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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런저런 해석을 참고하기에 앞서 ‘學而(학이)’ 편에 한정해서 ‘學’이라는 글자가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지 그 용례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공자는 ‘學而 6’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순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에는 믿음이 담겨야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몸소 익혀 행하면서도 남은 힘이 있거든 그때 가서 문(文)을 배우도록 하라[學].”

이한우 저.

인간학이자 정치학, 윤리학이자 인간경영학, 그리고 조직심리학이자 인생의 네비게이션, '논어' 다시 읽기

들어가는 말: 왜 '논어'인가?

『논어』와 나

그런데 주희가 주를 단 『논어집주』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의문점은 늘어만 갔다. 간혹 ‘언어학자’ 주희의 통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의 안내만으로 『논어』를 읽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로서는 그 밖의 다른 출구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됐다. 그 후로 최근까지 100번 이상 읽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以論解論(이론해론)’, 즉 『논어』로 『논어』를 풀어내보자는 발상이었다. 부분과 전체는 순환관계를 형성하므로 부분은 전체를 통해 해석하고, 전체는 부분에 대한 해석의 총합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은 필자가 대학에서 전공했던 해석학 이론의 기본원칙이다. 다만 이런 원칙이 과연 『논어』에도 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논어』의 편찬자가 그런 해석이 가능하도록 책을 편집 구성했는지가 관건이었다.

방침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는 것이었다. ‘500개 가까운 장(章)들이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어』는 느슨한 게 아니라 아주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게 얼개가 짜인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가진 책이었다. 잠언집도 아니고 잡록(雜錄)도 아니었다. 20개의 편(篇)과 498개의 장(章)이 말 그대로 거미줄처럼 복합적인 상호연계를 이루며 하나의 훌륭한 중첩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둘째는 『논어』에서 의미가 모호한 단어나 문장, 장(章)들을 『논어』에서 규명해 보자는 것이다. 결국 미시적으로는 文(문)이니 約(약)이니 惑(혹)이니 明(명)이니 하는 단어에서 시작해 문장이나 장(章)도 상호점검을 통해 『논어』에서의 의미를 추출해 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비교적 순수한 『논어』의 맥락을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이때 ‘순수한’이란 의미는 해석자의 주관이 가능한 한 배제되었다는 뜻이다. 그 작업은 곧 『논어』의 편찬자가 했던 작업을 역으로 추적해 올라가는 일종의 추체험(追體驗)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서해석학에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보다는 『요한복음』의 편찬자인 요한의 편찬의도를 추적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다고 보면 된다.

以論解論(이론해론)의 길

이제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이 책은 以論解論의 방법을 채택했다. 그것은 『논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 전체를 읽는 것과는 다르다. 단편 단편을 떼내어 읽으면 공자가 더 크게 들어오겠지만 우리처럼 『논어』를 거대한 체계의 하나로 읽을 경우에는 공자의 발언 못지않게 『논어』의 편찬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요한복음』의 편찬자 요한을 강조했던 것과 같은 논점이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오히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책을 편집한 그 편찬자의 의도가 중요할 뿐이다.

끝으로 이 책을 읽어가는 법에 대해 간략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논어』에 관심이 있고 한두 번이라도 『논어』를 읽어본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했다. 이런 독자들이라면 먼저 한문(漢文) 원문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본 다음, 본문의 번역과 비교해서 보고, 풀이를 읽어보면 된다. 그리고 풀이를 읽고 난 후에는 본문 번역이라도 다시 한 번 읽고 나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주기를 바란다. 물론 원문을 다시 정독하면 더욱 좋다.

그러나 『논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맨 앞에 나오는 한문 원문은 피해가도 된다. 장마다 원문 뒤에 있는 번역문을 먼저 본 다음 풀이를 읽고 맨 마지막에 한문 원문을 하나씩 뜯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훌륭한 독법(讀法)이 될 수 있다.

어느 쪽이건 한 장이 끝날 때마다 번역문의 뜻을 충분히 음미한 다음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줄 것을 부탁한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장에서 장으로 넘어감[移行]에 『논어』의 중요한 내용들이 대부분 숨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왜 『논어』인가?

1편

공자는 말했다. “(문을) 배워서 그것을 늘 쉬지 않고 (몸에) 익히면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 뜻이 같은 벗이 있어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오면 진실로 즐겁지 않겠는가? (이런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속으로 서운해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진실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면서 『논어』라는 거대한 산악(山岳)을 오르는 길에 들어서보자.

“공자(孔子)가 일생 동안 말한 것들이 무수할 텐데 『논어』의 편찬자는 왜 하필이면 이 세 구절을 산악의 초입에 해당하는 책 첫머리에 둔 것일까?”

당연히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저런 해석을 참고하기에 앞서 ‘學而(학이)’ 편에 한정해서 ‘學’이라는 글자가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지 그 용례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공자는 ‘學而 6’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순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에는 믿음이 담겨야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몸소 익혀 행하면서도 남은 힘이 있거든 그때 가서 문(文)을 배우도록 하라[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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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논어로 논어를 풀다 (last edited 2024-10-29 06:23:05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