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l +All:read AdamKahane, Collaborating With the Enemy: How to Work with People You Don't Agree with or Like or Trust <> = 추천의 글 = == 최재천 == == PeterBlock == 이 책의 내용은 부제 그대로다. 생각도 다르고 좋아하지도 않고 신뢰도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다룬다. 처음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협력하라고 한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난이도는 더 올라간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협력하라고 한다. 일터에서는 흔한 일이기도 하니까 이것도 그럭저럭할 만하다. 하지만 마지막 과제는 좀 더 힘들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의 협력은 적과 일하는 것과 같다. '협력의 역설'은 바로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변화 추구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단순하고 순진한 기존 전략은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아는 엘리트 집단이 존재한다는 전제다. 싱크 탱크를 만들고 마약, 빈곤, 테러 같은 부정적 사안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정상 회담에서 발언하고 협상가를 뽑는 것이 지도자와 전문가로 이루어진 핵심 집단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성스럽기까지 한 견해 말이다. 정부, 기업, 학교, 교회 같은 조직에서는 그 핵심 집단이 바로 최고 경영진이고 그들이 변화를 일구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다. 두 번째는 문제를 해결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전제다. 비전에 합의하고 목표를 세우고 그곳으로 향하는 예측 가능한 길을 설정한다. 마감 기한과 단계별 목표가 있는 관찰 가능한 평가 기준을 명시하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책무를 다하고 실패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과 분위기가 그런 믿음을 더욱 고착시킨다. '협력의 역설'은 그런 행동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라고 주장한다. 중대한 이해관계자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이 존재하는 복잡한 문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사회나 조직의 복잡한 문제는 다른 방식의 대처가 필요하다. 애덤 카헤인은 매우 특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전통적인 문제 해결법의 대안으로 스트레치 협력을 이야기한다. 불신, 양립할 수 없는 목표, 뿌리 깊은 원한의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합의에 도달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다. 생각이 달라도 협상을 거치거나 어떤 행동 방안을 목표로 삼지 않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만 합의하면 된다. 자신의 해결책이나 입장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동안 자주 활용했지만 애덤이 경계하는 기존 전략은 또 있다. 바로 문제 당사자들의 관계와 이익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청하고 신중하게 구성된 대화 형식을 따르며 까다로운 대화를 통제하고 합의한 뒤 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 물론 대화는 유용한 방식이지만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주요 사안이 아니다. 대안적 미래를 만들려면 대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 스트레치 협력에는 세 가지 주요 원리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 안에 있으니 간략하게만 소개하겠다. 첫째,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의 입장이 타당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고려해야 할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Bohr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훌륭한 생각은 그 반대의 생각도 진실이다.” 둘째, 함께 배우는 경험을 통해 진전이 이루어진다. 보통은 협상으로 확실한 것을 찾아내려고 하지, 함께 실험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견해가 있다. 상황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면 함께 뭔가를 시도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애덤 카헤인은 협업할 때 자신과 타인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적들을 한자리에 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해당한다. 이것은 존재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말인데, 상황을 바꾸려 하지 말고 알아차리라는 의미다.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나도 문제에 일조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PeterBlock, [[책/FlawlessConsulting]] 저자. = 머릿말 = 특별한 상황이건 평범한 상황이건 협력의 가장 큰 난제는 똑같았다. 그 난제는 단순하지만 쉽지는 않다.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과 어떻게 같이 일할 수 있는가?’ 이 책은 기업이나 정부, 비영리단체, 지역사회 구성원을 포함해 여러 조직과 부문에서 상황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중대한 난제를 진전시키기 위해 동료와 친구뿐만 아니라 적과 반대자와도 함께 일해야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나는 다양한 환경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많이 경험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떻게 진정한 협력을 할지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배움의 기록이다. = 서론: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방법 = 협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협력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협력은 이렇다. 당사자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하고 목적과 달성 방법에 관한 생각도 똑같아야 하며 상대방을 변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협력은 통제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협력은 전략 회의와 비슷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가정은 틀렸다. 복잡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할 때 협력은 통제될 수도 없고 통제되어서도 안 된다. 스트레치 협력stretch collaboration은 통제에 대한 기존의 가정을 버린다. 화합과 확신, 순응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버리고 불협화음, 시행착오, 공동 창조로 이루어진 골치 아픈 현실을 받아들인다. 스트레치 협력은 무술 수련과 비슷하다.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 복잡한 상황에서 함께 일하도록 해준다. 스트레치 협력은 일하는 방식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1. 첫째,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공동 목표와 팀의 화합에만 집중하는 편협한 시야가 아니라 팀 안팎의 갈등과 연결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2. 둘째, 상황을 진전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문제와 해결책, 계획에 대해 분명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고 새로운 관점과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실험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3. 셋째,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 즉 수행하는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타인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말고 적극적인 행동에 돌입해 자신을 바꾸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협력의 두 가지 접근법 ||구분 ||전통적인 협력 ||스트레치 협력 ||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팀 전체의 이익과 조화에 집중 (하나의 우월한 전체) ||갈등과 연결 수용 (다수의 부분적 전체) || ||과제를 진행하는 방식 ||전원이 문제와 해결책에 동의 (하나의 최적 계획) ||실험을 통한 진전 (다수의 창발적 가능성) ||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 ||다른 사람의 방식을 바꾸려고 함 (한 명의 최고 리더)||함께 게임에 발을 내디딤 (다수의 공동 창조자)|| 스트레치 협력은 어렵다. 세 가지 뻗기(스트레치)에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갈등과 복잡함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불편하고 겁도 날 것이다. 스트레치에는 다원화도 필요하다. 하나의 지배적인 전체, 하나의 가능성, 한 명의 리더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부분적 전체(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분), 여러 새로운 가능성, 공동 창조자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책은 스트레치 협력의 이론과 실제를 소개한다. 1장에서는 협력이 왜 필요하고 왜 본질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는지 살펴본다. 2장에서는 협력, 강제, 적응, 퇴장이 필요한 때와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3장에서는 전통적인 협력의 한계와 그것이 적용되는 편협한 조건을 설명한다. 4장은 스트레치 협력의 중요성을 5, 6, 7장은 스트레치 협력에 따르는 세 가지 스트레치를 자세히 설명한다. 바로 갈등과 연결 수용, 실험과 진전, 발 내디뎌보기이다. 결론에서는 이론을 활용한 연습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 1장. 더 중요해졌지만 더 어려워진 협력 = 협력은 필수적일 때가 많지만 보통은 커다란 난관이 따른다. 절실하게 필요할수록 더 힘들어진다. == 정말이지 같이 일 못 하겠네! == 참가자들은 정치인, 인권 운동가, 육군 장군, 기업 총수, 종교 지도자, 노동조합원, 지식인, 언론인 등으로 정말로 사회 각 분야의 여러 층에서 왔다. 뿌리 깊은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다수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경쟁 관계였다. 대부분 서로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고 신뢰도 없었다. 나라 안에도 그룹 안에도 의심과 방어적인 태도가 만연했다. 가장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힘을 합쳐야만 하는데 과연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 적화 증후군 == 이 짧지만 극심한 갈등은 오래전부터 느꼈던 어려움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나에게 무척 중요한 그 프로젝트가 무사히 진행되려면 사람들과의 협력이 필수였다. 그중에는 당연히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여겼다. 이 사건에서 나는 ‘적화(敵化·enemyfying)’라는 보편적 행동 혹은 증후군을 보였다. 적화 증후군은 상대방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현상이다. 내 문제와 고통의 원인이 상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상황에 따라 타인, 경쟁자, 반대자, 상대방, 적과 같은 미묘하게 다른 단어를 쓴다. 