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등'에 대한 강박
이 책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면서, 누군가 성공하려면 누군가는 실패해야만 하는 사회적 장치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다.
경쟁은 우리 생활에 매우 깊이 뿌리를 내리며 삶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이제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지 보다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경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하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먼저 구조적 경쟁structural competition과 의도적 경쟁intentional competition으로 개념을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구조적 경쟁이란 어떤 상황에 의한 것이고, 의도적 경쟁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즉 구조적 경쟁이 승리와 패배라는 구조와 관련된 외부적인 것이라면, 의도적 경쟁은 1등이 되고 싶다는 개인의 욕망과 관련된 내부적인 것이다.
어떤 활동이 ‘경쟁적 구조를 띠고 있다’는 말은 ‘상호 배타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뜻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실패해야만 내가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운명으로 묶여 있다. 소위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라 부르는 포커에서처럼, 한 명이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중 누군가는 정확히 그만큼 잃어야 한다. 상호 배타적인 목표 달성이라는 장치 아래에서는 두 명이나 그 이상의 개인들이 결코 모두는 달성할 수 없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합한다. 몇몇 사회과학자들이 말했듯이 이것이 바로 경쟁의 본질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당신이 져야만 한다. 그럴 때 내가 원하는 그것이 바로 ‘부족한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족함과 뭔가가 객관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고픈 두 사람이 한 그릇의 음식을 놓고 다툴 수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쟁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 ‘높은 지위’이다. 구조적 경쟁이란 대개 몇몇 개인들을 서로 비교하여 그 중 최고인 단 한 사람만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경쟁 그 자체에 승리라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족함이란 것은 원래 부족함이 없던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구조적 경쟁은 몇 개의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다. 예컨대 경쟁은 얼마나 많은 승리자가 나올 수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대학에 지원한 모든 수험생들이 합격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합격을 위해서 꼭 다른 사람이 불합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다른 이의 합격 가능성이 조금 줄기는 하겠지만). 반면 매년 열리는 미스 아메리카 대회는 단 한 명의 여성에게만 왕관을 주는데, 미스 몬타나가 뽑혔다면 미스 뉴저지는 절대 뽑힐 수 없다.
미인 대회나 대학 입시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경쟁자들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상호작용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한 명의 성공이 다른 경쟁자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줄일 뿐이다. 반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을 실패하도록 해야 하는 보다 강력한 구조적 경쟁도 있다. 전쟁이 하나의 예이다. 테니스 역시 그렇다. 테니스 선수들은 서로를 패배시키기 위해 더욱 적극적이다. 반면 번갈아 가면서 게임을 하는 두 명의 볼링 선수는 우승을 위해 상대방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그 게임의 규칙, 그리고 그와 관련된 구조적 경쟁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반해 이제 살펴볼 의도적 경쟁은, 실제로는 꽤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훨씬 더 정의하기 쉽다. 쉽게 말해 이것은 개인의 경쟁심, 즉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성향에 관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구조적 경쟁이 없는 곳에서 벌어질 수 있다. 파티에 가서도 그곳의 누구보다 더 지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온통 정신을 쏟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무슨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카렌 호나이Karen Horney는 신경증(neurotic, 노이로제) 환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이와 반대되는 상황, 즉 의도적 경쟁이 없는 곳에서 구조적 경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하는 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데만 집중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필연적으로 경쟁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렇게 성공을 곧 승리로 규정하는 상황은 사람들이 의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구조 아래서는 경쟁에 반대하는 사람조차 스스로의 의지대로 경쟁을 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불쾌한 스트레스를 낳는다. 의도하지 않은 구조적 경쟁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자신은 의식조차 하고 있지 않은데 누군가 개인의 등수를 매기고 상을 주는 경우이다. 동료를 이기는 데 별 관심이 없는 학생일지라도 타의에 의해 등급이 매겨지고,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된다(경쟁을 두 가지로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경쟁이 학교나 직장을 조직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이는 논쟁거리가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경쟁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므로 대안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사회심리학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는 여기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경쟁적으로competitively’라는 말은 남들과 겨루어 이기는 것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고,
‘협력적으로cooperatively’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독자적으로independently’라는 말은 다른 이들과 관계 맺지 않고 혼자서 뭔가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와 경쟁을 할 때에만 어떤 목표와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경쟁이 전혀 없더라도 일을 완수할 수 있으며, 자신이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단적인 예가 어제보다 단 몇 그램이라도 더 들어 올리려 노력하는 역도 선수의 경우이다.
이제 앞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협력’이라는 대안을 살펴보자. 이 말은 단지 비경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제도를 의미한다. 구조적 협력이란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노력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의 성공은 당신이 성공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노력의 대가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성취에 의해 결정된다. 요컨대 협력적인 교실이란 단지 학생들을 함께 앉히거나, 서로 얘기하도록 하거나, 자료를 공유하도록 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일의 성취는 개인이 아니라 그 반의 모든 학생들에게 달려 있으므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협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개념이 모호한 어떤 이상주의와 연관하여 생각하거나, 기껏해야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경우에나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아마도 협력과 이타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협력에서는 서로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반면 경쟁에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되기 때문에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는 경쟁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절대 진실이 아니다. 구조적 협력은 흔히들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면 이타주의’라는 식의 이분법에 맞서는 개념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돕는 것과 스스로를 돕는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비록 처음의 동기는 이기심이었다고 해도, 협력은 서로를 같은 운명으로 묶어준다. 협력은 현명하며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경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내는 실용적인 선택이며(이는 3장의 주제이다), 타인과의 경쟁 없이도 자신의 능력을 실험하고 즐길 수 있는 놀이를 만들어내는 기초(이는 4장에서 살펴본다)가 된다. 협력이 정신 건강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무엇보다 경쟁 옹호론은 수많은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네 개의 신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신화들은 널리 퍼져 있는 순서대로 이 책의 네 장을 구성하는 토대가 된다.
