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l +All:read JerryHarvey = 1.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 = 대개의 경영 이론 전문가들은 갈등관리가 조직이 직면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애빌린 패러독스의 논리에 따르면 합의관리를 하지 못함으로써 조직이 기능장애에 빠지는 게 더 큰 문제다. == 왜 그들은 애빌린으로 갔을까? == {{{#!wiki multi-columns 대체로 합의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조직들은 다음 5가지의 특성을 보이는데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1.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직이 처한 상황이나 당면한 문제의 본질에 대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예컨대 우리 가족은 선풍기 앞에 앉아서 레모네이드나 마시며 도미노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1.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욕구나 생각을 서로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해서 서로가 조직의 상황을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 가족 또한 합의에 대한 잘못된 가정을 근거로 서로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했다. “애빌린에 가자”라는 정보가 전달됐을 때 실제로 우리 가족은 콜맨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서로가 정보를 잘못 전달함으로써 ‘모두가 애빌린에 가고 싶어 하는군’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아무도 원치 않은 애빌린에 가게 됐다. 1.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조치에 대해 ‘무언의 합의’를 한다. 우리 가족도 ‘함께 행동하기’가 개인과 집단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1. ‘무언의 합의’에 동참하게 된 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직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느끼게 되며, 그로 인해 친숙한 몇몇 구성원 사이에 집단을 형성하고 다른 집단을 비난한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진 구성원들이 상급자를 비난하거나 서로를 탓하는 건 흔한 일이다. 우리 가족이 집에 돌아와 책임전가 논쟁을 벌였던 것도 이와 유사한 경우다. 1. 만약 조직의 구성원들이 합의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끝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런 악순환은 계속 반복되면서 더 강해진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그런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다. }}} == 원하지 않은 침묵의 결과 == ==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지는 5가지 이유 == 기업, 관료집단, 정부 등 그것이 어떤 조직이든 간에 조직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인의 의사를 접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하다. 그와 같은 행동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고 나아가 조직의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비합리적이다 애빌린으로 향하고 있는 대부분의 조직들이 난항을 거듭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패러독스를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이나 모델, 다시 말해 제대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관료 조직의 기본 심리를 잘 활용하면 그 같은 지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불안감과 부정적인 상상, 실질적인 위험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인 역전 등 5가지 지표로 표시돼 있다. 이러한 지표들은 조직이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그들이 처한 위험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도록 돕는다. 1. 불안감 1. 부정적인 상상 1. 실질적인 위험 1. 소외에 대한 두려움 1.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인 역전 === 불안감 === 통상적으로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대개의 조직원들은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의사결정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에 따라 실행 불가능한 연구 프로젝트를 추구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에 가담하기도 한다. === 부정적인 상상 ===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소신의 따라 행동했을 때 초래될 결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상상했기 때문에 ‘무언의 합의’에 가담한 것이다. 기업 연구개발 부서의 여러 담당자들은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상대방의 체면이나 명예, 직위, 심지어 건강까지 잃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백악관 직원도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 오히려 자신이 희생양이 되거나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협동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소외될 것을 두려워했다. === 실질적인 위험 === === 소외에 대한 두려움 === ===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인 역전 === == 애빌린 패러독스에서 벗어나려면 알아야 할 6가지 == {{{#!wiki multi-columns 여러 지표들을 한눈에 보기 쉽게 표시해 위험을 예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희생자, 가해자, 공모, 책임, 갈등, 복종, 용기, 대결, 현실, 지식 등과 같은 용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더욱이 애빌린을 우회하거나 애빌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정의한 이 새로운 개념들의 타당성을 검토할 필요성도 있다. 1.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 논쟁 1. 공모의 상호작용 1. 문제 해결의 책임 전가 1. 현실과 인식 그리고 대조 1. 진짜 갈등과 가짜 갈등 1. 집단 폭압과 복종 ===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 논쟁 === 책임을 전가하거나 남을 탓하는 행동은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진 조직이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증상이다. 대체로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서로에게 떠넘긴다. 이러한 역할 떠넘기기는 타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역기능도 우려된다. 왜냐하면 일단 어떤 기업이나 조직이 합의관리에 실패해 애빌린에 도착하게 되면 모든 조직 구성원들이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는 논쟁과 비난은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써야 할 에너지를 고갈시킬 뿐이다. === 공모의 상호작용 ===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공모(결탁)’는 애빌린 패러독스의 가장 기본적 요소다. 상사의 독재에 공모하는 부하직원이 없는 한 독재하는 상사는 나오지 않으며, 부하직원의 아부에 공모하는 상사가 없는 한 아부하는 부하직원도 생기지 않는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고쳐 말하면 애빌린으로 가는 것도 팀워크가 필요하다.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에게는 조직이 애빌린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책임 전가를 하기 위한 대상을 찾는 것은 조직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문제 해결의 책임 전가 === 애빌린 패러독스의 치명적인 영향을 제거할 힘은 그러한 현실에 맞서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지 조직 내의 위치와는 무관하다. 현실에 대항해 생기는 위험을 감수할 결심만 한다면 누가 됐든지 조직을 애빌린 패러독스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 === 현실과 인식 그리고 대조 === 조직이 처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현실’과 구성원들의 ‘인식’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애빌린 패러독스의 기본 역학은 구성원들이 대체로 조직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직스의 프로젝트 담당자들은 그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 진정한 애빌린의 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맥루더 또한 “우리는 그 작전이 불법이고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조’란 여기서는 현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 관계를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조직이 처한 현실의 본질이 ‘합의’의 문제인지 아니면 ‘갈등’의 문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문제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대조의 정의를 이렇게 다시 세우는 건 조직을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변화 요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조직이 미처 모르고 있으며 합의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해결책을 찾는 것 외에, 이미 합의된 사안에 대한 또 다른 해결책을 찾는 것도 조직의 변화와 효율성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진짜 갈등과 가짜 갈등 === 두통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갈등에도 ‘진짜’와 ‘가짜’라는 2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진짜 갈등과 가짜 갈등의 원인은 서로 다르며 치료법도 다르다. 1. 