우리는 평범하거나 특이한 맥락에서 때로는 신중하고 이따금 가볍게, 심지어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적은 항상 내가 아닌 남인 법이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똑같이 단호해도 나는 신념이고 당신은 아집에 빠진 것이고 그 사람은 독선적이다.” 적화도 비슷하다. “나는 관점이 다른 거고 당신은 틀린 거고 그 사람은 적이다.” 적화는 차이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한 방법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미묘한 현실을 흑백으로 단순화해 상황을 명확하게 하고 대처할 에너지를 모아준다. 하지만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였던 헨리 루이 멩켄Henry Louis Mencken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쉬운 해결책이 존재한다. 그 해결책은 깔끔하고 그럴듯하지만 틀렸다.” 적화는 흥미진진하고 만족스럽고 심지어 정의롭고 영웅적으로까지 느껴지지만 문제를 분명히 해주기는커녕 모호하게 만든다. 갈등을 증폭하고 문제 해결과 창의성의 공간을 좁힌다. 실현 불가능한 대대적인 승리를 꿈꾸느라 정신이 팔려 꼭 필요한 일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 협력의 최대 난제 == 내가 목격하고 실행하기도 한 적화는 협력에 따르는 최대 난제라고 할 수 있다. 협력은 정치에서도 집과 일터에서도 꼭 필요하지만 어렵다. 중요한 과제를 완수하려면 관점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사안이 중요하고 관점이 다를수록 협력은 더 필수적이고 더 힘들어진다. 협력의 최대 난제는 확연한 대립을 이루는 두 가지 사전적 정의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협력Collaboration은 ‘함께 일하다’라는 뜻이지만 ‘반역적으로 적에 협조하다’라는 뜻도 있다. 이처럼 이 단어는 에너지 넘치고 창의적인 팀의 관대하고 포용적인 전진 이야기(“힘을 합쳐야 해!”)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처럼 퇴행적이고 비윤리적인 악행 이야기(“협조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떠올리게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지만 배신을 막으려면 같이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협력의 최대 난제다. 협력의 난제는 권위주의와 복종이 약해지면서 발달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하지만 실패하면 분열과 양극화, 폭력성이 커진다는 점에서는 끔찍하다.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정말이지 같이 일 못 하겠네!”라는 말이 나온다면 협력의 난제에 부딪힌 것이다. 우리가 너무도 흔하게 내뱉는 이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그 사람과 함께 일하기 싫다거나 일할 수 없다거나 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 없이 일하거나 그 사람을 반대하거나 피하거나 이기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꼭 함께 일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을 피하거나 이길 수 없으며, 꼭 필요한 기술이나 자원이 그 사람에게 있거나, 그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 잘못이라 협력할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협력의 최대 난제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다. 상대방의 가치와 행동이 나와 달라서 틀리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므로 답답하고 화도 난다. 같이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되도록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내가 옳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협하거나 저버리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같이 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도무지 성공할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하면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 성공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까? = 2장. 협력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 언제 협력해야 하는지 알아야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알 수 있다. 협력은 문제에 접근하는 네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협력이 항상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다. == 나아가는 길은 불분명하다 == 내가 협력의 가능성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겪은 고무적인 경험의 결과였다. == 협력이라는 기적 같은 선택지 == == 협력의 세 가지 대안 == 팀원들은 국가의 난관에 대처하는 태국인의 기본적 태도 세 가지를 발견했다. 적응We Adapt, 강제We Force, 협력We Collaborate이라고 이름 붙였다. * ‘적응’은 태국인이 자신과 가족, 조직을 돌보고 더 큰 사회적 문제는 다른 사람들, 특히 정부와 엘리트 계급에 맡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인과 조직에 익숙한 태도였다. * ‘강제’는 많은 사람이 정치적 운동에 참여해 상의하달上意下達식의 해결 방안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었다. 태국인은 과거에 이런 태도를 보였고 가장 최근인 2008~2010년에 계속된 시위로 정치적 불안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협력’은 파벌과 집단을 벗어난 상향식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태국에 가장 선례가 적은 접근법이었다. 그 수개월 동안 태국에서는 세 가지 선택지가 전부 활용되었다. 하지만 국가적 위기가 커질수록 ‘적응’과 ‘협력’을 버리고 ‘강제’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상대편 혹은 적과의 협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다. 협력을 최선의 선택으로 보지 않았다. 다음 몇 달 동안 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의미에 대해 태국 동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팀원들과 생각을 주고받을수록 값진 깨달음이 생겼다. 태국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문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주어지는 전형적인 선택지의 틀을 알게 되었다. == 협력은 선택이 되어야 한다 == 내가 태국에서 얻은 깨달음은 이렇다. 우리가 정치에서든 집이든 일터에서든 문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네 가지 대응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협력, 강제, 적응, 퇴장이다. (태국 팀은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을 꼭 찾아야만 하는 처지여서 퇴장은 거론되지 않았다.) 네 가지 선택지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강제 수단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이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협력이 가장 최선이고 올바른 디폴트 선택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문제의 당사자가 서로 이어져 있고 상호 의존적이므로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몽플뢰르시나리오프로젝트에서 얻은 가르침도 마찬가지였지만 항상 사실은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협력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때도 있다. 따라서 협력은 항상 옳지도 항상 틀리지도 않는다.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협력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적이거나 본능적이거나 습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지만 선택지에 따른 기회와 위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네 가지 방법 * 상황을 바꿀 수 있는가? * 예: 일방적인 변화가 가능한가? * 예: 강제(일방적) * 아니오: 협력(다자간) * 아니오: 상황을 그냥 참고 견딜 수 있는가? * 예: 적응(일방적) * 아니오: 퇴장(일방적) 우리는 상황을 바꾸고 싶고 타인과 함께 일해야만 한다고 판단할 때 협력을 시도한다(다자간多者間). 혼자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더라도 협력해야만 한다. 협력은 동료와 친구뿐만 아니라 적과 반대자 등 타인과 함께 일하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거대한 영향력을 잇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협력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성과가 너무 적거나 느려서 많은 것을 타협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저버릴 위험이 있다. 1990년대 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몽플뢰르시나리오프로젝트에서 협력을 선택했다. 그들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협력 때문에 타협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도 필요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강제를 사용한다(일방적). 자신이나 동료와 친구들이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고 여겨 남들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강제는 평화적으로나 폭력적으로, 회유나 타도를 통해서 등 여러 방법으로 가능하다. 이념과 기술, 후원자, 투표, 권위, 돈, 무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강제의 장점은 자연스럽고 습관적인 대다수의 사고방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강제야말로 거의 모든 상황에서 변화를 위한 가장 좋은, 어쩌면 유일하게 사실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자리한다. 이에 따르면 공정한 대의를 위한 강제는 옳으며 활용하지 않는 것은 잘못되고 비겁한 일이다. 하지만 강제의 단점은 이쪽에서 밀어붙이면 상대방도 밀어붙이므로 절대로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4년에 태국에서는 친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각자의 목표를 몰아붙였고 군대까지 나섰다. 심해지는 폭력을 막았다고 군사 행동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국가의 문제 해결 과정이 정체되었다. 우리는 상황을 바꿀 수 없어서 그냥 받아들여야 할 때 적응을 시도한다. 적응에는 지능과 독창성, 용기가 많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일정 영역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게임의 법칙을 바꿀 수 없는데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데만 집중할 뿐 주변 상황은 무시하거나 회피하거나 받아들이려고 한다. 적응의 장점은 바꿀 수 없는 일을 바꾸려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적응은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효과적이지 않더라도 최선책이다. 단점은 너무도 끔찍해서 적응할 수도 없고 생존마저도 힘겨운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식량연구소에 참가하지 않은 세 조직은 협력을 통한 변화보다 기존 시스템 안에서 목표를 더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상황을 바꿀 수도 없고 더 견디고 싶지도 않을 때 퇴장을 활용한다. 퇴장은 중단, 이혼, 손 떼기 등으로 가능하다. 쉽고 간단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할 때도 있다. 위기에 처한 베네수엘라에서는 100만 명이 체념하고 이민을 떠났다. 네 가지 선택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니 내가 사업 파트너와 갈등할 때 보인 행동이 이해되었다. * 우선 나는 적응을 시도했다. 파트너에게 맞추려고 애쓰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을 찾으려고 했다. 