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l +All:read 칠레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인지생물학(biology of cognition) 분야의 연구자. FranciscoVarela의 스승이다. {{{ 1928년 9월 14일 칠레 산티아고 출생이며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다.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함께 베이트슨, 비트겐슈타인의 경로들, 비코의 사회적 “의지”, 폴 바이스의 자기생산(self-production),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뒤를 이어 자기생산(autopoiesis) 개념을 창안했다. 또한 신경생물학의 경험적 연구들을 기반으로 세워진 상대주의적 인식론인 급진적 구성주의의 정초자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47년 리쎄오 마누엘 데 살라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 칠레의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같은 대학에서 생물학으로 학위를 마쳤다. 1954년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을 지원받아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해부학과 신경철학을 연구했다. 1958년 하바드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칠레 대학의 “인식 생물학” 센터에서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생물학적 연구 프로그램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정교화하는 데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실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감각적인 공통의 구성물이라는 테제를 입증하기 위해 계속 힘을 쏟고 있다. - 알라딘 저자 소개 }}} 저서로는 * [[책/앎의 나무]] * 있음에서 함으로 이 사람은 무엇을 말할까? 무엇에 써먹을까? ''지도'': '앎의 나무'라는 책이 있다는건 안다. 인지에 관련된 이론이라는 정도를 안다.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견문을 넓혀보자. https://constructivist.info/ [[TheFifthDiscipline#A.2Bx3zVWLKU_.2BvCm8lQ-|TheFifthDiscipline]]에서도 마뚜라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함께했던 [[TheNatureOfSocialCollaboration|연구 작업]]을 돌아보면서 AnneMurrayAllen과 DennisSandow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물리학 원리가 산업의 시대를 지배했듯이, 생물학 원리가 지식의 시대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물학 원리에 따르면 지식, 인간, 조직은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간주됩니다. 물리학 원리에서 생물학 원리로의 이동이 의미하는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부분에서 전체로, (2) 분리에서 통합으로, (3) 개인에서 상호작용으로, (4) 관찰자 외부의 시스템에서 관찰자를 포함하는 시스템으로의 '초점의 이동'입니다.” AnneMurrayAllen과 DennisSandow가 사회 시스템을 보는 관점은 칠레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Maturana의 영향을 받았다. 마투라나는 살아 있는 시스템 안에서 일어나는 인지작용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유명한 인물이다. 마투라나는 지적인 행동은 네트워크의 모든 구성원이 타인을 네트워크 안의 정당한 참여자로 받아들이는 사회 시스템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100명이 넘는 기술자가 '사랑이란 상대를 합당한 타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지식을 넓혀주는 감정'이라고 말하는 마투라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 = 인지생물학의 언어 이해 = 신재영, '인지생물학의 언어 이해: 마뚜라나의 관점', 국제언어문학 제46호 == 1. 들머리 == "Everything said is said by someone." - 말한 것은 모두 어느 누가 말한 것이다. 마뚜라나가 한 말로, '자신의 논의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늘 마음에 새겨두라'고 조언하면서, "한 세계를 산출하는 성찰 자체는 언제나 어느 한 개인이 어느 한 장소에서 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잘... 연역적인 명제가 아니라, 시공간에 갖힌 어느 한 개인의 부분적인 인식이라는 것일까.) == 2. 마뚜라나의 인지생물학 == 개에게 목줄을 채워 줄로 묶어두는 상황이 있다고 할 때, 사람은 목줄이 속박과 통제의 용도로 사용될 것임을 알지만 개는 단지 목줄이 몸에 닿는 감각만 느낄 뿐이다. 이 상황에서 사람과 개의 (인식의) 차이점은, 사람은 관찰자로서 '이중보기(double look)'를 한다는 점이다. '보는 것을 보는' 관찰자의 재귀적 행동에는 언어가 개입된다. 사람은 관찰자 입장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 역할에는 윤리와 책임이 따른다. ('보는 것을 보는'. '메타적인 봄'을 이야기하는듯.) === 2.1. 자기생성 체계로서의 생명 체계 === 마뚜라나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을 시도했다. 그걸 위해 고안한 개념이 '자기생성(autopoiesis)'이다.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낸다는 의미. ([[자끄엘륄]]의 autonomous 개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오토포이에시스 개념은 단세포 생물이나 세포 개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책/앎의 나무]]에서 단세포 생물, 다세포 생물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 같다.) 세포는 자기생성 개체이다. (세포가 자기생성을 한다는 설명이 있겠네.) 그 하위요소들은 상호작용의 그물 안에서 역동적으로 얽혀 있다.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소포체, 리보솜, 세포막 등 여러 요소들이 있다. 그 중에서 마뚜라나가 주목한 것은 정작 주변부 요소로 간주하기 쉬운 세포막(membrane)이었다. 이 공간적 구조물이 없을 경우, 세포 물질은 "분자들의 수프처럼 여기저기 흩어져버려 세포라는 독립된 개체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곧, 세포막은 평소에는 환경과 개체를 '구분'하고, 비상시에는 "자기 옷을 스스로 여민다." 