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격에 따른 구별
Contents
1장에서 우리는 사람을 읽어내는 아홉 가지 징후, 즉 구징(九徵)을 따라가 보았다. 신(神)에서 시작해 의(儀)에서 끝나는 그 아홉 겹의 그물은, 이론적으로는 사람의 속을 낱낱이 비추는 거울이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마주해 이 그물을 던져 보면 곤란한 일이 벌어진다. 아홉 징후가 골고루, 흠 없이 갖춰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개는 아홉 중 하나나 둘이 유난히 두드러지고, 나머지는 그 두드러진 것에 이끌려 한쪽으로 쏠린다. 그 쏠림이 굳어지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성격'이 된다. 유소는 이것을 체별(體別), 즉 '몸(기질)에 따른 구별'이라 불렀다. 아홉 징후를 읽는 법을 배운 다음에는, 그 징후들이 어떻게 치우쳐 열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로 갈라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읽는 일이 비로소 쓸모를 갖추게 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람
체별 편은 열두 유형을 나열하기 전에, 먼저 그 어떤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이야기로 문을 연다. 중용(中庸)을 갖춘 사람이다. 유소는 이 사람의 '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대신, 맛과 색으로 에둘러 말한다.
夫中庸之德,其質無名。故鹹而不鹼,淡而不𨣈,質而不縵,文而不繢;能威能懷,能辨能訥;變化無方,以達為節。
풀어보면 이렇다. 짠맛이 나지만 소금 덩어리처럼 짜지만은 않고, 슴슴하지만 아무 맛도 없는 것은 아니며, 바탕이 질박하되 결이 없지는 않고, 무늬가 있되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다. 위엄을 부려야 할 때는 위엄을 부리고 품어주어야 할 때는 품어주며, 말을 잘해야 할 때는 청산유수이고 말을 아껴야 할 때는 어눌한 사람처럼 입을 다문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어느 한 가지 재료로 환원되지 않는다.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짠맛도 되고 슴슴한 맛도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람을 뭐라고 이름 붙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겸덕(兼德) — 여러 다움을 겸비해 어느 하나에 갇히지 않는 상태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 중용의 눈금에서 어느 한쪽으로 넘치거나 모자란다. 원문은 이를 두 부류로 나눠 부른다.
是以抗者過之,而拘者不逮。
항자(抗者)는 앞으로 내닫는 데만 힘을 쏟아 마땅한 도리를 지나쳐버리는 사람이고, 구자(拘者)는 무언가에 얽매여 움츠러든 나머지 마땅한 도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나치는 것도 병이고 못 미치는 것도 병이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저 익숙한 말이 바로 이 대목에서 온다. 유소는 이 두 극단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해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자』에 나오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끌어온다. 노(魯)나라에 선표(單豹)라는 은자가 있었다. 산속 동굴에 살며 세상 사람들과 이해를 다투지 않고 마음을 지극히 안으로만 길렀는데, 일흔이 되어도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붉었다. 그러나 어느 날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몸을 잡아먹히고 말았다. 반대로 장의(張毅)라는 사람은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바깥으로만 자신을 길렀는데, 마흔의 나이에 몸속에서 생긴 열병으로 죽었다. 안을 기른 사람은 밖에서 화를 당했고, 밖을 기른 사람은 안에서 무너졌다. 한쪽으로 치우친 삶은 반드시 그 반대쪽에서 대가를 치른다는 뜻이다.
여섯 쌍, 열두 얼굴
이제 유소는 이 '치우침'을 열두 가지로 세분한다. 각 유형에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 안에는 이미 강점과 약점이 함께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소가 이 열두 유형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열두 유형은 정확히 여섯 쌍으로 짝지어져 있고, 각 쌍은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 방식으로 맞물려 있다. 강의한 사람은 유순한 사람을 나약하다 여기고, 유순한 사람은 강의한 사람을 남을 해치려 든다고 여긴다. 이것이 체별 편 전체를 관통하는 진짜 주제다 — 성격은 자기와 닮은 것은 알아보지만, 자기와 다른 것은 반드시 오해한다.
먼저 열두 유형의 이름과 강점·치우침을 표로 정리해둔다.