관계가 원활하기를 바랐다. *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협력으로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상처 입거나 체면을 구길까 봐 두려워서 갈등을 피하고 최대한 예의를 차리면서 상황을 통제하려고 했다. 좀처럼 의견 차이를 좁힐 수가 없었고 갈등 자체가 불편해져 서로 의견이 다르니 협력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결국에는 강제를 활용했다. 파트너가 원하지 않는데도 내가 원하는 방법을 밀고 나갔다. * 내가 이겨서 상대방이 물러나야만 했을 때도 있었고 내가 퇴장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네 가지 선택지 중에서 내리는 선택은 실용적인 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때만 협력을 선택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일방적인 적응과 퇴장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일방적인 강제가 불가능할 때 협력이라는 다자간 선택지를 택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면 적응이나 퇴장을 선택하므로 상대가 강제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서로 힘이 동등해서 어느 쪽도 강제를 선택하지 못할 때만 협력한다. 물론 협력은 혼자서만 선택할 수 없다. 양측이 서로 원하고 필요한 것에 관한 생각이 일치해야 협력을 시작하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나는 협력하고 싶은데 상대는 원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상대는 퇴장이나 적응 혹은 강제가 협력보다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상대가 일방적 선택의 실행 가능성에 절망과 의심이 들어서 협력에 관심 갖기를 기다릴 수 있다. 아니면 직접 나서서 일방적인 선택의 실행 가능성에 대한 절망과 의심이 커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에 대항하는 우리의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어서 말이다. 제삼자를 개입시켜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 등으로 협력에 대한 상대방의 기대와 호기심, 희망을 끌어올리는 방법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이 놓인 상황의 특징 때문이 아니라 일반적인 선호 때문에 협력을 선택하기도 한다. 정치, 사회, 문화, 심리, 영적 이유에서 협력과 단결을 선호할 수도 있다. 협력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어떤 상황이든 협력, 강제, 적응, 퇴장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이유나 직감, 선호에 따라 협력을 선택한다고 해보자. 다음 질문은 이렇다. 어떻게 하면 협력이 성공할 수 있을까? = 3장. 기존의 억압적인 협력은 쓸모없다 = 사람들은 대부분 협력을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논쟁적인 맥락에서 그런 방식은 성공할 수가 없다. == 억압은 움직임을 막는다 == == 변화 관리에는 통제가 따른다 == 수전 존스는 협력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흔한 실수를 저질렀다. 1. 첫째, 존스는 프로젝트에 관한 대화의 초점을 병원 전체의 대의와 이익에만 맞추었다. 현재 상황과 필요한 변화에 관한 생각이 부서와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르고 변화의 결과로 승자와 패자가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또한 그녀는 ‘전체의 대의’에 관해 전체와 개인의 이익이 똑같은 경우는 자신뿐이며(성과금과 일자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은 부서와 직급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좌우된다는 불편한 사실도 간과했다. 단 하나의 전체를 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관리해야 할 전체가 여러 개였다.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너무 단순하고 기만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2. 둘째, 존스와 컨설턴트들은 문제와 해결책, 계획을 단 하나로 진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관점과 제안이 너무 많아 병원의 상황이 복잡하다 보니 실질적이고 진실한 합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영진은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합의에 이르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시도해보기 전에는 무엇이 효과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의견은 많지만 실제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기존의 고정된 선택지 가운데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선택지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야말로 변화에 꼭 필요한 일이다. 3. 셋째, 존스와 관리자, 컨설턴트들이 변화를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에 주목해보자. 그들은 변화 관리를 다른 사람, 즉 부하 직원과 공급 업자 그리고 환자의 가치와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일이라고 보았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이 근본적으로 위계적인 가정은 사람들을 방어적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변화를 위해서는 모두가 배움과 변화에 열려 있어야 한다. == 정답은 하나뿐 == == 전통적인 협력의 한계 == 몽플뢰르시나리오프로젝트 이후 로열더치셸에 사표를 내고 복합적인 공공 사안을 협력으로 해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세계의 정부와 기업, 비영리단체 등 함께 일해본 모두가 내가 배운 전통적이고 합리적이며 선형적이고 계층적인 3단계 모델을 절대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모델을 협력에 성공적으로 활용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할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 단계를 따르지 않는다. 새로운 관계, 통찰, 헌신, 계획, 역량 등 유용한 결과가 나올 때도 많지만 그것이 서로 합의된 계획을 실행한 결과인 경우는 드물다. 성과가 나올 때도 있고 의도와 비슷한 결과에 이를 때도 있으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협력이 짧게 유지되거나 수년간 이어지기도 한다. 서로 의견이 일치하거나 맞는 상태에서 혹은 극심한 논쟁이 벌어지는 상태에서 일을 진전시키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놓지 않는다. 오랫동안 나는 당사자들이 세 단계를 확실하고도 정연하게 따르고 계획과 통제에 더 큰 노력을 쏟는다면 협력의 예측 불가능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온 모델이 복잡하고 대립적인 상황에는 통하지 않으며 통할 수도 없음을 깨달았다. 나중에 물리학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정책과 전략을 다루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내가 흔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1973년에 디자인 이론가 호르스트 리텔Horst Rittel과 멜빈 웨버Melvin Webber는 이렇게 적었다. 대립적인 사회 정책 문제에서 과학적인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본질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악한’ 문제인 반면 과학은 ‘길들여진’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발달했다. 정책 문제는 확실하게 기술될 수 없다. 게다가 다원적인 사회에 반론의 여지가 없는 공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자본의 객관적인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은 정확할 수도 틀릴 수도 없다. 사회 문제의 ‘최적의 해결책’을 논의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확정적이고 객관적인 답의 측면에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협력의 어려움은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정답을 안다고 확신하면 타인의 답을 고려할 여지가 줄어들어 함께 일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2010년 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 사례를 생생하게 보았다. 태국 각계각층의 지도자 30명이 사흘 동안 연속으로 회의를 여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몇 달 전 방콕에서는 친정부와 반정부 세력의 과격한 충돌이 있었다.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어떤 일이 왜 벌어졌고 누구 탓인지 서로 너무도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전혀 일관성 없는 이야기라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려보니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실 가닥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상황의 진실은 ······다.” 복잡하고 논쟁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의 출발점은 보통 그렇다. 서로 자기가 진실을 안다고 확신한다. 나는 맞고 남은 틀리다. 나는 무고하고 남은 유죄다. 따라서 상대가 내 말에 찬성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퍼시픽가스앤드일렉트릭컴퍼니와 태국 사회 같은 조직에서 그런 확신은 위험하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믿음은 ‘나는 당연히 우월하고 너는 열등하다’로 변하기 쉽다. 이 믿음은 건설적인 협력이 아니라 퇴행적인 강요로 이어진다. 사람은 자아의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반드시 옳아야만 한다는 것에 집착한다. ... 나는 우월함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논쟁에서 이기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틀리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떤 일만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실패작이 된다고 생각했다. 성공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올바른 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다. 복잡하고 논쟁적인 상황에서 협력은 당사자들이 해결책은 물론이고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상태로 출발한다. 지금 어떤 상황이고 누가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협력하는 당사자가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기가 쉽다. ...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전체 상황 모델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미래학자 돈 마이클Don Michael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 아무리 진보한 사람이라도 코끼리의 한 부분 이상을 알지 못한다. 부분이 너무 많고 너무 빨리 바뀌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것들을 전부 합치는 기술이 있더라도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 다른 진실을 합쳐서 하나의 커다란 진실을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정치 철학자 아이제이아 베를린Isaiah Berlin은 단 하나의 이해와 가치를 합의하고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까지 말했다. 따라서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할 때는 하나의 진실이나 정답, 해결책을 합의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부 치료 분야의 권위자 존 고트맨John Gottman이 시행한 연구에 대해 고트맨연구소The Gottman Institute의 최고마케팅책임자CMO 마이클 풀와일러Michael Fulwiler는 이렇게 적었다. 