마뚜라나는 이 점을 자기생성체계에서 가장 독특한 점으로 보았다. (왜 이게 독특한가?) 세포막은 공간적, 물리적 기능 외에 세포의 물질대사에도 참여한다. 세포막을 통한 외부와의 에너지 및 물질 교류가 단절되면 세포는 생물로 존속하기 어렵다. 오토포이에시스란 '지속적인 대사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자신을 만들어내는 단위 개체의 활동'인 것이다. (세포막은, 구분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교환/대사의 채널이기도 함.) 막의 경계성과 물질대사의 역동성은 별개의 것이 아닌 통합된 현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현미경으로 단세포생물을 관찰할 때, 배경에서 그 개체를 구분할 가능성은 경계성과 역동성의 통합적 과정 자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함께 다닌다는 것?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처럼, 다른 특성을 가지지만 함께 존재하는 것과 비슷한걸까?) 신경체계는 자극의 수용이라는 면에서는 (섭동 과정을 거쳐) 외부에 열려있지만 인식작용은 내부를 향해 닫혀있다는 것이다. 신경체계는 내부도 외부도 없는, 단지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폐쇄적인 네트워크상의 내적 관계들의 역동일 뿐이다. "내부와 외부는 (외부의) 관찰자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체계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2.2. 구조접속과 섭동 === 개체가 해체되지 않고 조직을 유지하는 한 구조의 변천을 겪게 된다. 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유발될 수도, 그 자체의 역동성의 결과일 수도 있다. 개체들은 각자 개체발생을 하면서 구조적으로 접속(서로 만난다는 뜻인가? 간섭을 하거나)하게 된다. 이 때 반복되는 재귀적 상호작용은 상호 섭동(perturbation, 간섭)의 방식으로 일어나고, 이렇게 구조변화를 주고받는 것을 구조적 연동(structural couping, 구조접속)이라고 한다. (상호작용이면 상호작용이지, '재귀적' 상호작용은 뭘까?) 상호작용하는 개체들이 정체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계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상호 변화할 때 구조적 연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3.4. 인지체계 ===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의 지각 관련 실험들을 재해석하여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구조와 뗄 수 없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야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색체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 생명체계는 곧 인지체계이다. (이것으로부터, 존재=인식, 삶=앎이 성립하게 된다고 한다. "생물들은 구조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생물 조직으로서의 속성은 동일하다.". 다세포체의 속성은 유기체나 인간의 속성과 동일하다.) 유기체의 신경체계는 '정보'를 '입수'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의 어떤 속성들이 섭동될지, 또 그것들이 유기체에 어떤 변화를 유발할지를 결정함으로써 한 세계를 산출한다. 이중보기를 통해 "기술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저 물건'의 밑바닥에 인간의 구조가 깔려 있는 것이다." 곧 닫힌 구조의 인식활동이 세계를 산출하는 것이다. 인식의 이런 속성이야말로 우리의 문제이자 출발점이며 탐구의 길잡이라고 마뚜라나는 밝히고 있다. == 3. 언어에 대한 인지생물학적 이해 == 사람과 같이 치밀하고 광범한 신경체계가 갖추어져 있을 경우 환경과의, 그리고 다른 유기체와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구조접속의 새로운 차원들이 열리면서 새로운 현상들도 나타날 수 있다. (왜? 치밀하고 광범한 신경체계가 뭐가 특이하길래?)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에게는 자기의식과 언어가 생기게 된다. 자기의식은 이중보기와 관련이 되고, 이중보기를 수행하는 관찰자의 활동은 곧 언어의 발생과 연계된다. 관찰자인 우리가 사회적 접속의 틀 안에서 나타내는 행동을 가리켜 의사소통적 행동이라 부르고, 사회적 접속을 바탕으로 생기는 행동조정을 의사소통이라 부른다. === 3.1. 집단적 자기생성으로서의 언어 === 마뚜라나는 인간의 언어도 인지활동과 마찬가지로 오토포이에시스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여기에 구조접속을 결부시켜 설명한다. 곧 '개체발생적'이면서 '의사소통적'인 행동, 또는 '유기체들 사이에 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을 통해 생긴 행동'을 언어적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마뚜라나는 상호작용이 있으면 언제나 언어가 생기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과정에서 조정과정이 중첩될 때 비로소 언어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조정을 조정하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보면, 그런 점에서 유기체 중 인간만이 언어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꿀벌은 행위를 조정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꿀벌은 행위의 조정을 조정하지는 않습니다. 곧 순환(재귀)의 현상들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꿀벌은 자기가 애석하게도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갔었노라고 다른 꿀벌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꿀벌을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분류해야만 할 것입니다. '조정의 조정'이라는 재귀성 기준은 언어의 발생과 언어적 행동 여부에 대한 간명하고 유용한 판별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할 것이다.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 상황에서 언어가 발생하는데, 그때 발생하는 언어는 곧 새로운 대상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 3.2. 관찰자와 언어 === 마뚜라나는 언어의 발생을 두 개의 영역에서 다룬다. 상호작용과 개인 수준의 영역이다. 상호작용의 영역은 앞에서 살펴보았고, 개인 수준에서는, '보는 것을 보는 (이중보기)' 관찰자의 재귀적 행동에서 언어가 발생한다. 