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교육청 전자도서관 소장.

누가 경제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가

21세기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7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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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목표를 바꿔라
70년 이상 경제학자들은 GDP, 또는 국민 생산을 진보의 척도로 여겼고 이 개념이 고착되었다. 이는 소득과 부의 극단적인 불평등, 그리고 이에 따른 전례 없는 생명 파괴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21세기에는 더 큰 목표가 필요하다.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지구의 한계 안에서 모든 개개인의 인간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목표 말이다. 도넛 개념 안에 이런 목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할 일은 이 도넛의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으로 데려올 지역 경제와 세계 겅제를 창출하는 일이다. GDP의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이제 어떻게 균형을 이루며 번영할지를 찾아야 할 때다.
둘째, 큰 그림을 보라

주류 경제학은 경제 전체를 그저 '경제 순환 모델'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 그림의 여러 한계로 시장의 효율성, 국가의 무능함, 가정 경제의 의미에 대한 무시, 커먼스commons의 비극 등을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의 서사가 강화되었다. 이제 경제의 그림을 새로 그릴 때다. 사회 안, 또 자연 안에 포함되어 태양을 동력으로 돌아가는 경제 그림을. 새로운 그림은 새로운 서사를 불러온다. 시장의 힘, 동반자로서의 국가, 가계의 핵심적인 역할, 또 커멈스의 창의성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셋째, 인간 본성을 피어나게 하라
20세기 경제학의 핵심에는 합리적 경제인의 초상화가 들어앉아 있다. 이 초상화는 우리가 자기 이익에 몰두하고, 고립되어 있으며, 계산적이고, 취향도 고정된 데다, 지배자로서 자연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주입시켰다. 결국 우리는 이 초상화를 그대로 빼닮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 본성은 이보다 훨씬 풍부하다. 새로운 초상화의 밑그림에서 우리는 사회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며, 정확하게 계산하기보다는 근삿값에 근거해 행동하고, 신봉하는 가치도 유동적이고, 우리가 속한 생명 세계에 의존하는 존재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도넛의 안전하고도 정의로운 공간으로 들어갈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인간 본성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 시스템의 지혜를 배워라
수요 곡선과 공급 곡선이 교차하는 그림이야말로 모든 경제학과 학생들이 제일 처음에 배우는 다이어그램이지만, 이는 기계적 균형이라는 19세기의 잘못된 메타포에 뿌리를 둔 것이다. 경제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더 지혜로운 출발점은 단순한 되먹임 회로 한 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역동성을 경제학의 중심에 놓으면 금융 시장 과열과 붕괴부터 스스로 강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본질, 그리고 기후 변화의 티핑 포인트까지 전방위적으로 새로운 혜안이 열린다. 이제 경제를 무슨 단추나 레버 몇 개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기계로 보고 그 단추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짓은 그만둘 때다. 대신 경제를 영속적으로 진화하는 일종의 복잡계로 보아 돌보고 관리해야 한다.
다섯째, 분배를 설계하라