유형(한자) |
강점 |
치우침 |
강의(彊毅) |
잘못을 바로잡는 데 뛰어남 |
지나치게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음 |
유순(柔順) |
너그럽고 남을 잘 품어줌 |
결단력이 부족함 |
웅한(雄悍) |
담대하고 일 처리가 화끈함 |
시기와 만용이 많음 |
구신(懼愼) |
공손하고 삼감이 있음 |
매사에 의심이 많음 |
능해(凌楷) |
나라의 근간이 될 만큼 굳건함 |
제 고집을 꺾지 않음 |
변박(辨博) |
얽힌 것을 논리로 풀어냄 |
말이 실상과 겉돌며 흘러넘침 |
홍보(弘普) |
남을 두루 품고 챙겨줌 |
사귐이 흐리고 잡스러워짐 |
견개(狷介) |
검소하고 원칙을 지킴 |
작은 일에 옹졸하게 갇힘 |
휴동(休動) |
일 처리가 시원시원함 |
엉성하고 덤벙거림 |
침정(沈靜) |
정밀하고 미묘한 것까지 헤아림 |
굼떠서 일을 지체시킴 |
박로(樸露) |
속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함 |
은미한 사정을 챙기지 못함 |
도휼(韜譎) |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함 |
과단성 있게 결단하지 못함 |
이 표는 골격일 뿐이다.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여섯 쌍이 서로 마주 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강의와 유순 — 굳셈이 나약함을 나무랄 때
강의(彊毅)한 사람은 원문의 표현으로 여직강의(厲直剛毅), 즉 엄격하고 곧아서 잘못을 바로잡는 데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문제는 이 재주가 도를 넘으면 남의 숨은 허물까지 굳이 들춰내 헐뜯는 버릇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원문은 이 사람의 맹점을 이렇게 짚는다.
彊毅之人,狠剛不和,不戒其彊之搪突,而以順為撓,厲其抗。
사납고 굳센 나머지 남과 잘 어우러지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억셈이 부딪침을 낳으리라는 것은 경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순리에 고분고분히 따르는 태도를 굴복이나 비굴함으로 여기고, 오히려 자신의 꼿꼿함을 더 세게 밀어붙인다. 이런 사람과는 법과 원칙을 함께 세울 수 있지만, 은밀하고 미묘한 사정을 함께 살피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원문은 말한다.
반대편에 있는 유순(柔順)한 사람, 즉 부드럽고 고분고분해 편안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柔順安恕)은 매사에 너그럽고 남을 잘 품어주지만 결단이 무디다. 이 사람은 강퍅함을 남을 해치는 흉기처럼 여겨 두려워한다.
柔順之人,緩心寡斷,不戒其事之不攝,而以抗為劌,安其舒。
마음이 느슨해 일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경계하지 않고, 도리어 굳게 밀어붙이는 것을 남을 상하게 하는 짓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느슨함을 편안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과는 평범한 상식을 따르는 일은 함께할 수 있지만, 의심스러운 사안을 임기응변으로 결단해야 하는 자리에는 세울 수 없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아보면 왜 서로를 오해하는지가 또렷해진다. 강의한 사람의 눈에 유순한 사람은 그저 무르고 나약한 존재다. 유순한 사람의 눈에 강의한 사람은 남을 해치고야 마는 위험한 존재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 다만 자기 잣대로만 상대를 재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조직에서라면, 원칙을 어기는 후배를 가차 없이 지적하는 팀장과, 웬만하면 좋게좋게 덮어주고 넘어가는 팀장을 떠올려볼 수 있다. 전자는 후자를 보며 '저래서야 기강이 서겠나' 혀를 차고, 후자는 전자를 보며 '저러다 사람 다 떠나겠다' 걱정한다. 둘 다 자기 조직에서는 성과를 낸다. 그러나 둘 다 상대의 방식이 통하는 이유는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웅한과 구신 — 용맹과 조심이 서로를 겁쟁이라 부를 때
웅한(雄悍)한 사람, 곧 씩씩하고 사나우며 호걸스럽고 강건한 사람(雄悍傑健)은 일을 맡으면 기세 좋게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그 기세가 지나치면 만용이 되어 스스로 무너지거나 남에게 당할 위험을 살피지 못한다.