유기체는 폐쇄된 인지체계를 속성으로 하는데, 그 중 인간의 독특한 점은 인지적 재귀 행위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보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을 아는' 이중인지적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단 이중인지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것을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곧, 이전의 '무지'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관찰자는 거리를 두고 체계의 내부 역동성 뿐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도 같이 살필 수 있는데, 두 과정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다룸으로써 실재론과 유아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마뚜라나는 '논리적 장부기재'라고 일컬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는 경구는 인식론적 전환을 언명하기 위한 표현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곧 '관찰자'를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관찰자 없이는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나아가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으면 대상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곧 유아론이 되는데, 마뚜라나가 위 경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유아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살피는 것도 이해에 접근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먼저 관찰자가 하는 관찰 행위, 곧 '관찰하기'는 "자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자가고가 함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작동"이다. 새를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는 단지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 잘 하고 있는지 성찰할 수 없다. 인간만이 성찰할 수 있고, 따라서 관찰자가 될 수 있따. 하지만 우리는 항상 관찰자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자기 스스로를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의 관찰을 관찰할 때 관찰자가 된다. 인간은 다만 관찰을 통해서, 구분을 함으로써 말할 수 있을 뿐이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 세상은 생성된다. 관찰자는 처음에는 스스로의 '분리'를 체험하지만, 결국에는 이중인지적 보기를 통해 대상과 연결된다는 '통찰'을 하게 된다. 관찰자와 대상은 '구분하기'를 통해 한데 묶이게 된다. 구분은 곧 의미를 내포하고, 구분의 대상은 대상의 배경과 함께 출현하게 된다. 관찰자의 작동은 '함(doing)'으로 이루어져 있고, 함과 연계되는 언어활동은 실체로서의 언어(language)가 아니라 '언어하기(languaging)'가 된다. == 5. 마무리: 함과 앎, 그리고 삶 == 관찰하기를 관찰하는 관찰자는 구분하기와 언어하기로 세상을 산출하는 앎을 생성하고 이를 다시 언어하기로 드러내는 것이 인지생물학의 재귀적 관점이다. 이때 언어는 "사람다움과 관찰자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마뚜라나의 이론체계에서 관찰자의 인식행위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그의 경구 "Everything said is said by someone."이 그 이론체계에서 갖는 위상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 속에는 함과 앎이 구조접속되어 있음이 함축되어 있고, 윤리적 책임도 포함되어 있다. 이해하기를 이해하는 재귀적 관찰자는 그 이중인지를 모른 체, 아닌 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980년대 중반에, GarethMorgan은 autopoiesis 개념을 조직에 [[http://www.rosspettit.com/2015/11/corporate-middle-management-as.html|적용한다]]. ---- = 구성주의 생물학에서 바라본 '사랑의 윤리' = 신동의, '구성주의 생물학에서 바라본 사랑의 윤리', 윤리연구 제82호 == 요약 ==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사물에 대한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사물에 대한 지각과 인지가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각과 인지는 생물학적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구성주의는 인식의 대상보다는 인식의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신경생물학의 경험적 연구와 관련시켜 '자기생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러한 생각은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다윈의 생각과 충돌한다. 오히려 이들은 진화는 자연표류에 의해 이루어지며, 진화는 방랑하는 예술가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의 생각은 동물의 행동과 진화의 관계를 연구하고 자연선택의 최우선단위를 유전자로 규정하는 도킨스의 관점과도 충돌한다. 도킨스의 관점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생물학적 속성으로 환원시키고,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이른바 '극단적 환원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화를 자연표류의 관점에서 보는 마뚜라나는 '사랑의 생물학'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윤리와 사랑의 관계를 전개한다. = 1. 들어가는 말 = 구성주의 생물학은, 지각과 인지를 생물학적 현상들로 설명하려고 한다. 구성주의는 인식의 대상보다는 인식의 과정을, 또한 그 과정의 구체적인 경험 조건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던진 물음에 따라 규정된 맥락 안에서 효과적인 행동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한 행위 주체를 하나의 조건에서 관찰하더라도 어떤 물음을 갖고 관찰하느냐에 따라 행위 주체의 인지적 행동을 달리 평가할 수 있다."는 말과 통한다. 마뚜라나는 이러한 구성주의를 신경생물학의 경험적 연구 (비둘기의 색채 지각 실험)와 연관시키면서 '자기생성(autopoiesis)'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그에게 있어서 인지는 생물학적 현상이며, 현상을 체험하는 유기체에 관련된 것이다. 