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저.
인간학이자 정치학, 윤리학이자 인간경영학, 그리고 조직심리학이자 인생의 네비게이션, '논어' 다시 읽기
들어가는 말: 왜 '논어'인가?
『논어』와 나
그런데 주희가 주를 단 『논어집주』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의문점은 늘어만 갔다. 간혹 ‘언어학자’ 주희의 통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의 안내만으로 『논어』를 읽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로서는 그 밖의 다른 출구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됐다. 그 후로 최근까지 100번 이상 읽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以論解論(이론해론)’, 즉 『논어』로 『논어』를 풀어내보자는 발상이었다. 부분과 전체는 순환관계를 형성하므로 부분은 전체를 통해 해석하고, 전체는 부분에 대한 해석의 총합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은 필자가 대학에서 전공했던 해석학 이론의 기본원칙이다. 다만 이런 원칙이 과연 『논어』에도 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논어』의 편찬자가 그런 해석이 가능하도록 책을 편집 구성했는지가 관건이었다.
방침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는 것이었다. ‘500개 가까운 장(章)들이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어』는 느슨한 게 아니라 아주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게 얼개가 짜인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가진 책이었다. 잠언집도 아니고 잡록(雜錄)도 아니었다. 20개의 편(篇)과 498개의 장(章)이 말 그대로 거미줄처럼 복합적인 상호연계를 이루며 하나의 훌륭한 중첩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둘째는 『논어』에서 의미가 모호한 단어나 문장, 장(章)들을 『논어』에서 규명해 보자는 것이다. 결국 미시적으로는 文(문)이니 約(약)이니 惑(혹)이니 明(명)이니 하는 단어에서 시작해 문장이나 장(章)도 상호점검을 통해 『논어』에서의 의미를 추출해 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비교적 순수한 『논어』의 맥락을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이때 ‘순수한’이란 의미는 해석자의 주관이 가능한 한 배제되었다는 뜻이다. 그 작업은 곧 『논어』의 편찬자가 했던 작업을 역으로 추적해 올라가는 일종의 추체험(追體驗)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서해석학에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보다는 『요한복음』의 편찬자인 요한의 편찬의도를 추적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다고 보면 된다.
以論解論(이론해론)의 길
이제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이 책은 以論解論의 방법을 채택했다. 그것은 『논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 전체를 읽는 것과는 다르다. 단편 단편을 떼내어 읽으면 공자가 더 크게 들어오겠지만 우리처럼 『논어』를 거대한 체계의 하나로 읽을 경우에는 공자의 발언 못지않게 『논어』의 편찬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요한복음』의 편찬자 요한을 강조했던 것과 같은 논점이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오히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책을 편집한 그 편찬자의 의도가 중요할 뿐이다.
끝으로 이 책을 읽어가는 법에 대해 간략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논어』에 관심이 있고 한두 번이라도 『논어』를 읽어본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했다. 이런 독자들이라면 먼저 한문(漢文) 원문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본 다음, 본문의 번역과 비교해서 보고, 풀이를 읽어보면 된다. 그리고 풀이를 읽고 난 후에는 본문 번역이라도 다시 한 번 읽고 나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주기를 바란다. 물론 원문을 다시 정독하면 더욱 좋다.
그러나 『논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맨 앞에 나오는 한문 원문은 피해가도 된다. 장마다 원문 뒤에 있는 번역문을 먼저 본 다음 풀이를 읽고 맨 마지막에 한문 원문을 하나씩 뜯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훌륭한 독법(讀法)이 될 수 있다.
어느 쪽이건 한 장이 끝날 때마다 번역문의 뜻을 충분히 음미한 다음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줄 것을 부탁한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장에서 장으로 넘어감[移行]에 『논어』의 중요한 내용들이 대부분 숨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왜 『논어』인가?
1편 學而(학이)
1
공자는 말했다. “(문을) 배워서 그것을 늘 쉬지 않고 (몸에) 익히면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 뜻이 같은 벗이 있어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오면 진실로 즐겁지 않겠는가? (이런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속으로 서운해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진실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면서 『논어』라는 거대한 산악(山岳)을 오르는 길에 들어서보자.
“공자(孔子)가 일생 동안 말한 것들이 무수할 텐데 『논어』의 편찬자는 왜 하필이면 이 세 구절을 산악의 초입에 해당하는 책 첫머리에 둔 것일까?”
당연히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저런 해석을 참고하기에 앞서 ‘學而(학이)’ 편에 한정해서 ‘學’이라는 글자가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지 그 용례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공자는 ‘學而 6’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순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에는 믿음이 담겨야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몸소 익혀 행하면서도 남은 힘이 있거든 그때 가서 문(文)을 배우도록 하라[學].”
문의 정확한 의미는 바로 다음 장에 나온다.
이어지는 ‘學而 7’에서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이렇게 말한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기를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하고, 부모 섬기기를 기꺼이 온 힘을 다하며, 임금 섬기기를 기꺼이 온몸을 다 바쳐 하고, 벗과 사귀기를 일단 말을 하면 반드시 책임을 져 믿음을 주는 식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未學]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이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學은 명확히 사람됨을 배운다는 뜻이다.
이어 ‘學而 8’에서 공자는 배움과 관련된 내용은 아니지만 배움의 조건과 관련해 이런 발언을 한다.
“군자가 되려는 사람이 진중하지 못하면 위엄을 갖출 수 없고, (문을) 배우면 고집불통[固]에 빠지지 않는다.”
결국 이 셋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사람됨의 기본[質]이 되지 않고서 문(文)을 배워봤자 문을 배우지 않고서도 사람 노릇 제대로 하는 사람만 못하며, 문을 배우면 고집불통에 빠지지 않는다’다. 공자는 고집불통에 빠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부정적으로 보았다.
문제는 익히기[習]란 단번에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반면 배우기는 단번에 될 수 있다. 그래서 익히기는 늘 쉬지 않고 반복해서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時習(시습)의 時(시)는 흔히 번역하듯이 ‘때때로’로 풀이하면 본질을 놓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늘 쉬지 않고 반복해서’가 바로 時다.