- 첫 번째 신화는 경쟁이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억측은 별 생각 없이(그리고 증거도 없이) 만들어진 것이지만, 신중히 다뤄져야 한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본성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므로 경쟁에 대한 논쟁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 두 번째 신화는 경쟁이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경쟁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러한 주장은 학교 성적에서부터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법칙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 세 번째는 놀 때도 경합을 벌이는 것이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는 최선의(유일하지는 않지만) 방법이라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놀이를 할 때에도 경쟁한다.
- 마지막 신화는 경쟁이 인격을 형성하고 자신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앞의 얘기들보다 자주 들을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경쟁에서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춰 볼 때 모순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잡다한 설명을 다 빼고 본질만을 본다면 경쟁이라는 제도 자체에 무엇인가 매우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을 패배시키는 데에만 에너지를 쏟고, 또한 그들이 우리를 패배시킬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어떻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이러한 투쟁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까? 우리의 자존감이란 그저 옆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더 잘하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쟁적인 제도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이다. 즉 서로를 이기기 위해 적대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경쟁 자체에 있다.
- 그 뒤로는 앞서 살펴본 경쟁의 네 가지 신화−필연적이며, 더 생산적이고, 더욱 즐겁고, 인격을 형성한다는−에 기초하여 더욱 근본적인 비판을 해나갈 것이다.
- 6장에서는 경쟁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 7장에서는 속임수나 폭력 같은 추악한 일들이, 원래 경쟁 자체는 깨끗하지만 인격적으로 모자란 사람들이 경쟁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벌어지는지, 아니면 경쟁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어떤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지를 논할 것이다.
- 8장에서는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성들도 점차 경쟁적으로 변해가는 오늘날의 추세를 살피고,
- 9장에서는 경쟁을 대신할 협력적인 대안들을 고찰할 것이다.
- 마지막 10장은 경쟁적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학생들이 함께 배울 수 있게 돕는 희망적인 대안에 초점을 맞추었다.
- 끝으로 덧붙인 후기에서는 이 책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초판이 출간된 후 미국 사회에 어떤 변화 혹은 정체가 나타났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장. 경쟁은 필연적인가: 경쟁이 '인간 본성'이라는 신화
본능이라는 카드 게임
경쟁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경쟁의 폐해를 밝히기 전에 경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경쟁은 불가피한가?
자연 세계의 실제 모습
학습되는 경쟁 또는 협력
자연계에서 협력이 더욱 일반적이라는 논의를 했으니 이제 경쟁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반론, 즉 경쟁은 본성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첫 연구는 1937년 사회과학연구협회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후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 분야에 대해 조사된 문헌들의 대표적인 지식들”을 24가지로 분류하여 보고한 마크 메이Mark A. May와 레너드 두브Leonard Doob는 처음을 이렇게 시작한다. “인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타고난 본성이 있으나 그 목표를 남들과 함께할 것인가(협력), 아니면 대립하면서 이룰 것인가(경쟁) 하는 행동 양식은 학습된 것이다.” 이어서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유전적으로 더 근본이며 기초적(또는 원초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경쟁은 적절하고, 바람직하고, 필요하며, 피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유치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주입되고 있다. 이것이 모든 수업의 숨은 뜻이다. 줄스 헨리Jules Henry는 예리한 인류학자의 눈으로 우리의 이러한 문화를 지적했다.
- 보리스는 12/16을 약분하는 문제에 어려움을 느끼며, 겨우 6/8까지 만들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그보다 더 낮은 숫자로 약분할 수 없는지 조용히 묻고, 좀 더 생각해보라고 얘기한다. 다른 아이들은 손을 들고 흔들면서 그 아이가 틀린 문제를 맞히려고 안달이다. 보리스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있다. … 선생님은 학생들을 돌아보며 “자, 그럼 누가 보리스에게 답을 알려줄까?”라고 묻는다. 많은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은 페기를 호명한다. 페기는 4로 분자와 분모를 나누면 된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보리스의 실패로 인해 페기는 성공을 맛보게 된다. 보리스의 낙담이 페기의 행복이 되고, 그의 비참함이 그녀의 기쁨이 된다. 이것이 우리 초등학교 교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 호피, 다코타 같은 인디언 부족들에게 페니의 행동은 믿을 수 없이 잔인하게 보일 것이다.
일부 부모들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가르치는 이러한 상황에 좌절하기도 한다. 아이가 남들과 대립하기보다는 협력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는 부모들도 그러한 가치관을 마음속으로만 품는데, 자신의 아이들만 세상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마음먹은 부모들조차 교육을 위한 그들의 모든 노력들을 무너뜨리는 사회의 단단한 경쟁 구조와 싸워야만 한다. ‘바깥세상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은 곧 다른 이들을 이겨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바깥 세계의 경쟁을 권장하고 유지할 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경쟁 구도를 만든다. 이는 핵가족에서 더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우선 우리는 핵가족이 아이들을 양육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태평양 사람들을 연구했던 일련의 조사에 따르면 “경쟁적인 반응은 …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보다 서구적인 핵가족 제도에서 자란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왜 그럴까?
첫째, 많은 부모들이(보통은 무의식적으로) 가정을 아이들이 서로 경쟁하는 곳으로 만들곤 한다. 경쟁의 열렬한 지지자인 하비 루벤조차도 아이들을 겨루게 함으로써 보다 쉽게 길들이는, “분할하여 지배하는”(divide and conquer, 반대세력의 결집을 방해하기 위해 지배세력이 피지배자들을 경제, 사회, 지역적으로 대립시켜 통치하는 것, 식민지 지배의 전형적인 방식-옮긴이) 양육 방식에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가장 귀여운 아이가 되기 위한 자녀들 간의 경쟁은 바로 엄마에게 가장 이득이 된다. 말하자면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다른 형제보다 먼저 설거지를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 역시 감정적인 보상을 원한다는 것이다. “부모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칭찬, 애정, 지지가 필요하며, 불행히도 많은 경우 이런 것들은 경쟁을 조장함으로써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다.”