20세기 경제학에는 쿠즈네츠 곡선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 곡선이 불평등 문제에 강력한 메세지를 던졌다. 불평등 문제가 개선되려면 그 전에 먼저 더 악화되는 국면을 거쳐야 하지만, 경제 성장을 거친 뒤에는 결국 다 개선될 거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불평등은 경제 논리에서 필연적인 게 아니라 설계 오류로 인한 길과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1세기 경제학자들은 경제에서 생겨나는 가치가 더 잘 분배되도록 설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이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플로우들의 네트워크network of flows'다. 소득 재분배에 그치지 않고 부를 재분배하는 여러 방법, 특히 토지, 기업, 기술, 지식, 화폐 창출 권력 등을 통제하는 데 깃들어 있는 부와 재산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여섯째, 재생하라
지금까지 오랫동안 경제학은 '깨끗한' 자연환경을 사치재로, 오로지 잘 사는 이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해왔다. 이런 관점을 강화시킨 것은 환경 쿠즈네츠 곡선이다. 오염 문제가 개선되기 전에 반드시 더 악화되는 국면을 거쳐야 하지만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 종국에는 다 깨끗해진다는 소리를 다시 한 번 속삭인다. 하지만 이런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 악화는 퇴행적인 산업 설계의 결과물일 뿐이다. 21세기에 필요한 경제학적 사고는 선형이 아니라 순환형 경제를 창출하게 해주는 사고, 나아가 인간이 지구의 생명 순환 과정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회복시켜줄 재생적인 설계를 풍부하게 내놓는 사고다.
일곱째, 성장에 대한 맹신을 버려라
경제학 이론에는 너무나 위험해 실제로는 한 번도 그려진 적 없는 다이어그램이 하나 있다. GDP 성장의 장기 경로 그림이다. 주류 경제학은 경제 성장을 지상 명령으로 보지만 자연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다. 저성장 고소득 사회에서 경제 성장에 대한 맹신에 저항하고 나선다면 어려운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이다. 더 이상 경제의 목표를 GDP 성장에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건 어렵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겅제 성장 중독에 빠진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은 훨씬 힘들 것이다. 오늘날 경제는 정작 우리 삶이 풍요롭게 피어나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성장만 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가 성장하든 말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경제다. 관점을 이렇게 근본적으로 뒤집으면 우리는 금융,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성장에 중독된 지금의 경제를 성장 맹신으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21세기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일곱 가지 방법에서 구체적인 정책 처방이나 제도적 해법 따위가 바로 나오지는 않는다. 무엇을 할지 즉답을 약속하지도 않고, 총체적이고 궁금적인 해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이 21세기가 요구하는 경제학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마련하는 초석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이 원리들은 새로운 경제사상가에게 모두의 삶이 피어나는 경제를 만드는 도구가 되어줄 것이며,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은 경제학자로서의 본성 역시 같은 방향으로 일깨워줄 것이다. 장래에 닥쳐올 변화의 속도와 규모, 불확실성을 생각해본다면 미래 사회에 적합한 정책과 제도 모두를 현 시점에서 미리 처방하려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다. 미래 사회의 맥락 또한 끊임없이 변할 것이므로, 미래 사회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실험하는 작업은 새로운 세대의 사상가들과 행동가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제대로 해내야만 하는 일은 지금 출현하는 사유 중 최상의 것들을 조합해 새로운 경제학의 사고방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결코 끝나는 법 없이 계속 진보해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다음 세대의 경제학을 생각하는 이들의 임무는 이 일곱 가지 사고방식을 실천 속에서 결합시켜나가는 것, 그리고 일곱 가지 외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대 많이 찾아내 추가하는 것이다.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21세기의 모험은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자, 배가 떠나려 한다. 서둘러 승선하시라.

1. 목표를 바꿔라: GDP에서 도넛으로

경제학 본연의 목표를 잃으면 엉뚱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20세기에 들어 경제학은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려는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그러자 목표를 잃은 경제학의 둥지를 GDP 성장이라는 뻐꾸기가 몽땅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경제학은 어쩌다 목표를 잃었는가

경제학이라는 말을 처음 발명한 이는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폰이었다. 그가 말하려 한 것은 가정 관리 기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를 따라 경제학과 재물 습득술chrematistics을 구별했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의미 없어 보인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학은 물론 재물 획득술도 일종의 기술로 보았으며, 그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2000년이 흘러 뉴턴이 운동 법칙을 발견한 뒤에는 모든 학문이 과학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유혹을 너무나 크게 느끼게 된다.

스코틀랜드 법률가 제임스 스튜어트가 '정치경제학' 개념을 처음 제안하면서 이를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자유로운 나라에서 국새 정착을 수립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애덤 스미스가 나타나 자기만의 정의를 선보였다. 스미스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은 뚜렷이 구별되는 목표 두 개를 갖고 있다.

  1. 첫째는 사람들에게 풍족한 수입 혹은 생계수단을 공급하는 것으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그런 수입 혹은 생계수단을 스스로 조달하게 해주는 것이다.
  2. 둘째는 국가나 전체 공동체 차원에서 각종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충분한 재원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의 정의는 경제적 사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밝혔으므로 이를 명심했다면 경제도, 경제학도 절대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스미스의 접근법은 얼마 가지 못했다.