독자들은 이미 파악했겠지만, ‘學而 8’과 ‘學而 14’는 같은 내용을 하나는 소극적(negative)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적극적(positive)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결국 둘 다 君子를 학문수련과 인격수양이 하나로 통합된 인간형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學而 1’의 세 문장은 상호연결되는 고리로 얽혀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學(과 習), 朋, (知와) 君子의 고리이며 부차적으로는 說(열), 樂(낙), 君子도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 이 점에 주목했던 이는 정이천이다. “즐거움[樂]은 기쁨[說]에서 생겨난 것으로 그 뒤에 얻는 것이고, 즐거움이 없으면 군자라고 말하기에 부족하다.” 즉 (애쓰는 법을) 배우고 항시 익히는 것의 기쁨을 안 뒤에라야 자신과 비슷한 식견을 갖춘 벗을 통한 새로운 지식과의 만남이 즐거운 것이고,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아는 자라야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를 떠나 자기혁신[日新又日新]을 계속해 갈 수 있는 君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논어』의 맨 마지막 문장, 즉 ‘堯曰(요왈) 3’의 끝 문장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不知言(부지언)이면 無以知人也(무이지인야)다.’ 그 사람의 말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知人[사람을 아는 것]의 문제 하나로 관철되고 있다.
2
유자가 말했다.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경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또)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겨난다. 효(효도)와 제(공경)라는 것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 할 만하다!”
學而 1’은 사람을 아는 혹은 알아주는 문제[知人]로 끝을 맺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서 ‘學而 2’에 들어온 셈이다.
유자(有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유약(有若)이다. 여러모로 공자를 닮았다는 평을 들었고 윤리와 질서를 중시하며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정치가의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자(子)를 붙인 것으로 보아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 중의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논어』를 보다 정밀하게 읽기 위해서는 특히 여기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기본적인 특성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똑같은 질문을 해도 묻는 제자들에 따라 답을 달리 할 만큼 각각의 처지와 사람됨을 중요하게 여겼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맞춤형 답변’을 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學而 2’에서처럼 공자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실은 경우에는 십중팔구 바로 앞에 나온 공자의 발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단서를 던져주는 해설적 성격의 글이라고 보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유자가 말한 첫 대목 ‘其爲人也孝弟(기위인야효제)요 而好犯上者(이호범상자) 鮮矣(선의)니 不好犯上(불호범상)이요 而好作亂者(이호작란자) 未之有也(미지유야)다’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知人之鑑]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곧 그[其] 사람의 사람됨[爲人]을 안다는 뜻이다. 유자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뒤에서부터 다시 읽어보면 그 말하자고 하는 바가 훨씬 분명해진다.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사람을 쓰면서 누가 배신을 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인지를 알고자 온갖 노력을 다한다. 제대로 사람을 쓰려면[用人]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선은 그 사람이 해당조직이나 분야에서 윗사람을 함부로 범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윗사람을 함부로 범할지 아닐지는 결국 그가 일상생활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형이나 주변의 가까운 연장자들에게 공손한지를 눈여겨볼 때 어느 정도 미리 알 수 있다. 이제 知人(지인)은 제대로 된 사람[仁人]을 분별해 내는 문제로 심화된다.
3
공자는 말했다. “말을 아주 정교하게 남이 듣기 좋도록 하고, 얼굴빛도 곱게 하는 사람들 중에 (정말로) 어진 사람은 드물다.”
仁(인)에 관한 언급은 ‘里仁’ 편에 좀 더 자주 나온다. ‘里仁 2’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인이나 예를 통해 자신을) 다잡는 데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고, 좋은 것을 즐기는 데에도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다. 어진 자[仁者]는 어짊[仁]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자[知者]는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
공자나 유학의 텍스트에서 知者(지자, 智者라고 쓰기도 함)는 仁者(인자)보다 한 수 아래다. ‘知者가 仁을 이롭게 여긴다[利仁]’는 것은 인이 어떠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것을 편한 마음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仁을 편안하게 여긴다[安仁]’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仁을 체득하여 실행하는 경지이다.
‘里仁 3’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제대로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제대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제대로[能]’이다. 사사로이 누구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 제대로 좋아하고 제대로 미워할 줄 알아야 어진 사람이라고 한 것은 어진 이의 공정(公正)에 바탕을 둔 마음씨를 겨냥한 것이다. 여기서 어진 이는 공정한 이다. 따라서 ‘學而 3’과 ‘里仁 3’을 합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교언영색하는 사람 중에서 어진 이와 그렇지 못한 이를 분별할 수 있다.’
4
증자는 말했다. “나는 매일 세 가지로 내 자신을 살핀다.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최선의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은 없는가? 벗과 사귐에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은 없는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 또한 행실이 뛰어났던 제자 증자(曾子)의 말로 앞서 유자(有子)의 언급이 해설이었던 것처럼 ‘學而 1’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그의 사상은 ‘증자(曾子)’ 18편(篇) 가운데 10편이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남아 전하는데, 효(孝)와 신(信)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삼았다. 또 『대학(大學)』을 편찬하였다. 그는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儒敎思想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사는 『중용(中庸)』을 썼다.
‘學而 1’ 풀이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증자가 매일 자신의 몸을 되살피는 이 세 가지 항목은 ‘學而 1’의 순서를 그대로 뒤집어놓은 것이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남[人]을 위하여[爲] 일을 도모하되 조금의 사심도 없이 진심[忠]을 다하였는가를 먼저 살핀다. 이어 뜻이 같은 벗[朋友]들과 더불어[與] 사귀는 데 믿음[信]을 잃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傳不習(전불습)’, 즉 學而時習(학이시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를 점검한다는 것이다.
그는 남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忠] 되물었고, 뜻이 같은 벗들에게 믿음[信]을 주지 못한 점은 없었는지 되살폈고, 스승 공자로부터 전수받은[傳] 文과 行을 제대로 익혀 내 몸에 배게 했는지[本立]를 되짚었기 때문이다. 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거의 완벽하게 지키려고 했던 제자였다.
현학(顯學)의 유혹에 쉽게 굴복했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증자는 이처럼 스승 공자를 모범으로 삼아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전념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동양오성에 당당히 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일단 증자의 이 같은 자기성찰 삼계명으로 집약됨으로써 ‘學而 1’의 세 가지 명제에 대한 논의는 한 단계 심화된다. 이런 심화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만큼 ‘學而 1’의 세 가지 명제는 『논어』 전체를 하나로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공자는 말했다. “(제후의 나라인) 천승지국을 다스릴 때라도 매사에 임할 때 공경하는 마음으로 일관함으로써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내고, 재물을 쓸 때는 절도에 맞게 하여 사치를 멀리함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공역 등에) 부려야 할 경우에는 때에 맞춰 (농사일을 하지 않는 농한기 때 시키도록) 해야 한다.”
