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l +All:read [[순자]]에 대한 책. <> 현대의 가상의 인물이 순자를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감. = 내편 1. 순자 이야기: 인간과 하늘 사이에 선을 긋다 = == 1장. 순자를 만나다 == === 순자를 만나다 ===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란 대학자의 철학과 사상이 저하고 많이 흡사하다고 들었습니다. 또 그들의 철학 사상이 계속 이어지고 발전해 조선이란 나라를 이끌었다지요? 율곡의 유학 사상은, 간단히 말하자면, ‘현실에서의 인간’에 주목합니다. 감정과 욕망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인간이라 전제하지요. 현실의 인간을 일탈하기 쉬운 존재로 상정해, 외적 규범과 기준으로 어떻게 인간을 ‘다시’ 만들것인가를 고민해요. 사실, 선생님의 사상과 비슷한 점이 많아요. 율곡의 학문은 정통 주자학朱子學이라기보다는 ‘순자적 신유학新儒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율곡의 유학이 조선을 이끌었습니다. === 현실주의자 순자 ===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을 주재하고 우리들의 기도를 듣고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그런 하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스스로의 노력일 뿐입니다.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고 부지런히 생산하기만 하면 될 뿐이지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됩니다. 너무나 쉽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 저무는 전국시대 === 영토 국가들이 등장해 자국 내 군권을 강화했고, 열강이 군웅할거하던 때가 전국시대 아니었습니까? 상호 투쟁에 의한 강대국의 약소국 합병 현상이 빈번했고, 강대국들끼리 치열하게 싸웠지요. 그런데 전국시대 말기가 되자 그러했던 상황이 서서히 끝나고, 통일 제국의 등장이 가시화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가 활동했습니다. 이런 배경이 선생님의 사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일단은 저부터도 여러 사상을 종합했던 사람입니다. 맹자처럼 원리주의적으로 다른 사상가를 공격하기보다는 다른 사상의 장점을 제 나름대로 흡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가 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사상을 통합하며 저만의 사상을 만들었지요. 그렇게 만든 제 학문과 사상이 철저히 통일 제국, 더 정확히 말해 통일 제국을 다스릴 군주와 관료들을 위한 통치학이 되게끔 애를 썼습니다. === 군주를 위하여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요, 선생님의 학문과 철학의 사상적 수요자는 통일 제국을 이끌 군주인가요? 통일 제국을 이끌 군주와 관료, 지식인입니다. 그중에서도 군주가 핵심 수요자입니다. 법으로 대변되는 공적 원리로만 나라를 끌고 가야 한다고 말했던 한비자韓非子도 그렇고, 자연의 원리로 비유되거나 설명되는 도로 나라를 끌고 가자고 한 노자老子도 그렇고,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저작자들도 그러합니다. 적지 않은 이가 통일 제국을 염두에 두고 사상을 펼쳤습니다. 다들 저처럼 다분히 군주를 의식했지요. 그런데 한비자와 달리 저나 노자, 《여씨춘추》의 저작자들은 법과 법치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입니다. 법만으로는 통일 제국을 끌고 갈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법치는 법으로 인민의 힘을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국가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나라를 강성하게 하지요. 저는 그런 법의 효용성과 기능성 모두 인정합니다. 법치를 통해 힘을 극대화한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었는데, 그런 현실도 모두 인정했습니다. 다만 ‘통일 이후에도 법으로 인민을 강제하고 끌고 가도 괜찮을까?’ 하는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통일 제국을 안정된 기초 위에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법으로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걱정이 있었지요. 《여씨춘추》에 법을 대신할 어떤 명확한 통치 원리가 제시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대안이 보이지 않아요. 다만 보령 학생이 말한 것처럼 회의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하는 노자의 텍스트 《노자老子》가 제가 활동하고 활약했던 시점에 묶여 편집된 것으로 아는데, 노자도 분명히 진나라의 법과 법치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법으로 통일 제국을 다스려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지요. 그래서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나 강하지 않은 정치, 인민에 대한 최소한의 간섭을 말한 것이지요. 인민을 가혹하게 대해선 안 된다고 하며 수탈과 혹사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순자의 문제의식 === 공자의 학문이 끊어질 것 같다, 사라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선생님의 텍스트를 읽을 때 느껴졌습니다. 그 위기감 뒤에는 묵가, 법가, 도가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적 경쟁자가 있었고요. 바로 맞췄습니다. 공자 님의 학문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현실성과 효용성 면에서의 약점 탓에 군주들에게 늘 외면받았지요. 또 당대 많은 사상적 호적수에게 이래저래 치였습니다. 