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Finding Flow by MihalyCsikszentmihalyi
Contents
1. 일상의 구조
나는 이 책에서 현대 심리학이 알아낸 성과와 내가 연구한 내용에 바탕을 두면서도, 선인들이 후세에 남긴 뜻 깊은 지혜를 고루 동원하여 바람직한 삶의 길을 찾아나설 작정이다.
"바람직한 삶은 어떤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겸허하게 묻고 싶다. 그러나 예언자나 신비주의자처럼 말할 생각은 없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평범한 사건들, 즉 일상 생활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예를 들기 위해 애쓰고 싶다.
여러 해 전에 견학하던 기관차 공장에서 대부분의 용접공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이 없었고, 시계만 보면서 빨리 퇴근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공장 안에 있는 기계 설비의 구조를 모두 독학을 꿰뚫어, 못고치는 기계가 없었다. 집에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집 부근에도 멋진 분수를 만들었다.
무엇이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값지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알아내고 싶었다.
이 책에는 중요한 전제가 세 가지 깔려 있다.
- 중요한 진리는 이미 오래 전에 뛰어난 예언자, 시인, 철학자가 말했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네 인생의 지침으로서 요긴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깨달은 진리는 옛날 식으로 표현되었으므로 후대의 시각으로 그 안에 깃든 의미를 늘 재음미하고 재해석해야 생명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의 성전에는 선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사유의 결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므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글은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맹신하는 자세에도 문제는 있다.
- 지금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가 주로 과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현재로서는 과학이 현실을 담아내는 가장 신뢰할만한 거울이다. 과학을 무시하려는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 '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기울이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 온 앎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은 과거에서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에서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다. 또 가상의 미래로 뛰어본들 우리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하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이것보다 한층 절박하게 다가오는 질문,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는 지난 30년 동안 주로 심리학,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체계적 현상학을 발전시키는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만사가 인간 공통의 조건, 사회적-문화적 범주라든가 우연성에 의해 결정된다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성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리라. 다행히도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하루에 우리가 보통 하는 일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 가장 중요하고 비중이 큰 일은 생존과 안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하여 하는 활동이다. 오늘날 이것은 '돈벌이'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돈이 웬만한 물건은 모두 구입할 수 있는 교환의 매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 생산 활동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지만, 육체와 육체의 부속물을 잘 간수하는데도 우리는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하루의 1/4라는 시간을 우리는 이런저런 유지 활동에 투입한다. 식사, 휴식, 세면으로 몸을 돌보고 청소, 요리, 장보기와 각종 집안일로 생활의 여건을 유지한다.
- 생산과 유지 활동에 들어가고 남은 시간이 자유 시간, 곧 여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전체 시간의 1/4을 쏟는다.
생산, 유지, 여가라는 세 가지 주요 기능이 우리의 정력을 빨아들인다. 그러므로 삶의 성격은 우리가 직업적으로 하는 일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노력에, 그리고 남는 시간에 벌이는 활동에 좌우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삶은 이러한 기본 좌표 안에서 펼쳐지며, 우리가 보낸 하루하루를 모두 더하였을 때 그것이 형체 없는 안개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느냐는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지, 혼자소 보내는 시간과 여럿이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느낌을 갖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에서 나는 ESM(경험추출법: Experience Sampling Method)으로 확보한 자료와 여타 설문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두루 활용할 것이다.
2. 경험의 내용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우리가 하는 일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경험의 내용과 더 관계가 깊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는 일견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와 비극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기보다는 행복한 것으로 묘사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연구 결과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행복의 상관 관계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지만 예외도 있다. 놀라운 것은 한 나라 안에서 개인의 경제력과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는 아주 미미한 상관 관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는 평균 소득을 가진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빈곤의 문턱을 일단 넘어서면 재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특성도 개인의 행복 체감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행복이 우리가 따져볼만한 가치가 있는 감정의 전부는 아니다. 하루하루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싶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행복은 출발점으로서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하다. ... 행복을 얼마나 느끼느냐는 주어진 상황보다는 개인의 성향에 좌우된다.