學而 1’은 인간됨[爲人]의 요체를 이야기했고 2, 3, 4는 모두 그에 대한 보충설명이었다. 그리고 이 장 ‘學而 5’는 곧장 다스림[治人]의 요체를 제시한다. 위인(爲人-修己)과 치인(治人)은 『논어』의 양대 축이다.
‘敬事而信’을 하나로 엮어서 본다면 매사에 신중과 최선을 다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이어 ‘節用而愛人’은 나라의 재물을 사용함에 절도 있게 아껴 씀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使民以時’는 불가피하게 백성들을 공사 등에 부려야 할 경우에는 때에 맞춰[以時], 즉 농사일을 하지 않는 농한기 때 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道와 導(도)의 차이는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끈다[導]라는 강제적이고 타율적인 개념이 아니라 백성에게 스스로 믿음과 사랑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끄는 導보다는 길을 낸다는 道를 선택한 것은 적절했다.
6
공자는 말했다. “어린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순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에는 믿음이 담겨야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을 배우려)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몸소 익혀 행하면서도 남은 힘이 있거든 그때 가서 문(文)을 배우도록 하라.”
앞의 ‘學而 5’가 군주(君主)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도리에 관한 실마리를 논했다면, 여기서는 장차 군자(君子)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의 실마리를 던진다. 어찌 보면 ‘學而’ 5와 6은 서로 짝을 이뤄 공자가 그리는 바람직한 나라의 상하 모습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學而 5’는 그런 나라의 임금[君主]의 모습을, ‘學而 6’은 그런 나라의 모범적인 관리와 백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먼저 말해 두자면 그런 점에서 ‘學而 5’에서는 (敬) 信 (節) 愛 時 세(다섯) 가지가 핵심 개념이었다면, 여기서는 孝(효) 弟(제) 謹(근) 信(신) 愛(애) 親仁(친인) 行(행) 學(학) 여덟 가지가 핵심이다.
공자가 볼 때 도리에 맞는 행실의 핵심은 첫째, 집 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윗사람[長者]에게 공순(恭順, 弟)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행동을 할 때는 삼가야 하고 말에는 믿음이 담겨야 한다. 셋째,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그 중에서도 특히)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몸에 익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을 만큼 되었을 때 비로소 文(문)을 배우도록 하라는 것이다.
7
자하는 말했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하고, 부모 섬기기를 기꺼이 온 힘을 다하며, 임금 섬기기를 기꺼이 온몸을 다 바쳐 하고, 벗과 사귀기를 일단 말을 하면 반드시 책임을 져 믿음을 주는 식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이 (이미 문을)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이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學而 6’의 공자 발언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자하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복상(卜商)이며 공자의 10대 제자인 공문십철(孔門十哲)에 드는 공자의 대표적 제자 중 한 명이다. 증자가 내면의 성실을 강조한 반면 자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예(禮)의 격식을 중히 여겼다는 평을 듣는다.
‘學而 6’은 사람됨의 기본, 즉 質(질)을 이야기했고 ‘學而 7’은 기본에 더해지는 성심성의, 즉 애씀으로서의 文(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갈 文質(문질)의 문제를 『논어』의 편찬자는 이처럼 책의 전반부에 은근하게 배치해 놓았다.
8
공자는 말했다. “군자가 되려는 사람이 진중하지 못하면 위엄을 갖출 수 없고, 배우면 고집불통에 빠지지 않는다. (늘 진중하면서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남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는 벗하지 말며,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해서는 안 된다.”
다시 공자의 발언으로 돌아간다. 내용으로 보자면 이 글은 ‘學而’ 5와 6의 중간에 들어갈 수 있다. ‘學而 5’는 군주를, ‘學而 6’은 배우는 자를 이야기했는데, 여기에서의 君子(군자)는 어찌 보면 군주와 배우는 자 사이에 있는 지식층이나 중간지배층이다. 공자는 그 중간지배층인 君子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지침을 준다.
공자는 重과 學(학)을 풀어서 설명한다. 먼저 진중함에 대한 풀이다. 공자는 진중함을 갖추려면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忠] 남들에게 믿음[信]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忠孝弟信(충효제신) 모두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이것이 진중함이다. 이어 널리 사람을 사귀더라도 자기보다 못한 자[不如己者]는 벗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허물[過]이 있으면[則] 그것을 바로잡는 것[改]을 꺼려서는 안 된다[勿憚]고 강조한다. 남보다는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해결의 단서를 찾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것은 學則不固에 대한 풀이다. 이 때의 學도 당연히 ‘文을 배우다’는 뜻이다. 學文, 즉 애쓰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學而 8’은 5와 6 사이에 있으면서 6과 7에 대한 보충설명임과 동시에 다시 ‘學而 1’로 우리를 돌아가게 만든다. 대단히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뜻이다. ‘學而 4’에서 증자의 말이 우리를 ‘學而 1’로 돌아가게 한 적이 있으니 우리는 두 번째로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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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 1 |
學而 4 |
學而 8 |
文, 行 |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 傳不習乎 |
: 過則勿憚改 |
信 |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
: 與朋友交而不信乎 |
: 無友不如己者 |
忠 |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 爲人謀而不忠乎 |
: 主忠信 |
‘學而 1’과 ‘學而 4’와 ‘學而 8’은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보충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읽으면 그 뜻은 더 풍부해진다. 이런 가르침은 ‘述而 24’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공자는 네 가지를 가르쳤으니 문(文) 행(行) 충(忠) 신(信) 넷이다.
文과 行은 學而時習, 信은 有朋~, 忠은 人不知~에 각기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즉 ‘學而’ 1, 4, 8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는 핵심적인 교육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를 앞에서 본 文質(문질)로 정리하면 文과 行은 文, 忠과 信은 質이다. 여기에서 行이 質이 아니고 文인 이유는 그것이 禮(예)를 행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文은 애쓰는 것이다. 禮가 바로 애를 쓰는 것 아닌가?