어떤 부모는 아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부부끼리 경쟁하기도 한다. “누굴 더 사랑하니?”라고 노골적으로 묻거나 종종 이와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가정 내의 이러한 거의 병적인 현상과 그것이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끔찍한 영향에 대해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요점은 이러한 행동이 가정 내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랑이 무슨 희귀한 상품−계속해서 참여하여 필사적으로 경쟁해야만 얻을 수 있는 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란다. 우리는 사랑받는 것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연관시켜 생각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말들(예를 들어 “누가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아이일까?”)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애정을 구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제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1등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우리를 경쟁하게 만든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경쟁 자체에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자기 영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나 집단 간의 분쟁−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상호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도이치는 어떤 유형의 상호작용이든 스스로를 증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협력의 경험은 협력을 증가시키는 따뜻한 순환을 불러오며, 경쟁의 경험은 경쟁을 강화하는 차가운 순환을 불러온다.”54 게임 참가자들이 협력 혹은 배신을 선택하는 소위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PD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해럴드 켈리Harold H. Kelly와 앤소니 스탈스키Anthony Stahelski는 죄수의 딜레마 실험에서 보통 협력적인 사람도 상대방이 경쟁적이면 그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경쟁은 협력을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문화에서의 삶
이러한 비교문화 연구 자료는 다음과 같은 일반화를 가능케 한다.
- 첫째, 분명한 점은 “모든 문화에서, 이익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상호간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도시 아이들보다 시골 아이들이 협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도시 생활은 일반적으로 의도적 경쟁과 구조적 경쟁이 결합되어 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시골이나 농촌 사회는 비경쟁적이며, 모든 도시 지역은 똑같이 경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 둘째, 경쟁 사회는 아이들을 빨리 어른이 되도록 재촉하는 경향을 보이는데,110 몇몇 비평가들은 이를 미국 사회의 특징으로 꼽으면서,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 셋째, 한 사회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정의되는 집단의 존재가 뚜렷이 구분될수록 그 사회의 경쟁심은 높았다. 경제적 불평등과 경쟁의 상관관계는, 미드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조사한 대로, 협력적인 문화에서는 강한 소유욕과 축적 행위가 없다는 결론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쟁의 필연성에 대한 심리학적 논의들
3장. 경쟁은 더 생산적인가: 협력과의 비교
경쟁에 관한 논문을 읽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늘 어떤 확신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경쟁을 하지 않는다면 탁월함은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의 생산성마저 잃을 거라는 믿음이다. 즉 경쟁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고,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능력을 계발하고, 성공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경쟁 없는 사회란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의 비유를 빌면 “재미없는 경험… 낙오자들의 파도 없는 바다… 실패의 껍질을 뒤집어쓴 자기만족의 평범함… 그들의 심리적 피난처” 이다.
그러나 경쟁과 성공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것, 혹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에게나 남들이 만족할 만큼 입증하는 것은 경쟁 없이도 가능하다. “목표 달성이 남을 이기는 것에 달려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표 달성의 실패가 남에게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당신보다 더 잘하려고 애쓰지 않고서도 뜨개질이나 글쓰기에 성공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예를 들어 저녁을 준비하거나 집을 짓는 일처럼, 나와 당신이 함께 일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지 않으면 목표도 없이 방황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경쟁이란 간단히 말해서 타인의 목표 달성은 방해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경쟁은 어떤 일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다행히도)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어떤 기술을 연마하여 그 성과를 보이거나,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데 경쟁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취와 경쟁
경쟁이 ‘어떤 것’보다 더 생산적이란 말인가? 경쟁이 누군가에게 성취 동기를 부여했는가라는 개인 수준의 질문을 넘어, 경쟁 상황이 다른 상황에 비교해서 더 생산적인가를 물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 경쟁이 그 비용을 능가할 정도로 다른 방법보다 월등히 뛰어난지를 묻는 것이 좋겠다. 다른 방법이란 1장에서 말했듯이 협력(나의 성공이 당신의 성공과 결부되도록 함께 일하는 것)이나 독자적 노력(나의 성공이 당신의 성공에 아무 영향이 없는, 혼자 일하는 것)을 뜻한다. 이제 살펴볼 연구 중 일부는 경쟁과 다른 방법들을 하나씩 따로 비교했지만, 결국엔 이 세 가지(경쟁, 협력, 독자적 노력)에 대한 비교가 한눈에 보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타인을 패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함께, 혹은 독자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하는가? ... 여러 연구들을 검토해 본 결과 월등한 성과를 내기 위해선 경쟁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경쟁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이러한 결론에는 여러 조건들이 제시되었는데, 협력은 집단이 작을수록, 그리고 임무가 복잡할수록 더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고도의 문제해결능력을 필요로 할 경우 더욱 그러했다). 협력이 얼마나 더 효율적인지는 하려는 일이 얼마나 상호의존적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상호의존적일수록 협력은 더 도움이 된다.