먼저 진짜 갈등부터 살펴보면, 확실한 이분법적인 의견 차이가 있을 때 진짜 갈등이 발생한다. 가령 “연구 보고서를 읽어보니 이 프로젝트가 크게 성공할 것 같네요”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워터게이트를 도청해야 합니다”와 “난 반대합니다”와 같이 의견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연출되면 진짜 갈등이다. 1. 그렇다면 가짜 갈등은 무엇일까? 애빌린에 패러독스에서는 가짜 갈등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무언의 합의’에 동참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의사결정과는 상관없는 거짓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발생하는 분노와 좌절, 희생양 만들기 등을 갈등이라고는 부르지만,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는 가짜 갈등이다. 처음부터 아무도 찬성하지 않은 결정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을 때 발생하는 방어적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일종의 패러독스 속 패러독스로서 그와 같은 갈등은 합의의 부족 때문에 생긴 증상이다. === 집단 폭압과 복종 === 애빌린 패러독스의 역학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단 폭압, 다시 말해 조직 내에서 개인의 개성을 무시한 채 벌어지는 복종의 압력과 같은 개념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애빌린 패러독스의 기본 요소를 분석해보면, 사실 자신들이 잘못한 합의에 따라 행동했으면서도 마치 집단의 강제적 압력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경험을 집단의 폭력적인 압력으로 개념화하고, 이에 스스로 반응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 == 애빌린 패러독스 진단하기 ==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가장 먼저 그 상황을 진단해야 하는데, 아래의 애빌린 패러독스 진단법을 통해 조직이 현재 애빌린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 갈등에 빠져있는지 비교적 쉽게 예비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조사방법: 각각의 질문에 대해 당신이 속한 조직의 상황이 그렇다면 '예'라고 대답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하시오. 1. 조직 내에 갈등이 있다. ~-예) 아니오)-~ 2. 갈등에 대처하면서 조직의 구성원들이 좌절감과 무력감, 불만족을 느낀다. 현재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오직 탈출할 방법만 찾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에 불참하거나 불필요한 출장을 자주 가고, 휴가나 병가를 이용해 가능하면 사무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예) 아니오)-~ 3. 조직의 구성원들이 문제의 책임을 대부분 상사나 다른 하위집단에 전가한다. 몇몇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상사가 무능하고 비효과적이며 현실감이 없다거나 조기 퇴직 1순위라고 험담한다. 그러나 그의 면전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한다고 해도 직접적이 아니라 돌려서 말한다. 그럴 만한 상사가 없다면 다른 하위집단이나 부서, 사업단이 죄인이 된다. '멍청한 ㅇㅇㅇ 부서만 아니었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예) 아니오)-~ 4. 몇몇 친한 사람들끼리 하위집단을 만들어 점심시간이나 커피타임에 조직의 문제를 논의한다. 이 하위집단의 구성원들은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에 대해 상당한 의견 일치를 보인다. 그와 같은 대화의 끝에는 주로 '우리가 ㅇㅇ해야 해'라는 말이 나온다. ~-예) 아니오)-~ 5. 그들이 다른 하위집단 사람들과 당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려 말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맞게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기도 한다. ~-예) 아니오)-~ 6. 회의가 끝나면 그들은 친한 사람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면서, 왜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나열한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하며 자기도 같은 심정이라고 말한다. ~-예) 아니오)-~ 7.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가 문제를 더 키우거나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예) 아니오)-~ 8. 조직의 구성원들이 조직 내부에서보다 조직 외부에서 더욱 친하고 더욱 만족스럽고 더욱 효과적으로 어울린다. ~-예) 아니오)-~ == 애빌린 패러독스를 극복하는 방법 == {{{#!wiki multi-columns 애빌린 패러독스 진단법으로 조직이 애빌린으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는가? 그렇다면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러한 상황의 근원적인 이유가 합의관리의 실패 때문인지 아니면 갈등관리의 실패 때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적극적으로 대조해야 한다. 이 대조는 집단을 배경으로 삼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애빌린 패러독스가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공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해결책 또한 집단의 맥락에서 검토하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애빌린 패러독스로 이끈 각 개인 또는 하위집단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문제와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꼭 필요한 구성원들을 회의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회의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회의를 소집한 사람, 즉 대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심정을 먼저 털어놓고 다른 참석자들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설명을 통해 참석자들은 대조를 주도하는 사람이 조직원의 바람과 반대되는 결정을 할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는 사례다. 여러분께 프로젝트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과 반대되는 말을 했지만, 사실 저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견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들을 오도(悟道)할까 걱정이 되고, 서로가 서로를 오도하는 상황은 아닌지 염려되며,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누구도 원치 않는 프로젝트를 계속 함으로써 결국 회사가 파산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들의 솔직한 입장을 알고 싶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기술적 결과 ===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져 있음을 정확히 진단했다면,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고 신속하게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뤄진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프로젝트를 우리 모두가 계속해왔단 말입니까?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믿기진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보다 생산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할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 실존적 결과 === 나는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선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을 목격한 사람들을 상담하고 나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요컨대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 심리적으로 성공이나 실패를 거두는 것은 조직에서 생각하는 성공이나 실패의 기준과는 다르다. 가령 “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해서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들은 맞서기에 성공한 이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 사공이 많아서 힘들었다는 말과 함께 해고를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상처를 받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고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롭습니다. 또한 이럴 수도 있다. 그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더니 모두들 충격을 받더군요. 하지만 곧 제 말에 동의했고 이후 저는 승진해서 떠오르는 스타가 됐습니다. 