70년이 지나, 이번에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경제학을 정의하면서 초점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인류가 부를 생산하기 위해 힘을 합쳐 작업하는 데서 생겨나는 사회 현상들의 여러 법칙을 추적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통해 밀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후에 많은 이가 이를 이어받아 더 나아가게 된다. 새로운 흐름이란 경제가 달성해야 할 여러 목적을 뚜렷이 하는 대신 경제에서 나타나는 여러 법칙을 발견하는 쪽으로 관점을 전환시킨 것이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그레고리 멘큐의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경제학의 정의는 더 간략해진다. '경제학은 사회가 그 희소한 여러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대한 연구'라고 간단히 선언하고 끝내버린 것이다. 경제 행위의 여러 목적과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완전히 책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둥지를 차지한 뻐꾸기

성공의 비전을 종이에 그려보면 어떤 모습일까? 흥미롭게도, 경제학자들은 경제 성장을 목적으로 채택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그리는 법이 없다. 이를 그려보면 계속 올라가는 GDP 곡선이 나올 것이다. 지수 함수처럼 갈수록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성장 곡선은 마침내 종이를 넘어 앞으로 또 위로 나아갈지니, 인간과 개인의 진보에 대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메타포와 완벽하게 조응한다.

정작 쿠즈네츠 본인은 이를 경제 진보의 모습이라고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경제 성장률 계산법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 처음부터 잘 알았기 때문이다. 쿠즈네츠는 국민 소득이란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 가치만 포착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사회가, 또 가정 경제가 스스로를 위해 생산하는 어마어마한 가치의 재화와 서비스가 모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소득과 소비가 여러 가정 경제 사이에 실제로 어떻게 분배되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또 국민 소득이란 매해 발생한 소득의 양을 기록해 그 플로우, 즉 유량을 측정한 것이므로, 그것을 발생시킨 부와 재산 그리고 그 분배 상태를 보여주는 저량 지표도 이를 보완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GNP가 인기 절정에 달한 1960년대 초, 쿠즈네츠는 그에 대한 맹신을 가장 공공연하게 비판했으며 '국민 소득이라는 지표로 한 나라의 후생을 추론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DonellaMeadows는 1972년에 출간된 보고서 '성장의 한계 LimitsToGrowth'의 공동 저자로, 결코 말을 모호하게 뭉개는 법이 없었다. '경제 성장은 인류가 찾아낸 가장 어리석은 목표다.' 그리고 1990년대 말에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지 알아야만 한다.'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소리에 당당히 맞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의 성장인가? 왜 성장인가?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그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그 성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지구가 감당해야 할 비용은 얼마인가?'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해야 충분한가?'

쿠즈네츠는 1960년대에 이미 이렇게 조언했다. '성장의 양과 질, 비용과 수익, 단기와 장기라는 구별을 명심해야 한다. ... 그리고 목적을 분명하게 명시할 필요가 있다. 더 큰 성장이라는 목표를 내걸려면 무엇을 위해 무엇을 더 성장시킬지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뻐꾸기 쫓아내기

인간이 스스로 삶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개개인이 존엄과 기회와 공동체를 향유하는 세계를 목표로 삼자. 지구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넛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도넛은 간단히 말하면 21세기 인류의 길잡이가 되어줄, 근본적으로 새로운 나침반이다. 이는 우리가 의지하는 살아 있는 세계를 보호하면서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미래를 지향한다. 이 도넛의 사회적 기초에 못 미치면 인간이 안녕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식량, 교육, 주거 등 필수 요소가 결핍된 이들이 매일매일 직면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생태적 한계를 넘어가면 기후 변화, 해양 산성화, 화학적 오염 등 지구의 생명 유지 시스템이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두 경계 사이에는 도넛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최적의 지점이 있다. 생태적으로 안전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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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의 안쪽인 사회적 기초는 그 누구에게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삶의 기초 요소들을 열거한다. 열두 가지 요소에는 충분한 식량, 깨끗한 물, 양질의 위생 시설, 에너지 접근권과 청결한 조리 시설, 교육과 의료 서비스 접근권, 제대로 된 주거, 최소 소득과 안정적인 일자리, 정보망과 사회적 지원망 등이 들어간다. 나아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성 평등, 사회적 공평함, 정치적 발언권, 평화와 정의 등이 지켜져야 한다.

인간 활동의 '거대 가속'은 분명히 우리 지구를 크게 압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압박을 견디다 못한 지구의 생명 유지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히 어디일까? 다시 말해, 도넛의 바깥쪽 고리인 생태적 한계는 어디서 결정되는가?

홀로세 기간 동안 여러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업이 개발되었으며, 과학자들은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지구의 기온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이들이 정착해 계절에 맞춰 우기를 준비하고, 씨앗을 골라 심고, 수확을 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며 살게 되었다. 인더스 계곡, 고대 이집트, 중국 상나라에서 마야인, 그리스인, 로마인에 이르는 거대한 인간 문명이 이 지질학적 시기에 출현해 번성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지구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류가 몇 십억 명 단위로 번성한 기간이다.

