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저.
인간학이자 정치학, 윤리학이자 인간경영학, 그리고 조직심리학이자 인생의 네비게이션, '논어' 다시 읽기
들어가는 말: 왜 '논어'인가?
『논어』와 나
그런데 주희가 주를 단 『논어집주』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의문점은 늘어만 갔다. 간혹 ‘언어학자’ 주희의 통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의 안내만으로 『논어』를 읽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로서는 그 밖의 다른 출구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됐다. 그 후로 최근까지 100번 이상 읽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以論解論(이론해론)’, 즉 『논어』로 『논어』를 풀어내보자는 발상이었다. 부분과 전체는 순환관계를 형성하므로 부분은 전체를 통해 해석하고, 전체는 부분에 대한 해석의 총합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은 필자가 대학에서 전공했던 해석학 이론의 기본원칙이다. 다만 이런 원칙이 과연 『논어』에도 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논어』의 편찬자가 그런 해석이 가능하도록 책을 편집 구성했는지가 관건이었다.
방침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는 것이었다. ‘500개 가까운 장(章)들이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어』는 느슨한 게 아니라 아주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게 얼개가 짜인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가진 책이었다. 잠언집도 아니고 잡록(雜錄)도 아니었다. 20개의 편(篇)과 498개의 장(章)이 말 그대로 거미줄처럼 복합적인 상호연계를 이루며 하나의 훌륭한 중첩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둘째는 『논어』에서 의미가 모호한 단어나 문장, 장(章)들을 『논어』에서 규명해 보자는 것이다. 결국 미시적으로는 文(문)이니 約(약)이니 惑(혹)이니 明(명)이니 하는 단어에서 시작해 문장이나 장(章)도 상호점검을 통해 『논어』에서의 의미를 추출해 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비교적 순수한 『논어』의 맥락을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이때 ‘순수한’이란 의미는 해석자의 주관이 가능한 한 배제되었다는 뜻이다. 그 작업은 곧 『논어』의 편찬자가 했던 작업을 역으로 추적해 올라가는 일종의 추체험(追體驗)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서해석학에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보다는 『요한복음』의 편찬자인 요한의 편찬의도를 추적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다고 보면 된다.
以論解論(이론해론)의 길
이제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이 책은 以論解論의 방법을 채택했다. 그것은 『논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 전체를 읽는 것과는 다르다. 단편 단편을 떼내어 읽으면 공자가 더 크게 들어오겠지만 우리처럼 『논어』를 거대한 체계의 하나로 읽을 경우에는 공자의 발언 못지않게 『논어』의 편찬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요한복음』의 편찬자 요한을 강조했던 것과 같은 논점이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오히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책을 편집한 그 편찬자의 의도가 중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