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5: 성숙 - 죽는 순간까지의 화두
"성장은 확장이고, 성숙은 갈무리다. 평생을 두고 익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화두다."
도예가 김선생의 작업실
김선생은 도자기를 빚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물레 앞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그릇을 빚었다. 얼마나 크게, 얼마나 높게,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는가가 전부였다. 전시회마다 새로운 형태를 선보였고, 사람들은 그의 '성장'을 칭찬했다.
어느 날, 뭔가 달라졌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완벽하게 빚은 그릇이 가마에서 깨졌을 때였을까, 아니면 스승의 투박한 그릇에 차를 마시며 묘한 평온을 느꼈을 때였을까. 그 순간 이후, 물레 앞에 앉은 시간보다 가마 앞에 앉은 시간이 길어졌다. 온도계를 들여다보고, 장작을 조절하고, 그저 기다렸다. 어떤 작품은 세 번이나 가마에 넣었다가 깨뜨렸다.
"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세요?" 젊은 제자가 물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야. 시간을 주는 거지."
요즘 그의 작업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첫 번째는 젊은 도예가들이다. 그들은 물레 앞에 앉아 흙덩이를 힘차게 끌어올린다. 흙이 점점 높아지고, 넓어지고, 다양한 형태로 변해간다.
"선생님, 이번 작품은 제가 지금까지 만든 것 중 가장 큽니다!" "이 형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거예요!"
김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좋아. 잘했어. 그런데 이제 가마에 넣어볼까?"
두 번째는 나이 든 동료 도예가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크기나 형태를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가마 온도에 대해, 유약의 배합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작품은 3번 가마에 넣었어. 처음 두 번은 실패했지. 하지만 세 번째에..." "온도를 단 10도만 낮췄는데, 색이 완전히 달라지더군. 20년을 해도 배울 게 남아."
그들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투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손에 쥐면 묘한 무게감이 있고, 입술에 대면 온기가 느껴진다. 그 그릇에 차를 따르면, 차가 더 깊은 맛을 낸다. 사람들은 그 차를 마시며 묘한 평온을 느낀다.
김선생은 가끔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터 그릇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익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은 왜 없었을까? 그리고... 저 젊은 도예가는 언제 그 순간을 맞이할까?'
어쩌면 내일 맞이할 수도 있다. 완벽하게 빚은 그릇이 가마에서 깨지는 순간. 혹은 10년 후일 수도 있다. 혹은 평생 그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이 문제다.
물레 위에서 그릇은 성장한다. 흙덩이가 높아지고, 넓어지고, 모양을 갖춰간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다.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마 속에서 그릇은 성숙한다. 겉으로는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줄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시간을 견디며, 그릇은 단단해지고, 색을 입히고,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 된다.
젊은 제자가 묻는다. "선생님은 도예가인가요, 도공인가요?"
김선생이 대답한다. "도예가는 만드는 사람이고, 도공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지. 나는 이제 도공이 되어가고 있어. 아직 다 된 건 아니야. 죽는 날까지도 '되어가는' 중일 거야."
성장의 시대, 성숙의 시대
우리는 성장의 언어에 익숙하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올림픽 모토이자, 현대 사회의 주문이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올라가야 하고, 직장에서는 직급이 올라가야 하고, 통장에는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주문이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더"가 답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무언가 쌓였지만 채워지지 않은 허기. 이것이 성숙이 속삭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심리학자들은 이 전환점을 각자의 언어로 포착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대륙에서 작업했지만, 놀랍게도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매슬로는 이를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이라 불렀다. 그는 인생 말년에 자신의 유명한 욕구 위계이론에 한 단계를 더 추가했다. 자기실현 위에 자기초월을.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른다. 그가 이 개념을 발전시킨 직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자기실현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면, 자기초월은 "나를 넘어 무엇과 연결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더 이상 "나"의 완성이 목표가 아니다. "나"를 넘어서는 것, 타인과, 자연과, 우주와, 더 큰 의미와 연결되는 것. 매슬로는 머더 테레사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교했다. 둘 다 자기실현을 이룬 사람들이지만, 초월의 차원에서는 달랐다.
융은 이를 "개성화(Individuation)"라 표현했다. 그는 명확히 구분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 자아를 확립하는 시기와, 그 자아를 넘어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시기. 이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30대에 이 전환을 맞이하고, 어떤 사람은 60대에도 여전히 첫 번째 국면에 머문다.
융의 말은 단호하다: "선형적 진화는 없다. 오직 자기(Self)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발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향해 나선형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때로는 뒤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에릭 에릭슨은 인생의 마지막 과제를 "자아 통합 대 절망(Ego Integrity vs. Despair)"으로 정의했다. 그는 이를 노년기의 과제로 제시했지만, 그의 핵심 통찰은 다른 데 있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든 삶을 돌아보며 큰 질문과 마주한다. 내 인생은 의미 있었는가? 나는 내가 되고자 한 사람이 되고 있는가?