나아가 홀로세의 살기 좋은 상태는 외부 교란이 없다면 앞으로도 5만 년은 더 이어질 거라고 한다. 현재 지구의 공전 궤도가 특이한 원형을 이루기 때문인데, 이는 40만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일 정도로 아주 드문 경우라고 한다. 가만히,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알려진 바로는 우리는 생명체가 사는 유일한 행성에 있으며, 그것도 가장 친절하고 호의적인 시대에 태어났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태양 주위를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도는 덕에 이런 시대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살기 좋은 지구로부터 스스로 쫓겨난다면 이건 정말 미친 짓일 터다. 그런데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이 바로 그런 짓이다.

2009년, 요한 록스트룀 JohanRockström과 스테천이 이끄는 지구 시스템 과학자 집단은 결정적인 아홉 가지 과정을 찾아냈다. 기후 시스템과 담수 순환 주기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지구를 홀로세와 같은 조건으로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는 과정들이다. 이들은 이 과정 하나하나에서 수천 년간 인류가 누려온 안정성을 위협하는 지점이 정확히 어느 정도 압력을 받는 순간인가 찾아내고자 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지구는 전혀 미지의 상태로 들어설 것이며, 완전히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변화들이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여러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 기초와 지구를 지켜내는 생태적 한계의 경계선을 동심원으로 묶으면 도넛의 안쪽 경계선과 바깥쪽 경계선이 된다. 물론 두 경계선은 연관성이 매우 깊다. 만약 도넛의 두 경계선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려고 펜으로 화살표를 그려보면 도넛은 금세 스파게티 그릇처럼 보일 것이다.

21세기 초입에 우리가 처한 상태는 지구 환경 측면에서 보나 인류의 입장에서 보나 실로 살벌한 상황이다. 이는 오늘날 까지 인류가 추구해온 세계 경제 개발 경로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강력한 고발이기도 하다. 수십억 인구가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조건조차 충존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전지구적으로 생태 위기 지경에 들어서 지구의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갉아먹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무한 성장이 아니라 균형으로 피어나는 삶

'앞으로 또 위로'는 진보를 나타내는 아주 친숙한 메타포지만 우리가 아는 경제에서의 진보는 우리를 위험한 영역으로 끌고 온 주범이기도 하다. '인류는 생명 유지 장치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해양과학자 캐서린 리처드슨은 말한다. '지금 우리는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다. 진보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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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균형 개념을 나타내는 고대 상징들: 왼쪽부터 도교의 음양, 마오리족의 타카랑기, 불교의 길상결, 켈트족의 쌍둥이 나선형.

어떤 문화권에서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균형으로 피어나는 삶'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이렇게 인류의 안녕에 대한 통합적이고 균형적인 개념은 여러 고대 문화에서 내려오는 전통 상징으로도 나타난다. 도교의 음양, 마오리족의 타카랑기, 불교의 길상결, 그리고 켈트족의 쌍둥이 나선형 등은 모두 보완적인 힘 사이의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춤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GDP 성장이라는 뻐꾸기 같은 목표를 둥지에서 물아내려는 서구 입장에서는 단순하게 안데스나 마오리의 세계관을 가져올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그와 동일한 비전을 명료하게 표현할 새로운 언어와 그림을 찾아내야 한다. 무엇이 있을까? 첫번째로 제안하는 것은 '피어나는 생명의 망 속에서 번영하는 인간human prosperity in a flourishing web of live'이다. 그렇다. 이게 핵심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인류의 안녕에 너무나 기초적인 무언가를 말로 표현할 정확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그림에 대해서는 어떨까? 나는 우리 도넛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넛 그림을 화면에 띄우고 핵심 개념을 설명하자 영국 대표가 일어나 발언했다. "참 응미롭군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분들이 대지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너무 허황되고 모호해서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도넛 그림은 사실상 거의 같은 이야기를 과학에 기초해 설명한다는 걸 알겠습니다." 때때로 그림은 언어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메워주곤 한다.

우리는 도넛 안에서 살 수 있을까

이 도넛은 21세기를 헤쳐나갈 나침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 안전하고도 정의로운 공간으로 옮겨갈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분명한 핵심 요소를 다섯 개 꼽아보자.