감정은 의식 안의 상태를 말한다. 슬픔, 두려움, 떨림, 지루함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에 '심리적 엔트로피'를 조성한다. 무질서도를 뜻하는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내부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데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 과단성, 민첩성 같은 바람직한 감정은 '심리적 반엔트로피'의 상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추스르는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걸림돌 없이 정력을 우리가 선택한 과제로 온전히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 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 목표, 동기 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질서가 없으면 정신적 과정은 두서가 없어지고 감정의 질은 급격히 저하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발적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역시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있다.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결국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의도의 경우는 정력이 단기간에 투입되는 반면, 목표는 좀 더 장기적으로 투입된다. 일관된 목표의 추구 없이 일관된 자아를 만들어 나가기는 어렵다.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정력을 제대로 투입해야 한 사람의 경험에 질서가 생긴다. 예측이 가능한 행동, 감정, 선택에서 드러나는 이 질서는 시간이 흐르면 개성 있는 '자아'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의도와 목표를 두고 사람들이 흔히 품는 오해가 있다. 가령 힌두교나 불교처럼 갈래가 다양한 동양의 종교들은 행복에 으려려면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더 이상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적잖은 수의 유럽과 미국 청년들이 철저히 자동적이며 우연히 이루어지는 행위만이 삶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아래 일체의 목표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보기에 동양의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은 목표를 덮어놓고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의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 관성은 무시 못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목표의 대부분은 유전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불교가 우리에게 억눌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하다. 타성에 젖은 목표를 근절한다는 역설적 목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정신력을 24시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이루기 벅찬 과업이다. 요가 수행자나 승려는 타성에 젖은 목표가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느라 전력 투구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여력이 거의 없다.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서구인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정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집중하지 못하면 의식은 혼돈에 빠진다. 마음은 평상시에는 정보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집중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노력을 한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감정의 흐름을 거슬러야 할 경우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교과서에 실린 정보를 흡수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시험에 붙어야 한다든가 하는)이 필요하다. 정신적 과업이 어려울수록 집중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는 객관적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별다른 갈등 없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성숙한 지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재능의 개발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런 모순으로 차있다. 가슴, 의지, 정신이 일치할 때의 뿌듯함을 우리는 좀처럼 맛보기 어렵다. 감정, 목표, 사고가 일치하지 않고 의식 안에서 격투를 벌이며, 우리는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는지 생각해보자. 가령 스키를 타고 산비탈을 질주할 때 우리는 몸의 움직임, 스키의 위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공기, 눈 덮인 나무에 주의를 집중한다. 갈등이나 모순을 의식할 짬이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눈 속에 고꾸라진다. 그러니 누가 딴 생각을 하겠는가? 활강이 너무도 완벽하여 우리는 그것이 한없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순간의 경험에 완전히 몰입한다.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을 나는 '몰입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운동 선수가 말하는 '몰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에 다름아니다. 운동선수, 신비주의자, 예술가는 각각 다른 활동을 하면서 몰입 상태에 도달하지만, 그들이 그 순간의 경험을 묘사하는 방식은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체스, 테니스, 포커 같은 게임을 할 때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선명하게 표현된 소우주 안에 있다. 종교 의식에 참여하거나 산을 오르거나 수술을 할 때도 명확한 목표가 주어진다. 몰입을 유발하는 활동을 '몰입 활동'이라고 하자. 일상 생활과는 달리 몰입 활동은 명확하고 모순되지 않은 목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몰입 활동의 또 하나 특징은 되먹임, 곧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 활동은 작업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체스를 두면서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형세가 유리해졌는지 불리해졌는지를 안다. 등반가는 걸음을 한 보 내디딜 때마다 자기가 부른 노래가 악보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우리는 단서가 주어지지 않으면 지금 하는 일이 잘 되는지 못 되는지 한참을 모르고 지낼 때가 많지만 몰입 상태에서는 대체로 그걸 알 수 있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행동력과 기회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바람직한 경험을 하게 된다.
- 과제가 너무 힘겨우면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젖다가 제 풀에 포기하고 만다.
- 과제와 실력의 수준이 둘 다 낮으면 아무리 경험을 해도 미적지근할 뿐이다.
- 그러나 힘겨운 과제가 수준 높은 실력과 결합하면 일상 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심도 있는 참여와 몰입이 이루어진다.
등반가라면 산에 오르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할 때, 성악가라면 산에 오르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할 때, 바로 그런 경험을 한다. 보통 사람은 하루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하지만 몰입 경험은 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강렬한 삶을 선사한다.
목표가 명확하고 활동 결과가 바로 나타나며 과제와 실력이 균형을 이루면 사람은 정신을 체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여들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자의식은 사라지지만 자신감은 평소보다 커진다. 시간 감각에도 변화가 온다. 한 시간이 일분처럼 금방 흘러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 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암벽을 타는 산악인이 고난도의 동작을 하면서 짬을 내어 행복감에 젖는다면 추락할지도 모른다. 까다로운 수술을 하는 외과의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행복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몰입하지 않고도 행복을 맛볼 수는 있다.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의 편안함과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을 불러 일으킨다. 모두 소중한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유형의 행복감은 형편이 않좋아지면 눈 녹듯 사라지기에 외부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그림 1에서 우리는 왜 몰입이 개인을 성숙시키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어떤 사람이 그림에서 '각성'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각성은 별로 나쁜 상태는 아니다. 각성 상태에 놓인 사람은 정신을 상당히 집중하고 능동적이며 대상에 밀착되어 있다. 문제는 그 정도가 높지 않아 몰입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신바람 나는 몰입의 상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실력 연마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한다.