여태까지의 직장 경력 중에서 가장 멋진 순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지 않은 사람들도 자신의 실패를 기술적 결과와는 완전히 다르게 설명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상황이 나빠지면서 결국 동료 직원이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회사에는 아직도 긴장감이 남아 있고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지만, 저는 지난번 성과 평가에서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기분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났을 때 제가 희생양이 됐죠. 아직 회사에 붙어는 있지만 이미 강등까지 당한 상태라 제 미래는 결코 밝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쉬워지는 건 아니죠.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는 행동이 그것을 시도한 사람들에게 기술적인 결과와는 무관한 심리적 만족감을 준다는 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실존적 경험의 진정한 의미와 여러 조직에 대한 그 타당성은, 의사결정의 과학적 분석에 있는 게 아니라 시시포스(Sisyphus)의 형벌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는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부분이다. }}} ==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는 자세 == 대개의 직장인들은 회사 안에서 시시포스처럼 하릴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카뮈가 지적했듯이 시시포스는 바위에서 손을 뗀 뒤 그것이 산 아래 원래 자리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잠시나마 자기 운명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결국 그 행위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불합리한 합의에 맞서는 행동은 시시포스가 수동적이지만 의식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면서 얻었던 깨달음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맞섬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바위 밀어 올리기를 잠시 멈추고 조직이라고 불리는 불합리한 삶 속에서 찰스 스노우가 말한 “우리 스스로 해낸 인생의 승리”를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aradox: 왜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는가? ==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나요?” 만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직 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그 조직의 슈퍼스타이거나 이미 조직을 떠난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의 조직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조직의 문제와는 상반되는 행동을 취한다. 아니, 이것에 대해 별다른 표현을 하지 않는다.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또 그것에 따르는 것은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어떤 불안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조직 생활을 해보지 않았거나 조직의 생리에 대해 아주 무지한 사람이다. 조직 속에서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는 1차적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직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분명히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거나 또는 조직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경우 이런 상황은 아주 쉽게 일어난다. 저자는 애빌린 패러독스를 ‘합의관리’의 실패 현상으로 지적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냥 ‘합의’를 해주는 상황 말이다. 실패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모두‘애빌린’에 가는 데 동의 했으면서도 정작 돌아와서는 아무도 그곳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상대방을 서로 비난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 2. 현실에 길들여진 사람들 = == 케구리 연못에 숨겨진 31가지 진실 == {{{#!wiki multi-columns 나는 한동안 행크와 함께 케구리 연못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부분의 조직이 케구리 연못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조직이 조직원들을 케구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직원 한 명 한 명이 케구리이고, 조직 생활은 연못에서의 삶이라는 가정하에 경영 문제를 31가지로 구체화시켜봄으로써, 조직과 조직원이 처한 현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의 내용은 중요도 순서로 나열된 것이 아니며, 의식적인 순서의 개념도 없다는 것을 일러둔다. 1. 모든 조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제품이나 식료품, 자극 등을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케구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후자를 전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직원들이 사리 분별해 행동하는 것보다 조직의 명령 체계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2. 개구리가 아니라 ‘케구리’라고 하는 이유는 케구리들은 자신이 개구리임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수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 본인에게조차 자신의 ‘케구리성(phroginess)’을 철저하게 숨긴다. 즉, 일단 케구리로 변화된 사람들은 그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가 케구리가 됐다는 것은 엄청난 치욕임에 틀림없다. 3. 어느 케구리가 말하기를, “케구리로서의 삶은 연잎 위에서 홀로 사는 외로운 삶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그들은 연못 안에서 고독한 삶을 사는 경향이 있다. 곤충을 잡아먹으려고 서로 경쟁하고, 연못에서의 자기 위치를 높이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진흙 밭에서 이뤄낸 일로 평가를 받는다. 결코 합창을 잘했다고 해서 보상을 받는 일은 없다. 이 모든 사실을 감안할 때, 케구리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연못에 사는 다른 케구리들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어. 언젠가 그들의 연잎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이지.” 4. 케구리들은 케골어를 구사한다. 케골어는 어휘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배우기는 쉽지만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모든 케구리들이 동시에 “케골”이라고 합창하면, 연못 전체가 소란해진다. 하지만 합창한 보람은 그다지 크지 않다. 케구리들끼리 아무리 “케골케골”이라고 한목소리를 내봤자 정보다운 정보가 전혀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케구리들이 케골어를 구사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못에 들어간 자는 누구나 케골어만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케구리들과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조직에서도 사람들은 케구리로 변한 사람들과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5. 대부분의 케구리들은 연못의 물을 빼내는 일보다는 파리를 잡는데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반대로 만약 그들이 연못의 물을 열심히 빼내는 일에 열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깨끗해진 연못 덕에 잡아먹을 파리도 없어지고, 그 결과 케구리들도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연못의 물을 빼내지 않고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6. 케구리 연못에서는 대체로 황소케구리가 우두머리가 된다. 즉, 연잎 위의 고독한 삶을 잘 참아낼수록 케골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며, 더 날렵하게 파리를 잡을 수 있고 다른 케구리들의 연잎을 더 능숙하게 빼앗을 수 있으며, 연못을 현재 상태로 잘 유지할 수 있는 우두머리로서의 재목감이 될 확률이 커진다. 7. 황소케구리들은 연못에서 존경을 받는다. 왜냐하면 케구리 세계에서는 흔히 황소케구리가 사람을 케구리로 만드는 마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케구리를 만들어내는 생산 체계에서 우두머리 케구리가 차지하는 역할을 감안할 때, 나는 그러한 외경심이 황소케구리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연못의 케구리들이 사람들을 케구리로 만드는 동안에,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8. 황소케구리들의 마술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마력이 있다고 믿기에 가능하다. 황소케구리들의 횡포는 실제 그들의 마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황소케구리의 마력’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온다. 황소케구리의 마력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못의 환경을 구성하는 안개와 진흙, 이끼 등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 9. 황소케구리 특히 우두머리 황소케구리들은 연못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들이 연못을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연못이 그들을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갇혀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닉슨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10. 