통합은 "나의 인생은 이래야만 했다"는 깊은 수용이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고통도 모두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지혜(wisdom)다. 그런데 에릭슨의 통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통합을 이룬 사람도 절망을 경험한다. 통합은 완결이 아니라, 통합과 절망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천명(知天命)" - 하늘의 뜻을 알았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언급한 나이(50세, 70세)가 아니다. 그 사이의 과정이다. 알았다고 해서 바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앎과 자유 사이에는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숙은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깨달음을 살아내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지천명"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혹은 몇 십 년 후에 "종심"에 이를 수 있다. 혹은 85세에 처음으로 "지천명"을 경험할 수도 있다. 시작의 시기는 각자 다르다.
폴 틸리히는 이 모든 것을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비존재의 위협 - 죽음, 무의미, 고독 - 을 마주하면서도 존재를 긍정하는 용기. 성숙은 불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성숙은 끝이 아니라 방향이다.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향해가는 것이다.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이다.
성숙의 역설: 비워지면서 채워지는
성숙의 가장 큰 역설은 이것이다: 성숙은 덜어내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채우는 과정이다.
도예가의 그릇처럼, 가마 속에서 그릇은 조금 줄어든다. 물기가 증발하고, 불순물이 타버린다. 표면적으로는 손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그릇은 단단해지고, 색을 입히고,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 된다. 줄어들면서 완성된다.
일상에서도 이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 한다. "나는 뭐든 될 수 있어." 하지만 어느 순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의사가 되면 화가가 될 수 없고, 서울에 살면 제주에 살 수 없다. 선택은 포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포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모든 가능성을 붙들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내려놓으면, 비로소 그 하나를 깊이 살 수 있다. 이것이 성숙이다.
융은 이를 "그림자 통합"이라 불렀다. 우리가 부정하고 억압한 자신의 측면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 완벽한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불완전한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더하기도 빼기도 아니다. 갈무리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말한다. "나는 예전만큼 많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어. 에너지도 예전 같지 않아." 표면적으로는 능력의 감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 어디에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알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양은 줄었지만 질은 높아졌다. 흩어졌던 것이 모아진 것이다. 이것이 성숙의 시작이다.
매슬로의 자기초월도 같은 역설을 담고 있다. "이기적인 자아를 초월한다"는 것은 자아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를 확고히 확립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빈 손으로는 내려놓을 것도 없다. 가득 찬 다음에야 흘러넘칠 수 있다.
죽는 순간까지의 화두
한국 전통 선불교에서 "화두(話頭)"는 평생 붙들고 가는 질문이다. "이 뭣고?" "부모 미생 전 본래면목은?" 답이 아니라 질문. 도달이 아니라 방향. 완성이 아니라 과정.
성숙이 바로 그런 화두다.
에릭슨이 말한 "통합"도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그는 강조했다. 통합을 이룬 사람도 때때로 절망을 경험한다. 아침에 평화롭게 일어나도, 저녁에는 후회가 밀려온다. 중요한 것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도 한 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새롭게 필요한 것이다. 어제의 용기가 오늘의 용기를 보장하지 않는다. 매 순간, 비존재의 위협 앞에서 존재를 긍정하는 선택을 새롭게 해야 한다.
공자의 군자(君子)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70세에 "종심"에 이르렀다는 공자도, 그것이 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더 나아갈 길은 없었을까? 아니다. 다만 그 너머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성숙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여전히 익어가고 있다. 성숙에 졸업장은 없다.
이것이 절망적으로 들릴 수 있다. 끝없는 과제, 영원한 미완성.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다.
우리는 '완성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진다. 실수해도 괜찮다. 넘어져도 괜찮다. 어제보다 못해 보이는 오늘도 괜찮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80세 노인도 성숙을 향해 가고 있고, 20대 청년도 성숙의 순간들을 경험한다. 나이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도착이 아니라 여정의 문제다.
성숙이 주는 선물
그렇다면 이 끝없는 여정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도착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얻는가?
첫째, 존재의 평화다.
무언가 되어야 하고, 성취해야 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다.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깊은 인정. 이것이 챕터 3에서 다룬 validation의 궁극적 형태다. 더 이상 외부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인정한다.
도예가 김선생은 더 이상 전시회에서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 좋은 평을 받으면 기쁘지만, 나쁜 평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는 이미 가마 앞에서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 관계의 깊이다.
더 이상 타인을 나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매슬로의 "B-사랑(Being-love)" - 있는 그대로의 사랑. 상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선물이다.
챕터 4에서 다룬 "흘러넘침"이 바로 이것이다. 가득 찬 것은 숨길 수 없다. 성숙한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연민이, 지혜가, 따뜻함이 흘러나온다. 애쓰지 않아도.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셋째, 죽음의 수용이다.
에릭슨이 말한 지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도예가는 안다. 아무리 애정을 쏟아 만든 작품도 언젠가는 깨진다. 누군가 떨어뜨려서, 혹은 시간이 지나 저절로. 하지만 그것이 그릇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유한함이 그릇을 더 소중하게 만든다.
넷째, 지금 여기의 충만함이다.