최근 도이치는 과제의 설정뿐 아니라, 임무 완수에 따른 보상의 분배 방식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그 방식에는 승자 독식(대부분의 경연에서 그렇듯이), 성과에 비례하는 배분, 그리고 균등 배분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 경쟁이 성과를 높인다고 생각하므로 앞의 두 가지 분배 방식이 더 열심히 일하게 할 것이라고 여긴다. 즉 탐나는 보상을 승자 몫으로만 하면 최고의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추론이 맞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콜롬비아 대학생을 대상으로 6개의 실험을 실시했는데, 여기엔 일본어로 된 시의 해석과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젤리의 개수를 추산하는 등의 과제가 포함되었다. 결과는 이렇다.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제(상호의존도가 낮은 과제)에서는 보상의 분배 방식이 일을 잘하고 못함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모두가 균등한 보상을 받았을 때보다 성과에 비례하여 보상을 주었을 때가 더 생산적이라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의 성패가 협동에 달려 있는 경우(상호의존도가 높은 과제)엔 명백한 차이를 보였는데, 도이치는 균등 배분 방식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승자 독식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16 는 것을 알아냈다.
일하는 속도, 풀어낸 문제의 수, 기억해낸 정보의 양 같은 양적인 성과 측정법에서 성과의 질적인 면으로 관심을 돌리면 경쟁은 오히려 훨씬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에 실시된 실험에서, 단순하고 기계적인 일을 할 때 사람들을 경쟁시키면 속도는 빨라지지만 작업의 질은 훨씬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경쟁적인 상황보다는 협력적 상황에서 확실히 더 복잡한 결과물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학습을 할 때 경쟁적 혹은 독자적으로 추론하는 것보다는 협력 집단 안에서 토론하는 과정이 질적으로 더 높게 인지능력을 계발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경쟁이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협력은 사람들을 단지 어떤 집단에 소속시키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공통의 노력이 결과물로 산출되고, 목표를 서로 공유하며, 각 개인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성공과 연결되는 어떤 도전적인 과제에 집단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특히 협력은 아이디어와 도구를 공유하고, 때로는 분업을 하고, 그 일이 성공하면 받을 수 있는 보상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간다.
경쟁은 왜 실패하는가?
일반적으로 경쟁이 왜 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잘하려고 애쓰는 것과 남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뛰어나다는 것과 이긴다는 것은 다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이다. 우리는 그저 일을 열심히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자는 전자의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종종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옹호된다. 일찍부터 경쟁을 경험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경쟁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경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배우는 것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은 단지 방해물로 보게끔 아이들의 의식을 바꾸어놓는다.58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미래에도 변함없기 때문에, 경쟁에 자주 노출되어 승리하는 법을 배운다고 해서 훗날 일을 더 효과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 경쟁을 통해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나중에 오히려 경쟁을 회피할 가능성이 커진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은 동기부여 이론가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일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외적 동기(outside motivator, 돈이나 성적 등)는 일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보상인 즐거운 활동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 마가렛 클리퍼드는 “외적 동기가 성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과란 기본적으로 학습에 달려 있는 것이고, 학습은 주로 내적 동기에 의해 영향 받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 성과가 매우 복잡한 일에 관한 것이라면 내적 동기가 더 중요하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성취 동기가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 동기가 외적 보상에 좌우되면 일을 잘해 낼 수 없다.
데시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밝힌 대로 외적 동기를 이용하는 방법은 내적인 동기부여를 저해하며, 장기적으로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역효과를 가져온다. 말하자면 금전적인 보상은 그 일 자체를 즐기는 내적 동기를 옆으로 밀어낸다. 즉 이런 식으로 보상을 받기 시작하면, 이전엔 아무런 보상 없이 하던 활동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돈은 “활동을 위한 내적 동기를 ‘매수’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동기의 감소는 (실험을 통해 보았을 때)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외적 동기는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 동기를 잠식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미 좋은 결과를 낳고 있는 내적 동기까지 갉아먹는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경쟁이 결과적으로 학습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이다. 어떤 외적 동기도 성과를 떨어트리는 것처럼, 경쟁 역시 그렇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얘기는 외적 동기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해도, 그중 가장 강력한 동기는 돈이나 승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점이다. 이 책임감은 협력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타인이 내게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데서 비롯되는 책임감은 협력을 가능케 하며, 그 어떤 외적 보상보다 더 큰 성과를 이루게 한다. 이에 반해 경쟁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단지 그의 실패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뿐이다.
협력은 상호 간의 노력을 좀 더 능률적으로 만드는 데 비해, 경쟁하는 사람들은 서로 믿고 의지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누리지 못한다. 또한 존슨 형제가 지적했듯이, 타인에게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으로 인해 더 자유롭게 문제를 탐구하고, 모험에 도전하며, 가능성을 즐기고, “또한 비웃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보다는 그 실수에서 배움을 얻는다.” 타인이 잠재적인 협력자가 아닌 적대적인 사람인 상황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경쟁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문제이다.
대체로 협력은 재미있고 더 생산적이기 때문에 선순환 구조를 가져오며 더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 또한 교실에서도 “수업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72 때문에 내적 동기를 강화시켜 꾸준히 뛰어난 학습 능력을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경쟁이 성공에 매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실패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경쟁은 높은 성과를 거두는 기쁨을 주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근심의 원인이 된다. 실제적인 보상(돈, 트로피, 성적)은 그리 큰 것이 아닐지라도 심리적 부담은 항상 크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쟁에서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자가 못 되고, 소수의 사람들만 승리한다. 실패에 대한 예상은 예전에 겪었던 패배의 기억을 통해 그리고 이를 동력으로 해서 성과를 저해하는 동요와 신경과민의 감정을 불러온다.