9
증자는 말했다. “부모님의 상을 삼가서 치르고, 먼 조상까지도 잊지 않고 추모하면 백성의 백성다움도 두터워질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증자의 이 발언을 ‘學而 8’과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앞의 것이 공자의 언급이었기 때문에 제자인 증자의 이 언급은 일단 그에 대한 해설일 가능성이 높다. 굳이 연결 짓자면 결국은 ‘主忠信(주충신)’, 즉 ‘사람을 대하거나 어떤 일을 함에 최선을 다하고[忠] 믿음을 줄 수 있게 하라’의 가장 생생한 사례로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이 장은 사람을 보는 知人(지인)의 문제 차원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다. 부모의 상을 충심(忠心)으로 치르고 먼 조상들까지 잊지 않고 충심으로 추모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신실(信實)할 가능성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學而 11’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10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찾아간 나라에 이르셔서 반드시 그 정사(政事)를 들으시니 그분이 (정치에 관심이 많아) 그렇게 하려고 구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제후가 먼저 공자에게 청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자공은 이렇게 답했다. “공자께서는 온화하고 반듯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과 태도를 통해 그것, 즉 정치참여의 기회나 지위를 얻은 것이니 설사 그것을 그분이 먼저 구해서 얻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는 것과는 아마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네.”
자금과 자공의 이 문답은 공자의 말[語]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는 가끔 에피소드처럼 등장하는 공자의 생생한 면모에 대한 보고 내지 목격담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 점에서는 이 장은 이와 비슷한 내용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子張(자장)’ 편 후반부에 놓아도 될 듯하다. 텍스트(공자)와 해석(제자)의 관계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구절인 것이다.
그런데 왜 『논어』의 편찬자는 이 에피소드를 이처럼 비중이 큰 머리말 부분에 배치한 것일까? 이 장이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을 연결해 주는 고리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學而’ 편에서 사람됨[修己]과 관련된 부분과 다스림[治人]과 관련된 부분을 각기 다뤄왔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 특유의 사상이며 유가의 핵심이다. 바로 이 장이 그 연결고리를 담고 있는 에피소드라고 보았기 때문에 공자 사후의 에피소드임에도 불구하고 편찬자는 여기에 배치했다고 봐야 한다. 실은 ‘學而 9’도 수기와 치인의 연결이었다는 점에서 이 장은 ‘學而 9’에 대한 보충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문답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문면에 드러난 그대로이다. 정치에 참여하거나 제후의 자문에 응하더라도 공자의 그것은 권력욕이나 출세를 위한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공자와 일반 사람들이 다른 근본이유는 공자의 경우 溫·良·恭·儉·讓(온·양·공·검·양)의 다섯 가지 덕목[五德]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 오덕(五德)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오덕은 적어도 유학자로서 정치에 관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확대해서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군자나 선비[士](가 되려는 사람)도 오덕을 갖추려 노력해야 한다.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스승님께서는 그것을 궤 속에 넣어 가죽으로 싸서 고이 보관하시겠습니까? 좋은 값을 구하여 그것을 파시겠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修己(수기)하되 治人(치인)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기회가 왔을 때는 治人의 과제를 피해서도 안 된다. 다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진퇴(進退)의 도리이다.
11
공자는 말했다. “(어떤 사람을 관찰할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를 향한) 그 아들의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그가 하는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 삼 년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보여준 도리를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라고 이를 만하다.”
여기서 공자는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孝를 꼽고서 그것을 살피는 일반적인 방법 한 가지를 제시한 것이다. 즉 공자는 여기에서 그냥 효도하라는 도덕적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제대로 효도를 다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공자가 생각한 孝는 무엇인가? 물론 이에 대해 공자는 늘 그렇듯이 직접적인 정의(定義)를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孝를 행하는 사람들의 사례와 不孝(불효)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孝의 실체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 갈 뿐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가져야 할 예(禮) 중에서 대표인 孝란, 유자가 말한 대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어진[仁] 사람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지표다.
일단 충분하지는 않지만 孝에 관해 공자가 하고 싶은 말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필 수 있었다. 결국 공자는 최선을 다할 것[至誠=文]을 강조한다. 文(문)을 우리는 ‘애쓰다’로 풀었다. ‘애쓰다’의 사전적 의미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다’이다. 공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가 어찌 군주나 친구, 심지어 자식에게 최선을 다할 것인가라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효자(孝子)가 되라는 말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을 판별함에 그 사람이 孝를 어느 정도까지 행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나머지 인간됨(예를 아는 인간인지의 여부 혹은 어진 사람인지의 여부)은 절로 알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문제[知人]의 어려움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12
유자가 말했다. “예(禮)의 쓰임(用)은 화기(和氣)를 귀하게 여긴다. (요순과 같은) 옛 임금들의 도리도 바로 이런 예의 화기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상하가 통용되어 행해졌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화기만을 알아서 조화나 화합에만 힘쓰고 예(의 체)로써 그것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예를 제대로 행할 수 없다.”
- 앞에서 공자가 孝(효)를 이야기했으므로 여기서 제자 유자(有子)가 말하는 禮(예)는 그에 관한 풀이로 볼 수 있다. ‘學而’ 11과 12도 광의로 보면 텍스트(공자의 말)와 주석(제자의 말)의 관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마도 『논어』의 편찬자는 공자가 말한 孝 다음에 제자의 언급 중 딱 떨어지는 풀이를 찾으려 했으나 마땅치 않아 그에 가장 가까운 언급으로 유자의 이 말을 골랐는지도 모른다.
13
유자가 말했다. “개인적 차원의 약속이 (공적인 차원의) 의리(義理)에 가까울 경우 약속했을 때의 말은 지켜질 수 있다. 공손한 태도가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당할 일은 멀어진다. 그리하여 그 주변의 친지를 잃지 않는다면 진정 그 사람을 종주(宗主)로 삼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을 知人(지인)의 차원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마침 정약용은 그 점에 주목했다.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觀人之法]에서는 밖에서 보이는 행실이 비록 착하더라도 마땅히 안의 행실을 보아야 한다. 신(信)과 공(恭)을 잘하는 것은 모두 사람을 접하는 외적인 행실이니, 외적인 행실이 이미 착하고 내적인 행실이 또한 구비되면 그 사람은 높여 존경할 만한다.” 이 구절의 해석지침까지 제시한 것이다.
‘學而’ 12, 13은 전체 흐름에서는 약간 돌출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약용의 지침에 따라 해석할 경우 ‘學而 11’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부모에게 하는 것을 잘 살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것이 첫째라면, 둘째는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아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라는 내용으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해놓고 뒤에 가서 보게 될 ‘泰伯 2’를 한 번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보길 권한다.
공자는 말했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삼가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임금이 친족들에게 돈독히 하면 곧 백성들 사이에서 어진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또 (새로 등극한) 임금이 옛 친구, 즉 선왕의 옛 신하들을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배반과 같은 각박한 짓을 하지 않는다.”