인구
머릿수가 많을수록 모두의 필요와 권리를 충족시키는 자원이 더 많이든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인구는 반드시 안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세계 인구는 여전히 늘고 있지만 1971년 이후 증가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근, 질병, 전쟁 때문이 아니라 발전과 성공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인구의 규모를 안정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개개인 모두에게 사회적 기초보다 나은 생활 수준과 빈곤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분배
볼평등이 극에 달할 경우 인류는 도넛 안쪽과 바깥쪽 경계를 모두 넘어간다. 전 세계에서 생산된 식량의 30~50%는 수확 후 세계 공급 사슬을 거치면서 버려지거나 음식물 쓰레기로 사라진다. 먹지 않는 음식의 10퍼센트 만으로도 굶주림 문제는 사라진다. 도넛 경제는 인류가 자원을 지금보다 훨씬 공평하게 분배하고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열망

경제학자 팀 잭슨 TimJackson이 아주 훌륭하게 표현했듯이,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 오래가지도 않을 인상을 심어주려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고,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쓰도록 계속 설득당하'는 상태다. 전 세계에서 중산층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열망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지구 한계에 집단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술
도시화는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동시에 주거, 교통, 식수, 위생, 식량, 에너지 등을 훨씬 효과적인 방법으로 충족시킬 기회를 주기도 한다. ... 인프라를 만들 때 어떤 기술을 사용하느냐는 사회적, 생태적으로 실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도로를 점유하는 자가용 대신 빠르고 싼 대중교통으로 새로운 교통 시스템을 만들 수 없을까? 현대 도시의 에너지 시스템을 화석 연료 대신 지붕에 태양광 발전 네트워크를 설치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없을까? 냉방과 난방 에너지 대부분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건물을 설계할 수는 없을까? 토지의 탄소 효율성을 높이고 더 좋은 일자리를 마련하는 방법으로 도시인을 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을까? 이런 것들은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문제들이다.
거버넌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여러 도전에 대응하기 적합한 거버넌스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이는 아주 근본적인 정치 문제다. ... 세계 차원의 거버넌스 구조가 필요하다.

2. 큰 그림을 보라: 자기 완결적인 시장에서 사회와 자연에 묻어든 경제로

여러 위기가 중첩되면서 새로운 경제학 드라마의 대본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쓸 귀한 기회가 찾아왔다. 옛날 경제 순환 모델의 주인공들을 대시 한 번 찾아보는 것을 시작점으로 하자.

무대를 만들다

1948년, 새뮤얼슨이 쓴 "경제학" 교과서에는 그가 기여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대성공한 것이 경제 순환 모델 다이어그램이었다. 이 그림은 이후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최고로 잘 가르치는 장치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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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경제 분석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행위자와 무시해도 좋은 행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을까? 중심 무대는 가계와 기업 사이의 시장이다. 가계는 노동과 자본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임금과 이윤을 얻는다.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재화와 서비스를 사들이는데 소득을 지출한다. 이렇게 생산과 소비가 상호 의존 관계를 맞으면서 소득이 순환한다. 그런데 이 흐름을 교란시키는 외적 고리 세 개 - 은행, 정부, 무역 - 때문에 소득의 흐름은 여러 다른 용도로 바뀐다. 이 모델에서는 은행이 소득을 저축으로 빨아들여 투자로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렸다. 정부는 세입으로 소득을 뽑아가지만 공공 지출로 다시 주입한다고 되어 있다. 해외 무역상은 그 나라가 수입한 물품의 대금을 지불받아야 하지만 또한 그 돈을 그 나라가 수출한 물품 대금으로 다시 지불한다. 시장에서 소득의 순환 흐름은 이 세 가지 요소의 방향 전환에 따라 누출되었다가 다시 투입되는데, 전체로 보자면 이 시스템은 닫혀 있는, 완결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뮤얼슨이 직접 말했듯이 배관을 따라 계속 물이 순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새뮤얼슨이 이 그림을 고안한 의도는 경제가 나선형으로 하강하면서 침체로 떨어지는 과정에 대한 케인스의 통찰력을 보여주려던 것이었다. 만약 가계가 경기 침체가 다가올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출을 줄이면 기업도 노동자 고용을 줄일 것이도, 노동자가 해고를 당하면 가계 소득도 줄 것이니 가계의 수요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 결과 애초에 가계가 두려워한 그 경기 침체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케인스는 이런 사태를 막을 최선책이 바로 정부 지출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이 호전되어 사람들이 자신감과 믿음을 회복할 때까지 정부가 계속 지출을 늘려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그림에 그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시스템 이론 사상가인 존 스터먼 JohnSterman에 따르면 '한 모델의 가장 중요한 가정들은 그 모델을 이루는 방정식 안에 있지 않고 방정식 밖에, 기록된 문서가 아니라 기록되자 않은 곳에, 또 컴퓨터 화면의 여러 변수에 있지 않고 그 변수들을 에워싼 빈 공간에 있다.' 경제 순환 모델을 소개할 때는 이런 단서를 분명히 달아야 한다. 이 모델은 경제 활동이 의존하는 에너지와 자원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그런 활동이 일어나는 사회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연극의 등장인물에서 빠진 것이다.