단세포나 다세포와 달리 인간이 언어와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유기체의 구성요소로서 작동하는 (풍부하고 넓게 펼쳐진) 신경체계(nervous system)가 있기 때문이다. "신경체계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고 단지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폐쇄적인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상호관계들이 영구적으로 약동할 뿐이다. 내부와 외부는 관찰자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체계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지하는 개체는 자신의 신경 체계를 통해서 이 세상에 구성적으로 관여하고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관찰하기는 관찰자의 구성이며 이 구성은 자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지적 그리고 문화적인 조건에 따라 이루어진다. 인간의 인지 능력의 생물학적 근원을 탐색하면서 생명의 '자기생성'을 주장하는 마뚜라나의 혁명적 생각은 근본적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진화를 주장하는 다윈의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에 의하면, 자기생성을 하는 생명은 '자연표류(natural drift)'를 하면서 다양한 생명종들로 진화했다고 하면서, 진화는 '방랑하는 예술가'와 비슷하다는 은유를 제시한다. 그는 생명체의 능동성을 강조한다. 생명 현상을 유전자로 귀결하려는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과는 전혀 상반된 길을 가는 마뚜라나의 관점은 궁극적으로 생명은 자신이 우발적으로 부딪히는 환경적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생성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생명체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귀결로부터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생존기계"라는 도킨스의 생각은 생명체의 자율적인 자기생성을 주장하는 마뚜라나와 달리 생명은 궁극적으로 유전자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타율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타율적 생성(heteropoesis)'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관점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관점을 토대로 마뚜라나는 윤리와 사랑의 관계를 '사랑의 생물학'이라는 관점으로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객관적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과학을 하는) 주체 의존적인 지식의 영역이며, '그 아는 사람'들의 자질들을 규정하는 방법론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된"다고 주장한다. == 2. 구성적 인지생물학 ==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책/앎의 나무]]에서 인식의 생물학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대안적 관점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한 마디로 인식은, "저기 바깥에 있는 저 세계의 표상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세계를 끊임없이 산출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반 표상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식은 불연속적이지 않고 연결주의적이며, 요소주의적이지 않고 맥락적이고, 관념적이지 않고 신체적이다. 마뚜라나에 의하면, 인식은 구조적 접속에 의한 '구성(enaction)'이다. 이는 서양의 사상사를 관통했던 본질주의를 강하게 거부하는 반-본질주의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의 생각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삶은 일상에서 발생하며, 우리의 존재와 행위 그리고 인식이 함께 뒤얽혀 있다는 점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그들의 관심이며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철학과 과학을 구분했던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앎과 행위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독특한 점은 철학이나 과학의 이론을 빌리지 않고 '구성적 인지생물학'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자신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설득력 있게 내고 있다는 것이다. === 1. 생명체의 조직-자기생성 === 인식활동이 세계를 산출한다는 주장은 철학이나 과학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독단적 사고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즉 이들에 의하면, "인식자의 행위인 인식은 인식자의 생물학적 본성, 곧 생명체의 조직(organization)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생물이 어떻게 개체로서 구성되는지, 그리고 생물에게 고유한 자기생성조직을 바탕으로 어떻게 생물의 정체를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여기서 조직과 구조의 관계는 무엇인가? 조직은 어떤 것이 어떤 것이기 위해, 다시 말해 어떤 것을 특정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구성요소들 사이에 있어야만 하는 관계들이다. 이에 반해 구조(structure)는 특정 개체를 구체적으로 구성하여 그 조직을 실현하는 구성요소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다. 이를테면 어떤 물체를 의자라고 말하려면, 거기에는 다리, 등받이, 앉는 곳이라는 부분들 사이에 앉는 일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의자는 등받이가 없을 수도 있고, 앉는 부분이 가죽이나 나무 혹은 철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처럼 앉는 부분이 나무에서 가죽 혹은 철로 바꾼다면 그 의자의 구조는 변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자의 조직, 즉 의자가 지닌 본래적 기능이 변한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