14
공자는 말했다. “무릇 군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먹을 때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할 때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또 일을 할 때는 민첩하게 하고 말은 신중하게 하며, 이어 도리를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잘잘못과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다면 (설사 그가 文(문)을 아직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文을)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다.”
이 장은 번역해 놓으면 그다지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문제는 君子(군자)라는 개념 때문에 자칫 자기모순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데 있다. 만일 ‘군자는 먹을 때는 배부름[飽]을 구해서는 안 되고 집에 거처할 때에는 편안함[安]을 구해서는 안 되며, 일에 임해서는 민첩해야 하고 말을 할 때는 삼가야 한다’고 해석해 버리면 사실상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y)에 빠지게 된다. 君子를 그냥 君子라고 해석하지 않고 ‘무릇 君子가 되려고 하는 자’라고 해줘야 동어반복을 피하고 그 다음 구절과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수 있다. 이는 이미 ‘學而 8’에서 제기된 바 있으며 앞으로도 君子라는 말이 등장할 때는 상당 부분 이런 식으로 풀이해야 한다.
15
자공은 말했다. “가난하지만 비굴하게 아첨을 하지 않는 것(사람)과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는 것(사람)은 어떠합니까?” 공자는 말했다. “그것도 좋다. 허나 가난하지만 즐거이 살 줄 아는 것(사람)과 부유하지만 예를 좋아하는 것(사람)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자공은 말했다. “『시경(詩經)』에 ‘잘라내 문지르듯, 갈듯, 쪼고 다듬듯, 그리고 또 갈듯’이라 하였으니 아마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사(賜)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지나간 것을 일깨워주자 앞으로 올 것도 아는구나!”
어떤 일을 함에 적당히 하는 게 아니라 절실함과 정성스러움이 극진하도록 하라는 뜻 아닙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그 文(문)이다. 애쓰는 모습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마[其] 이 『시경』의 구절이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其斯之謂與].” 묻지를 않고 이렇게 어느 정도 단정했다는 것은 자공도 나름대로 자신 있게 공자의 의중을 파악했다는 뜻이다.
공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를 권유했고 이에 자공이 바로 알아듣고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절실함과 정성스러움[切磋琢磨=文]의 중요성을 파악해 내자 흡족해 하고 있는 것이다.
16
공자는 말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혹은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평가해 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 ‘學而 14’는 배움[學]의 문제였고 ‘學而 15’는 즐거움[樂]과 예를 좋아함[好禮]의 문제였다. 각각 ‘學而 1’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배움[學]은 說(열)이고, 벗[朋]과의 지적인 교류는 즐거움[樂]이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 구절, 즉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이면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이다. 공자는 마치 바로 이 구절에 이어 군자(君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와 거의 유사한 구절이 ‘憲問 32’에 나온다.
공자는 말했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衛靈公 18’도 비슷하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파하지 않는다.
공자는 말했다. “자신이 자리에 있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자리에 가게 될 준비가 되었는지를 걱정하라.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하게 되려고 노력하라.”
이처럼 ‘學而’ 편 열여섯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子曰(자왈)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 有朋(유붕)이 自遠方來(자원방래)면 不亦樂乎(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이면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를 중심으로 나선형을 이루면서 단계적으로 의미를 넓혀가는 구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學而’ 편 열여섯 장을 통틀어 키워드를 하나만 고르라면 배움[學]이요, 그 다음은 君子(군자), 그 다음은 禮(예)라고 할 수 있다.
『논어』 맨 마지막 편인 ‘堯曰’의 마지막 장, 즉 우리의 최종 목적지 ‘堯曰 3’은 이런 말로 끝난다.
공자는 말했다.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고,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 無以知人也].”
『논어』라는 책을 읽어내는 키워드로 필자가 知人(지인)의 문제에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남을 알고[知人] 자기를 닦는[修己] 문제로 시종(始終)하는 책이 바로 『논어』이기 때문이다.
2편 爲政(위정)
1
공자가 말했다. “정치를 다움[德]으로 하는 것은 비유컨대 북극성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별들이 그것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문제는 德(덕)이다. 德만 이해하면 나머지는 그냥 넘어가도 될 정도로 德이 핵심이다. 그런데 德은 그냥 德인가? 더 이상 의미를 풀어낼 수 없는가? 德은 번역하지 않고 그냥 德으로 읽고 지나가면 그만인가? ‘爲政以德(위정이덕)’, 즉 德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德治(덕치)다. 나올 것은 다 나왔다. 그런데도 아무 내용이 없다. 문제는 역시 德이다. 德이 안 풀리면 德治고 ‘爲政以德’이고 간에 모호하고 애매한 개념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爲政 3’에 法治(법치)와 德治(덕치)를 비교하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백성을 법령[政]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이 법망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백성을 다움[德]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 감화될 것이다.”
법과 제도 그것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이끌어내는 힘, 그것이 여기서의 德(덕)이다.
‘顔淵 10’에서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문제, 즉 德을 높이는 문제[崇德]에 관해 질문을 한다. 이에 공자는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충(忠)과 신(信)을 주로 함으로써 의로움[義]을 실천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崇德]이다.” 개인의 사사로움을 극복하고 매사에 최선[忠]과 믿음[信]을 다하여 이(利)가 아니라 의(義)로 옮겨가려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쌓이게 되는 정신적 공력(功力)이 바로 德이라는 것이다.
‘顔淵 21’에서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다시 崇德(숭덕)을 묻자 공자는 보다 간명하게 답한다.
“일을 먼저하고 이득은 뒤로 하는 것[先事後得]이 덕을 높이는 것[崇德] 아니겠는가?”