케구리 연못의 특이한 점은 일반 케구리 무리가 그들의 우두머리를 만드는 케구리성의 자질 때문에 황소케구리들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파멸시킨다는 것이다. 11. 인간 진화론자(Darwinians)들은 가장 강한 자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말한다. 케구리학자들은 가장 약한 자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말한다. 둘 다 적자생존의 원리를 따르지만, 둘 중의 하나는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12. 케구리 연못의 특이한 점은 암컷 케구리들은 거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암컷 케구리들은 황소케구리에게 있는 고독을 견디는 능력이나 케골어 구사 능력, 파리 포획 능력, 연못유지 능력 등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암컷 케구리가 우연히 존경의 대상이 되는 능력을 개발하게 되면 황소케구리의 옷을 입은 암컷 케구리가 되며 케골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다. 13.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성적인 결합이 필요하며 매우 즐겁고 사실적이지만, 케구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적인 결합이 필요 없고 그냥 마술이면 충분하다. 14. 경영 개선 프로그램은 일종의 마술과 같고 아무도 해치지 않으며 플라토닉한 ‘케구리의 키스’로 이뤄진다. 케구리의 키스를 촉진하는 모든 행위는 기만적인 조직 개발의 방법으로써, 전형적인 ODD(Organizational Development by Deception)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의 물을 빼거나 매립하지 않고 케구리의 스타일을 평가해 합창을 강화하며 연잎 다툼의 갈등을 해결하는 행위는 ODD 관리자들이 취하는 케구리 키스의 좋은 사례들이다. 15. 케구리 키스는 유혹하는 행위다. 이와 관련해 심리학자 프레드릭 허즈버그(Frederick Herzberg)는 “유혹을 당하는 것이 강간을 당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유혹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파멸에 스스로 가담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영 개혁가들이 유혹을 당해 케구리 키스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제로 사랑의 행위까지 이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키스를 한 사람의 얼굴에 피부병을 옮길 뿐이다. 16. 대부분의 조직 구성원들은 케구리학자 네트워크나 연못유지관리협회에 가입한다. 그와 같은 네트워크와 협회에 가입하는 목적은 각 구성원의 연못을 덮고 있는 안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데 있다. 그러나 케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정보 교환으로는 연못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다. 다행히 케구리들은 그들의 연못이 모두 비슷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도감을 느낀다. 또는 어떤 황소케구리의 말처럼 “비참한 케구리는 동반자를 필요로 하며, 비참한 동반자를 좋아한다”. 17. 가끔 케구리학자들이 회의를 할 때, 안개 속에서 방귀를 뀌는 케구리가 있다. 그 케구리는 자신의 케구리성을 잃어버렸으므로 연못의 균형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따라서 케구리학자들은 케구리의 방귀를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귀는 안개 속에 구멍을 만들고, 결국 연못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술적인 분위기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18. 케구리들 사이에서는 다른 케구리에게 키스를 하면 그 케구리가 왕자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하지만 케구리에게 키스를 하면 피부병만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래도 키스를 하겠다면 이런 사실도 알아야한다. 그 짙은 안개 속에서 다른 케구리가 어느 쪽을 향해 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19. 케구리들은 서로에게 자주 함정을 판다. 그러나 케구리 함정은 아주 특이해서, 그 함정을 판 케구리만을 잡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당신이 케구리 함정을 파야만 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당신은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20. 케구리 함정을 파는 기술은 다음 세대에 잊혀지지 않고 전수되며, 습지유지관리 연구학교들은 습지관리학을 전공한 케구리교수들을 고용한다. 학교 앞의 연잎에 써 붙어 있는 구호처럼 케구리교수들의 직무는 엄격하게 통제된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올챙이들이 있다면 이는 케구리교수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까닭이다.” 이 구호를 면밀히 살펴보면, 구호의 근본 원리가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올챙이 교육의 기본 책임이 케구리교수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올챙이가 공부를 못하면 케구리교수의 잘못이고, 같은 논리대로 올챙이가 공부를 잘하면 그 공도 케구리교수의 몫이다. 그렇다면 어느 모로 보나 올챙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케구리교수의 유능함이나 무능함을 담는 수동적인 무생물 용기로서의 ‘올챙이’가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교육의 태도는 학생들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습지관리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이 연못의 외로운 평행 상태에 그렇게 잘 적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학습에 대한 책임을 떠맡았을 때, 그 사람은 교육자가 아니라 단지 ‘케구리교수’가 되는 것이며, 그에게 가장 중요한 직무는 올챙이들이 연못에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이다. 21. 여러 종류의 조직에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케구리가 된다. 케구리 연못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권한을 위임할 수는 있지만, 책임을 위임할 수는 없다.”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부하의 성과에 책임이 있다. 만약 당신의 부하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당신 때문이다. 올챙이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부하직원들도 확장된 당신의 일부로만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이 연못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케구리들이 자기 부하의 성과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많은 케구리들이 자신의 케구리 스타일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자기 부하의 성과에 책임이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스타일(천성과 반대되는)이 부하직원들의 성과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23. 많은 황소케구리들은 연못에서의 자신의 삶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웃지 못한다. 그들은 거세된 케구리(steerphrog)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의 황소케구리들은 웃으면서 죽지만 거세된 케구리들은 결코 웃는 법이 없다. 그들은 그저 케골거릴 뿐이다. 24. 미국 정부가 있는 워싱턴은 흔히 ‘안개 낀 습지(Foggy Bottom, 포토맥 강변의 안개 때문에 생긴 미 국무부의 속칭-옮긴이)라고 불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관료주의의 온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그곳의 이름을 케구리습지(phrog Bottom)로 바꾸는 것도 좋을 듯하다. 25. 알프레드 매로우(Alfred Marrow)의 《안개낀 습지에 파문 만들기(Making Waves in Foggy Bottom)》는 미 국무부의 관료주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다룬 책으로서, 본질적으로는 그 노력의 실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어떤 조직에서든지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는 습지에서 물을 빼는 행위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6. 습지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결국 전 세계가 케구리 습지로 뒤덮일지 모른다. 케구리 오염에 비하면 대기 오염은 위협도 아니다. 케구리 습지는 궁극적으로 악의 세계다.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bdt)의 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무해한 것 같은 케구리 습지는 엄청난 악의 힘을 갖고 있는 황소케구리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돌프 아이히만 (Adolp Eichman,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장교-옮긴이)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27. 대부분의 습지 관리자들의 직무는 연못에서 물을 빼는 것이 아니라 습지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있다. 케구리 원스턴 처칠(Winston Phroghill)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습지의 물을 빼내기 위해 습지의 수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28. 