맹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가 주적으로 선포한 묵자와 양주楊朱의 무리만이 힘을 떨치고 있었다지만, 제가 살았던 시대에는 전방위적으로 공자 님 사상이 압박을 받았습니다. 사실 공자 님 사상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부분은 분명 아쉬운 점입니다. 약점이었어요. 전 그 약점을 보완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상가들과 경쟁해서 이겨내야만 했지요. 참 힘들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현실 정치 상황에서 공자 님의 이상을 실현해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현실을 살펴 현실성이 있는 학문을 모색했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자 님께서 말한 덕치라는 이상에 합치되는 방향이어야 했습니다. 참 어려웠지요. 공자 님 사상도 계승해야지, 타 학파들과 경쟁해 이겨야지, 통일 제국의 등장이라는 현실도 살펴 공자 님의 학문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야지……. 그러다 보니 더 절박했습니다. 특히 공자 님 사상을 현실성이 있는 학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습니다. 현실적인 유학 말입니다. 후한 때 지식인 제갈량諸葛亮이 남긴 《계자서誡子書》가 떠오르네요. 짧은 글입니다. 어린 아들에게 준 글이에요. 무릇 군자가 되기 위해선 고요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절제와 검소함으로 덕을 쌓아야 하는 법이다. 담박하지 않으면 자신의 뜻을 밝게 할 수 없으며,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지 않다면 원대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배움에 충실하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없고, 뜻이 견고하지 못하면 배움을 완성할 수 없다. 뜻이 흔들리고 산만하고 게으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쉬이 흥분하며 서두르는 마음으로는 바른 성정을 키울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해를 보내지만 뜻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해 그저 세월만 흘려 보내다가 마치 마른 나뭇잎처럼 땅에 뒹굴고 만다. 결국 세상에 제대로 서지 못해 기울어가는 초라한 세계에서 슬픔에 잠겨 살 뿐이다. 그때는 후회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제갈량의 이 말은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이란 사자성어 둘로 압축할 수 있어요. 담박명지, 담박해야 명지할 수 있다. 즉 삿된 것에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해야 하며 마음이 항상 그렇게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밝은 목표, 제대로 된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정치원은, 영정, 평안하고 고요해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잔잔해 모든 사물을 비추어낼 수 있는 물결처럼. 우리 마음이 그래야 치원,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학문의 끝에 도달해 많은 성취를 이루고 인식의 지평을 끝없이 넓혀 천하의 많은 사람을 자신의 가슴에 품을 수 있답니다. 제갈량의 글의 보면, 우선 학문에 대한 신심 거의 종교적 열정마저 느껴져요. 마음 수양에 대한 관점, 안정됨과 고요함에 대한 강조, 이런 내용은 마음을 맑은 물과 거울처럼 만들라고 강조하신 선생님의 말씀과 겹쳐 보여요. 이것 말고도 학문에 대해 지녀야 할 신실한 자세, 맑고 고요한 마음과 거기에 항상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 대한 강조,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한 학문 성취의 방법과 인간의 완성 등 한 대 유학자라 그런지 제갈량에게서 선생님의 모습이 진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한나라가 무너지면서 순자적 유학에 반성이 일었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 토지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한 사대부들을 위한 유학을 모색하다 보니 맹자가 각광받았어요. 그 이후 도교와 불교의 도전에 직면해 응전의 차원에서 유학이 진화한 성리학이라는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한 대 이후에 선생님의 색채가 강한 유학은 한국에서는 몰라도 중국에서는 다시 주류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 2장. 순자의 나라 == === 북방 조나라의 유자 === 조나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좋지 못했습니다. 동쪽으로는 제나라라는 강국과 대치 중이었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에 위협받는 처지였으며, 동북쪽으로는 연燕나라와 마주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남쪽은 같은 진晉나라의 후신으로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불린 한나라, 위나라와 접해 있었지요. 그들도 만만치 않은 호적수였습니다. 게다가 북쪽의 흉노匈奴와도 가까웠으며 동호東胡라는 이민족 국가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환경이 저를 현실적으로 사고하게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초라한 위상의 공자 님 사상을 계승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태어나 자란 조국의 환경 문제도 제게 영향을 미쳤지요. 현실적으로 사유하게 하고 안이한 이상론을 배격하게 한 것이지요. ... 그래서 제가 ‘생존의 유학’, ‘살아남는 유학’의 길을 모색했나 봅니다. 제 사상의 종사宗師 공자 님께서 태어난 곳은 노나라입니다. 