先事後得(선사후득)은 선공후사(先公後私)와 같은 말이다. 공명정대한 일처리 능력이 德이다. ‘憲問 35’에서 공자는 빼어난 말[馬]이라고 칭찬할 때 그것은 그 말의 힘[力]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다움[德]을 칭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이 말로서 빼어남, 인간이 인간으로서 빼어남, 그것이 바로 德이다. 그것은 말의 말다움, 인간의 인간다움과도 통한다.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해 볼 때 일단 ‘爲政 1’에 나오는 德은 탁월(卓越), 특출(特出), 출중(出衆)과 통한다. 우리말로는 빼어남이다. ‘~다움’이 바로 빼어남이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말은 인간으로서 빼어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고, 군주가 군주답다는 것도 군주로서 빼어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며, 신하가 신하답다는 것도 신하로서 빼어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德은 빼어남이자 다움이다. 德治(덕치)는 자연스레 솔선수범(率先垂範)에 의한 정치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빼어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교만하거나 소홀히 하면 빼어남, 다움은 사라져버린다. 『서경(書經)』에 ‘德日新(덕일신)’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곧 빼어나기 위해서는, 또 어렵사리 갖추게 된 그 빼어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날이 새로워지려는 노력[日新又日新]’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결국 ‘爲政以德’의 德은 군주로서의 다움이나 빼어남을 말한다. ‘군주로서의 빼어남은 무엇인가? 어떤 군주가 빼어난 군주인가?’ 하는 문제는 ‘顔淵 11’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본문만 살펴본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법[政]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君君]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臣臣]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父父]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子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이렇게 말한다. “좋은 말이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제아무리 곡식이 많이 있다 한들 내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君君(군군)은 바로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 빼어난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신하도 마찬가지고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君君이라는 게 제자리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진다는 것은 자기발전과 승화가 필수적이다. 신하 또한 신하다워지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다. 德(덕)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文(문)을 배우고 틈날 때마다 (몸에) 익히라는 ‘學而 1’ 첫 문장의 본뜻이다. 學而時習(학이시습)은 바꿔 말하면 다움[德]을 갖추기 위해 쉼없이 애써야 한다는 뜻이다.
2
공자는 말했다. “『시경』 삼백 수를 한 마디 말로 덮을 수 있으니, 곧 생각함에 사특(邪慝)함이 없다는 것이다.”
“일을 먼저 하고 이득은 뒤로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 아니겠는가?
‘爲政 1’의 풀이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이 구절이 公(공)을 통해 ‘爲政’ 1과 2를 연결하고 있다.
‘學而 15’에서 자공(子貢)은 『시경』을 근거로 切磋琢磨(절차탁마)를 언급한 바 있고 여기서 다시 공자는 詩三百을 한 마디로 덮으면[蔽] 思無邪라고 하면서 『시경』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시경』은 『논어』에 앞선 기본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思無邪’라는 말 자체가 『시경』에 실려 있는 시(詩)의 시구(詩句)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논어』의 맥락에서 詩(시)가 갖는 의미를 잘 살펴보면 德(덕)과 詩는 무관치 않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詩는 잘 된 詩이며 그중에서 가장 잘 된 詩 300여 수를 한데 모은 것이 『시경』이다. 『논어』에서 詩와 『시경』을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陽貨 9’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는가”라고 꾸짖은 다음 詩의 효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흥기할 수 있게 해주고[可以興],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고[可以觀], 무리를 이룰 수 있게 해주고[可以群], 원망할 수 있게 해주고[可以怨], 그리하여 가까이는 아비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해준다.”
이 말을 보는 순간 ‘爲政’ 1과 2가 바로 연결됨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당시 공자가 생각했던 詩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詩와는 차원이 다르다.
3
공자는 말했다. “백성을 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이 법망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백성을 빼어남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 감화될 것이다.”
이 글은 대구(對句)와 대조(對照)를 사용한, 간명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문장을 보여준다. 앞의 구절은 흔히 말하는 法治(법치) 만능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것이고, 뒤의 구절은 德治(덕치)의 효과가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恥]을 알게 해서 자발성에 기초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법제금령과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免]에만 힘쓰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無恥]. 타율(他律)이다. 반면 다움[德]과 禮(예)로 이끌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且] 스스로를 바로잡게[格] 된다. 자율(自律)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수줍음과는 전혀 상관없고 염치(廉恥)를 뜻한다. 최소한의 자존심과 연결된다.
그런데 공자의 이 말을 기존의 학자들은 흔히 이분법으로 나눠서 보는데 그것은 현실주의자 공자를 모르는 데서 나온 치명적인 오해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나겠지만 공자에게 法治와 德治는 경쟁하는 두 정치스타일이 아니라 함께 겸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통치방법이다. 공자가 여기서 法治를 버리고 德治로만 일관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앞의 구절은 德(덕)과 禮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오로지 법제금령과 형벌로만 백성을 위압해서 통치하려는 수많은 패왕(覇王)들의 통치행태를 비판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려는 진의(眞意)는 法治를 쓰되 언제나 德과 禮가 그것을 뒷받침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爲政’ 1, 2, 3을 일관하는 주제가 다움[德]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기발전과 상승을 통한 솔선수범(率先垂範)과 통한다.
4
공자는 말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문을)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고, 마흔 살에 혹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 살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해도 그것이 세상의 법도를 넘지 않았다.”
이 장은 우선 공자가 자신의 70년 생애를 간략하게 자술(自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공자가 자신의 삶의 역정(歷程)을 예로 들어 제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해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준거틀을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자신은’이 아니라 ‘무릇 사람은’으로 시작해야 한다. ‘무릇 사람은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하고, 30세에 스스로 일어서야 하며, 40세에는 어디에도 혹하지 않아야 하고, 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게 되어야 하고, 60세에는 무엇을 들어도 화를 내지 않게 되어야 하고, 70세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세상의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爲政’ 편을 이끌고 있는 다움[德]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자는 시기별로 그 나이에 맞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 서른 살다운 삶, 마흔 살다운 삶, 쉰 살다운 삶, 즉 한 인생의 시기마다 갖춰야 하는 다움[德]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인생은 자신을 부지런히 닦아가는[修己] 삶이다.
‘泰伯 8’에서 공자는 “예(禮)에서 선다[立於禮]”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立이 禮(예)와 관계되는 것이다. 즉 공자가 立이라고 할 때는 禮의 세계를 몸에 체득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논어』에 나오는 안연(顔淵)의 다음과 같은 말이 쉽게 이해된다. 그는 공자가 자신을 이끌어준[道] 방법을 ‘子罕 10’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文-애씀)으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禮)로써 나를 다잡아주셨다[博我以文 約我以禮].” 즉 공자는 자신이 열다섯 살 때[文]와 서른 살 때 깨우친 바[禮]를 제자의 교육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 자신도 ‘雍也 25’와 ‘顔淵 15’에서 “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문(文-애씀)을 통해 배움을 넓히고, 그 배운 바를 예(禮)로써 다잡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學而時習(학이시습)’을 연상시킨다.
이번에는 ‘顔淵 1’에서 안연이 공자에게 仁(인)을 묻자 ‘克己復禮(극기복례)’라고 대답한 대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선다는 것은 이처럼 사사로움을 벗어나[克己] 공적인 禮(예)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仁을 행하는 것[爲仁]이다. 克己(극기)는 곧 立己(입기)다.