관계 갈등의 69%는 영구적인 문제다. 모든 부부에게 있는 갈등은 두 사람이 직면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근거한다. 1) 근본적인 성격 차이로 일어나는 반복적인 갈등 2) 생활 방식에 관한 니즈의 근본적인 차이다. 우리 연구에서는 영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부부가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 대화가 불가능하면 갈등이 교착상태에 이르고 결국 정서적 유리遊離로 이어진다. 내가 초기에 배운 전통적인 협력 방식은 용도가 제한적이다.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행동이 의도된 결과로 이어지는 단순하고 통제된 상황에서만 통한다. 하지만 가정, 조직, 지역, 국가 등 사회 시스템 대부분에서는 복잡성이 점점 커지고 통제는 줄어들어 그런 상황을 자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전통적인 협력은 이제 쓸모없어졌다. 다루는 상황이 단순하고 통제 가능하다고 가정하여 전통적인 협력을 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하면 곤경에 처한다.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이유로, 통하겠지라는 추측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협력을 활용한다. 하지만 성공할 리가 없다. 적화만 심해져서 한층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번진다. 그러면 초조해져서 효과 없는 전통적인 협력에 박차를 가한다. “곤경에 빠지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확신했던 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통적인 협력은 단순하고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만 효과가 있다. 다른 상황에서는 스트레치 협력이 필요하다. = 4장. 전통적이지 않은 스트레치 협력이 필수다 = 대부분의 사람은 스트레치 협력을 낯설고 불편해한다. == 스트레치는 유연함과 불편함을 만든다 == 존과 메리는 주택 대출금을 또 연체한 아들 밥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이번에 그들은 전통적인 협력이 아니라 스트레치 협력을 시도한다. 세 사람은 한 가족으로서 따뜻한 유대감을 느끼지만 상황에 대한 경험과 관점, 니즈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들은 그 차이에 대해 솔직하고도 격렬한 대화를 나눈다. 존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아들 때문에 화가 나고 무력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메리는 손주들이 걱정되고 부부의 은퇴 계획이 엉망이 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한다. 밥은 힘들어진 사업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마당에 부모가 비난만 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세 사람은 문제나 해결책에 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끝까지 합의에 이를 수 없고 실제로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너무 과격하지 않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볼 마음은 있다. 존은 아들의 사업체를 위해 은행 대출을 받아주겠다고 약속하고 메리는 며느리 제인의 취직을 도와주기로 한다. 그들은 아들 부부와 상황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존과 메리는 토요일마다 손주들과 시간을 보낸다. 모든 것이 갑자기 쉬워지지는 않았지만 서로 마음을 연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시도해볼 수 있다. 밥과 제인의 경제 상황도 나아지기 시작한다. 네 사람은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 방법은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대신 스스로 변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한다. 존은 경제적인 문제 말고 다른 부분에서도 아들과 유대감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메리는 남편에게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밥은 중소기업 고문관의 조언을 받고 제인은 집안의 예산을 관리한다. 이러한 변화로 네 사람이 상황과 서로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답답함이 줄어들었다. 경제적, 감정적 압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 또 그들을 압도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한 가족으로서 힘을 합쳐 문제를 더욱 신중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네 사람은 모두 전통적 협력에서 스트레치 협력으로의 변화가 어렵다고 느낀다. 스트레치가 불편하다. 더 큰 갈등과 더 진실한 유대 모두에 마음을 열고 실패할지도 모르는 낯선 행동을 시도해야 하며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 내전을 끝내는 방법 == 강제, 적응, 퇴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협력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논쟁이 심한 상황에는 전통적인 협력이 통하지 않는다.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199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잠깐이나마 그런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 새로운 방법이 내가 배워온 전통적인 협력과 어떻게 다르며 왜 효과적인지 알게 된 것은 나중에 콜롬비아에서였다. 데스티노콜롬비아프로젝트는 콜롬비아가 서로 힘을 합쳐 50년의 내전을 끝내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측면에서 스트레치 협력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 첫째, 데스티노콜롬비아 팀은 콜롬비아의 공익을 위해 힘을 합치고자 했지만 단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립 관계에 놓인 그들은 해결책에도 합의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관한 생각마저 달랐다. 그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한 것은 콜롬비아가 문제 상황에 놓였다는 것뿐이었다. 문제의 측면이나 이유에 대한 관점은 제각각이었다. 팀원들은 함께 일하는 것을 즐기고 서로에게 책임감도 느꼈지만 하나의 팀은 아니었다. 모두가 데스티노콜롬비아 팀보다 원래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과 헌신이 훨씬 더 컸다. (두케가 카이세도를 살리려고 한 것은 이 법칙의 예외였다.) 그들의 협력은 이러한 비단결성 때문에 논쟁이 많았지만 그만큼 값지고 다채로웠다. 단 하나의 목표나 초점 없이 협력했다. 2. 둘째, 팀원들은 국가에 필요한 계획이 무엇인지 합의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네 가지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으며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첫 번째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만 다들 동의했다. 나머지는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했다. (시나리오를 활용한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의 비전이나 로드맵 없이 협력이 이루어졌다. 3. 셋째, 팀원들은 각자 원하는 목표에 대한 뜻이 강력했지만 남들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역시나 소우주는 대우주의 축소판이었다. 콜롬비아 내전이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그 어떤 정당도 다른 정당에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팀은 타인을 바꾸려 할 수 없는 상태로 협력했다. == 통제에 대한 환상 버리기 == 데스티노콜롬비아프로젝트는 협력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억눌려 있음을 강조한다. 스트레치 협력을 하려면 세 가지 차원으로 뻗어야만(스트레치) 한다. 그 세 가지 차원은 전통적인 협력을 포함하고 초월한다. 요약하자면 전통적인 협력은 초점과 목표, 달성 계획, 실행을 위하여 개인이 해야만 하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팀이 하나의 로드맵을 따르는 것과 같다.) 반면 스트레치 협력은 통제에 놓이지 않고도 전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여러 팀이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1. 스트레치가 이루어지는 첫 번째 차원은 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협력에서는 통제와 억압을 통해 팀의 화합과 대의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복잡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팀원들의 관점과 소속, 관심사가 크게 다르고 각자 행동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트레치를 통하여 팀 안팎에 자리하는 갈등과 관계에 마음을 열고 수용하고 협력해야 한다. 2. 스트레치가 이루어지는 두 번째 차원은 팀의 과제를 진전하는 방법이다. 전통적인 협력에서는 문제, 해결책, 실행 계획에 대한 명백한 합의를 끌어내고 합의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복잡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분명한 합의나 예측 가능한 실행이 불가능하다. 팀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서로 신뢰가 없거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과 가능성을 시도하고 실험해 한 번에 하나씩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스트레치가 필요하다. 3. 스트레치가 이루어지는 세 번째 차원은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 즉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이다. 전통적인 협력에서는 내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되도록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암묵적으로 ‘타인’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고 자신은 상황의 바깥쪽이나 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상대에게 지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상황으로 들어가 열린 태도로 자신의 방식을 바꾸는 스트레치가 필요하다.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다섯 가지 방법 * 상황을 바꿀 수 있는가? * 예: 일방적인 변화가 가능한가? * 예: 강제(일방적) * 아니오: 변화를 통제할 수 있는가? * 예: 일반적인 협력 * 아니오: 스트레치 협력 * 아니오: 상황을 그냥 참고 견딜 수 있는가? * 예: 적응(일방적) * 아니오: 퇴장(일방적) = 5장. 첫 번째 스트레치, 갈등과 연결을 수용하기 = 전통적인 협력은 팀원들과 화합하여 팀 전체에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싸우기보다는 대화를 한다. 이 접근법은 통제 가능한 단순한 상황에서는 효과적이다. 문제 당사자들의 관점과 관심사가 전부 일치할 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점과 관심사가 다른, 복잡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갈등과 연결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화뿐 아니라 싸움도 필요하다. == 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 스즈키와의 대화 직후라서였을까. 나는 넬슨 만델라가 참여와 대화를 통해 반대자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사실에 집중하느라 그가 주장과 투쟁으로도 똑같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 사실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만델라는 투옥되기 전에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 반대하는 불법 시위와 작전을 이끌었고 지하로 들어갔으며 은밀하게 해외에 드나들었고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무장 게릴라 제1사령관을 맡았다. (ANC 지도자들은 2007년에도 테러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미국 입국 사증 발급이 거부되었다.) 