경쟁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경쟁이 불안감을 가져온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불안감이 일을 더 잘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약간의 불안감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여키스-도슨 법칙Yerkes-Dodson Law으로 알려진 이론에 따르면 어떤 일이든 그 수준에 맞는 적당한 자극(불안감)은 최고의 성과를 올리게 해주지만, 일이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그 자극 수준은 낮아져야 한다. 하지만 경쟁은 효율성을 떨어뜨릴 정도의 높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스트레스가 심한 경쟁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성과는커녕 그저 실패하지 않는 데만 급급하다. 실패를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과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잘 알려진 동기부여 이론가인 존 앳킨슨J. Atkinson은 이렇게 말했다. “실패를 피하려는 경향은 … 성취 지향적인 행동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우리 사회가 경쟁을 불쾌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 중 하나는 “패배를 두려워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생산성이란 무엇인가? : 개인의 관점을 넘어서
경쟁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하나의 일자리, 한 그릇의 식사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한 시점만을 딱 잘라내서 원인과 결과,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 등을 무시한 채 그때의 상황만으로 결론을 내릴 때에만 그렇다. 우리는 왜 많은 사람이 원하는 재화(일자리를 포함하여)의 공급량이 이렇게 부족한지, 처음부터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는지, 또한 경쟁이 앞으로 사람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도 고려해야 한다.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관심을 돌리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을 포함하여 인생의 목표가 변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한 우리의 경쟁적인 전략들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하다. 타인을 패배시키려고 애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실패해야만 내가 성공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전략은 일시적으로만 생산적일 뿐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공을 생각한다면(즉 개인의 이익에서 집단의 이익으로 조금만 관점을 바꾼다면) 협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익이 된다. 이에 대한 예로 가렛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을 생각해보자. 소를 키우는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공공의 목초지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므로, 자신은 소의 개체수를 계속해서 늘려가는 것이 이익이다. 그러나 다른 농민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각자가 모두 자신의 이익대로만 행동한다면 풀은 고갈되고, 결국 모두에게 손해가 된다(만약 농민들이 자신의 소를 더 많이, 더 먼저 먹이려고 경쟁하면 고갈 과정은 더욱 빨리 진행될 것이다. 즉 경쟁하면 할수록 모두가 더 빨리 손해를 입는다).82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성공과 이익을 집단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협력이 더욱 생산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경쟁적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협력이 훨씬 좋은 방법이라는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정치학자인 로버트 액셀로드R. Axelrod는 각 국가가 협력과 경쟁 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이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이용했다. 그는 게임이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죄수의 딜레마 게임 전략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가장 훌륭한 전략은 상대방이 하는 대로 똑같이 응수하는 것이었다. 액셀로드는 “상대방을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협력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에 따라 성공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상호 이익에 기초한 협력은 현재와 같이 명백히 비협력적인 세계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협력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 방법이 자리를 잡으면 계속 유지될 수 있다.”86 그는 또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경우 사람들(혹은 국가들)은 더 잘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연구한 다른 학자들도 참가자들이 게임에 참여하기 전에 대화를 나눌 경우 게임을 더 잘한다는, 즉 일관되게 협력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쟁적인 경제제도
더 많은 것을 갖기 원하기 사람들의 심리 때문에 경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의 결과로 이러한 심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결핍(희소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다.
4장. 경쟁은 더 재미있는가: 스포츠와 놀이
놀이란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외적 동기가 내적 동기를 잠식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어떤 놀이든 외적인 보상이 주어진다면 놀이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보상이 없는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른다.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스포츠와 같은 경쟁적 활동은 배제되어야 한다.
경쟁 없는 즐거움
많은 사람들이 경쟁 때문에 스포츠에서 멀어진다는 말은 그것이 비극일 뿐만 아니라, 경쟁과 즐거움의 관계가 보통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본장의 주제에 관련되어) 뜻하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를 아예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수한 즐거움 이외의 여러 이유(이를테면 자기 과시욕 같은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경쟁적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어떤가? 이러한 문제는 다른 문화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 어떤 문화에서는 협력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놀이 역시 비경쟁적인 것을 선택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경쟁적 게임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기도록 사회화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오락 활동에서조차 승패를 나누어야 한다고, 즐겁기 위해선 누군가 져야 한다고 배워온 것이다.
경쟁을 즐거운 일로 여기게끔 우리가 사회화된다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승리의 중요성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오직 이기는 것이 중요한 놀이만이 아이들에게 제공된다는 뜻이다. 여기에 진정한 대안은 오로지 경쟁 자체가 없는 놀이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이들도 경쟁하지 않는 놀이를 한번 접해보면 보통은 계속해서 그쪽을 선호한다. 이런 결과가 암시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렇다면 그런 게임은 어떻게 하는 걸까? 모든 게임은 각종 방해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예를 들어 미식축구는 이곳에서 저쪽으로 공을 이동하는 것이 목표이며, 상대팀은 그것을 방해한다. 경쟁적이지 않은 게임에서는 방해물이 다른 사람(팀)이 아니라 그 게임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야 하므로 이런 게임에는 경쟁이 포함되지 않을 뿐더러,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협의에 의한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선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경쟁 활동은 특히 더 규칙에 얽매이는데(규칙의 적용 또한 엄격하다), 이런 경쟁의 대안이라고 해서 꼭 “달리고 싶을 때 달리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는” 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코커스 경주’ 처럼 아무런 규칙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순수한 놀이에 더욱 가까울 뿐이며, 경쟁하지 않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보통은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규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꼭 경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비경쟁적인 게임 역시 규칙을 갖기 때문에 경쟁자가 있는 게임만큼 도전적이다. 또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으며 “모두가 이겼으니 다함께 상을 받는” 코커스 경주처럼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적대시해야 할 상대방이 협력의 파트너가 되는 것은 단지 글자만의 변화가 아니다. 게임의 구조가 바뀌고, 참가자 상호 간의 태도가 바뀐다. 앞서 얘기했듯이 아무리 우호적으로 테니스를 친다 해도 그 게임 자체의 구조를 무시할 수 없다. 두 선수는 서로 상대방이 패배하도록 공을 쳐야만 한다. 경쟁하는 선수들은 협력 게임이 가져다주는 좋은 기분, 곧 상대방의 성공에 기쁨을 느끼는 그 기분을 알지 못한다. 협력적인 놀이 활동을 해본다면 왜 경쟁이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처럼 즐겁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5장. 경쟁은 인격을 키우는가: 심리적 고찰
앞서 검토했던 것을 무시하고,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경쟁이 꼭 필요하다는 신화가 사실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경쟁을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경쟁이 생산성을 올리는 데는 효과적이어도, 경쟁하는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일의 성과에서 사람에게로 관점을 돌리면 경쟁에 반대해야 할 더 많은 이유들이 보일 것이다.