雄悍之人,氣奮勇決,不戒其勇之毀跌,而以順為恇,竭其勢。
기운을 떨쳐 용감하게 결단하면서도 그 만용이 자신을 넘어뜨릴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도리어 남의 신중함을 겁먹은 것으로 치부하며 자기 기세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런 사람과는 어려움을 함께 건널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다잡고 자중해야 하는 자리는 함께할 수 없다.
이 사람이 가장 낮잡아 보는 상대가 바로 구신(懼愼)한 사람, 정밀하고 선량하며 매사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사람(精良畏愼)이다. 구신한 사람은 공손하고 삼가는 데는 능하지만 의심이 지나쳐 몸이 굳는다.
懼愼之人,畏患多忌,不戒其懦於為義,而以勇為狎,增其疑。
환난을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이 많으면서도 정작 마땅히 행해야 할 때 나약해질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도리어 용맹함을 경솔하고 무례한 짓으로 여겨 의심을 더 키운다. 이런 사람과는 몸을 보전하는 일은 함께할 수 있어도, 절의를 세우고 뜻을 굽히지 않는 자리에는 세우기 어렵다.
웅한한 사람이 보기에 구신한 사람은 그저 겁쟁이다. 구신한 사람이 보기에 웅한한 사람은 경박하고 무례한 망나니다. 위기 상황에서 앞뒤 안 재고 뛰어드는 소방관과, 매뉴얼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움직이는 안전관리자를 떠올려도 좋다 — 물론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지어낸 예일 뿐이다. 실제로는 두 태도가 함께 있어야 일이 되지만,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능해와 변박 — 소신과 논변이 서로를 위선이라 부를 때
능해(凌楷)한 사람, 곧 강인하고 모범적이며 굳건하고 끈질긴 사람(彊楷堅勁)은 나라의 기둥으로 쓸 만한 재목이지만, 제 소신을 너무 굳게 움켜쥔 나머지 고집스러워진다.
凌楷之人,秉意勁特,不戒其情之固護,而以辨為偽,彊其專。
자기 뜻을 굳게 붙들고 지키면서도 그것이 고집으로 굳어질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남의 논리 정연한 언변을 위선이나 허장성세로 치부하며 자신의 독선을 더 강화한다. 이런 사람과는 바른 도리를 함께 지킬 수 있어도, 여러 사람의 의견에 두루 맞춰가는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이 사람이 못마땅해하는 상대는 변박(辨博)한 사람, 시비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는 사람(論辨理繹)이다. 변박한 사람은 얽힌 문제를 푸는 데는 탁월하지만 말이 실상과 동떨어져 둥둥 떠다니기 쉽다.
辨博之人,論理贍給,不戒其辭之汎濫,而以楷為繫,遂其流。
논리가 넉넉하고 말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말이 실상과 겉돌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원칙과 기준에 따라 자신을 다잡으려는 태도를 도리어 구속이나 방해로 여겨 자기 말의 흐름에 그대로 휩쓸려간다. 이런 사람과는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어도, 마음을 다잡고 매듭을 짓는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능해한 사람의 눈에 변박한 사람은 말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다. 변박한 사람의 눈에 능해한 사람은 융통성 없이 자기 생각에 갇힌 옹고집이다. 회의 자리에서 한번 정한 원칙은 절대 굽히지 않는 임원과,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논리로 판을 다시 짜는 임원이 부딪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아도 좋겠다.
홍보와 견개 — 포용과 결벽이 서로를 더럽다 여길 때
홍보(弘普)한 사람, 두루 남을 아끼고 급한 일을 잘 주선해주는 사람(普博周給)은 품이 넉넉해 누구든 감싸안지만, 그 넉넉함이 지나치면 사귐이 흐리고 잡스러워진다.
弘普之人,意愛周洽,不戒其交之溷雜,而以介為狷,廣其濁。
남을 아끼는 뜻이 두루 미치면서도 그 사귐이 뒤섞이고 흐려질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를 옹졸하고 편협한 것으로 여겨 자신의 흐린 사귐을 계속 넓혀간다. 이런 사람과는 뭇사람을 어루만지는 일은 할 수 있어도, 풍속을 맑게 바로잡는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정반대편에는 견개(狷介)한 사람, 맑음을 지키고 흐림을 물리치는 사람(淸介廉潔)이 있다. 검소하고 원칙을 지키는 절개는 있지만 도량이 좁아지기 쉽다.