만델라는 출소 후 1994년 선거로 이어진 협상과 그 후 재임 기간에도 목표를 진전시키고자 반대자를 강하게 몰아붙일 때가 많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만델라의 리더십은 그가 언제 어떻게 참여하고 주장해야 하는지 알았음을 보여주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이루어낸 변혁은 참여와 주장을 모두 활용한 만델라 같은 이들 덕분이었다. 그동안 나는 전체에서 물리적인 부분에만 집중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은 대화가 가능해지도록 설계된 워크숍에서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워크숍을 벗어나면 서로 싸울 때가 더 많았다. 워크숍에서의 대화가 놀랍고 유용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참여와 주장의 역할이 내 바람처럼 완전히 별개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과테말라에서 아레나스가 나에게 해주려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참여와 주장 중에서 하나만 사용하면 안 된다. 둘 다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전체는 하나가 아니다 == 참여와 주장에 모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가 있다. 팀이든 조직이든 지역사회든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일은 분별 있지도 타당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모든 사회 시스템은 여러 개의 전체로 이루어진다. 그 전체들은 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분이다. 영국 작가 아서 케스틀러ArthurKoestler는 전체이자 부분인 것을 가리키는 홀론holon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5 예를 들어 개인은 자기 자신으로는 전체이지만 팀의 일부이다. 팀은 그 자체로 전체지만 조직의 일부분이다. 또 조직은 전체지만 어떤 부문의 일부이고 그런 식이다. 이러한 전체들에는 저마다 고유한 필요와 관심사 그리고 야망이 있다. 전체는 여러 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전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전체의 이익’ 달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것이기까지 하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전체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말에는 개별 팀원(더 작은 전체)과 조직(더 큰 전체)의 우선순위를 낮춘다는 뜻이 들어있다.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하나의 전체 이익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서로 겹쳐진 여러 전체의 이익과 다양함 그리고 불가피한 갈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나는 팀의 협력을 다그치면서 팀 전체의 목표에 집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참가자들의 개인적, 조직적 목표를 제쳐두라는 암묵적인 요구와도 같았다. 크고 작은 전체의 이익은 나와 팀의 리더에게만 똑같을 뿐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도 간과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팀 전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았다. == 홀론의 두 가지 동력 == 다수의 전체와 함께 일하는 열쇠는 힘과 사랑을 모두 행사하는 것이다. 2010년에 출간한 《포용의 리더십》에서 제시한 이론인데 지금까지도 협력의 역학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그 책에서 나는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Tillich의 심오한 연구에 따라 힘power을 “살아 있는 모든 생물체의 자아실현 동력”이라고 정의했다. 힘의 동력은 주장하는 행위에서 드러난다. 집단 내에서 힘의 동력은 분화differentiation (다양한 형태와 기능의 발달)와 개별화individuation(서로 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부분)를 만든다. 사랑도 역시 틸리히의 정의를 따라 “분리된 것의 통합을 지향하는 동력”이라고 정의했다. 사랑의 동력은 참여 행위에서 드러난다. 집단 내에서 사랑의 동력은 균질화(정보와 역량 공유)와 통합(전체로 연결되는 부분)을 낳는다. 내 주장의 핵심은 모든 개인과 집단은 두 가지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한 가지만 활용하는 선택은 실수라는 것이다. 힘과 사랑은 하나만 골라야 하는 선택지가 아니다. 서로 보완적인 관계이므로 둘 다 선택해야 한다. 나는 틸리히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의 “사랑 없는 힘은 무모하고 폭력적이며, 힘이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고 나약하다”라는 주장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크고 작은 사회 시스템에서 두 가지 동력 중 하나가 빠졌을 때 일어나는 쌍둥이 같은 퇴행과 두 가지 동력이 함께 행사될 때 일어나는 발전적 통합에 관한 여러 사례를 인용했다. 살아 있는 모든 전체 혹은 홀론은 사랑과 힘의 동력을 가진다. 통합을 지향하는 동력인 사랑은 홀론의 부분성을 반영한다. 더 큰 전체의 일부인 것이다.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동력인 힘은 전체를 반영한다.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다. 따라서 다수의 전체와 함께 일하려면 사랑과 힘을 모두 행사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 힘과 사랑을 번갈아가며 행사하라 == 나는 《포용의 리더십》을 출간한 후에 심리학자 배리 존슨BarryJohnson이 힘과 사랑 같은 간극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법론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존슨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해결이 불가능하고 오직 관리만 가능한 양극성을 구분 지으라고 제안한다. 양극성에서 두 가지 관계는 들숨과 날숨의 관계와 유사하다. 들숨과 날숨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면 이산화탄소가 넘쳐서 죽고 내쉬기만 하면 산소가 부족해서 죽는다. 들이쉬기와 내쉬기를 모두 해야 하며 동시가 아닌 번갈아가면서 해야 한다. 우선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숨을 들이쉰다. 세포가 산소를 이산화탄소로 바꾸고, 혈중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숨을 내쉰다. 혈액 속 산소 수치가 너무 낮아지면 숨을 들이마신다. 몸이 건강하면 이러한 불수의적인 생물학적 피드백 시스템에 따라 들숨과 날숨의 교대가 유지되어 우리는 살아가고 성장할 수 있다. 배리 존슨의 방법론을 통해 참여와 주장에 관한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이해되었다. 그의 방법론은 사랑과 힘을 행사하려면, 즉 다수의 전체와 함께 일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설명해주었다. 조화를 수용하고 불협화음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협력이라는 그동안의 생각이 협력의 효과와 적용 가능성을 제한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로지 화합만 존재하는 협력은 으레 실패하기 마련이고 결국은 적응과 강제 그리고 퇴장으로 이어졌다. 협력할 때는 사랑과 힘을 번갈아가며 행사한다. 우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한다. 참여가 계속되다 격렬해지면 결합과 항복이라는 불편한 감정이 만들어진다. 참여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중요한 신념을 경시하거나 타협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반응이나 불편함은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주장으로 바꿔야 한다는 신호가 된다. (아레나스와 스즈키의 경우와 같다.) 하지만 주장이 계속되다 격렬해지면 차단, 반발, 저항 충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반응이나 감정은 참여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다. (이 간단한 예시에서는 양쪽에게 한 가지 역할만 주어졌지만 실제로는 양쪽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다.) 사랑과 힘의 양극성 관리 ||구분 ||사랑||힘 || ||발전적 측면 ||참여||주장|| ||과하면 나타나는 신호 반응||굴복||저항|| ||퇴행적 측면 ||조종||강요|| 이 두 가지 반응이나 불편함이 무시되거나 도를 넘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면 참여와 주장이 교대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자기주장만 하고 상대방의 저항을 밀치고 나간다면 자신의 목표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상대를 패배시키거나 탄압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주장만 하면 전쟁과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태국인들이 2013-2014년의 폭력 사태가 내전으로 이어질까 봐 두려워한 것과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이 위험에서는 저항의 분위기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주장이 너무 과해서 참여가 필요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참여로 전환하면 주장이 퇴행적인 효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반면 나의 참여가 너무 과해서 상대방이 타협당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상대방을 조종하거나 힘을 빼앗는 결과가 된다. 극단적인 경우 참여만 행사하면 질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강제된 평화나 화해로 생기가 사라져버린다. (태국인들은 2014년 쿠데타가 무감각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까 봐 걱정했다.) 이 위험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왜 항복 분위기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참여가 너무 과해서 주장이 필요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주장으로 전환하면 참여가 퇴행적인 효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제한 없는 참여가 가져오는 위험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몽플뢰르시나리오프로젝트 이후 참여와 대화를 받아들이고 주장과 싸움을 거부한 내가 놓친 점이기도 했다. 배리 존슨은 (내가 그런 것처럼) 제한 없는 주장의 위험에 너무 집착하는 것을 경고했다. 참여가 하나의 극이 아닌 완벽한 이상이라고 착각하게 되므로 정반대의 위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중하지 못하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주장을 거부하고 제쳐버린 것이 내 실수였다. 그렇다고 주장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둠으로 들어가버려 무의식적으로 행사되었을 뿐이었다. 미국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은 ‘전문직 종사자를 도와주는’ 나 같은 사람들이 힘과 주장을 거부하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고 지적한다. 주장을 차단하면 왜곡이 일어나 퇴행적이고 위험해진다. 제임스 힐먼의 지적처럼 정치와 비즈니스에서는 주장(경쟁과 논쟁)의 가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장과 참여의 공존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장을 유지하기 위한 협동이 그 예이다.) 하지만 협력 부문에는 주장보다 참여가 필요하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발전적인 주장이 가능해지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전통적인 협력은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주장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경직된다. 결국 딱딱하게 굳어 꽉 막혀버린다. 