동방 노나라는 지형이 사방으로 트였습니다. 자연히 인민에게 유동성이 있었지요. 위衛, 송, 제 등 노나라의 인민은 주변의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선택권이 있었어요. 모국이 폭정을 행하고 인민을 못살게 굴면, 그들은 다른 나라를 선택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나라에서는 백성을 강압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온정적으로 대하고 달래고 타이르는 통치학이 생기지요. 공자 님 사상은 그런 동방의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 이렇게 여겼습니다. 공맹의 관념적인 사상으로는 문화와 관습이 제각각인 여러 지역과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단순히 어진 마음과 어진 정치, 위정자의 덕과 솔선수범만으로는 무리라고. 그러다 보니 명확하고 외재적이며 활자화할 수 있는 규범인 예를 생각했지요. 특히 제가 생각하는 예란 법까지 포괄해서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제2의 조국 제나라 === 전 철저히 욕망을 긍정합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무질서와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욕망 자체를 줄이거나 욕망 추구를 금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게든 인간의 욕망은 긍정되어야 하고 충족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면서도 보장할 수 있어야 위정자지요. 사실상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생존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군집 생활과 분업을 거의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말하기도 했지요. 사람이란 존재는 모여 사는 군집 상태에서 분업을 해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이지 인간의 욕망은 철저히 충족되어야 합니다. 섣불리 이를 부정하거나 줄이자고 해서는 안 되지요. 또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사회를 이루고 분업이란 사회 운영의 틀을 통해 부지런히 생산하면 됩니다. 앞서 통일된 중국 이야기를 했지요? 인간에게는 모두 욕망이 있고 개인은 사회 속에서 이를 어떻게든 충족해야 합니다. 특히 통일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인간이 질서 있게 욕망을 채우도록 해 안정된 통일 제국을 만들어보자, 이것이 제 사상의 목표라면 목표입니다. 일단 인간의 욕망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충족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욕망을 무질서하게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마구 다툰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욕망을 예와 분分이라는 질서 틀 내에서 충족하게 하면 됩니다. 욕망 충족을 통제하면서도 보장해야지요. 질서 있게 욕망을 충족하면서 무질서와 혼란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지요. 그런 사회의 모습이 제가 생각하는 올바름이고 착함善입니다. 이상이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욕망이 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욕망을 잘 인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욕망이 있다는 사실만을 곤혹스러워하는데, 현실을 모르는 통치할 자격이 부족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욕망을 분명히 인정하고 질서 있게 욕망을 추구하게 하는 게 어쩌면 통치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그렇게도 강조한 예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예는 욕망을 통제하면서도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지요. === 남방 초나라로 가다 === == 3장. 인간와 하늘 사이에 선을 긋다 == 먼저, 천관天觀이 선생님 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 좀 여쭤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순자의 천관, 그가 하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면 그의 철학을 절반 정도는 이해한 거나 진배없다.” 선생님 철학에서 천관이 그 정도로 중요한가요? 앞서 말한 욕망이란 열쇳말보다 더 중요하지요. 사실 욕망 자체가 저의 천관념에 포함됩니다. 그뿐 아니라 제 사상의 모든 것이 저의 천관과 연결됩니다. 제 천관을 이해하면 저의 인간관, 사회관, 군주관, 스승관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예와 규범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지요. === 종교적 하늘과 결별하다 === 선생님의 <천론> 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런 뜻으로 알고 있어요.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칙과 규칙성이 있다. 그것은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걸桀임금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운행에 다스림으로 대응하면 길하고! 하늘의 운행에 혼란으로 대응하면 흉하다! 하늘은 아무런 의지 없이 일정한 원리, 일정한 법도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그런 하늘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거나 사회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그저 우리들 눈에 보이는 자연일 뿐입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환경일 뿐이지요. 