만약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경쟁이 심한 조직이나 활동은 피하려고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쟁심이 강한 사람들 역시 회피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경쟁적인 사람이야”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은 보통 친구로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완전히 외면당하지는 않아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경쟁심을 발견할 때도 조금은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러므로 경쟁으로 인해 어떤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치열하고 무의미한 경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심리적 대가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왜 우리는 경쟁하는가?
어떤 사람이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자존감이란 개념은 매우 유용하다. 자존감이 강하다는 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나타내며, 스스로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자존감은 그저 높은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것이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비록 나중에 후회할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쉽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 삶을 구축하는 핵심이며 기초가 된다.
나는 인간의 행동이 때때로 자신의 진정한 동기와는 반대되는 형태로 나타나며, 인성의 형성에 자존감이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면 우리는 경쟁심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기 때문에 경쟁을 하며, 결국 낮은 자존감에 대한 보상을 위해 경쟁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어떤 일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을 경쟁적으로 한다. 가장 멋진 연인이 되고자(혹은 가장 많은 연인을 만들고자) 애쓰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이 별로 사랑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위적인 직업을 갖고자 애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실제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둘째, 그러한 특정 부분에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 즉 자존감이 부족함을 나타낸다. 사랑스러움, 혹은 직업적 기술들 같은 특정 능력을 위해 애쓰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전부를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의 특성이나 능력을 대표하는 어떤 요소가 없을지라도 경쟁은 벌어지는데, 그것(더 많은 돈을 벌고,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려는 경쟁)은 바로 자존감이 약해서 그런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경쟁으로 여기는, 특별히 경쟁심이 강한 사람들에게서 더 명백하게 볼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려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별로 능력 없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고자 경쟁을 한다.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든 아니든 경쟁심은 결국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다.
앞서 본 대로 무엇을 잘하는 것과 남을 이기는 것은 서로 다르다. 그 동기를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것을 특히 잘하는 것에서 큰 성취감을 맛본다. 물론 타인과 비교해서 무엇인가 잘하는 것에서 성취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단지 잘한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있고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굳이 남들과 비교하여 더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기준(정답을 맞힌 문제가 몇 개인지, 혹은 1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의해 개인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타인보다 잘하려는 욕망과 자신이 만든 기준에 부합하려는 욕구는 전혀 다르다. 여기엔 본질적으로 보상이라는 동기가 작용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에 남보다 더 눈에 띄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근육이나 지식을 연마하는 기쁨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유능함을 확신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강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만약 경쟁에 목소리가 있다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의 말투가 들릴 것이다. “뭐든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난 더 잘할 수 있어!” 경쟁 사회는 이런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고 그러한 사회는 “강박적 사고, 개인적 무능에 대한 불안, 배출구가 필요한 적대감”의 결합으로 움직인다고 로렌스 프랭크는 말했다.
각 문화권에는 자기회의(self-doubt,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에 빠진 사람들을 다루는 각기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인생을 거의 제로섬 게임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그 메커니즘은 바로 경쟁이다. 자신의 가치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보상 받을 수 있는 메커니즘이 경쟁이라는 뜻이다. 결국 자존감 결핍은 경쟁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경쟁의 요소에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개인적 욕구와 그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피해를 봐도 된다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결합되어 있다. 두 가지의 결합은 타인을 불쾌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유쾌해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승리, 패배, 그리고 자존감
개인의 성격 중 비록 동기에서는 건전하지 않지만, 그 결과를 놓고 보면 괜찮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물어보자. 경쟁은 정신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말하자면 경쟁은 결과적으로 그 동기가 된 자존감 결핍을 채워줄 수 있을까?
1981년에 두 명의 심리학자가 8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경쟁심이 강한 학생들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타인과의 경쟁에 적극적인 학생들은 개인의 가치를 평가와 성과에 의존하여 생각하는 특징을 드러냈다.” 다시 말해 경쟁적인 학생들은 무조건의 자존감을 갖지 못했으며 스스로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자신이 무엇을 잘했는지, 남들이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구조적 경쟁에 관한 연구는 전형적으로 그 대안적 구조, 특히 협력의 평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이러한 연구는 건전한 개인의 특성을 이끌어내는 데 경쟁과 협력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에 중점을 둔다. 우리와 같이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협력이 강력한 자아발달에 적합하지 않고, 어쩐지 의존적인 성향이 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진실처럼 보인다. 17건에 이르는 연구 결과를 검토한 존슨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협력학습 상황은 경쟁적 학습이나 독자적 학습에 비해 자존감을 더 높이며, 건전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게 했다.” 그들은 또한 “협력은 정서적 성숙, 좋은 인간관계, 강한 정체성, 타인에 대한 신뢰와 낙관 등 심리적 건강함을 나타내는 많은 지표들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라고 서술했다.21 또한 경쟁은 ‘외부통제위치’를 조장하며 협력은 ‘내부통제위치’의 경향을 갖는다. 즉 타인과 경쟁보다는 협력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스스로의 삶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학자인 루스 루빈스타인Ruth Rubinstein은 경쟁적인 여름방학 캠프에 참여한 10~14세 아이들과 경쟁 없는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을 비교했는데, 직접 설문지에 답을 적는 방식으로 자존감을 측정했다. 그 결과 경쟁적 캠프의 아이들에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데 반해, 비경쟁적 캠프의 아이들은 남녀 모두 자존감이 높아졌다. 모턴 도이치는 자존감이 “협력평가제도와 비교했을 때, 경쟁평가제도에서는 더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협력은 높은 자존감을 가져다주지만, 경쟁은 그 반대 효과를 불러온다고 할 수 있다. 왜일까?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선 협력은 서로의 능력을 공유함으로써 보다 생산성을 높인다. 좀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욱 확신을 갖는다. 또한 협력하면 서로에게 인간적 유대를 갖는다. 자신의 성공이 타인의 성공과 긍정의 관계에 있을 때(경쟁의 경우는 부정의 관계로 맺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으며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협력이 심리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이와 비교해서 경쟁이 성과와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불행한 심리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들을 이기려고 애쓰는 행동은 그 원인이 되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완화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리가 더욱 중요한 위치−사회나 어떤 상황, 또는 한 개인에 의해−를 차지할수록 패배는 더 큰 심리적 손상을 불러올 것이다.
