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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간신은 어떻게 식별해낼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간신은 따로 있는가? 제왕학의 교과서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쓴 진덕수(眞德秀)는 간신은 따로 있다기보다는 임금이 그렇게 만드는 측면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한나라 제위를 찬탈한 왕망(王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초창기에 어찌 반드시 곧장 그의 마음속에 나라를 찬탈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서리를 밟았을 때 (추위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얼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맨 처음[始시]에 임금이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면 왕망은 더 이상 야망을 키워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진덕수의 진단이다. 이 책에서 진덕수는 찬탈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권력의 칼자루를 임금으로부터 빼앗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문제를 훨씬 심도 있게 다룬다. 찬탈은 불과 50쪽에 불과하지만 ‘간사한 자가 주군을 옭아매는 실상’에 대해서는 일곱 가지 유형으로 나눠 무려 250쪽에 걸쳐 파고든다. 그만큼 간사한 자들이 임금을 옭아매는 기술은 다양하고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
이한우 저. 책의 해석은 저자/역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기 때문에, 이 저자가 믿을만한 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내용을 파악해보자.
Contents
들어가는 말. 리더의 입장에서 사람을 알아보는 책, '논어'
『논어』는 사람 보는 책이다. 그렇다고 관상(觀相) 보는 법을 일러주는 책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과 행동, 즉 언행(言行)을 살펴 그 사람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보려는 것이 『논어』식의 사람 보는 법이다. 그것이 옛사람들이 즐겨 썼던 지인지감(知人之鑑), 즉 사람을 알아보는 거울이라는 것이고 또 『논어』에 관한 한 한・중・일 최고의 주석서 중 하나인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말로는 관인지법(觀人之法), 즉 사람을 살펴보는 방법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제쳐두고 많은 사람들은 맨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은 들어봤어도 『논어』라는 책이 어떤 구절로 끝나는지를 잘 모르는 듯하다. 사실 그 끝 구절이야말로 『논어』가 어떤 책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요왈 3)
이 구절은 그냥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어』라는 책의 최종 결론이라는 점에서 그 뜻을 명확히 해야 한다. 말을 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서도 정확히 그 속내를 읽어낸다는 뜻이다. 그래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짧은 구절이지만 그 안에 함축된 의미는 『논어』 전체를 통해 쉽게 풀어낼 수 있다. 사실 행동으로 드러나고 나면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쉽다. 대신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 그 사람이 하는 말만 가지고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짧은 몇 마디 말만으로도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 살아가는 것이 한결 쉬울 것이다.
중용(中庸)은 명사가 아니라 적중하여[中중] 유지한다[庸용=常상]는 두 개의 동사다. 사안의 본질에 적중해 그것을 오래 품고 가는 능력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부중(不中)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이 또한 법률 적용이나 어떤 문제의 해결책 등이 사안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리나 사안에 적중하지 못했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논어』 이해는 여전히 선비의 정신 수련 방법 정도에 머물고 있다. 지도자가 사람 보는 법을 배워 훌륭한 사람들과 더불어 멋진 일을 해내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실 지금처럼 선비의 심신수양서 정도로 『논어』라는 책을 곡해시킨 장본인은 주자(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이다. 송나라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들은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논어』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이라는 사서(四書)의 체계를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전에는 이런 체계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체계에 들어가는 순간 제왕학(帝王學)이나 리더십 이론으로서의 『논어』의 면모는 다 사라지고 그 책은 한갓 마음 다스리는 법 정도를 알려주는 책으로 전락해버린다.
사서(四書)라고 하는 성리학의 굴레를 벗겨낼 때 『논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목소리로 그 안에 담겨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을 위한 지인지감의 지혜다.
『논어』를 둘러싼 주자학과 반(反)주자학의 대립을 모르는 독자라면 이게 무슨 소린가 할지 몰라서 간단한 예 한 가지를 들겠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숙종실록』 숙종 1년(1675년) 1월 18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주강(晝講-경연의 일종)에 나아갔다. 윤휴(尹鑴)1)도 입시(入侍)했다. 윤휴가 말했다. “『논어』의 주(註)는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동지사(同知事) 김석주(金錫胄)2)가 말했다. “『논어』의 주는 버릴 수 없습니다.” 윤휴가 말했다. “(임금의 공부는) 과거(科擧)를 보는 선비가 공부하는 것과 다르니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경연) 검토관(檢討官) 이하진(李夏鎭)이 말했다. “윤휴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
1장. 다스리는 자, 언제나 살피고 주의하라
리더가 혹(惑)하면 망한다
나라가 망하는 이유나 원인은 수없이 많다. ...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실은 내환, 그중에서도 내분(內分)이 결정적이다.