‘顔淵 21’에서는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惑(혹)에 관해 묻자 공자는 좋은 질문이라고 평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망각해 그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혹(惑) 아니겠는가?”
그리고 ‘顔淵 22’에서 안연이 知를 묻자 知人(지인)이라고 답한다. 결국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화(禍)를 빚어내는 것이야말로 惑이라고 공자는 정의한 것이다. 不惑은 이를 멀리한다는 것이다. 결국 不惑은 知人이다.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면 惑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마흔에 知人하고 오십에 知天命(지천명)하는 것이다.
‘陽貨 26’은 마흔 살과 不惑 그리고 知人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공자는 말했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으면 그대로 끝날 뿐이다.”
이제 우리는 공자가 말한 열다섯, 서른, 마흔의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공자의 또 다른 발언을 미리 살펴보자. ‘子罕 29’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자는 말했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도를 행하는 데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또 더불어 도를 행하는 데 나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함께 뜻을 세울 수는 없으며, 또 더불어 함께 뜻을 세웠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권도(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
여기서 공자가 자신의 생애를 시기별로 핵심어를 통해 요약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5
맹의자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어기지 않는 것이다.” 번지가 공자가 타는 수레를 몰고 있을 때였다. (이때 공자는 문득 맹의자와의 문답이 떠올랐다.) 그래서 공자가 일러 말하기를 “맹의자가 효를 묻길래 답하기를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노라”고 한다. 번지가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말했다.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 지내고, 예로써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 지금까지 총론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각론에 들어가면서 孝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學而 11’의 孝를 고찰할 때 ‘爲政’ 5, 6, 7, 8의 ‘효를 묻다[問孝]’를 미리 간략하게 살펴본 바 있다. 그때 이야기한 대로 ‘爲政’ 5, 6, 7, 8을 하나로 꿰는 테마는 孝이다. 공자에게 孝란, 유자(有子)가 말한 대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어진[仁]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지표다. 사람을 아는 것[知人]의 첫 걸음이다. 孝는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인간의 태도[禮]이기 때문이다.
맥락으로 보자면 ‘爲政’ 1, 2, 3은 모두 다움[德]과 관계된 것이고, 4는 공자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나이별로 갖춰야 할 다움[德]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여전히 德(덕)을 이야기하는 문맥 속에서 孝의 문제와 만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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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무백이 효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병들면 어떻게 하나라는 것만을 걱정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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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오늘날의 효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잘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다. 개나 말도 모두 그런 정도는 챙길 줄 안다. 봉양하는 데만 힘쓰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개나 말과) 구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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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얼굴빛을 온화하게 갖는 것이 어렵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는 아랫사람(자식)이 그 수고로움을 떠맡아 하고 술과 밥이 있으면 윗사람(부모)에게 잡수시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데) 일찍이 그것을 일러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논어』의 편찬자는 ‘爲政’ 편 서두에서 다움[德]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5, 6, 7, 8에는 연이어 孝의 문제를 제기한 것일까? 물론 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知人(지인)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孝는 부모 자식 간의 문제여서 너무 간단하고 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공자는 ‘爲政’ 5, 6, 7, 8을 통해 일단 다양한 각도에서 孝를 제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孝는 한 사람의 仁(인)/不仁(불인)을 판단하는 知人의 차원에서 중요한 척도로 삼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爲政’ 5, 6, 7, 8에서 보여준 대로 孝는 다양한 측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거나 쓰려 할 때) 어떤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의 孝를 행하는지를 봄으로써 그 사람의 孝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수 있고,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사람됨에 대한 총체적 판단으로 이어져도 크게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즉 知人의 문제이다. 하긴 속된 말로 자기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모시고 누구를 이끌겠는가? 知人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이런 해석의 적실성은 다행스럽게도 다음에 나오는 ‘爲政 9’가 재확인해 준다.
그리고 ‘爲政’ 5, 6, 7, 8은 孝를 실마리로 삼아 애씀[文]의 강도가 단계적으로 높아져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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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한다. “(초창기에) 내가 안회와 더불어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내 말과 뜻을 어기는 바가 없어서 어리석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물러간 뒤에 그의 사사로운 생활을 면밀하게 살펴보니 오히려 충분하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드러내어 실행하고 있었다. 안회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여기서 더 이상의 언급은 없지만 공자가 안회의 사생활 중에서도 특히 면밀하게 살펴본[省] 모습은 바로 孝(효)와 관련된 부분이었을 것이었다. 그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군자(君子)의 대명사였고 이 책 『논어』에도 별도로 ‘顔淵’ 편이 있을 만큼 공자의 총애를 받았던 수제자이자 인격자였다. 이런 맥락에서 공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知人之鑑]을 이어지는 장들을 통해 좀 더 소상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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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말했다. “(사람을 알고 싶을 경우) 먼저 그 사람이 행하는 바를 잘 보고, 이어 그렇게 하는 까닭이나 이유를 잘 살피며, 그 사람이 편안해 하는 것을 꼼꼼히 들여다본다면 사람들이 어찌 그 자신을 숨기겠는가? 사람들이 어찌 그 자신을 숨기겠는가?”
결국 사람을 보는 법을 제대로만 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의 사람됨을 빈틈없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도 처음에는 안회의 사람됨을 잘 몰랐지만 결국 이 같은 방법을 통해 안회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뒤에 가면 반대의 경우도 나온다. 공자는 재아(宰我)라는 제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었는데 후에는 그로 인해 말만으로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새삼 知人(지인)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된다.
11
공자는 말했다. “옛 것을 배워 익히고 그리하여 새것을 알아내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문맥이 전환한다는 데 있다.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살피는 길에 관해 살펴보았다면 이제 군자(君子)의 길을 논하기 위한 총론 차원에서 이 구절이 제시되었다고 보는 게 무난할 듯하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군자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어진다.