- 이번에는 '자신감'이라는 범주로 넘어가 보자. 이것 역시 행복감, 만족감을 웬만큼 가질 수도 있는 바람직한 경험의 상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집중도, 밀착도가 떨어지며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 또한 강하지 않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해야 몰입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과제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렇듯 각성과 자신감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상태다. 그 밖의 상태에서 몰입으로 넘어가기는 이보다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안이나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는 몰입 상태가 너무나 요원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지금보다 덜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물러나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몰입 경험은 배움으로 이끄는 힘이다. 새로운 수준의 과제와 실력으로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은 자가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도 꾸준한 성장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입의 단계로 넘어가기에는 권태와 무력강이 너무 강하여 비디오처럼 이미 나와있는 규격화된 자극으로 우리의 정신을 채우거나, 필요한 실력을 닦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마약이나 술 같은 인위적 이완제가 가져다 주는 몽롱한 상태로 가라앉는다. 최적의 경험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첫발을 내디딜 기운조차 없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들은 화초 가꾸기건, 음악 감상이건, 볼링이건, 요리건, 대체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운전을 할 때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혹은 일을 할 때도 의외로 자주 나타난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식을 취할 때처럼 수동적으로 임하는 여가 활동에서는 좀처럼 그런 체험이 보고되지 않는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사람은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맛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3. 일과 감정
창조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언제 누구와 같이 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엮어가는데 남달리 뛰어나다. 자연스러움과 무질서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루의 리듬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독으로 들어가기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우울하다가도 여럿이 모인 곳에 가면 다시 생기가 감돈다는 건 수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결과다. ... 남들과 같이 있으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병리 증세도 혼자 있으면 불거진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남과 어울릴 때 우리의 주의력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 구조화된다. 타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목표를 제공하고 행동의 결과를 곧바로 알려주는 효과를 낳는다. ... 이렇게 타인과의 교제에는 집중이 필요하다. 반면에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혼자 있을 때는 정신력을 집중할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고 무언가 걱정거리를 찾게 된다.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 경험의 질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대인 관계에 정력을 쏟는 것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동네 술집에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정말로 성숙해지려면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사고를 가진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긴요한 것은 결국 고독을 견디는 능력, 아니, 고독을 즐기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든 예에서 우리는 마치 사람은 무엇을 하고 누구와 같이 있고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그 내면이 영향을 받는 수동적 대상인 것처럼 말했다. 일면 타당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가다. 집에서 혼자 살림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끼고, 직장에서 의욕적으로 일하고, 아기와 대화에 몰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눈부신 일상 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머리에 담긴 정보를 바꿈으로써 경험의 길을 곧바로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찰하기 전에 장소, 사람, 활동, 시간대 같은 일상의 환경이 가지는 영향력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탈속을 하여 아무리 내공을 깊이 쌓은 수도자에게도 유독 마음이 끌리는 나무가 있고, 유달리 맛있는 음식이 있으며, 왠지 가까이 가고픈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보통 사람인데,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상황에 얼마나 많이 좌우되겠는가.
그러므로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해야 한다. 식사 시간에 행복을 느낀다든가 여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동안 곧잘 몰입 경험에 이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확인되는 성향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실은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뜻밖에도 일하기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데서 더 큰 즐거움을 맛보았는지도 모르며 혹은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4. 일의 역설
사람은 살아가면서 쓸 수 있는 시간 중 1/3을 일하며 보낸다. 일은 우리에게 퍽 묘한 경험을 안긴다. 가장 강렬하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일에서 경험하고 자부심과 자기 정체성 또한 그것에서 얻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일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고 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투입되는 시간의 양이나 우리의 의식에 남기는 여파 강도로 보아 일이 그토록 막중한 의미를 갖는다면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는 사람은 일의 이와 같은 이중성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유럽에서 일의 성격이 확 바뀐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이다. 그러다가 이백 년 전에 또 한 차례 획기적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도 빠른 속도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일에 필요한 에너지는 거의 사람이나 가축의 근육에 의존하였다. ... 증기기관이 개발되고 뒤이어 전기가 발명되면서 우리가 에너지를 변환하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방식에 혁명이 일어났다.
육체적 노력으로 이해되었던 일이 숙련된 활동으로, 인간의 독창성과 창조성을 구현하는 활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기술 혁신의 부산물 덕이었다. 칼뱅이 활동하던 시대에 이미 '노동 윤리'는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었다. 훗날 마르크스가 고전적 노동관을 뒤집어, 오직 생산 활동을 통해서만 인간의 잠재력을 구현할 수 있다고 부르짖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직 여가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19세기에 들어와서 일에 창조의 기능이 강화되었을 따름이다.
우리는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도 일의 뿌리깊은 이중성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 일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일을 하는 동안엔 거기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장래 직업에 현실감각이 없는 것은 어른들의 직업 성격 자체가 빠르게 변하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의미 있는 직업 선택의 기회라든가 보고 배울만한 직업인을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집안이 넉넉한 10대 청소년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한다. 뿐만 아니라 부유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집안에서, 동네에서, 지역 사회에서 보람 있는 직업을 접할 기회가 훨씬 많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건 그런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걸 할 때 가장 괴로워한다. 이를테면 평범한 유지 활동, 수동적 여가 행위, 그렇고 그런 만남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때 이들의 자부심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은 일로 소일하면서 자란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인생에서 이렇다 할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에는 안 좋은 점도 따르지만 일이 아예 없는 것은 더 끔찍하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한가로움을 더없이 좋게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수많은 농노와 노예를 거느린 지주의 한가로움이었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한가로움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참담함에 젖는다. 맨체스터대학의 심리학자 존 헤이워스는 직장을 못 구한 젊은이들이 실얼 수당을 웬만큼 받아도 자신의 삶에 좀처럼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인간은 힘겨운 노동 없이도 창조의 은혜를 향유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성경의 말씀은 사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목표 의식과 도전 의식이 없이는, 자기 절제가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의미 있는 삶을 누리기에 충분할 만큼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기가 어렵다.