그런데 내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다양한 진단이 있겠지만 결국은 리더의 리더십 붕괴 혹은 무능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공자가 말한 혹 혹은 불혹의 의미를 알고서 이야기를 진행하자. 『논어』 안연(顔淵) 편에서 제자 자장(子張)이 혹(惑)이 무슨 뜻인지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자기가 사랑한다고 해서 (이미) 죽은 것도 살기를 바라고 자기가 미워한다고 해서 (버젓이) 살아 있는 것도 죽기를 바라는 것이 혹(惑)이다.”(안연 10)
이 말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소관이지만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소관이 아닌데 그 경계를 헷갈리는 것이 바로 혹(惑)이라는 뜻이다. 앞서 공자가 자로에게 했던 말과 그대로 통한다. 인간사(人間事)는 인간사의 범위를 넘어서서 해결을 시도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안연 편에서 이번에는 번지(樊遲)8)라는 제자가 혹(惑)이 무슨 뜻인지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망각해 그 (재앙이)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혹(惑) 아니겠는가?”(안연 21)
유학자 범조우(范祖禹)는 이렇게 풀이했다. “사물에 감정적 영향을 받아 동요되기 쉬운 것으로 분노만 한 것이 없으니, 자신을 잊어서 그 부모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함은 미혹됨이 심한 것이다. 미혹됨이 심한 것은 반드시 세미(細微)한 데서 일어나니, 이것을 조기에 분별한다면 크게 미혹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논어』의 여러 곳에서 공자는 “지자(知者)는 불혹(不惑)한다”고 말한다. 이때 지자는 그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보다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 혹은 인간사의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40세에 불혹이라고 했으니 사람을 볼 줄 알고 사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매한 자가 불혹할 수도 있으나 권력에 도취되면 아무리 뛰어난 자도 교만으로 인해 혹하기 마련이다.
달콤한 말 앞에서는 누구나 흔들린다
등통이나 이연년은 나라를 망치게 한 경우는 아니지만 명군이나 성군도 아첨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금도 사람인지라 신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사사로운 호불호(好不好)에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례를 소개한 사마천은 “심하구나! 사랑과 미움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언제나 교언영색(巧言令色), 아첨은 멀리하고 직언(直言)에만 귀 기울일 것 같은 세종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었다. 아첨에 늘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이나 가족의 문제 앞에서는 세종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위인(偉人)’ 세종대왕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례는 계속된다.
간사한 자를 알아보는 능력을 갖춰라
『논어』 안연 편에서 제자 자장이 소문이 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뛰어난 지도자라면 바로 이런 소문만 요란한 자를 미리 살펴서 알아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지인지감(知人之鑑) 능력의 네 단계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면서 아는 자는 최고요, 배워서 아는 자는 다음이요, 겪고 나서야 그것을 배우는 자는 그다음이요, 겪고 나서도 배우려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최하가 된다.”(계씨 9)
지도자에게는 뛰어난 이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賢賢현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간사한 자가 간사하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奸奸간간]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뛰어난 이를 몰라본다고 해서 나라나 조직이 당장 망하지는 않지만 간사한 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까이 할 경우 당장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간신은 어떻게 식별해낼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간신은 따로 있는가? 제왕학의 교과서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쓴 진덕수(眞德秀)는 간신은 따로 있다기보다는 임금이 그렇게 만드는 측면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한나라 제위를 찬탈한 왕망(王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초창기에 어찌 반드시 곧장 그의 마음속에 나라를 찬탈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서리를 밟았을 때 (추위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얼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맨 처음[始시]에 임금이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면 왕망은 더 이상 야망을 키워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진덕수의 진단이다.
이 책에서 진덕수는 찬탈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권력의 칼자루를 임금으로부터 빼앗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문제를 훨씬 심도 있게 다룬다. 찬탈은 불과 50쪽에 불과하지만 ‘간사한 자가 주군을 옭아매는 실상’에 대해서는 일곱 가지 유형으로 나눠 무려 250쪽에 걸쳐 파고든다. 그만큼 간사한 자들이 임금을 옭아매는 기술은 다양하고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루어 헤아림'은 곧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다
2장. 인재를 보는 눈을 밝히다
왜 지금 '지인지감'인가
인재 찾기와 그 어려움
핵심은 마음을 꿰뚫는 것이다
보고, 관찰하고, 분별하라
3장. 천하의 흥망을 가르다
대업을 이룬 자와 패망한 자
떠돌이 청년이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세심한 시선과 한결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배움의 자세를 기억하라
뜻을 같이하는 벗을 구하라
4장. 섬기는 자의 옳은 자세
사안에 적중하여 오래 유지하라
공로를 떠벌려 자랑하지 말라
영광의 무게만큼 커지는 위험을 생각하라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