습지 관리자들은 습지 컨설턴트들의 의무가 습지에서 물을 빼는 것이 아니라 습지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9. 대부분의 경영개선 이론들은 매립이 아니라 습지 관리의 촉진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케구리를 키우는 사람이며, 대부분의 경영 컨설턴트들과 습지관리학과 교수들은 케구리를 키우는 관리자들을 돕는다. 이들의 관계는 공생 관계다. 30. 케구리를 키우는 관리자들과 이들을 돕는 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습지에 발이 빠져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멀쩡한 의식을 갖고 있다. 하나님, 그들의 영혼을 돌보소서. 31.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돌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큰 케구리 양식자일 것이다. }}} == 케구리 연못에서 벗어나는 방법 == {{{#!wiki multi-columns 연잎 위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독하다. 케구리 연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실 케구리들은 연못 밖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인간 관리자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습지를 빠져나올 수 있다. 1. 조직의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 일하지 않도록 하라. 짝을 이루거나 팀 또는 조직을 이뤄 일하도록 하며, 팀 또는 조직 단위로 보수를 지불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일한 대가로 보수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돕게 되는 법이다. 2. 승진, 해고, 보수, 업적 등은 제로섬이 아닌 방식으로 평가하라. 제로섬의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항상 제로로 평가한다. 다시 말해 ‘네가 이기면 나는 지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로섬이 아닌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관계의 결과를 그렇게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둘 다 승자가 될 수 있으며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시너지 효과에 힘입어 3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케구리들’은 연령순으로 직원들을 해고하겠지만, ‘사람들’은 해고하는 대신에 일정 비율로 보수를 삭감하면서, 불경기에 더욱 더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 3. 케구리 연못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마라. 사람들이 케구리 연못에서 벌어지는 일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을 때,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예컨대 케구리 연못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는 누구도 케구리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4.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책임을 져라. 케구리들은 습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황소케구리에게 돌리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근무지와 그 운영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돌린다. 5.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신뢰하라. 케구리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출퇴근기록기를 설치한다. “너희들이 정직하게 근무시간을 지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증명해봐라” 하는 식이다. 또한 케구리들은 누군가 아파서 출근할 수 없다고 전화하면 의사의 진단서를 요구한다. 개인 사무실을 만들어 다른 이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대화내용이나 업무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다. 그들은 모든 비용에 상세한 증빙자료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교활한 습지의 봉급생활자들은 황소케구리가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회사 돈을 빼돌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케구리들의 독한 키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구린 곳을 감추는 CYA(Cover Your Ass)장부를 따로 만들어 둔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정직성을 의심하는 규칙이나 절차를 거의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가끔 그런 신뢰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한다. 6. 사람들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대하라.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로널드 D. 랭(Ronal D. Laing)은 “사람을 개인화된 주체(주관적으로)로 대하지 않고, 비개인화된 객체나 사물(객관적으로)로 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고 지적했다. 황소케구리들은 케구리들을 객관적으로 다루려 한다. 그들은 케구리들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그 상항에서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대가로 자신도 하나의 대상, 즉 사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인간성의 본질을 스스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황소케구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서로를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관적인 생각은 그들의 근무지에서 발생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다뤄짐으로써 근무 환경을 새롭게 만들어간다. }}} == paradox: 아직도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 조직은 케구리가 아닌 생명체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케구리가 지나치게 많은 뇌세포를 가지면 조직의 생활을 견딜 수 없다. 만약 많은 뇌세포를 가지게 되어 인간화되면 조직에서 방출되거나 스스로 탈출해야 한다. = 3.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 = == 아브라함 이야기: 관료주의의 탄생 ==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충성심을 테스트 받으라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해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실존주의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rgaard)는 그의 에세이 《공포와 전율(Fear and Termbling)》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아주 특별한, 사실상 이해 불가능한 종교적 행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외에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비이성적인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절대적 복종은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행동이며, 이런 행동은 어떤 종교든 그 신념이 가장 투철한 사람들에게만 모델이 된다는 데 의견을 함께합니다. == 당신의 이웃에 아브라함이 있다 == == 직장에서의 복종 == ==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 == == 새로 쓴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 == paradox: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라? == = 4.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 = 일반적으로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환경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거짓말을 즐겨 하며, 상대방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생산성이 감소되는 무능력한 조직이 만들어진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걱정하느라고 무기력해지는 현상은 모든 조직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그 이유는 용서하는 과정이나 절차,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용서를 함으로써 조직의 구성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시도하며, 현실을 제대로 평가하면서 커뮤니티를 구축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불행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이웃에 살았던 민간 항공기 조종사 에드가 달력에 근무 스케줄을 잘못 표시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나는 용서와 은총을 장려하는 정책과 과정이 조직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 아소 기장의 선물: 진실이 용서를 낳는다 == ==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 == 유머와 부조리 이해하기 == 아소 기장은 유머감각과 부조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자질은 유용할 뿐 아니라 여느 문제해결 방식과 달리 건전하다. 