성인이 일상 생활에서 몰입 경험을 언제 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여가 시간보다는 근무 시간에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ESM 조사 결과가 처음에는 무척 놀라운 것이었다. 아주 뛰어난 실력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상황에서 집중력과 창조성, 만족감이 높아지는 현상은 집보다는 직장에서 더 자주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서 게임에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이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일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 있다. 무사히 과업을 마무리했거나, 괄목할 만한 판매 신장을 이루었거나, 상급자의 칭찬을 들었거나, 아무튼 일을 하면 대체로 어김없이 보상이 뒤따른다. 일은 산만함을 누르고 집중력을 살린다. 이상적인 경우는 일의 난이도가 일을 하는 사람의 실력과 엇비슷할 때다. 일은 게임, 운동, 음악, 예술처럼 몰입할 수 있고 보상이 따르는 활동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이런 구조를 지닌 요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일에서 얻는 본질적 보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물론 전문 직종이다. 전문 직종은 개인이 자신의 목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과제의 난이도도 조정할 수 있으며, 개성이 깃들일 여지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아주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 기업가, 정치가, 과학자는 사냥을 하던 선조들처럼 일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삶과 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몰입은 새삼스러운 경험이 아니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보면 어려움라 많고 내면의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정신을 넓히는 데서 느끼는 희열은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은퇴하고도 남았을 노령의 연구자들마저도 항상 느끼는 즐거움이다.
일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값지게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다. 문제는 일을 어떻게 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서 어떤 경험을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일에서 만족을 얻는다 하더라도 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만났던 뛰어난 사람들의 대다수는 자신에게는 일보다 가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바쁜 일과 때문에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직업에 애정을 기울이고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벌레'로 보기는 어렵다. 일벌레는 일에만 미쳐서 다른 목표나 책임은 안중에 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일벌레는 직무와 관련 있는 도전에만 응하고 일에 관계된 기술만을 배우려 드는 편협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는 일이 아닌 다른 활동에서는 몰입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 발로 차고 인생을 초라하게 마감하곤 한다. 일에만 미쳐 살아온 그에겐 이제 뾰족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에 전념하면서도 인생을 다채롭게 꾸려간 사람의 예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5.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하나는 남는 시간을 현명하게 쓰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앞에서 다양한 이유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우리는 누구나 가장 소망하는 목표의 하나가 자유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일은 필요악으로 여겨진 반면 쉴 수 있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로 받아들여졌다. 여가를 즐기는 데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 없고 아무나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임을 보여준다. 여가는 일보다 즐기기가 더 어렵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쓰는 요령을 모르면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모든 증거들은 게으름이 사람의 천성이 아님을 시사흔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 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드라마 시청일 수도 있고 연애 소설이나 추리 소설 같은 판에 박힌 이야기를 읽는 것일 수도 있으며 도박이나 섹스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고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의식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짧은 시간 안에 줄여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감과 불쾌감이다.
의식의 혼돈을 이런 식으로 피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는 먹혀들지만 경험의 질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주지는 못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의 기분은 몰입 상태에 있을 때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도전을 이겨내어 문제를 해결한 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대부분 명확한 목표, 정확한 규칙, 신속한 피드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바로 이런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집중하고 긴장한다. 그런데 여가 시간에는 이런 외적 조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여가 시간에 운동을 한다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거나 취미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몰입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진다. 하지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주어졌을 때는 몰입과는 정반대의 현상인 심리적 혼돈과 무기력 상태로 들어간다.
여가 활동이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능동적 여가와 수롱적 여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며 심리적 효과도 당연히 판이하게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랄 하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이 하릴없이 상가를 쏘다니거나 TV를 보는 것보다 즐겁다는 걸 청소년들도 인정한다. 하지만 가령 농구를 하려면 시간이 만만찮게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야 한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도 적어도 반 시간 가량은 연습을 하면서 손을 풀어야 슬슬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은 하나같이 처음에 어느 정도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그 다음부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복잡한 활동을 즐기려면 그런 '시동 에너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불안하거나 혹은 처음의 그런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은, 재미는 덜하더라도 더 편하게 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족할 것이다.
수동적 여가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편으로 쓰이는 순간부터다. 그런 습성이 뿌리내리면 생활 전반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심심차적으로 도박에 손을 댄 사람은 직장과 가정, 결국은 본인의 인생 전부를 파탄으로 이끄는 습벽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TV를 남달리 많이 보는 사람은 좋은 직장에도 못 다니고 인간 관계도 원만치 못한 경향을 보인다.
미국에서도 아미시, 메노나이트 같은 전통 마을에서 사는 주민들은 일을 하면서 몰입감을 지주 경험한다. 농부의 하루 일과라는 것이 언제 일 끝나고 언제 여가가 시작되는지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뜨개질, 목공, 노래, 책읽기 같은 '여가 활동'이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 의미에서 모두 유용하고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거기에는 희생이 뒤따르는데 이제는 화석처럼 별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기술적, 정신적 단계의 한 지점에 묶여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진 건강한 삶을 누리는 방법은 과연 이 길밖에 없을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 몸을 담그고서도 이러한 특성을 결합하여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여가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일을 할 때처럼 창조력을 발회하고 정력을 쏟아야 한다. 사람을 성숙시키는 능동적 여가는 저절로 굴러오는게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실험하고 발전시키는 데서 여가의 의미를 찾았다. ... 지금은 전문가만이 그런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며 아마추어가 섣불리 나섰다가는 전문가의 영역을 건드렸다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러나 단지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아마추어는 자신의 삶을 흥미롭고 즐겁게 만들 뿐 아니라 모든 이의 삶을 값지게 한다.