연극 대본을 쓰다

새뮤얼슨이 경제 순환 모델 다이어그램을 공표하기 한 해 전인 1947년, 하이에크, 프리드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랭크 나이트 등 이 경제학 드라마의 극작가가 되지 못해 안달이던 소규모 자유방임주의자 집단이 스위스 휴양지인 몽펠르랭에 모여 각본을 짜기 시작했다. 이들의 꿈은 자기들이 짠 드라마가 언젠가 경제학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시장을 지지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파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저작에서 영감을 얻어 자기들이 '신자유주의적neoliberal'이라고 지칭한 의제들을 확고히 다졌다. 소련 공산주의가 확장되면서 전 세계에 확산되는 국가전체주의의 위협에 강력하게 반격을 가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점차 시장근본주의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으로 변형되었고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함께 달라졌다. 게다가 새뮤얼슨의 다이어그램은 경제라는 드라마에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단역인지를 서술하고 있었으니,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그들의 드라마를 펼칠 완벽한 무대와 등장인물을 제시하고 있었다.

경제학: (우리를 파멸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간) 20세기의 신자유주의 이야기

시장
효율적이므로 완전히 자유롭게 작동하게 할 것
기업
혁신적이니 주도권을 줄 것
금융
오류를 범하는 법이 없으니 무조건 신뢰할 것
무역
당사자 전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니 모두 국경선을 개방할 것
국가
무능한 존재이니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는 등장인물도 있다.

가계
집안 문제이니 여성들에게 맡겨둘 것
커먼스
비극으로 끝날 것이니 빨리 팔아버릴 것
사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무시할 것
지구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것이니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갈 것
권력
경제와 무관하니 언급하지 말 것

새로운 세기, 새로운 공연

우리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나는 그림으로 대답하겠다. 이는 다양한 경제사상 학파로부터 얻는 주요 혜안을 그림 하나로 종합한 것으로, 내가 '묻어둔 경제The Embedded Economy'라고 명명한 다이어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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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첫 번째로 우리의 생명 세계인 지구는 태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지구에는 인간 사회가 있으며, 그 안에 경제 활동이 있고, 그 안에는 다시 가계, 시장, 커먼스, 국가 등이 있어서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들을 돌아가게 만드는 금융의 흐름이 있다.

경제학: (균형을 유지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21세기 이야기

지구
생명의 근원이니 그 한계와 경계선을 존중할 것
사회
생활의 기초이니 그 안에서 여러 관계가 풍성히 자라게 할 것
경제
다양한 시스템을 내포하고 있으니 그 모두를 지원할 것
가계
핵심이니 이들의 기여에 가치를 부여할 것
시장
강력한 것이니 사회와 자연에 지혜롭게 어우러지게 할 것
커먼스
창조적인 것이니 그 잠재력을 한껏 풀어둘 것
국가
필수적인 것이니 명확히 책임지게 할 것
금융
하인 역할을 하니 사회에 복무하게 할 것
기업
혁신적인 존재이니 목적을 부여할 것
무역
양날의 칼이니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할 것
권력
어디에나 속속들이 침투하니 남용되지 않게 할 것