인간의 문제해결 방식을 오랫동안 연구한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는 유머야말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방어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또한 유머란 “개인적으로 불편함이 없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행위, 즉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고 받아들이기에 너무 끔찍한 사실을 견뎌내며, 절대 타인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먼 커즌스(Noman Cousins)는 비슷한 맥락에서 유머에 치료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의사들이 치료가 불가능하고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던 중병을 웃음으로 치료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과 문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개인과 조직의 효율성에 유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유머가 없거나 부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리자, 지도자, 부하직원, 동료, 교사, 성직자, 부모, 정치가, 코치 중에 유능한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직 내에서는 유머를 표현하는 것이 금기시돼 있다. 실제로 마이클 맥코비(Michel Maccoby)의 조사에 따르면 관리자들의 53퍼센트가 유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대답했지만, 정작 직장에서 유머가 허용되는 분위기라고 대답한 사람은 14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한다. ==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 == 관리자와 부하직원, 교사와 학생, 국회의원과 지역구민,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비대칭 관계다. 권력과 책임의 분배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보채거나 반항을 하면 더 많은 권력이 부하 직원에게 이동하기도 하므로 권력이 언제나 높은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비대칭 관계에 놓여 있는 참가자들이 공모해 권한을 가진 인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면 관리자와 부하직원이 모두 파괴되고 말 것이다. 나는 이처럼 누구에게도 득이 안 되는 행동을 ‘기생공생(parabiotic)’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기생(parasitic)’과 ‘공생(symbiotic)’의 합성어로서 두 마리의 거머리가 엉겨 붙어 서로의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타인을 파괴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아소 기장은 그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두 거머리를 떼어놓았다. 아소 기장은 모든 사실을 ‘깨끗이 인정’했으며, 일본항공의 관리자를 누구도 탓하지 않았고, 승무원이나 관제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내가 멍청한 짓을 했소”라고 말했을 때 관련 당사자들의 책임을 모두 면제해준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이 제한된, 그러나 현실적인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아소 기장은 우리에게 대리 만족을 안겨주었다. 어떤 행동을 했든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고, 동시에 타인의 행동과 선택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수용하기 어려운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었다. == 이타주의 실현의 기회 == 베일런트는 이타주의를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남에게 줄 때 얻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아소 기장은 몸소 행동을 통해서 이타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타주의는 유머와 함께 자신의 삶에 성숙하게 적응한 결과의 하나다. 그리고 이타주의의 표현은 실존적으로 만족스러운 경험일 뿐 아니라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의 말처럼 “인간 문화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아소 기장은 법의 심판대에 솔직하고 간결한 대답으로 자신을 맡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내재돼 있던 이타주의를 표현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가 왜 그의 행동을 보고 기뻐하는지 이유는 모른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 용서가 주는 희망 == 마지막으로 아소 기장은 무결점주의를 지향하는 조직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조직 생활에서도 신성한 용서가 은총의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언젠가는 조직들도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1. 직원들의 인사기록카드에 기록된 불리한 기록은 기간을 정해 정기적으로 지운다. 2. 영구적인 처벌 없이 공식적인 용서 의식을 시행한다. 3. 직원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과를 하는 방법과 사과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렇게 되면 조직의 구성원들은 세속적 또는 영적인 의미에서 용서와 은총을 조직 생활의 기본 바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조직에서도 의존성 우울증과 쇠약증의 먹구름이 걷힐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회사의 출입구에 아소 기장의 불멸의 한마디 “내가 멍청한 짓을 했소”를 돌에 새겨 장식할 것이다. 이것은 욕이 아니라 최고의 휴머니즘과 진정으로 신성한 우리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 paradox: 누구의 잘못인지 아무도 모른다 == = 5. 영혼을 파는 사람들 = == 아이히만 이야기의 교훈 == 나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이히만에게 직언할 도덕적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나의 동료 테드는 어째서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인문대학 교수들을 위해 휴머니즘의 길을 선택했는지도. 이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자부심을 갖고 단언하건대, 그 대학 위원의 입장 변화와 내 친구의 반대 그리고 다른 교수들의 반대를 포함한 모든 상황들이 결합해 인문대학 교수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어찌됐든 그 대학의 경영 상태가 무척 어려워질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대학은 건재하다. 모든 교수들이 인문대학 교수들을 쫓아내고, 그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을 때보다 조금 수입이 줄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학의 많은 구성원들은 나치 시절의 덴마크인들처럼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을 모아 단결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대학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됐다. 테드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동료에 대한 조직의 배반이나 조직의 이기적 공모에 가담하는 것은 영혼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런 행동은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게 하고 생존하게끔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간성’이라는 씨실과 날실을 끊어버리는 무모한 행위다. == 조직의 살인과 공모자들 == 조직의 감원은 홀로코스트로 가는 행동이다. 즉, 조직의 ‘작은 살인’이다. 그렇다면 어떤 공모를 통해 조직 구성원들이 서로를 죽이는 걸까? 공모가 실현되려면 몇 가지 구조적인 요인들이 필요하다. 우선 계획된 역할을 수행하는 찬성파와 이를 정당화시키는 이론 그리고 그 이론을 포기하라는 엄청난 내부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이 그것이다. 관료주의는 간혹 불신과 소외와 과대망상증을 낳기도 하지만,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낳기도 한다. 무엇을 낳느냐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조직을 만드느냐와 그 조직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무엇이 공모를 정당화시키는가? == == 아이히만 vs 덴마크인 ==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을 표현한 덴마크인들의 능력에 용기를 얻은 나는 모든 조직에서도 ‘덴마크인의 사랑’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부족한 물적 자원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런 관심과 애정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 생존해 번창할 가능성을 높여 주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해고시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생각해보니 덴마크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서로의 관계가 원수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조직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내쫓고 그 자리에 ‘덴마크인’을 앉히는 것이다. == 왜 악마와 거래하는가? == == 조직 문제의 해결책 == {{{#!wiki multi-columns 분리에 대한 공포와 애착에 대한 욕구는 일반적인 것이며 아이히만은 물론 그 누구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아이히만의 옷을 입고 그 대신 행동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행동을 어떻게 제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생존에 대한 욕구를 지지해주는 사회(또는 조직)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신성하게 지킬 때 가능하다. 