狷介之人,砭清激濁,不戒其道之隘狹,而以普為穢,益其拘。
맑음을 좇고 흐림을 물리치면서도 그 도리가 좁아질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두루 사귀는 태도를 더럽고 잡스러운 것으로 여겨 자신의 옹졸함을 더해간다. 이런 사람과는 절의를 지키는 일은 함께할 수 있어도,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홍보한 사람은 견개한 사람을 보며 '저렇게 까다로워서야 누가 곁에 남겠나' 혀를 차고, 견개한 사람은 홍보한 사람을 보며 '저렇게 아무나 다 받아주니 물이 흐려지지' 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인맥을 폭넓게 관리하는 사람과, 몇몇 신뢰하는 사람만 곁에 두는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휴동과 침정 — 속도가 다른 두 사람
휴동(休動)한 사람, 일 처리가 시원시원해 작은 일에 매이지 않는 사람(休動磊落)은 추진력이 좋지만 엉성하고 덤벙대기 쉽다.
休動之人,志慕超越,不戒其意之大猥,而以靜為滯,果其銳。
남보다 앞서기를 바라는 뜻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고요하고 신중한 태도를 정체되고 굼뜬 것으로 여겨 자신의 조급함을 더 밀어붙인다. 이런 사람과는 일을 앞장서 밀어붙이는 것은 함께할 수 있어도, 한 걸음 물러나 남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겸양은 함께하기 어렵다.
반대편의 침정(沈靜)한 사람, 침착하고 고요하며 일의 요체를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沈靜機密)은 정밀함이 미묘한 데까지 이르지만 굼떠서 일을 지체시킨다.
沉靜之人,道思迴復,不戒其靜之遲後,而以動為疏,美其懦。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자신이 남보다 크게 뒤처질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태도를 거칠고 성긴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느긋함을 오히려 아름답게 여긴다. 이런 사람과는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함께할 수 있어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휴동한 사람은 침정한 사람을 답답한 굼벵이로 보고, 침정한 사람은 휴동한 사람을 생각 없이 몸부터 움직이는 성급한 사람으로 본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창업가와, 몇 번이고 검토한 뒤에야 서명하는 재무 담당자 사이의 익숙한 긴장도 이와 비슷하다.
박로와 도휼 — 솔직함과 임기응변이 부딪칠 때
박로(樸露)한 사람, 질박해 숨김이 없는 사람(樸露徑盡)은 마음속이 알차고 진실하지만, 그 알참이 지나치면 거칠고 우직해져 은미한 사정을 놓친다.
樸露之人,中疑實碅,不戒其實之野直,而以譎為誕,露其誠。
속이 곧고 진실하면서도 그것이 거칠고 우직함으로 흐를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하는 태도를 허황된 것으로 여겨 자신의 속내를 아무 데나 쉽게 드러낸다. 이런 사람과는 신의를 세우는 일은 함께할 수 있어도, 상황이 변할 때마다 무게를 달리 재는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도휼(韜譎)한 사람, 속을 감추고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하는 사람(多智韜情)은 헤아림이 뛰어나 남에게 잘 받아들여지지만, 그 술책이 바른 도리에서 벗어나기 쉽다.
韜譎之人,原度取容,不戒其術之離正,而以盡為愚,貴其虛。
남의 마음속을 잘 헤아려 받아들여지려 하면서도 그 술책이 바른 도리를 벗어날 수 있음은 경계하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허허실실한 태도를 도리어 귀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과는 남의 좋은 점을 함께 칭찬해줄 수 있어도,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박로한 사람은 도휼한 사람을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사람으로 여기고, 도휼한 사람은 박로한 사람을 눈치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우직한 사람으로 여긴다. 협상 테이블에서 패를 다 보여주고 시작하는 사람과, 끝까지 속내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 서로를 답답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진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의 칼
여섯 쌍을 다 살펴보고 나면 한 가지가 뚜렷해진다. 이 열두 유형은 저마다 뚜렷한 강점을 지녔고, 그 강점 때문에 세상에 쓸모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모두 중용의 저울에서 벗어나 있다. 항자는 지나치고 구자는 못 미친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의 결함을 돌아보기는커녕, 상대의 결함만 지적하며 자기 확신을 더 굳힌다. 유소는 이 어리석음을 아주 인상적인 비유로 정리한다.