반면 스트레치 협력은 참여와 주장 사이를 발전적으로 순환하므로 가족, 조직, 국가 같은 사회 시스템이 더욱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 나는 《포용의 리더십》 관련 강연에서 사람 대부분이 사랑과 참여 혹은 힘과 주장 중에서 한쪽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인이나 문화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다. 스트레스가 적은 환경에서는 두 가지 동력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상대가 동료나 친구일 때),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에서는 자신의 기본 상태로 돌아가 안전지대에 갇힌다(상대가 적과 반대자일 때).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모두가 힘과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자제한다면, 즉 강한 쪽을 약화하거나 약한 쪽을 상대방에 맡기면 힘든 상황에서 협력에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약한 동력을 행사해 강해지게 만들어야 한다. 즉 스트레치가 필요하다. 참여와 주장이 교대로 이루어지려면 언제 어느 쪽을 행사할지 알고 퇴행적이 아닌 발전적인 주기가 이어져야 한다. 캐나다의 알루미늄 기업 알칸Alcan의 CEO였던 데이비드 컬버David Culver는 탁월한 관리자로 유명했다. 사회 혁신을 연구하는 프랜시스 웨스틀리Frances Westley가 은퇴한 컬버에게 비결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온정적인 마음이 들면 오히려 더 냉정해지려고 합니다. 냉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온정적이 되려고 하지요.” 따라서 참여와 주장을 왔다 갔다 하려면 (퇴보로 접어드는) 불균형의 신호를 보내는 피드백에 주의를 기울이고 균형을 바로잡는 조처를 해야 한다. 참여가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조종하는 위험의 경지에 이르면 주장이 강해져야 한다. 반면 주장이 저항을 일으켜 강제의 위험이 발생하면 참여가 강해져야 한다. 정적인 균형을 유지하지 말고 역동적인 불균형을 의식하고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참여와 주장을 모두 활용하는 기술은 필요할 때마다 대항하고 조처하는 의식과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참여가 지배하는 상황이나 시스템에서 주장은 예의에 어긋나거나 공격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반면 주장이 지배하는 상황이나 시스템에서 참여는 약하거나 배신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흐름에 역행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지배적인 움직임이 좌절과 의심, 두려움으로 이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 맞서는 조처를 해야 한다. 갈등과 연결을 수용하려면 반드시 사랑과 힘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통합과 전체의 이익을 강조하는 사랑이 과도하다고 생각된다면 힘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힘의 행사에 따르는 불안한 갈등도 감수해야 한다. 부분의 의사 표현과 이익을 강조하는 힘이 과도하다고 생각된다면 사랑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행사에 따르는 제한적인 집단주의도 감수해야 한다.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해야 한다. = 6장. 두 번째 스트레치, 실험하며 나아가기 = 전통적인 협력에서는 모두가 문제와 해결책, 실행 방안, 실행에 동의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이 접근법은 통제 가능한 단순한 상황에서는 효과적이다. 협력하는 사람들이 계획에 동의하여 의도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여러 다양한 견해와 행동을 실험할 필요가 있다. 방법을 제안하고 상황을 관찰하면서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 미래를 통제할 수 없지만 영향을 줄 수는 있다 == 나는 프로젝트를 통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프로젝트에서 다뤄진 상황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통제 불능이었다. 다수의 합법적, 불법적 행위자에 의한 여러 신구 약물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할 수 없었다. 세계 정부와 비정부 기구의 마약 정책에 관한 관점과 입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독립적인 참가자들의 협력 결과물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멈추자 눈에 띄는 진전이 이루어졌다. 참가자들이 문제나 해결책에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꼭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깨달음은 만장일치 없이 상황을 전진시키는 자유를 선사했다. 프로젝트 운영자와 팀원 사이에 활기 넘치는 협력이 이루어진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기존의 단일 전략을 융통성 없이 실행하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전략을 다양하고 유연하게 실험해볼 의지가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 돌을 더듬으면서 강을 건넌다 ==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만든다. 출발하기 전에는 길을 알 수 없다. 길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가면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흥미진진하면서도 불안하다.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당사자들이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어서 위험도가 낮은 단기간의 행동 계획 이상에는 헌신하지 않는다. 통제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협력이므로 언제든 원하면 퇴장할 수 있다. 협력자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 강요나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 마약 프로젝트에서 팀원들이 여러 굴곡에도 끝까지 참여한 것은 저마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안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영학 교수 피터 센게PeterSenge는 말한다. “대부분의 리더십 전략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다. 변화 전략을 시행하는 리더들은 마치 식물을 보고 이렇게 부탁하는 정원사와 같다. ‘빨리 커라! 좀 더 노력해! 할 수 있어!’ 빨리 자라기를 ‘원하라’고 식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원사는 세상에 없다. 씨앗에 성장 잠재력이 없으면 그 누구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 스트레치 협력은 정원 일과도 같다. 다 같이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만들 수 있지만 지시할 수는 없다. 협력자들이 어떤 계획을 함께 실천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 계획은 변화의 시작에 불과할 뿐 끝을 내놓지는 못한다. 복잡하고 논쟁적인 환경에서 어떤 계획이 성공할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계획을 실행하는 것뿐이다. 만약 협력자들이 어떤 계획을 실행하기로 합의했고 그 계획이 의도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말이다. 계획대로 되리라는 생각은 오만하고 비현실적이다. 복잡하고 논쟁적인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한 번에 한 걸음씩 내디디며 깨달음을 얻는 것뿐이다. 따라서 거래나 합의를 하는 것이 스트레치 협력의 전부가 아니다. 스트레치 협력은 지속적이고 창발적인 과정이므로 합의보다 실행이 더 중요하다.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행동하고 행동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의견이 일치하고 서로 호감과 신뢰가 있어야 성공적인 협력은 아니다. 그것은 필수 사항이 아니다. 성공은 오도 가도 못하며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계획의 구상과 합의 그리고 실행이 스트레치 협력의 전부가 아니다. 물론 계획을 수립하는 것도 유용하다. 계획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효과적이지 않을 때 변화를 줄 수 있다면 말이다. 스트레치 협력은 불확실함과 논쟁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덩 샤오핑邓小平은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변화를 추구하는 접근법을 매우 인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우리는 돌을 더듬으면서 강을 건너고 있다.” 칼 웨이크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은 좋은 지도나 계획 덕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단 행동을 시작해서 어떤 맥락에서든 눈에 보이는 결과가 만들어지면 상황이 파악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명확한 비전이나 목표가 없어도 된다. 문제 상황을 함께 이겨내려고 한다는 공동 의식만 있으면 된다. (정찰 부대의 공동 의식은 눈보라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협력 팀의 진전은 합의한 목표를 이루는 탁월한 계획을 신중하게 실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동에서 배움을 얻음으로써 진전이 이루어진다. 일이 잘 돌아간다면 (부대원처럼) 희망과 경계심, 활기, 유연성, 상호 지지가 행동을 돕는다. 캐나다의 경영학 교수 헨리 민츠버그HenryMintzberg는 이 원칙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민츠버그는 전략을 실행하는 데 정반대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목적을 실현하는 의도적인 전략과 목적이 없어도 실현되는 예기치 못한 전략이다. 그는 완전히 의도적인 전략을 실행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관리자는 많지 않다고 본다. 전략, 즉 행동 패턴이 의도대로 정확하게 실현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조직에 정확한 목적이 존재하고 그것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표현되어 바라는 바를 의심 없이 정확히 아는 상태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조직은 집단행동을 뜻하므로 어떤 의도가 조직적인지 아닌지 의심을 없애려면 사실상 모든 행위자에게 보편적이어야 한다. 본인이 의도하거나 일종의 규제 반응으로 지도자의 의도를 수용한 것이거나 상관없이 말이다. 셋째, 집단의 의도가 정확히 의도한 대로 실현되어야 한다. 시장, 기술, 정치와 같은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환경이 완전히 예측 가능하고 유순하거나 조직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조직에서 완벽하게 의도적인 전략을 찾기가 어렵다. 단순한 조직의 내부에서도 이 조건이 충족되기 어렵다면 여러 조직이 얽힌 복잡하고 갈등 많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따라서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의도적이 아닌 창발적인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창발적 전략은 실험으로 구현된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결과를 통해 배운다. 신속 조형 기술rapid prototyping(제품 개발에 필요한 시제품을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옮긴이) 같은 디자인 기반의 방법론을 이용한다. 가정을 표현하고 시험하면서 심각성이 낮고 고치는 비용도 적게 들도록 초반부터 오류를 찾는다. (“일찍 실패하고 실패하며 나아가라.”)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 실패는 행동이 아니므로 배움을 얻을 수 없고 행동을 미루는 것이므로 더 크고 값비싼 실수로 이어진다. 마약 퇴치 프로젝트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보고서를 자잘하게 수정하고 단 하나의 권고 정책이 아닌 여러 가지 미래 시나리오를 만들었으며 실험에 중점을 둔 하나의 시나리오를 소개하면서 작업했다. == 창의성에는 부정의 능력이 필요하다 == 실험 과정은 창조 과정이다. 내 동료인 예술가 제프 바넘Jeff Barnum은 파블로 피카소가 투우사 그림을 그리는 타임랩스 사진으로 만든 영상11을 보여주면서 그 원칙을 알려주었다. 