이미 말했지만 생존에는 애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고용을 보장하고 그에 보답하는 고용원이 존재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정책을 입안할 때, 모든 조직 구성원들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조직 내 이타주의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덴마크인들에 대해 공부하고 일상적인 조직 생활의 일부로서 도덕적인 문제들을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물적 자원이 부족한 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물적 자원이 풍부한 시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보장된 고용 === 조직 내에서 분리에 대한 공포를 줄이고 애착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을 제공하려면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 대부분의 직원에게 고용을 보장하는 일본 기업들이 사실상 모든 경쟁 분야에서 미국의 생산성을 앞지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변해야 할 사항들은 열거하자면 끝이 없지만 우선 다음의 6가지 필수 사항들을 명심해야 한다. 1. 신규 채용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1. 장기적인 계획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 1. 병적인 분리 공포보다는 애착 욕구에 호소해 서로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1. 서로를 죽이는 치열한 경쟁보다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팀워크 인센티브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1. 조직 구성원들에게 보다 평등한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일본 주요 기업 CEO의 순수입은 대졸 신입사원보다 6~7배 정도 많은 반면, 미국 기업은 50배 정도 많다). 1. 노사관계를 적대적이 아니라 협조적인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 참여 경영 === 변화 관리에 참여하는 것은 분리 공포를 줄이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데 필요한 애착의 경험을 제공하므로 조직이 감내해야 할 경제적 압력을 받고 있을 때 특히 유용하다. 심리학자인 엘리엇 자크(Eliott Jaques)는 참여를 “미래의 고용기회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변화 관리에 고용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할 권리”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그러므로 참여는 소속과 소외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이 소속감을 갖기 위해서는 소속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참여는 비인간적인 조직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서 저항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 === 이타주의적인 조직 구조 === 조직이 사랑을 촉진하고 소외를 줄일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구성원들의 이타주의 표현을 장려하는 정책과 절차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물적 자원이 부족할 때, 더욱 필요하다. === 덴마크인들의 교훈 === 덴마크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 없어 마음이 답답하지만, 일본인과 그들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려져 놀랄 정도다. 우리의 끝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작가들은 《Z이론(Theory Z)》 《일본식 경영의 기술(The Art of Japanse Managemaent)》 《단합을 위해서(For Harmony and Strength)》와 같은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북미의 조직관리 방식이 구시대적인 것처럼, 일본의 조직관리 방식도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덴마크인들의 조직관리 방법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끝나지도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방법도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것이며 그러므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 == pardox: 가지를 자르면 나무가 죽는다 == 비즈니스가 어려운 상황에서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서 일부를 해고하는 일이 많이 생겨난다. 그들은 직원의 해고가 너무 힘들고 어렵지만 꼭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조직 전체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면 그 조직은 분명 ‘조폭조직’이다. 내가 살기 위해 또 다른 조직원을 죽여도 된다고 믿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폭조직도 아닌데 회사라는 조직에서도 구성원들이 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바로 서로 공모하는 사고방식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가장 분명히 가지는 욕구는 ‘분리 공포’와 ‘애착 욕구’이다. 조직으로부터 자신이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죽음의 공포같다. 저자는 정리해고와 같은 행위를 조직 내에서 행해지는 ‘살인 공포’와 같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공모 행위의 모순은 정작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또 기대했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냥 해치운다. 바로 여기에 서로의 공모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기합리화 과정이 존재한다. 조직생활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조직을 건강하게 생존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크든 작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인 조직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도덕적 선택이란 언제나 타인에 대한 우리의 애정 어린 관심의 표현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와 타인이 함께 생존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욕구이자 또 다른 용기의 표현이 된다. = 6. 변명하는 사람들 = == 집단의 폭압이라는 환상 == 현대에는 집단 폭압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집단 폭압이란 대부분, 행동과학자들과 경영이론가들이 우리가 집단에서 도덕성을 잃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을 탓할 때 사용하라고 제공하는 핑계라고 본다. 다음 두 가지 방식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첫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안감, 부정적인 상상, 실질적인 위험, 소외에 대한 두려움,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인 역전 등이 작용해 조직이 개인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집단행동, 즉 애빌린 패러독스를 행하게 된다. 나는 애빌린 패러독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리가 어떤 조직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애빌린으로 가는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모든 참여자들이 아무도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을 수 있으며, 각 개인은 집단의 강요가 없는데도 자신의 행동이 집단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집단 폭압과 복종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여주는 심리학적인 실험의 결과들을 검토에 바탕하고 있다. 애빌린 패러독스의 관점에서, 실제로 집단에 의해 복종을 강요받은 개인과 관련된 연구는 전무한다. 다만 고전적인 애시의 실험이 집단의 압력이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심리 연구로 간주될 뿐이다. == 서부영화로 배우는 건스모크 현상 == 우리는 벌레 먹은 사과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문제 상황을 언제나 폭도들의 압력과 동료들의 압력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려고 한다. 어째서 그럴까? 가족과 동료, 친구, 조직의 문제를 다룰 때, 합의와 협력이 아니라 갈등과 폭력의 측면에서 해석해야 딜런이 감수했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이브처럼 우리도 선악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집단의 압력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들의 용기 없음에 대한 핑계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과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조직이 많은 지원과 자유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과를 먹기 위해서는 어렵고 위험한 도덕적 선택을 제시하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령 일단 새로운 사과를 먹고 나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들킨 10대 청소년은 “내 친구가 훔치라고 했단 말이에요”라는 핑계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또 “직원회의에서 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회사 중역도 “모두가 그 의견에 찬성하는 것 같아 보였단 말입니다”라고 집단 사고 알리바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학살에 왜 가담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나치 장교에게도 집단 압력은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쉽게 댈 수 있는 핑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회과학자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도덕성 마취제가 들어 있는 사과를 계속 제공하도록 격려하고 지원한다. 