군자의 자기수양[修己]을 위한 첫걸음은 역시 『논어』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학이시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學而 1’의 풀이에서 이미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學而時習은 앞으로 보게 될 溫故而知新과 정확하게 맥이 통한다. 그리고 자기혁신에 좀 더 강조점을 두자면 『대학(大學)』에 나오는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과도 같은 뜻이다.” 學(학)=溫故(온고)이다. 그리고 時習(시습)은 답습(踏襲)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훈련과 준비이다. 그러고 나면 知新(지신)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日新(일신)은 日知新(일지신-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익혀)에서 日修己(일수기-매일매일 스스로를 갈고 닦고)를 거쳐 知人(지인)과 知天命(지천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日新又日新’은 중첩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 장에 군자론(君子論)이 이어지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12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쓰임새가 한정된) 그릇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릇, 접시, 도구, 기관(器官), 그릇으로 쓰다, 그릇으로 여기다, 존중하다 등등이 器(기)의 뜻이다. 일단은 주희의 해석을 따라 ‘군자는 각각 그 한정된 용도만을 갖고 있는 그릇과는 다르다’로 풀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듯하다. ‘公冶長 3’은 공자가 염두에 둔 그릇[器]이 뭔지를 보여준다.
자공이 “저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말했다. “너는 그릇[器]이다.” 이에 자공이 “어떤 그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말했다. “나라의 제사에 사용될 만한 귀중한 그릇이다.”
실은 그릇이 아니다[不器]고 해야 君子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칭찬인데 공자는 자공(子貢)에 대해 그릇이긴 하나 귀하게 쓰일 그릇이라고 말함으로써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기는 했다. 자공은 바로 다음 장에도 질문자로 등장한다. ‘八佾 22’에는 관중(管仲)의 그릇[器]이 작다는 공자의 평이 나온다. 『논어』에서 그릇은 사람을 알고 평가하는 데[知人] 핵심적인 개념이 되고 있다.
그리고 ‘爲政 11’부터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배움[學], 말[言], 실천[行] 등 君子가 되기 위한 자세나 조건이다.
따라서 不器를 앞의 ‘爲政 11’에 연결 지어 특정 전문지식보다는 보편적인 인간과 세계에 관한 공부를 하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고, 뒤의 ‘爲政 14’를 위한 일종의 개념정립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어지는 ‘爲政’ 13, 14, 15, 16은 不器로서의 君子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봐도 무방하다.
13
자공이 군자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그 말하려는 바를 먼저 실행에 옮기고, 그런 연후에 그 실행한 바를 바탕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군자이다.”
공자는 “그 말한 바[其言]를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새로운 다짐이나 약속을 하지 말고 그 말한 바를) 먼저 실천하고, 그런 연후에 그 실천한 바를 바탕으로[從之]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이 군자이다”라고 답했다. 물론 이것은 말이 앞서는 자공의 병폐를 일깨워주는 가르침이자 학식을 지향하는 君子의 일반적 폐단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언행일치(言行一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와 관련된 구절을 잠깐이나마 본 바 있다. ‘學而 14’의 ‘敏於事而愼於言(민어사이신어언)’이 바로 그것이다. 일을 할 때는 민첩하게 하고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里仁 24’에서 거의 비슷하게 반복된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말은 어눌하려고 애쓰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欲訥於言而敏於行].”
欲(욕)은 ‘애써야 한다’이다. 敏於事(민어사)=敏於行(민어행)이고 愼於言(신어언)=欲訥於言(욕눌어언)이다. 일을 행할 때는 민첩하고 신속하게 하고 말을 할 때는 신중하게, 즉 일부러 어눌한 듯이 하려고 해야 한다.
14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마음으로 친밀히 하되 세력을 이루지 않으며, 소인은 세력을 이루되 마음으로 친밀히 하지 않는다.”
여기서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논어』에서 처음으로 君子(군자)와 小人(소인)을 대비시켜 설명하는 구절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里仁 11’에서 공자는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처하는 곳의 편안함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君子는 공적인 가치를, 小人은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선악(善惡)보다는 공사(公私)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憲問 7’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자[不仁者]는 있어도 소인이면서 어진 자는 없다.” 어질지 못한 君子는 있어도 어진 小人은 없다는 말이다. 君子와 仁子(인자)의 관계가 상호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발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듯 君子/小人의 짝[對]은 선악(善惡)보다는 공사(公私) 혹은 도량의 대소(大小)에 상응한다.
15
공자는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면 속임을 당하기 쉽고, (반대로) 생각만 하고 배우지는 않는다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배움[學]과 생각[思]의 관계를 논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논어』 편찬자의 의중을 생각한다면 주어로 君子(군자)를 추가하는 게 더 정밀할 수 있다. 그러면 군자론의 문맥에 자연스레 이어진다. 즉 爲己之學(위기지학)을 해야 하는 君子가 배우는 것 자체에만 몰입해 배운 것을 익히고 생각해서 반추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결국 속임수[罔]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반대로 배움은 없이 생각만 한다면 황당무계의 지경에 빠지기 십상이니 위태롭다고 말한다. 앞에서 본 대로 ‘陽貨 23’에서 “군자가 용맹[勇]만 있고 의(義)가 없으면 (국가 차원의) 난(亂)을 일으킨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생각에는 배움이 갖춰져야 하고 용맹에는 義(의)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생각과 배움은 君子가 되려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길이다.
반대로 小人(소인)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만 하고 배우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아마도 공자는 후자를 더 위험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뒤에서 보게 될 ‘衛靈公 30’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일찍이 낮에는 밥도 먹지 않고 밤에는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생각만 해보았지만 얻는 것이 없었다. (생각만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배우는 것만 못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각이 질(質)이라면 배움이 문(文)이다. 앞서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원래 『논어』에서 배운다는 것도 문(文)을 배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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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말했다. “이단에 빠지면 그것은 해로울 뿐이다.”
일단 바로 앞 장과 이어진다. ‘爲政 15’에서 말한, 생각만 하고 배우지는 않는 사람은 십중팔구 異端(이단)에 빠질 위험이 높다.
‘子路 4’는 일종의 사례를 통한 풀이다.
번지가 공자에게 농사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공자는 말했다. “나는 늙은 농부만도 못하다.” 그러자 번지가 채소 가꾸는 것이라도 배울 것을 청한다. 이에 공자는 “나는 늙은 농군만도 못하다”고 답한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말했다. “소인이구나, 번지여.”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곧 백성들이 감히 불경을 행하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곧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곧 백성들이 감히 실상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이가 없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서라도 올 것이니 어찌 내 능력을 농사짓는 데 쓰겠는가?”
‘子張 4’는 이를 총괄해서 잘 요약하고 있다.
자하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작은 도라 하더라도 반드시 보아줄 만한 것이 있겠지만 원대함에 이르는 데 장애물이 될까 두렵다. 바로 이 때문에 군자는 작은 도는 하지 않는 것이다.”
작은 도[小道]가 바로 異端과 통한다. 원대함[遠]은 公道(공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