각적 능력에 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체화적이지만 발제적이지 않은 접근버버도 가능하다.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과 인지과학의 비인지론적 접근법들과 불교적 명상의 전통을 바탕으로 이들 주제들을 연결해나가고 있다.
개방적 변형적 경험 즉 깨달음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앞서 설명했듯이 이 책의 주제는 과학과 인간경험의 대화다. 그렇다면 개방적이며 변형적 인간경험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여러 장에서 저자들이 이미 그 해답을 제시했지만 여기서는 보다 단순한 예들을 가지고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자동차에 휘발유가 주입되면 자동차는 동력원을 얻게 된다. 자동차는 휘발유를 태워서 움직이지만 자동차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좋은 휘발유를 썼다고 4기통 자동차가 6기통 자동차가 되지는 않는다. 휘발유는 자동차에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자동차를 잠시 살아 움직이게 할 뿐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컴퓨터에는(폰 노이만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일반적 디지털 컴퓨터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소프트웨어인데, 이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분리되어 있어서 아무리 소프트웨어를 자주 사용하거나 변화시켜도 하드웨어(메모리 공간, 실리콘 칩의 기본능력)에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한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그 컴퓨터의 램 메모리가 바뀌거나 하드디스크 공간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역시 컴퓨터 프로그램의 사용은 구조적이며 변형적인 변화를 컴퓨터에 일으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파일을 다운로드 한 경우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다운로드를 받는 컴퓨터는 새로운 정보를 지니게 되지만 이 컴퓨터 자체가 다운로드 과정을 통해 하드웨어적으로 변형된 다른 컴퓨터가 되지는 않는다.
이제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한 생물체가 음식을 섭취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먼저 자동차의 경우처럼 음식은 동력원이 되어서 그 생물체의 신체를 유지시키며 이를 통해 이 생물체는 생존하게 된다. 음식은 이 생물체에 생존을 위한 에너지원이 된다. 음식은 소화되고 나서 배설되기 때문에 생물체를 거쳐가는 활력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결국 자동차가 휘발유를 쓰는 것처럼 신체가 음식을 이용해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음식의 경우에는 다른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음식은 신체에 단순한 에너지원일 뿐만 아니라 신체의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근육과 뼈와 신경계를 변화시키고 증가,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음식을 통해 신체가 성장한다. 음식의 섭취를 통해 신체의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활성적 변화, 즉 에너지 소비적 변화가 아니라 구조적, 변형적 변화다.
비슷한 일이 우리 마음과 정신에도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이 책을 읽으면 책에 실린 새로운 정보가 이 사람 마음에 저장된다. 이것은 새로운 파일을 한 컴퓨터에 다운로드 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새로운 정보의 입수와 저장이 바로 이런 경우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앞서도 지적했듯이 파일의 다운로드는 파일을 받아들이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새로운 정보가 메모리에 입력되고 저장된 것일 뿐이다. 책을 읽는 행위도 새 정보의 입수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 컴퓨터의 비유와 다른 점이 없다. 많은 이들은 독서의 목적은 바로 새로운 지식의 축적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독서는 책을 읽는 이들에게 개방적 변형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책의 정보가 독서를 통해 두뇌에 저장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독서는 다른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이 책은 이 사람에게 구조적이며 변형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독서를 통해 단순히 한 정보체계(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고 저장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통해 그 정보체계(그 책을 읽은 사람) 자체가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민스키가 말한 조작적 폐쇄성(한 인지작업의 결과가 그 인지체계 자체의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특징)이란 바로 이런 구조적 변화를 가리킨다. 이제 독서는 단순히 생존과 체계유지를 위한 정보입수의 과정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의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인 것이다. 한 인간이 인격체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는 바로 이런 변형적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단순한 정보로서의 지식이 성숙한 지혜와 덕으로 바뀌어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고 변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논하는 인간경험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정보를 얻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런 구조적이며 변형적 과정을 일으키는 체험적 과정이다. 이것은 정보가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을 일으키는 과정이다. 깨달음이란 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깊은 영향(구조적 변화)을 일으키는 사건을 말한다. 깨달음에서 진리는 단순히 (세상이 어떤 상태로 존재한다는) 표상적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이 놓인 마음과 전 인격에 변형적 진실이 되는 것이다. 편견과 사심이 없는 성찰 그리고 집중과 명상은 이런 인간경험을 구조적이며 변형적 자기발견과 성숙의 과정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은 개방적이다. 변형적 경험은 고정된 결론이나 편견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이 경험은 경험자로 하여금 마음을 열고 마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선입견을 버리고 관찰하도록 한다. 이런 과정은 또한 체화적이다. 이런 경험을 통한 앎은 온전한 신체적 현전 그리고 지각적 행위를 통해 나타나지, 신체와 분리된 마음의 표상적 정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과정은 또한 발제적이다. 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미 확정된 대상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만들어가는 상호의존적 규정 과정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불교적 지관 명상의 전통이 바로 이런 변형적 경험 과정을 체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에 관련하여 현대과학과 철학이 가져다준 놀라운 발견과 논증들을 비관적 회의주의나 이기적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라, 개방적이며 자기변형적인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보의 집적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구조적, 변형적, 그리고 체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깨달음의 고유한 영역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분명하게 논의되지는 않았지마나 이 저자들의 주장은 인지과학과 불교, 인간경험과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 전체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함축을 남긴다. 인문학 humanities과 자유교양교육 liberal arts education 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지식과 정보의 개방적, 구조적, 변형적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인간활동이기 때문이다. 정보와 기술습득이 목표인 직업교육에 밀려 그 중요성이 많이 쇠퇴하고 있는 인문교육이나 교양교육에 대해 저자들은 아마도 정보의 내재화와 구조적 변화의 존재와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며 이런 개방적이며 변형적 인지현상은 단순한 철학적 가정이 아니라 과학적인 검증도 가능한 실재적인 현상이라는 고무적인 주장을 펼 것이다. 결국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서양철학과 동양의 불교는 그 어느 것도 빠져서는 안 되는 계속적인 대화의 참여자들인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런 대화의 중요성 그리고 철학과 과학의 대화가 불교적인 명상의 전통을 통해 가능하다는 저자들의 주장이 주는 참신함에 있었다. 이 중요성과 참신함은 이 책이 출간된 지 거의 20년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합당하게 느껴진다.
주요 개념 정리
- 경험(현상적 경험, 명상적 경험)
- 인지과학과 인간경험의 명상적 연결이 이 책의 주제라면 경험 혹은 체험은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 개념들 중 하나다. 단순히 경험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이 개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경험은 감각경험을 지식의 기반과 정당화 근거로 삼는 경험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록1. 명상에 관련된 용어
부록2. 정념/자각에 이용되는 경험 범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