피카소는 우선 캔버스에 대략적인 선을 그린 후 정교함과 채색을 추가한다. 계속 수정하고 색칠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아름답게 그려진 중앙의 황소 머리를 없애버린다. 바넘은 설명한다. 창조 과정은 발견의 과정이다. 이미 보거나 아는 것을 마음에 투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이미 완성된 머릿속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예술가는 분명한 매체 안에서, 그 본질적인 속성의 한계 안에서 영감과 부합하는 매체의 방식을 찾는다. 피카소는 창조하기 위해 기꺼이 파괴한다. 부분에 집착하느라 전체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경향을 맹렬하게 극복하려면 맹렬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피카소는 아름다운 얼굴이나 멋진 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구체적인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전체적인 작품을 추구한다. 그는 그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를 찾는다. 여기에서 필요한 내적 행위는 효과적이지 않은 것을 내려놓는 용기와 새로운 해결책을 제안하는 대담함이다. 바넘과 나는 이 원칙을 MIT 경제학 교수 오토 샤머OttoScharmer의 ‘U 이론TheoryU’과 연결했다. U자는 자각에서 발현으로 움직여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 움직임은 직접적인 직선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바넘은 시작점에서는 앞으로 무엇이 만들어질지 알 수 없으며 U자 아랫부분 모퉁이 정도에 이르러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알지만 방법은 알지 못한다. 요즘 창의성이라는 단어는 너무 막연하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든다는 필수적인 의미가 잊혀버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창의적으로 발견하려면 무언가를 시도하고 뒤로 물러나 결과를 살피고 변화를 주고 계속 반복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나는 책을 쓰면서 이 방식을 배웠다. 무슨 내용을 쓰고 싶은지 몇 달을 생각해도 소용없다.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쓴 글을 살펴봐야 감이 잡힌다. 어디를 고치고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있다. 나쁜 글을 수백 번 고쳐 써야 좋은 글이 나온다. 이런 방식으로 일하려면 두려움(“난 실패작이야!”)이나 집착(“이 방법이 옳지 않으면 안 돼!”)을 버리고 부족한 결과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희망 사항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현재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 언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니,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불편한 대립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이것을 ‘부정의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불렀다. 키츠는 이것을 “사실이나 이성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불확실성, 신비, 회의 속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13 그동안 배운 계획-동의-실행 모델에서 벗어나 ‘불확실성, 신비, 회의’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나에게 스트레치가 필요했다. 스트레치 협력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내심과 여유를 가지고 실험과 반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를 위해 실수가 드러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써가며 화가나 시인처럼 혼자 작업하고 적이나 반대자와도 함께 일해야 한다. ==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귀 기울여라 == 마약 퇴치 프로젝트 팀이 새로운 정책의 선택지를 함께 구상하고 표현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열린 태도로 서로의 생각에 귀 기울인 덕분이었다. 개방적 경청open listening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실험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기 위해 꼭 필요하다. 개방적 경청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선택지를 발견하게 해준다.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꾼다는 뜻이다. 서구에 동양 불교의 선 사상을 처음 소개한 스즈키 순류鈴木俊隆 선사는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숙련된 사람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아주 조금밖에 없다”14라고 했다. 미국의 학자 카트린 카우퍼Katrin Käufer가 이끄는 연구진은 비전과테말라 팀의 구성원을 면담해 그들의 작업 경험을 분석했다.15 그 결과 팀원들의 대화와 경청 방식이 카우퍼의 동료인 오토 샤머가 고안한 모델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6 그 모델에 따르면 말하기와 듣기에는 사고의 시점에 따라 네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의 전체 혹은 다수의 부분에 우선순위를 두는지, 기존의 현실 재현 혹은 새로운 현실 실현에 우선순위를 두는지가 다르다.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순서로 이 네 가지 방식을 의도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활용한다. 오토 샤머가 다운로딩downloading(내려받기)이라고 명명한 말하기와 듣기의 첫 번째 방식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오직 내 이야기만 듣는 상태다. (“아,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어.”) 다운로딩과 관련된 말하기는 항상 하는 말만 한다. 그것만이 진실이기 때문에 혹은 말해도 안전하거나 정중하므로 말한다. 전체는 (목표도 팀도 전략도) 하나라고 주장하고 다른 것은 무시하거나 억압한다. 다운로딩은 전문가, 근본주의자, 독재자 등 오만하거나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 간의 스트레치 협력은 항상 다운로딩 단계에서 시작한다. (“사실은 바로 ······입니다.”) 말하기와 듣기의 두 번째 방식은 토론debating이다. 마치 토론회나 법정의 판사처럼 외부에서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듣는 단계다. (“이건 사실이고 그건 사실이 아니야.”) 토론과 관련된 말하기는 바로 생각의 충돌이다. 저마다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이기거나 지는 생각과 사람이 생긴다. 이 단계는 다운로딩보다는 개방적이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관점을 표현하고 그것은 각자의 견해일 뿐 진실은 아님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말하기와 듣기의 세 번째 방식은 대화dialoguing다. 자아의 경계선 밖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주관적으로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당신의 말을 이해합니다.”) 대화와 관련 있는 말하기는 자기 성찰적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저마다 힘과 사랑을 행사하는 다수의 홀론을 다루며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단계다. 앞서 비전과테말라 워크숍에서 로널드 오차에타가 거대한 무덤의 발굴 현장을 지켜본 이야기를 했을 때 5분간 침묵이 감돌았다고 소개했다. 나중에 팀원들도 자주 언급한 순간이었는데 누군가는 “합일”의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말하기와 듣기의 네 번째 방식은 실존 체험presencing이다. 이것은 만들어지는 무언가를 자각하는 것pre-sensing과 현재에 머무르는 것present을 합친 신조어다. 자신이나 상대방의 경계선 안쪽이 아니라 더 커다란 시스템에서 생각이나 사람에 귀 기울인다. (“지금 내가 알아차린 바는 ······입니다.”) 실존 체험이 이루어지는 집단에서는 사람들 간의 경계선이 사라져서 개인이 집단이나 시스템 전체의 관점에서 말하므로 다른 사람들도 집단이나 시스템 전체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된다. 오차에타는 비전과테말라의 핵심 구성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개인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이므로 관심을 쏟고 조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기와 듣기의 네 가지 방법 ||<-4:>새로운 현실 창조|| ||<|2>전체 우선 ||실존 체험<
>"지금 내가 알아차린 바는 ... 입니다"||대화<
>"내 경험에 따르면..."||<|2>부분 우선|| ||다운로딩<
>"사실은 바로 ... 입니다" ||토론<
>"내 생각에는..." || ||<-4:>기존 현실 재현|| 네 가지 방식의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타당하고 유용하다. 한 가지 방식만 쓰지 말고 네 가지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운로딩과 토론만 하면 똑같은 현실이 재현된다. 지금까지와 똑같은 생각만 하고 지금까지와 똑같은 행동만 할 것이다.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싶다면 대화와 실존 체험도 해야 한다. = 7장. 세 번째 스트레치, 발을 내디뎌보기 = 세 번째 스트레치는 가장 크다. 사이드라인에서 본게임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황에서 중요한 과제를 완수하려면 마냥 서로를 지켜보고 탓하고 회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발을 내디뎌야 한다. 전통적인 협력에서는 다른 사람의 방식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 다른 사람은 협력 범위 밖에 있는 이들일 수도, 집단행동의 대상일 수도, 행동을 바꾸길 바라는 동료일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단순하고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는 효과적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 때 말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내가 현재 상황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상황이 바뀌려면 내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거리와 자율성은 줄어들고 연결과 갈등은 많아진다는 뜻이다. 흥미진진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 저들은 바뀌어야 해! == 기업가이자 공무원인 아룬 마이라Arun Maira에게 도대체 프로젝트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조언을 구한 적도 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무리의 이해관계자 리더가 어떤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할 때, 모두가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만 바뀌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을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해관계자가 개입할 때는 다른 사람의 잘못만일 수가 없어요! 각양각색의 리더들이 자신의 변화를 고려하게 만드는 것이 진짜 혁신입니다.” 인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받은 억울한 대우를 곱씹었고 복수하는 상상도 했다. 물론 내 실수도 있었고 대처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내가 부당한 희생양이며 그 사람들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바뀌지 않는 한 내가 바뀔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쓴 소논문에서 다음 문단을 발견했다. 자신을 스스로 변함으로써 세상의 변화를 돕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개인과 대조되는 개인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다른 태도는 주의를 흩뜨리고 주도권을 약화시키며 대담한 시도 자체를 방해한다. 