인간과 집단 앞에 놓인 삶의 조건이자 문제 상황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과 실천이지요. 외적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늘과 인간을 철저히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그냥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과 실천까지 포괄하는 의미의 존재입니다. 자, 잘 들으세요. 천으로 대변되는 인간을 둘러싼 ‘외적 대상’을 ‘인간(과 인간의 노력, 실천)’과 분명히 구분하자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천인지분입니다. 신비론적, 숙명론적 그리고 종교적 의미를 투영시켜 보는 하늘, 그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자연, 그런 생각과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의 기도에 응한다거나 아니면 인간과 사회를 주재한다거나 어떤 인간에게 도덕적 사명을 준다거나 하는 하늘, 즉 자연은 없습니다. 하늘은 그저 한 인간의 삶에 놓인 조건일 뿐입니다. 눈으로 관찰되고 우리가 명백히 인지할 수 있는 늘 변함없는 규칙을 가진 하늘이 우리 눈앞에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이런 자연을 보고서 어떤 법칙성 같은 것을 파악해내면 됩니다. 또 힘을 가하고 노동력을 더해서 뭔가를 산출해낼 수 있는 부분이 있나 없나 살펴보고, 그러면서 자연에서 인간 삶에 필요한 것들을 얻고 뽑아 자신과 사회를 부유하게 바꿔나가면 될 뿐입니다. 이미 춘추시대부터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려는 가치중립적 천관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장자라던가 노자, 그리고 상앙과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술지사들, 그리고 선생님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가치중립적 자연관, 천관에 정교한 이론 틀이 부여되었다고나 할까요?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배제하고 가치중립적으로 자연을 바라본 데에는 장자의 영향이 사실 절대적입니다. 법술지사들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치중립적 자연관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철학적 방식으로 설명하려 했던 이가 장자였지요. 법가 역시 장자 영향을 받았고 저 역시 장자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 철학을 보면 천관념 이외에도 장자가 영향을 준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 장자의 천관과는 명확히 다르고 구별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장자는 천에 가려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즉 하늘과 인간의 구분,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말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그 분리를 부정했습니다. 자연,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 즉 그가 도 또는 명命, 천뢰天籟라고 부른 그런 자연적 질서에 인간을 종속시켰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도 철저히 자연의 일부로 보았다고 할까요? 인간을 자연을 구성하는 다른 동물, 사물과 마찬가지로 보았습니다.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과 권능, 지위를 부정한 것이지요. 자연 안에 인간을 용해하고 매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인간의 주체적 지위를 확보할 수 없고 실천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항상 인간은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인간을 너무 작게 보았습니다. 저의 도는 하늘의 도도 아니고 땅의 도도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길이고 군자가 밟고 가야 할 길일뿐입니다. 도는 그저 사람의 길人道일 뿐이고, 인도만이 인간에게 있을 뿐입니다. 인도를 열심히 걸어갈 때,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 오직 인도만 있을 뿐 === 같은 유가라지만 맹자는 마음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서 어떤 종교적 의미의 천과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실 종교적, 형이상학적 천에 너무 매몰된 감이 있어요. 그저 인간의 도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조화로운 공존의 삶을 살기 위해 만들어낸 문화와 전통, 규범만이 있고 우리는 이를 따르고 실천하면 될 뿐이지요. 이것만이 인간의 길이고 인간의 가치를 밝혀주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야만, 그렇게 해서 인간의 독자적 위치와 지위를 전제할 때에만 생길 수 있지요. 그래야 인간 스스로 규범이든 재화든 열심히 만들어내고 지키고 실천할 것 아닙니까? 천인지분! 자연과 인간의 구분에 밝아야 합니다. === 실천과 노력이 인간이다 ===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어떻게든 뭐라도 더하고 보태려고 행동하는 모습, 그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의 노력, 실천, 행위도 저 순자의 천인지분 논의에서 천과 상대되는 인간의 개념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전 지금 여기서 인간이란 존재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천인지분, 자연과 인간의 구분을 말할 때 그 맥락 안에서의 사람, 즉 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의식적 노력, 실천, 행위는 천인지분을 말할때 천에 대응하는 인이라는 뜻이지요. 