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l +All:read VictorFrankl의 저서. <> = 옮긴이 서문 = = 추천의 글 =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어떤 사람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능이 아까워서라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저 간직하고 싶은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런 환자의 대답 속에서 프랭클 박사는 정신과 치료에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지침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게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우리는 먼저 정신의학의 이론과 치료에 대한 빅터 프랭클의 접근법을 선배 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의학자는 신경질환의 특성과 치료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 중에서 nooge-nic neuroses와 같은 몇 가지는 그 원인이 환자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 학파는 물론 현대의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 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환자들이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어떻게 하면 환자들에게 상황이 아무리 참담해도 무언가를 위해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줄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직접 강제수용소의 동료들을 대상으로 했던 집단치료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 1.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들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정신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들을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 목표 - 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직도 두 개의 자살미수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두 사건의 성격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자살 동기를 털어 놓았다. 그 동기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에게는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 중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아이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일이었다. 이 사람은 과학자로 그 동안 책을 써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의 아이, 그 아이에게 애정을 베푸는 데에 있어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내가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불리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는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물론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내적 갈등을 감추기 위해 가치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이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우리는 그 거짓 가치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 가면을 벗겨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면을 벗기는 작업도 그 사람이 인간의 진정하고 순수한 욕구, 즉 자기 삶의 소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와 만나게 되면 그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만약 그때 이것을 중단하지 않으면 ‘가면 벗기기’를 하는 심리학자가 실제로 벗기는 것은 그 자신의 ‘숨겨진 동기’, 즉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순수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무시하고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필요한 자기 자신의 무의식일 뿐이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도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가 환자에게 어떤 것을 다시 깨우쳐 주는 과정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의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분석이든, 심지어 치료과정에서 정신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석일지라도 환자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 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근래에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의사들이 이 질문에 대해 일률적인 대답을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해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체스 챔피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수는 무엇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임의 판세와 상대편 선수의 개인적인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가장 절묘한 수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로고테라피에서 이렇게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의 행동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째, 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로고테라피는 환자가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혹은 누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환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심리치료사 중에서는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환자에게 가치판단을 내려 주고 싶은 유혹을 가장 덜 받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환자가 가치판단을 내릴 책임을 의사에게 전가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고테라피는 가르침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다. 도덕적 훈계와 거리가 먼 것처럼 논리적 추론과도 거리가 멀다. 비유를 하자면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 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의미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환자가 인식하고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 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번째 방법은 어떤 것 -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 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명쾌한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한번은 나이 나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에게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런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탈출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이런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초의미(super meaning)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편 로고테라피에서 활용되는 ‘역설의도(paradoxical intention)'라는 기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다. 즉 마음 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치료에서는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활용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 역설의도라고 하는 로고테라피의 치료기법이 적용될 때마다 발휘된다. 로고테라피에서 역설의도기법이 먹혀 들어가는 것은 인간에게 이런 거리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기 병을 자신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정신치료에서는 그 병이 생기게 된 원인을 알아내 그것에 근거해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어린 시절에 어떤 원인이 병을 일으킬 수 있고, 성인이 된 후 전혀 다른 원인이 이 병을 치유해 줄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기불안은 역설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의도와 과잉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자기 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정신치료법이 현대에 만연해 있는 이런 허무주의 철학의 충격과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이 증상을 치료할 수 없다.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집단적인 신경증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치료법이 허무주의 철학을 반영하게 될 뿐 아니라 환자에게 그 자신의 진정한 모습보다 캐리커처만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이런 신경증적 숙명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치료법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 ‘최선’이란 라틴어로 ‘옵티넘(optimum)'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optimism)'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이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에 대해,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 것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유가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인간적인 현상인 웃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면 된다. 즉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그를 웃겨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웃음을 강요해서는 진정한 웃음을 끌어낼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카메라 앞에 선 사람에게 ‘치즈’라고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 완성된 사진을 보면 사람들의 얼굴이 작위적인 웃음으로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그런 행동 패턴을 ‘과잉의도(hyper-intention)'라고 부른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렇다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아주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 실례로 포로수용소나 강제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내가 어떤 미군에게 들은 말인데 이럴 경우 처음에는 ‘체념상태’라고 부르는 행동 패턴이 나타난다고 한다. 강제수용소에서는 이런 체념상태가 아침 다섯 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물론 밖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막사에 남아 똥과 오줌에 절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기를 고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경고도 협박도 소용이 없다. 그런 다음에 아주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 주머니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담배를 꺼낸 다음 그것을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가 뒤를 잇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의미는 없지만 수단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수단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해 특히 현재 실직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나는 소위 ‘실업으로 인한 신경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젊은 환자 중에서 특별한 종류의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환자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출판한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나는 이런 신경질환이 두 개의 잘못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을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환자들에게 청소년기관이나 성인 교육기관, 공공 도서관 혹은 이와 비슷한 기관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엄청나게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그렇게 하자마자 경제 상황에 변화가 없고 전과 같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이 복지정책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샬롯 뷜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 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공부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런 전기적인 접근법에 생물학적인 접근법을 가미할 수도 있다. 로고테라피는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프롬프터로서의 판단력을 갖고 있다. 그런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해서 판단력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잣대를 갖다대야 하고, 이 상황은 어떤 일련의 판단기준과 가치의 중요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가치들이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차원에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 가치들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어 왔다. 그 가치들은 인간이 하나의 생물로서 살아온 지난날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심오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콘래드 로렌츠도 ‘생물학적 아 프리오리(a priori ; '먼저 이루어진 것부터'라는 의미의 라틴어 성구로 '선험적'이라고 번역)’라는 개념을 창안하면서 아마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최근에 나는 그와 함께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에 깔려 있는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전적으로 내 생각에 동의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치의 문제를 이미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산에 그것이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에디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을 성취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로고테라피 치료 상의 개념’이 정말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적인 경험의 세계를 희생시키면서 외적인 성취의 세계에만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을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