우리에게는 복종에 대한 압력은 물론 집단적인 폭압과 폭도들의 압력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사과가 필요하다. 그와 같은 벌레 먹은 사과를 먹는다면 딜런 보안관은 그 나무의 다른 사과를 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사과가 제공하는 지식은 우리도 딜런 보안관처럼 큰 위험, 즉 실존적 분리의 위험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분리의 위험을 감수할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의 도움을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위험은 감수하기엔 너무나 클 것이다. == 자유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위험 == ==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선택은 무엇인가? == == paradox: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 == 저자는 처음부터 우리가 ‘조직의 압력’이라고 믿는 것이 조직 속의 개인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상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의 조직 구성원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것이다. 어쩌면 조직에서 전혀 일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비난쯤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저자는 조직에서 개인이 집단적 압력이나 폭력을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에는 사실, 조직의 압력이나 힘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다만 ‘행동 불안’, ‘부정적 상상’, ‘실존하는 위험’, ‘분리 공포’, ‘위험한 확실성의 전도’등이 작용해 집단이 개인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감이 결국은 개인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집단행동’이라고 부른다. 집단행동에는 개인이 조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될 수도 있는 실존적 위험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런 실존적 위험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존재의 위험일 뿐이다. 즉, 행복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불행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경구처럼 말이다.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죽음을 감수하고 죽음의 궁극적 결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조직 안에서 개인이 느끼는 ‘분리 불안’에 대한 공포는 심각한 수준이다. 왕따, 불인정, 해고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런 불안심리 때문에 개인은 조직 안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 항상 조직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도덕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강박증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조직의 압력이 자신에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제약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위험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집단 폭압은 상상 속에서 존재한다. 집단의 압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집단에서 도덕성을 잃고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탓할 때 사용하는 핑계일 뿐이다. 이런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고 집단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다소 생뚱맞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 스스로 자신에 대한 영적이 이해를 높여야 한다. 진짜든 상상이든 집단 폭압에서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영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이 자신의 정신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내걸 용기를 주는 신비한 힘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인생관과 가치관, 즉 우주관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 자신의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려고 하는 자세다. 만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조직의 압력은 자신의 존재나 행동을 합리화시켜주는 구실이 되고 만다.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까지 조직의 구성원들은 단지 그냥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스스로 늪지에 사는 케구리임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 7. 서로 돕지 않는 사람들 = == 서로 돕는 것은 부정행위다? ==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행위를 속임수라고 정의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며, 내가 알기로 그런 문제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정행위에 대한 잘못된 정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업무 완수에 대한 형편없는 모델을 제공한다 * 시너지 효과를 막는다 * 이타주의의 표현을 막는다 * 의존성 우울증을 유발하다 내 그림자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갈 때, 그가 내 발뒤꿈치에 화살을 쏘았으며 아킬레스건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또 협력과 팀워크의 영광을 찬양하다가 다음 순간 영업사원들이 서로 피 터지게 경쟁하게 만드는 성과급 보너스 계획을 발표하는 관리자들에게서 내가 발견한 그런 모순을 내 그림자가 나에게서 발견했음을 알았다. 그들과 나의 위선을 발견했을 때, 나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 부정행위에 관한 새로운 정의 == == 엇갈린 주위의 반응 == == 평가의 딜레마: 왜 시험을 보는가? == == 낯섦에 대한 도전 == == 희망의 빛 == == paradox: 아름다운 협동, 커닝을 허용하라 == 조직 내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행위’가 많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즐겁게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혼자서 일하는 것보다 서로 도우면서 협력하면 개인의 역량보다 더 많은 또 더 높은 수준의 일을 이뤄내는 것이 가능하다. 사회는 시너지 효과나 팀 활동을 강조하지만 정작 조직 내에서는 항상 개인이 다른 개인을 밟고 일어선다는 경쟁의 개념이 팽배하다. 왜 조직 생활에서는 협력보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인 경쟁 심리가 더 우세한 것일까? 저자는 이를 두고 우리가 학교교육을 통해 협력하고 도와주는 것이 부정행위라고 배웠기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 감수의 글 = 조직사회에서 상사의 의중을 잘 파악하는 눈치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공식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와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눈치는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요 능력이 돼버렸다. 잘 살펴야 하고 빨라야 한다. 조직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눈치와 요령의 미학은 메시지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일을 처리하는 핵심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수행 과업이나 새롭게 진행돼야 하는 프로젝트를 누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사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우리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 “이 일을 왜 해야 하나요?” * “이 일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 “의도는 알겠지만, 실제로 그런 결과를 기대하는 건 힘들지 않나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런 질문은 조직 내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책의 초반에 “만약 하나님이 생쥐라면 어떻게 될까요?”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조직의 경영과 관련된 인간 행동과 심리 또는 조직관리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 Category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