자유롭지 못하므로 의미가 없는 일과 목적이 없으므로 의미가 없는 여가로 섦이 양극화되는 위험성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앞 장에서 소개한 창조적 개인들의 실례가 하나의 출구를 제시하는 건 아닐까. 전통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처럼 창조적 개인의 삶에서도 일과 놀이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 사람과는 달리 그들의 삶은 화석화된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로부터 얻은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미래를 더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며 남아도는 시간을 두려워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일이 여가처럼 즐거우며, 일을 잠시 접어두었을 때는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여가가 아니라 진정한 재충전으로서의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된다.
6. 인간 관계와 삶의 질
살아가면서 무엇이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들고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할 때, 십중팔구 우리는 타인을 떠올릴 것이다. ...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행동 중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남들과의 교제다. 몰입 경험을 하다가 다음 순간에 냉담, 불안, 이완, 권태가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간관계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잘 아는 임상심리학자들은 타인과의 유쾌한 만남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맞춘 심리요법을 발전시켰다. 행복이 인간 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얻는 피드백에 우리의 의식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건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사람 관계에서 마음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 하나는 우리의 목표와 다른 사람의 목표 사이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사람들끼리 어울리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므로 어떤 합치점을 발견하기란 원칙적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기울이면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작은 합치점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
- 성공적인 어울림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조건은 다는 사람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디의 정력이 남아돌지 않는 다음에야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면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긍정적 결과를 끌어낼 수 있고, 적절한 어울림에서 맛볼 수 있는 몰입 경험을 하게 된다.
공부나 가사노동도 혼자 하거나 식구와 하는 경우에는 마지못해서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하면 신이 나서 한다. 여기에는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이유가 있다.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적절히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이 이상적으로 갖추어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선택한 것은 그와 나의 목표에 합치점이 있어서이며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서로에게 득을 준다. 이쪽이 저쪽을 착취하는 외적 강제 관계가 아니다. 이상적 우정은 결코 한 자리에 고여 있지 않다. 우정은 늘 새로이 정서적, 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대상, 활동, 모험을 추구하고 새로운 태도, 관념, 가치를 개발하면서 친구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많은 경우 몰입 경험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활동의 내용이 금방 시시해지기 때문이지만, 친구는 일평생을 가도 끊임없이 자극을 줄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정서적, 지적 기량을 갈고 닦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회적 조건의 다른 특성들과 비교할 때 우정은, 가깝게는 가장 정서적 보상이 큰 상황을 제공하고 멀게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가져다준다. 그러나 현대인의 생활은 우정을 지켜나가는 데 불리한 쪽으로 작용한다. 전통 사회로 갈수록 개인은 어렸을 때 사귄 친구들과 일평생 만난 기회가 많다. 그러나 미국처럼 땅이 넓고 사회적 이롱 범위도 큰 사회에서 이것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중학교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가 다르고 대학교에 들어가면 또 바뀌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직장을 옮기는 경우로 잦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전근을 갈 때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의 사귐이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정서적 위기를 맞이한 성인들이 자주 토로하는 고백의 하나가 바로 참다운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몇 세대 사이에 가정은 필수 불가결한 경제적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다. 물질적 혜택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가정이 주는 정서적 보상의 의미가 한층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가정은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최적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우애가 돈독한 가정에서는 오히려 언쟁을 많이 벌인다. 정말로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원만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좋은 가정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을 북돋우면서도 애정의 울타리 안에 묶어들이는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언제까지 집에 들어와야 하고 숙제는 언제 하고 그릇을 누가 씻는가처럼 허용 가능한 것와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느라 불필요하게 기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칙과 규율은 있어야 한다. 정력을 입씨름과 말다툼에 허비하지 않으면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건설적으로 투자된다. 그러면서도 식구들은 필요할 때는 가족 전체로부터 정신적 후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실력을 닦고 과제를 깨닫는 기회를 갖게 되어, 살아가면서 몰입 경험을 남보다 많이 할 확률이 높다.
창조성이 뛰어난 개인을 연구하면 더욱 바람직한 해격책을 얻을지도 모는다. 이 사람을은 무조건 외향적인 것도 무조건 내향적인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특성을 다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고독한 천재'라는 고정 관념이 강하게 박혀 있는 게 사실이고, 또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려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다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창조적인 개인들이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에서 우리는 사람이 외향적이면서 동시에 내향적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읽는다. 어쩌면 내향성 일변도에서 외향성 일변로에 이르는 전 범위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인지로 모른다. 죽 이어진 스펙트럼에서 양쪽 끝의 한 가락에만 갇혀 삶을 집단성 아니면 개인성 어느 하나로만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는 타고난 기질이나 자라온 환경의 탓으로 두 극단성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치우치기 쉬우며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그것이 몸에 익어 활발한 어울림 아니면 쓸쓸한 고독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의 다양한 경험 영역을 축소하고 삶을 향유하는 수많는 가능성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7. 삶의 패턴을 바꾼다
라이너스 폴링의 대단한 점은 아흔 살의 고령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열정과 호기심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 그가 하는 모든 말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폴링은 가난한 환경에서 고생을 밥 먹듯이 하며 자랐지만 누구보다도 삶의 기쁨을 제대로 체득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본인 말대로 "그저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일만 해왔을 따름"이었다.