猶晉楚帶劍,遞相詭反也。
진(晉)나라 사람과 초(楚)나라 사람은 칼을 차는 방향이 서로 반대였다고 한다. 진나라 사람이 초나라 사람을 보면 칼을 거꾸로 찼다고 비웃고, 초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을 보면 마찬가지로 칼을 거꾸로 찼다고 비웃는다. 그러나 좌우가 다를 뿐 각자의 방식에는 나름의 쓰임과 이유가 있어서, 사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강의한 사람과 유순한 사람, 웅한한 사람과 구신한 사람이 서로를 나무라는 것도 이와 똑같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인데, 당사자들은 그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착각한다.
왜 배워도 잘 고쳐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치우침은 배움으로 고칠 수 있을까. 유소의 답은 뜻밖에 비관적이다.
夫學所以成材也,恕所以推情也;偏材之性,不可移轉矣。
배움은 재주를 완성하는 방법이고, 서(恕) —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 는 남의 속내를 읽는 방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재주에 치우친 사람의 본성은 쉽게 옮겨가지 않는다. 강의한 사람에게 학문을 가르쳐도, 그 학문은 그의 굳센 본성 위에 쌓여 오히려 남의 흠을 들추는 버릇을 더 날카롭게 다듬어줄 뿐이다. 서(恕)를 가르쳐도 사정은 비슷하다. 각자는 결국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남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信者逆信,詐者逆詐。
신의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신의 있다는 것을 미루어 남도 다 그러리라 미리 믿어버리고, 속이는 데 능한 사람은 자신이 속이려 든다는 것을 미루어 남도 다 그러리라 미리 의심해버린다. 앞의 사람은 정작 자신을 속이려는 사람 앞에서 무방비해지고, 뒤의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투사(投射)'라 부르는 현상의 아주 오래된 표현이다 — 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마음의 거울에 비친 대로 본다.
그래서, 사람을 쓰는 자는
결국 배움이 아무리 쌓여도 한쪽으로 치우친 재주는 도(道)로 들어서지 못하고, 서(恕)를 아무리 발휘해도 모든 사람을 두루 품어내지는 못한다. 이것이 편재(偏材) — 한쪽으로 치우친 재목 — 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다. 그렇다고 이들을 버릴 수는 없다. 오히려 유소는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이에게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사람을 쓰는 어짊(用人之仁)으로 그 탐욕을 다스리고, 사람을 쓰는 지혜(用人之智)로 그 속이려는 마음을 다스린 뒤에야, 저마다 한쪽으로 치우친 수많은 인재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쓰이고 도리가 모든 일과 사람에 두루 펼쳐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 전체가 가리키는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강의한 사람도, 유순한 사람도, 변박한 사람도, 침묵하는 사람도 — 그 자체로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자기와 닮은 사람은 알아보되 자기와 다른 사람은 반드시 오해하는 것이 편재의 숙명이다. 오직 중용을 갖춘 사람만이 이 열두 얼굴을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값어치로 알아볼 수 있다. 강의한 사람의 꼿꼿함도, 유순한 사람의 너그러움도, 변박한 사람의 논리도, 침정한 사람의 신중함도 — 그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깎아내리지 않고 '저것대로 쓸모가 있다'고 볼 수 있는 눈. 그 눈이 갖춰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서로 칼을 거꾸로 찼다고 평생 비난만 하다 끝난다. 이 오해의 구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7장 접식(接識)에 이르면 유소는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깊이 파고들어, 왜 같은 부류의 사람끼리만 서로를 알아보고 다른 부류는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는지를 묻는다.
원 편명: 체별 제2(體別第二) — 참고: 이한우, 『이한우의 인물지』(21세기북스, 2023)
개요로 돌아가기 | 이전: 1장. 아홉 가지 징후 | 다음: 3장. 유형에 따른 직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