사람들이 협력에 관해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무엇을 하게 만들 수 있나요?” 이 질문에는 계층적인 흑백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우리 대 그들, 친구 대 적, 영웅 대 악당, 선 대 악, 무죄 대 유죄. 하지만 비계층적이고 비통제적인 스트레치 협력에서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 없으므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적화의 문제는 적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위험을 제시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자주 마주친다. 게다가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다 보면 거북함과 저항, 반대가 나오기 마련이다. 적화의 진짜 문제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균형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힘들고 곤란한 대상을 아예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는 그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집중해야 한다. == 문제의 일부가 아닌 사람은 해결책도 될 수 없다 == 어떤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계와 역할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역할이 무대에 선 배우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연극 감독 혹은 연극을 보는 구경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은 상황의 바깥쪽에 위치하며 위에서 상황을 만든다고 보는 시각이다. 배우들은 연극의 창조자이지만 감독은 최고 지도자 혹은 슈퍼-창조자다.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의 역할을 배우 혹은 ‘관객’이라고 보는 것이다. 브라질 연극 감독 아우구스토 보알Augusto Boal의 작품처럼 연극에 직접 참여하고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관객을 말한다. 자신이 상황의 일부분으로 그 안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상황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참여자 중 한 명이다. 스트레치 협력에서 우리는 공동 창조자다. 자신의 균형을 잡는다면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신을 간과하면 균형이 무너진다. 자신이 아니라 남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면 안 된다. 후자에서 전자로 주의를 옮기면 해방감을 얻고 자신에게 행위 주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직접적인 기회가 생긴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남 탓하기나 강요, 회유, 기다림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할 일을 계속한다. 자기 할 일을 계속하려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리더십 학자 빌 토버트Bill Torbert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사회 운동가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문제의 일부가 아닌 사람은 해결책의 일부다’라는 말에는 중요한 핵심이 빠졌습니다. 문제의 일부가 아니면 해결책의 일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자신의 행동이 상황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위에서의 강제 말고는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다. 따라서 스트레치 협력에는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상황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일부라고 보는 시선이 꼭 필요하다. 집에 늦는 이유를 ‘정체된 도로에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고 ‘내가 있는 도로가 정체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후자는 타인과 함께 상황을 바꾸는 선택지를 분명하게 열어준다. 반대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시선도 균형을 무너뜨린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자기 관점과 행동의 정확성과 가치를 오만하게 과대평가하고 타인은 과소평가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협력에 차질이 생긴다. 상황이 어떻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이 왜곡되어 타인과 갈등이 발생한다.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잃을까 봐 두려우면 자기중심적이 된다. 어떤 일에 실패할까 봐 두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실패작이 될까 두렵다. 전문가, 전문직, 권위, 지도자, 영웅 등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정체성도 협력을 방해한다. 정체성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의 위에 올려놓거나 따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 협력하려면 동료나 동등한 존재로서 어깨를 맞대고 동참해야 한다. 아냐 쾨네의 말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느끼는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 아룬 마이라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의 위험성을 자주 일깨워주었다. 한번은 이렇게 꾸짖었다.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안 됩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우리가 하려는 대규모의 변화 과제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일은 네 것이지만 그 열매는 네 것이 아니다’라는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의 구절을 기억하세요.”7 이 조언은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고서도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 닭보다는 돼지가 되어라 == 세 번째 스트레치의 핵심은 바꾸고자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황이 바뀌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스트레치는 쉽지 않다. 상황에 온전히 개입함으로써 변화나 상처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것을 희생하려는 의지가 따라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햄 오믈렛에 닭은 참여했지만 돼지는 헌신했다.” 스트레치 협력을 하려면 닭이 아니라 돼지가 되어야 한다. = 결론: 스트레치 배우기 = 이 책 《협력의 역설》은 좀 더 집단적인 행동과 개인적인 책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집과 일터, 지역 및 국내외 문제 등 모든 영역에서 과제를 완수하려면 동료와 친구뿐 아니라 적과 반대자와의 협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복잡하고 대립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 협력할 때는 스트레치를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스트레치의 이론만 제시했다. 마지막 장은 이론을 실천에 옮기도록 도와줄 것이다. 스트레치 협력은 타인과 함께 일하는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기본적으로 세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 번째 스트레치는 갈등과 연결을 받아들임으로써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 상호 보완적인 동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장으로 표현되는 자기실현 동력인 힘과, 참여로 실현되는 재통합 동력인 사랑이다. 이 두 가지 동력을 동시가 아닌 교대로 활용해야 한다. 두 번째 스트레치는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실험하면서 다운로딩과 토론만 활용해 현재 상태를 강화하지 말고 대화와 실존 체험을 활용해 새로운 가능성이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기와 특히 듣기가 개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세 번째 스트레치는 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상황의 바깥쪽이나 위쪽에서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직접 행동을 개시해 스스로 바뀌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트레치를 낯설고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뿌리 박힌 행동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동을 익히려면 계속 연습해야 한다. 연습을 시작하려면 몇 가지 단순하고 새로운 행동을 시도해보고 효과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살펴보면서 수정하고 반복하면서 계속 쌓아나가야 한다. 이런 연습법에는 호기심과 열린 태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즉흥 연극과 마찬가지로 실행하는 도중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확고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행동과 영향을 살펴보고 자신을 잘 알고 도와주고자 하는 동료와 친구 들의 피드백도 얻어야 한다. 다음은 세 가지 스트레치를 연습하는 6주 프로그램이다. 준비물이 필요하다. ... == 앞으로 나아가는 길 == 한동안 새로운 행동을 연습하고 한결 익숙해지면 좀 더 복잡하고 대립적인 상황에서도 시도해볼 수 있다. 행동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목표는 사회적 맥락에서 거의 불가능한 완전무결한 협력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상황의 영향력을 인식해 더 빠르게 적응하고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의식적인 무능에서 의식적인 무능으로, 또 의식적인 유능과 무의식적인 유능으로 옮겨갈 수 있다. 스트레치를 배울 때 만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습관적인 방식의 익숙함과 편안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방법이 분명하다’라는 서술법에서 ‘이 방법일 수도 있다’라는 가정법으로 옮겨가야 한다. 자신의 견해와 입장, 정체성에 대한 집착을 풀고 작게 수축한 자아를 더 크고 자유로운 자아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따라서 스트레치는 두려우면서도 해방감을 준다. 미국의 태극권 지도자 울프 로언솔Wolfe Lowenthal은 태극권의 추수推手라는 수련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상대가 아무리 단단하고 물러섬이 없다 해도 상대를 부드럽게 다룰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임을 뜻한다. 추수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추수의 핵심은 꽉 막힌 상태를 탐구하고 결국 없애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겨뤄야 하는 ‘적’은 자기 자신이다. 평소에 숨기는 문제가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러한 자아와의 대면에는 전진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이런 기회를 주는 상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이처럼 놀랍게도 협력을 배울 때는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유용한 역할을 해준다. 스트레치하려면 나와 다른 상대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쪽으로 다가가야 한다.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상황일수록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적은 가장 좋은 스승이 되어줄 수 있다. ---- CategoryManag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