혹자는 그런 태도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할지로 모른다. 자기 입맛에 당기는 일만 골라서 하는 태도야말로 방종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폴링과 비슷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아무리 어렵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리고 설사 강요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흔쾌히 맡아서 처리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은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들의 삶이 나나 여러분의 삶보다 객관적으로 보아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삶에 대한 강한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몰입 경험을 그만큼 자주 하게 한다는 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직장일을 고역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작용한다.
- 첫째는 하나마나한 일을 한다는 불만이다.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못하고 사실은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일부 공무원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세일즈맨들, 심지어는 과학자들 중에서도 가령 군수 산업이나 담배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을 심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만저만 마음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 둘째는 지겨운 일을 밥 먹듯이 되풀이해야 한다는 데서 느끼는 불만이다. 참신한 맛도 없고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일을 하다 보면 응당 가질 법한 생각이다. 몇 해만 지나면 그런 일인 눈을 감고서도 할 수 있게 되고 성장한다는 느낌보다는 정체하고 퇴보한다는 불안감이 싹트게 된다.
- 셋째는 직장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이다. 특히 상사가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면 그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올라간다.
일반인의 상식과는 달리 사람이 자기 일에서 만족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보수나 안정성보다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인이다.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힘겨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우리에게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손님을 맞는 슈퍼마켓 직원, 특정한 증세보다는 환자의 전체 건강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사, 센세이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는 믿음으로 기사를 쓰는 기자, 이런 사람들은 티끌만한 결과밖에는 낳지 못하는 틀에 박힌 일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을 몰고 온다. 전문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직업은 반복적이고 일차원적인 활동으로 바뀌었다. 기껏 한다는 일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슈퍼마켓 진열대에 물건을 쌓거나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체 맥락을 늘 염두에 두고 자긴의 행동이 전체에 미칠 영향을 이해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직업이라도 세상을 전보다 살 만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상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다른 연구자들처럼 나도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면서 주변의 무질서를 줄이는 데 이바지한 직장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직무의 가치가 크게 올라간 것은 근무자가 자기 일에 남들보다 더 정성을 쏟아부어 거기서 남다른 의미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업에서 얻는 의미는 공짜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예들이 보여주듯이 직무 수칙에 규정된 수준 이상으로 생각을 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관심도 자연히 높아지기 마련이며 이러한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이다.
변화도 없고 긴장되지도 않는 일을 호기심과 성취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일로 바꾸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도 원하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별도로 정성을 쏟아부어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지겨운 일은 계속 지겨운 일로 남기 마련이다. 어느 한구석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직무에 임하면서, 이런 조치는 과연 필요한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할 수는 없는가, 어떤 조치를 곁들여야 내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생길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불필요한 구석을 없앰으로써 일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 전략이다. 같은 정력을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을 생각하는데 쏟아붓는다면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커질 테고 직장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발견들도 사실은 과학자들이 진부한 절차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설명이 필요한 새롭고 예외적인 현상에 주목한 데서 나온 것이 적잖다. 빌헬름 뢴트겐이 방사선을 발견한 것은 어떤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이 빛을 쪼이지 않았는데도 마치 빛에 노출된 듯한 흔적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였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세척을 하지 않은 지저분한 그릇에서 박테리아 배양균의 농도가 떨어진다는 점에 착안한 결과였다. 로절린 얄로가 방사면역분석시험법을 발견한 것도 당뇨병 환자가 일반 환자보다 인슐린을 흡수하는 속도가 낮다고 하는 예상 밖의 관찰 결과에 집중적으로 파고든 덕분이었다. 이 모든 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누군가가 상황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우리의 삶을 뒤바꾸는 중대한 발견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과학에는 이런 사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만약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면서 "이런, 물이 탕 밖으로 또 넘쳤네, 마누라한테 잔소리깨나 듣겠군" 그저 이런 생각만 하고 말았다면 인류는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몇백 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로절린 얄로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고 술회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워낙 흐트러져 있어서 무슨 일이 터져도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간다.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면 위대한 발견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던 일이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기다려지는 환상적 활동으로 변모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둘째,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인들이 더 힘든 자리로 승진하는 것은 그들이 이전의 직책에서 이런 단계를 충실히 밟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설령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력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직장일에서 더욱 만족을 느낄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쪽에 일을 맞추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업무 만족도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반면 아무도 나의 목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 동료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상사나 부하 직원과 대화가 단절될 때 직장은 지옥으로 변한다.
일과 인간 관계에서 몰입을 경험하는 사람의 삶은 질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특별한 묘책도 없고 손쉬운 지름길도 없다. 자기한테 찾아온 기회를 함부로 내버리지 않고 잠재력을 끝까지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삶의 경지에 을라설 수 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의 성격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할까? 바로 그것이 다음 장의 주제다.