승리는 어떤 의미 있는 방식의 만족감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패배의 고통을 보상해주지 못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경쟁의 구조에 있다. 어떤 경쟁이든 영구적인 승리란 있을 수 없으며, 잠시 동안 이겼다는 사실이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회사의 임원이든 슈퍼볼의 챔피언이든, 혹은 가장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든, 1등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라이벌의 표적이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한계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승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문제 말고도 사실 어떤 도취감과 자존감의 강화 사이에는 크나 큰 심리적 간격이 있다. 약물에 도취되어 잠시 동안 자신과 세상에 좋은 느낌을 갖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마약이나 술이 개인의 심리적 건강을 높인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승리도 비슷한 도취감을 줄 수는 있지만, 경쟁의 원인이 되는 자존감의 부족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진 못한다. 우선 경쟁의 목적은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앞서 보았듯이 이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승리와 성공은 사실 그 동기나 거기에 사용되는 능력을 따져보면 서로 다른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이긴다 해도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에 만족을 느끼는 지표는 되지 못한다. 또한 더 중요한 문제는, 승리를 통해 특정 능력을 입증한다 해도, 이 ‘특정’이라는 것의 한계에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웃보다 더 부자이며 매력적일지 몰라도 이런 특정한 비교가 자존감이라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기는 것으로 자신감을 갖거나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기쁨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바로 나올 수 있다. 바로 또 다시 경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좀 더 나은 방법이 아니라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바로 그 방법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리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대신, 계속해서 승리하고 싶은 욕구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경쟁은 악순환이다. 경쟁하면 할수록 더욱 경쟁이 필요해진다.
경쟁을 합리화하는 논리
경쟁의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상호배타적인 방식으로만 목표를 달성하게끔 만드는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참가한 사람들의 개인적 성격을 모른다고 해도, 그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승리하는 구조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타격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예들은 특별히 더 노골적이지만, 경쟁적 문화에서는 이런 모순된 메시지들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사실 “승패를 떠나 어떻게 시합에 임하느냐가 중요하다.”, “노력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오늘 경기에 참여한 모든 아이들이 승리자이다.” 이런 말에 기뻐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1등뿐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모순되는 두 가지 방향의 사회화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마크 메이와 레너드 두브는 “협력이라는 이상주의적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경쟁적 제도를 유지해왔다”고 했으며, 존 실리John R. Seeley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들은 경쟁을 해야 하지만, 경쟁적인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학교는 겉으로는 협력을 ‘증진’하고, 은밀하게는 경쟁을 ‘묵인’함으로써 이러한 딜레마에 대처한다.” 1970년대에 몇몇 사회과학자들은 우리 사회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정신분열증의 상태에 가깝다. … 도덕적 격언으로는 협력 행동을 장려하고 … 학교나 사회에서는 경쟁 행동을 부추기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경쟁과 불안감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심각하지만, 그것이 경쟁이 가져오는 심리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서는 불안과 걱정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경쟁에서 불안과 걱정을 느끼는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이자 가장 명확한 이유는 패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심리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그저 남을 이기는 것으로 유능함을 증명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불안정해진다. 패배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안정감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만약 실제로 패배한다면, 다음번의 경쟁에서 더 큰 불안감을 느낄 것이며, 곧 자기실현적 예언의 형태로 굳어질 것이다. 어떤 성과에 대한 영향력은 제쳐두더라도 불안감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기 위한 경주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불행한 유산일 뿐이다.
불안감의 두 번째 이유는 승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경쟁의 목표가 승리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경쟁에 참여한 유능한 사람들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간간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결승전에서 숨이 턱 막히는 선수들, 이런 현상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와서야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57
경쟁이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들
지금까지 살펴본 것 외에 경쟁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몇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보자.
첫째로 ‘결과 지향성’을 들 수 있다. 4장에서 보았듯이 놀이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 지향’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과정을 중요시하면서 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결과만을 지향한다.
경쟁은 물론 결과 지향성을 초래하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을 조장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경쟁의 목표는 승리다. 경쟁을 하면서 그 과정을 즐긴다는 것은 핵심을 벗어나는 일이다. 과정을 지향한다는 것은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쉽게 배제된다. 진정 지적 탐구를 원하는 학생은 일률적으로 짜인 시간표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그는 훌륭한 성적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법률의 해석이나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은 변호사는 정략적인 사고로 판결에만 신경 쓰는 변호사만큼 승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결과 지향적이다. 승리만을 지향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과정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득점판만 바라볼 뿐이다.