성장을 추구할 때, 우리는 항상 미래에 산다. "언젠가 내가... 하면..." 하지만 성숙을 향해 갈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산다. 왜냐하면 성숙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이 성숙의 기회다. 화날 때 참는 것이 아니라 화를 온전히 느끼는 것. 슬플 때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통과하는 것. 기쁠 때 집착하지 않고 그 기쁨을 흘려보내는 것. 이 모든 것이 성숙이다.
오늘, 그리고 내일: 물레와 가마 사이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오늘을?
도예가에게 다시 돌아가 보자.
젊은 도예가는 물레를 돌려야 한다. 그릇을 키우고, 형태를 만들고, 기술을 익혀야 한다. 이것이 성장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건너뛸 수 없다. 물레를 돌리지 않은 사람은 가마에 넣을 것이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마가 더 중요해진다. 온도, 시간, 기다림. 이것이 성숙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무시하면, 아무리 훌륭하게 빚은 그릇도 그저 마른 흙덩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두 시간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장 없이는 성숙할 것이 없다. 하지만 성숙 없이는 성장이 의미가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시간이 나이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5세에도 성숙의 순간이 있고, 75세에도 여전히 성장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같은 사람 안에서도 영역마다 다른 시간이 흐른다.
어떤 사람은 일에서는 이미 성숙의 단계에 있지만, 관계에서는 여전히 성장의 과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예술적 표현에서는 가마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재정 관리에서는 아직 물레를 돌리고 있을 수 있다.
성숙은 '나이 들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의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언제든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지금 어느 시간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 나는 지금 무엇을 쌓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갈무리하고 있는가?
-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더 깊은 것을 원하는가?
- 나는 보여주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나누고 싶어 하는가?
- 나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이미 충분하다고 느끼는가?
답이 전자라면, 당신은 성장의 시간에 있다. 후자라면, 성숙이 당신을 부르고 있다.
둘 다 필요하다. 둘 다 아름답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이다.
실천적 제안:
성숙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할 수 있다.
1. 매일 아침, 질문하라: "오늘 나는 무엇을 키울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익힐 것인가?"
2. 전환의 순간 포착하기: 당신의 삶에서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깊이'를 원하게 된 순간이 있었는가? 그 순간을 기록하라. 그것이 성숙의 시작이다.
3. 주간 성찰: 일주일에 한 번, 이번 주에 내가 '확장'한 것과 '갈무리'한 것을 각각 하나씩 적어보라. 둘 중 하나만 있다면, 균형을 찾아보라.
4. 영역별 점검: 일, 관계, 건강, 영적 삶 등 각 영역에서 나는 지금 물레 시간인가, 가마 시간인가? 같은 사람도 영역마다 다른 단계에 있을 수 있다.
5. 가마의 시간 존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라. 가마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20대든 60대든, 지금이 가마의 시간일 수 있다.
6. 깨달음에 주목하라: 성숙은 나이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것이다. "아, 이제는 달라야겠다"는 순간이 올 때, 그것을 무시하지 마라. 그 순간이 당신의 "지천명"이다.
마지막 말: 화두를 품고 살아가기
김선생의 작업실에 찾아온 젊은 도예가가 묻는다. "선생님, 저는 언제쯤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김선생은 빙그레 웃는다. "나처럼? 글쎄, 나도 아직 '나처럼' 되지 못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은 이미 대가이신데요."
"대가? 그런 건 남들이 붙이는 이름일 뿐이야. 나는 아침에 작업실 문을 열 때마다 생각하지. '오늘은 무엇을 배울까?' 그리고 저녁에 문을 닫을 때 생각하지. '아, 오늘도 배웠구나.'"
"그럼... 선생님도 계속 배우시는 건가요?"
"그럼. 평생 배워야지. 그게 이 일이야."
"그럼 언제 완성되는 건가요?"
김선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완성? 완성은 없어. 아니, 정확히는 죽는 순간이 완성이겠지. 그 전까지는 모두 과정이야."
"그럼 계속 미완성인 건가요? 그게 좋은 건가요?"
"좋고말고. 왜냐하면 그게 삶이니까. 삶은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거야. 매일매일. 자네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물레를 돌리다가 어느 순간 가마가 더 중요해지는 때가 온다는 걸. 그게 내일일 수도 있고, 10년 후일 수도 있어. 중요한 건 그 순간이 왔을 때 알아차리는 거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음... 뭐랄까.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질 때? 대신 나누고 싶어질 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이미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 때? 그때가 아닐까."
젊은 도예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종심소욕불유구" -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김선생도 어쩌면 그런 경지에 가까워진 것 같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옳은 것을 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이것도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내일 아침 일어나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또 새로운 배움이 기다린다. 또 새로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도 괜찮다.
왜냐하면 성숙은 도착이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오늘, 이 화두를 품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당신이 스무 살이든, 쉰 살이든, 일흔 살이든.
물레를 돌릴 때는 힘차게 돌리고, 가마를 기다릴 때는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성장할 때는 열정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때는 은근히 익어가며.
그리고 기억하라. 성숙은 나이 들면 자동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과 함께, 지금 이 순간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성장은 확장이고, 성숙은 갈무리다. 평생을 두고 익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