8.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그 일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늘 우리는 자기목적적이라고 한다. 가령 그저 놀이 자체가 좋아서 두는 체스는 나에게 자기목척척 경험이 되겠지만 만일 내가 돈을 걸고 체스를 두거나 그 세계에서 순위에 오르기 위새 체스를 둔다면 똑같이 두는 체스라도 자기 외부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행위가 되어 외재적 목적성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다. 외부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보다는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상이 되기에 물질적 수혜라든가 재미, 쾌감, 권력, 명예 같은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일에서, 가정 생활에서, 남들과 어울리면서, 먹으면서,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몰입을 경험하므로 외부적 보상이 없어도 무방하다. 이런 사람은 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외부의 보상이나 위협에 쉽사리 농락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여한다. 삶의 흐름에 깊숙히 빠져들 줄 안다는 소리다.
어떤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진 인간형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가 어떻에 처신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자기목적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바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수동적으로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사람는 자신의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한다. 사람은 몰입을 낳기에 좋은 활동, 곧 정신 노동이나 능동적 여가 활동을 할 때 비로소 몰입을 경험한다.
적극적으로 여가 활동을 하면 경험의 질이 어떻게 달라질까? 너무나 당연하지만 청소년들은 자기목적성이 있든 없든 생산적 활동을 할 때보다는 여가 활동을 할 때 더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 그러나 집중력은 떨어지는 편이어서 여가 활동이 미래의 목표를 이루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집단을 비교해보면 행복감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항목에서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난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청소년들은 집중을 더 잘하고 즐거움도 많이 느끼며 자긍심도 높고 자기가 하는 일이 미래의 목표 달성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모두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해 못할 사실이 하나 있다. 왜 그들은 더 행복해하지 않을까?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더 행복한 건 아기지만 아무튼 복잡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력은 우리의 가능성을 채워 우리를 성장시키면서 행복을 맛보는 일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무위도식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서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자기목적성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가족화 지내는 시간이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주일에 평균 네 시간을 더 가족과 함께 보낸다. 그들이 어째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요령을 더 많이 터득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기서 슬슬 풀리기 시작한다. 가정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아이는 구태여 자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방어 의식이나 경쟁심을 느낄 이유도 없이 편안하에 이런저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보다 마음의 여유다 많은 건 아닐 터인데도, 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아차리며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관심을 아껴두었다가 심각한 일, 중요한 일에만 조금씩 배당한다.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 내가 정력을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은 나 자신, 또 나에게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약간이라도 줄 수 있는 주변 사람이나 일거리다. 나와 직접 관계없는 세상사에 관여하거나 새로운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거나 자기 중심적 의식이 설정한 테두리를 뛰어넘는 데 마음 쓰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나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이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내가 ESM 추적 방식으로 연구한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 가운데 켈리라는 학생은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남자 친구나 쇼핑에 별로 관심이 없고 시험 성적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신화에 흠뻑 빠져들어 '켈트 신화학자'로 자처했다. 일주일에 사흘은 오후에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물을 간수하고 분류하는 일을 거들었다. 벽장 안에다 잡동사니를 쓸어넣는 아주 단순한 일도 켈리는 즐겁에 해치웠다. 항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배우려고 애썼다. 가까운 친구들과는 종교나 앞으로의 진로를 놓고 진지한 토론도 곧잘 벌였다. 그렇다고 해서 켈리는 이타주의자도 아니었고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소극적 성격도 아니었다. 켈리는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관심늘 기울일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목적성을 중요시한다. 획기적인 업적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이유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도 정력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인용문인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수동적이거나 관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해하려는 의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인의 이해 관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기울이는 관심의 내용이 당사자의 목표나 야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때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기회를 잡게 된다.
생활에 부대끼다 보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당면한 목표를 이루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우주의 본질이나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 등의 문제에는 신경을 쏟을 겨를이 없다. 하지만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삭막한가. 그런 사람은 경이를 느낄 줄도 모르고 놀랄 줄도 모르고 감탄할 줄도 모르며, 인간의 공포와 편견이 정해놓은 울타리를 감히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과 관심을 키우는 연습을 해오지 않은 사람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 점에 신경을 써야 한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사실 그 원칙을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시도할 만한 가치는 분명히 있다. 먼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건성으로 임할 게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여 처리하는 습관부터 몸에 익히도록 하자. 설거지, 옷입기, 청소처럼 단순한 일도 충분한 정성을 기울이면 응분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하기 싫은 일, 수동적 여가에 들였던 시간과 관심을 끌어다가 보람은 있지만 적잖은 부담이 따라서 자주 하지 못했던 일에다 투자하자. 이 세상에는 볼 만한 것, 할 만한 것, 들을만한 것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삶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바깥에서 오는 자극이나 도전이 나의 관심을 앗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흥미도 자연스럽게 늘어나서 둘 사이에는 피드백 관계가 형성된다. 어떤 대상에 흥미를 가지면 당연히 관심도 더 쏟게 되고, 거꾸로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히 흥미도 높아지기 마련인 것이다.
관심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경험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삶의 질로 직결된다. 정보는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기울이는 관심은 바깥의 사건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서 필터 구실을 한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끼는가는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다스리는 방식에 좌우된다.