스포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두 명의 사회학자에 따르면 결과 지향성은 사고의 경직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윌리엄 새들러는 “경쟁하는 사람은 결과에만 집중한다. 이러한 경쟁 자세를 지속적으로 취한다면 그의 사고 역시 경직되기 쉽다”69고 말했다. 결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유연성을 결여한 것이므로 경직되는 것은 당연하다. 경쟁에 빠져들수록 자발성은 떨어지고, 결과와 관련되는 일 외에는 둔감해지며, 생각하는 과정은 점점 경직된다.
둘째는 양자택일의 사고이다. 이는 어떤 상황이든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즉 ‘흑백 논리의 오류’이다. 이 나라를 사랑하든가 아니면 떠나라는 식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든가, 아니면 제일 쓸모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논리의 오류로 보고, 다른 대안 또는 중간의 회색 지대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셋째로 살펴볼 것은 현실 순응적 태도와 획일성이다. 우리 사회는 매우 경쟁적이며 개인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 경쟁은 보통 집단보다는 개인의 수준에서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흔히 경쟁이 개인주의를 조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라는 말은 두 개의 아주 상이한 철학적 운동과 관련이 있다. 한편으로는 에머슨Ralph W. Emerson과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같은 19세기 철학자들로부터 20세기 실존주의의 한 계통으로 이어지는 개인주의가 있다. 이는 자급자족, 양심, 자치, 불복종 등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 가슴 깊이 품은 가치에 대한 헌신, 모두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항하는 용기 등이 포함된다.
또 하나의 개인주의는 이 운동의 잘못된 모방에서 시작된다. 현대 대중 심리학과 개인의 잠재력을 계발하려는 일부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것을 장려하여 인간관계에서의 소외를 조장한다. 이것은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해라. 나는 내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라”고 말하면서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애처로운 시도이며, “1등을 지키라”고 얘기하는 노골적인 이기주의이다.
경쟁과 함께 가는 것은 이러한 개인주의이다. 편협한 자기중심주의는 남들을 패배시키는 데 유리하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인간관계를 깨뜨리며, 경쟁과 잘 부합한다. 그러나 경쟁은 앞서 보았던 진정한 개인주의를 증진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반대로 현실 순응을 조장한다.
3장에서 경쟁이 창조성을 억제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노력이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승리에 방해가 된다 싶은 일은 하지 않는다. 윌 크러치필드는 피아노 경연대회 참가자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참가자들은 승리를 위해 실수하지 않는 데만 집중하며 “새로운 연주 기법이나 진짜 놀랄 만한 시도는 피하려 한다.” 창조성의 핵심은 순응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즉 개성적인 사고와 모험적인 시도가 없다면 창조성은 피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경쟁은 이러한 과정을 억제한다.
6장. 서로에게 맞서는 사람들: 경쟁 속의 인간관계
인간관계의 독
“산업화 시대의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업상의 라이벌 아니라 배우자, 형제자매, 이웃, 사무실 동료들까지 경쟁상대로 생각한다”고 이미 1960년대에 월터 바이스코프Walter Weisskopf는 말했다. 회사는 물론이고, 이기기 위한 경주는 자신이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진다.
경쟁에 의해, 그리고 경쟁을 하는 동안 축적된 적대감이, 상황이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두 사람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나는 지금 경쟁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이 인간관계 자체를 방해하며, 이미 구축해 놓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라이벌의 해부
앞서 해리 스택 설리번의 얘기에서 보았듯이, 스스로를 좋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승리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 관계 맺기가 힘들다.
줄스 헨리는 “경쟁적 문화에서는, 어떤 일에서든 누군가가 성공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패를 의미하며, 심지어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그렇다”고 말했다. 앞서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도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는 미국 아이들에 대해 언급했는데, 7~9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 (경쟁에 매우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백인 아이의 78퍼센트가 “단지 다른 아이들이 갖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만으로 장난감을 빼앗았다.” 이에 반해 경쟁이 덜 사회화된 멕시코 아이들의 경우 그 횟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부버는 자신의 주체성과 더불어 타인의 주체성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당신은 내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당신 세계의 중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내가 공통의 인간성을 갖는다는 말이 우리 둘은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를 ‘나의 거울’, 혹은 ‘내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타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또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감정이입)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의 상황을 나의 관점이 아닌 그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그가 보는 세상과 그가 경험하는 삶이라는 실체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부버에 따르면 “이러한 행동은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타인의 삶과 교감하는 것이다.” 타인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풍요로워진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대화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경쟁 상대의 인격이나 얼굴, 주체성을 없애는 것은 승리를 위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러한 전략을 더 잘 사용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는 경쟁 구조 자체에 이미 내재해 있다. 그처럼 어떤 활동이든 상대방을 ‘비인격화’하는 일은 비판 받을 만한 일이다.
존슨 형제는 여러 학습 환경이 학생들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그들에 따르면 “협력적인 학습 환경이 경쟁적 혹은 독자적 학습 환경보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해주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인간관계를 구축한다.”19 또한 기업 경영 게임에 참여한 대학생들 중 경쟁적 상황에 처한 학생들은 상대 기업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오히려 기업 경영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본적인 감정이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버가 말한 인간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처한 상황과 그 감정을 상상으로 느낄 수 있는 경우에 특히 더 돕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 공감 능력이 이타주의를 조장하는 데 반해, 경쟁은 공감 능력을 해치므로 경쟁과 이타주의는 상반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쟁 상황과 비교하여 협력 상황에서는 서로 호감을 보이고 공유하며 돕는 행동이 늘어난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고 캐럴 에임스는 말했다.
7장. 반칙을 저지르는 심리: 승리를 위하여
8장. 여성과 경쟁
9장. 경쟁을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