인이란 범주에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과 실천과 행위도 포함된다는 말씀입니다. === 인간도 하늘이다 === 인간과 대조되는 자연은 단순히 천으로 대변되는 자연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실천과 행위의 객체가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바꿔야 할 모든 대상이 천입니다. 인간 삶을 둘러싼 모든 조건, 인간 앞에 놓인 모든 문제 상황을 천이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사람도 포함되지요. 저는 위僞라는 개념으로 말했지요. 인간의 노력, 실천, 행위를 통칭해 위라고 했습니다. 위의 객체가 되는 것은 모두 천입니다. 외적 자연, 내적 자연 모두 위를 통해 다듬고 바꿔야 합니다. 인간이란 내적 자연 역시 위의 객체이고 대상입니다. 그러니 천이지요. 곧, 인간도 천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연에서 이것저것을 받아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교육과 사회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때까지는 자연 사물과 거의 같은 존재이지요. 그때는 자연과 인간의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커가면서 사회화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사회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면서 사회화하고, 그러면서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다른 자연 사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자연이랄 수 있는 하늘에 달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만큼은 자연 사물과 같고 다른 동물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커가면서 자연과 달라집니다. 교육받고 사회화하면서 자연과 구분되기 시작하지요. 두 번째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요. 인간이 태어날 때는 자연 사물과 같았지만 인간이 모인 사회에서 예를 배우며 사회화합니다. 예를 통해 질서를 지키고 타인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회화와 질서의 여부는 예에 달려 있으니 나라와 인간 사회의 운명은 예에 달렸다고 힘주어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하늘에 달렸고 국가와 사회의 운명은 예에 달렸지요. 엉뚱한 것, 알 수 없거나 본인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에 마음 둘 필요 없습니다. 뜻을 닦고 덕을 쌓아 생각과 지성을 밝게 하는 것, 이렇게 본인 하기 나름인 것에 힘쓰면 됩니다. 반대로 소인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은 버려두고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을 흠모하기 때문에 날로 퇴보하지요. 군자가 날로 발전하는 까닭과 소인이 날로 퇴보하는 까닭은 이것뿐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먼 길을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으로 인간의 성장과 발전을 많이 이야기했지요. 꾸준한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꾸준하게 실천하고 노력하는 인간은 ‘천지天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대등한 주체로서 하늘과 땅이 벌이는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참어천지參與天地’라고 합니다. === 하늘과 땅의 일에 참여하는 존재 === 저의 천인지분은 천, 지, 인이 각각 따르는 바, 혹은 하는 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맡은 바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성립한 논리입니다. 하늘에는 영원불변하는 도가 있고, 땅에는 영원불변하는 원리가 있으며, 군자에게는 영원불변하는 몸가짐이 있습니다. 곧 하늘에는 한결같은 도 ‘상도常道’가 있고, 땅에는 한결같은 법칙 ‘상수常數’가 있으며, 군자에게는 한결같이 행해야 할 바 ‘상체常體’가 있다는 말인데, 특히 군자가 행해야 할 것은 바른 몸가짐과 실천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직분이지요. 각기 맡고 있는 직분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구분해서 이야기했지만, 우리 인간은 인간의 직분을 다하면 하늘과 땅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일에 참여할 수 있지요. 제가 말하는 구분이란 건 구분을 위한 구분, 분리를 위한 분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직분을 명확히 알아서 하늘의 일, 땅의 일에 참견하거나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직분에 충실히 한 다음 천지의 사업에 참여해 그들과 나란히 하며 조화를 이루자는 겁니다. 이것이 참어천지지요. == 4장. 학문과 수신, 그리고 스승 == = 내편 2. 순자 철학 읽기: 순자의 철학과 사상 = == 5장. 천인지분에서 성위지분으로 == == 6장. 성악설을 논하다 == == 7장. 백지설을 논하다 == == 8장. 예란 무엇인가 == == 9. 법이란 무엇인가 == == 10. 군자란 누구인가 == == 11장. 군주 그리고 후왕이라는 이상 == = 내편 3. 순자 읽기: 순자의 네 모습 = == 12장. 위대한 스승 순자 == == 13장. 역사가 순자 == == 14장. 시장주의자 순자 == == 15장. 사회학자 순자 == = 외편 1. 순자, 맹자, 율곡: 공자의 계승자와 순자의 계승자 = == 16장. 순자, 맹자를 겨냥하다 == == 17장. 순자와 율곡 == = 외편 2. 위대한 종합자: 철학을 집대성하다 = == 18장. 순자와 제자백가 == == 19장. 순자와 대학, 중용 == ---- Category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