비극적 상황을 그런 대로 견딜 만한 상황으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은 갇혀 지내던 감방이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바깥의 '현실' 상황이 워낙 비인간적이고 삭막해서 대부분 절망에 빠진다. 살아남은 사람들인 외부의 상황을 선별하여 무시할 건 무시하고 자신의 유일한 현실인 내면으로 관심을 돌린다. 시나 수학 같은 상징 체계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보조물 없이도 정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어서 한결 유리하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가 관심을 다스리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기술이나 원리를 익히는 건 별로 어려울 게 없다. 명상과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육체활동을 즐기는 사람은 체조, 에어로빅, 격투기를 익힐 수도 있다. 즐거움을 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력이 쌓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관계없다. 그러나 중요한건 우리의 태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자가 되기 위해 기도를 하고 훌륭한 이두박근을 얻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활동의 의미는 반감된다.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대수롭지 않으며 나의 관심을 다스리는 데서 희열을 맛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9. 운명애
어떤 사람의 따뜻한 행동 하나, 비열한 행동 하나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가에 영향을 끼친다. 자기목적성이 뚜렷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의식에서 무질서를 크게 줄인다. 많이 가지려 하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은 사회 전반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항구적인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이것은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 다채로운 종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기 의식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주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느냐다. 불가에서는 그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 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이처럼 진지한 유희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근심과 겸손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지혜를 익힌 사람은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성패와는 무관하게 우주의 질서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시도 자체가 그에게는 보상으르 다가온다. 그런 사람만이 뻔히 질 줄 알면서도 선의를 위한 싸움에서 희열을 맛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지만 이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나 나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율리시스처럼 우리도 자아가 불러일으키는 헛된 욕망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자아가 벗이 될 수 있으며 도움이 되 수 있고 충만한 삶의 단단한 반석이 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리처드 스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삐 풀린 에고를 어떻게 다스려 창조적 작업에 이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 물론 내 안에는 못되고 치졸하고 비뚤어지고 우유부단한 면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지만, 난 거기서 힘을 끌어낸다. 난 그것들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힘의 원천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가 휘어잡을 수 있을 때 그것들은 작가의 재료가 된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손쉬운 길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실 가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 입장에 놓이면 아까운 정력을 탕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 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이 집중력을 높이고 의식을 명료하게 만들며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살다 보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많이 있다. 회의에 참석하는 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 공과금을 내는 일, 아무리 면해 보려고 잔머리를 굴려도 피치 못하게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툴툴거리며 마지못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치울 것인개. 둘 다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후자가 더 긍정적인 경험을 낳는다. 청소처럼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치운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하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다. 목표를 설정해 놓으면 일하는 괴로움이 상당히 줄어든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니체 철학의 중심 개념이라 할 '운명애(amor fati)'에서 잘 드러난다.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애를 가진 사람은 위대하다는게 나의 신조다. 운명애는 살아갈 날에서도, 살아온 날에서도, 달라지지 않기를, 아니, 영원히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세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태도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테니까."
AbrahamMaslow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임상적 관찰과 자기 실현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면접을 통해 그는 성장의 과정이 절정감으로 귀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절정감은 자아와 환경의 일치를 뜻한다. 그것은 '내적 필요성'과 '외적 필요성', 혹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안하면 안되는 것' 사이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매슬로는 말한다.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기 의지대로 선택한다."
심리학자인 CarlRogers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심신이 건강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내적 자극에 대해서건 외적 자극에 대해서건 가장 경제성이 높은 방향으로 행동방침을 정하고 그쪽을 따르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깊은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CarlRogers의 말은 이어진다. "심신이 건강한 사람은 확고하게 결정된 것을 자유 의지로,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추구할 때 가장 확실한 자유를 경험할 뿐 아니라 그것을 선용한다." 그러므로 니체와 AbrahamMaslow의 말대로 운명애는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자기 행동의 주인 의식을 가지려는 자세에 다름아니다. 진정한 희열과 인격의 성장은 무질서한 일상 생활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때만이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한 니체의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매슬로와 로저스가 들고 나온 '인본주의 심리학'에도 따지고 보면 한계점이 없지는 않다. 사회가 번영을 구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지배하던 금세기 중엽에는 자아 실현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대전제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아 실현을 한답시고 세부 방법론을 따지거나 이런저런 목표들 사이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나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었다. 낙관적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감싸고 돌았고, 유일한 악덕은 자기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않는데서 나온다는 믿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차츰 즐겨하면서 문제가 싹텄다.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청소년들은 차를 훔치거나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다른 이유는 없다. 군인들은 전선에서 기관총을 앞에 놓고 있을 때만큼 강한 몰입감을 느낄 때가 없다고 말한다. 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동안 자기가 풀어야 할 '매혹적 문제'를 시정 어린 글 속에 담았다. ... 이런 예들이 암시하는 윤리적 의미는 분명히 판이하게 다르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긴다고 해서 그 일을 해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걸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즐거움을 주는 목표를 찾아나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세상 전체의 무질서를 줄일 수 있는 목표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목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무질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예로부터 종교의 몫이었다. ...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좇아서 행동한다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이기심에 눈이 먼 사람의 말로를 보여주는 시나리오늘 준비해야 했다. 내세에서 비천한 동물로 나타난다든가 까맣게 잊힌다든가 지옥의 불길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오늘의 시대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초월성을 가진 목표들의 새로운 터전을 발굴하는 것이다. 즉 삶의 의미를 주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과학자와 사상가가 꾸준히 쌓아올리고 있는 지식에서 바람직한 삶의 토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