21세기 경제학 드라마의 막을 올리자

경제 순환 모델 다이어그램만 '묻어든 경제' 다이어그램으로 바꾸었을 뿐인데 경제 분석의 출발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시장의 신화는 끝이 났으며, 그 대신 가정 경제, 시장, 커먼스, 국가라는 네 가지 영역을 통한 조달 개념이 들어왔다. 네 영역은 모두 사회 안에 담겨 있고 또 사회에 의존한다. 그리고 사회는 다시 생명 세계에 담겨 있다. 이 새로운 그림으로 우리는 단순히 소득의 흐름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안녕의 근간이 되는 여러 부의 원천 - 자연, 사회, 인간, 물질, 금융 - 을 이해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인간 본성을 피어나게 하라: 합리적 경제인에서 사회 적응형 인간으로

이 장에서는 우리의 경제적 자아인 '합리적 경제인'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추적하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밝혀내려 한다. 또 이제 드러나는 새로운 인간의 초상화를 전망하면서 인간 본질 묘사에 나타나는 변화 다섯 가지를 알아보려 한다.

우리의 자화상

합리적 경제인은 주류 경제학 이론의 핵심에 자리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인간이 나타났는지는 교과서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이 초상화는 개념과 방정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그리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혼자 살아가고, 손에 쥔 건 돈 뿐이며, 머릿속은 온통 계산뿐인 데다, 마음속에는 오로지 자기밖에 없는 존재.

이 악명 높은 인물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을까? 가장 자세한 초기 그림은 애덤 스미스의 두 주요 저작에 등장한다. 하나는 1759년 출간한 '도덕감정론'이고, 다른 하나는 1776년에 출간한 '국부론'이다. 오늘날 스미스는 '교역, 물물 교환, 교환'하는 성향이 있으며 따라서 시장을 작동하게 만다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이기심이 다른 어떤 미덕보다 개인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여러 특징 중에서 가장 경탄할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최고 자리는 우리의 '인간성, 정의, 아량, 공덕심 등 다른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성질들'이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정치경제학에서는 예측 가능한 주인공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정치경제학은 과학이 되지 못한 채 그저 기술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런 좌절감 따문에 존 스튜어트 밀은 다빈치의 뒤를 따라 스미스의 인간 묘사를 깎아내 경제적 인간이라는 캐리커처를 만들었다. 정치경제학은 '인간의 본성 전부를 다루는 것이 아니며 ... 사회 안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행위 전체를 다루지도 않는다.' '정치경제학은 오로지 부를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만 관심을 둔다.' 밀은 부에 대한 욕망에다 과장된 특징 두 가지를 추가했다. 근본적인 노동 혐오와 사치에 대한 애호였다. 밀 또한 이렇게 해서 나온 인간 묘사가 '전혀 근거 없는 추측들'에 기초한 '자의적인 인간 규정'이며, 따라서 정치경제학이 내리는 여러 결론이라는 것도 '오로지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 진리'가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 캐리커처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었다. '그 어떤 정치경제학자도 실존하는 인류를 이런 존재로 생각할 만큼 정신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는 그저 과학적 작업에서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취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이렇게 경제적 인간이라는 캐리커처를 만들어내고자 한 밀의 노력을 열정적으로 심화시킨 이가 제번스였다.

제번스는 이렇게 효용 개념을 경제학 이론의 중심에 놓았고, 그 자리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1920년대에 오면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가 경제적 인간에게 신과 같은 특징을 두 가지 부여한다. 바로 완벽한 지식과 완벽한 예견 능력이다. 이 능력으로 경제적 인간은 시대를 넘나들면서 모든 재화와 가격을 비교할 수 있다. 이전 초상화와 비교하면 결정적인 비약이었다. 이전 경제적 인간은 특징을 심하게 과장했을 뿐 여전히 현실 속 인간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트는 자기의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초인간적인 권능을 부여해 새로운 존재로 꾸며냈다.

인생은 예술의 모방이다

177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두 세기 동안 경제적 인간은 그저 특색이 강조된 정도의 초상화로 묘사되기 시작해 갈수록 변모하더니 결국 조잡한 만화가 되었다. 시작은 인간을 그려낸 모델이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된 것이다.

시카고 옵션 거래소. 여기서는 시장이 시장 이론을 따라 한다.

21세기의 초상화

업데이트된 인류 초상화의 밑그림 작업이 진행 중이며, 우리의 경제적 자아를 제대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혁신적인 발견 다섯 가지가 있었다.

  1. 우리는 협량하게 자기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이며 호혜성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2. 우리는 선호하는 것이 고정되지 않고,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는 모두 유동적이다.
  3.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 의존해 살아간다.
  4. 우리는 악착같이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충 근사치를 구하면 만족하는 존재다.
  5. 우리는 자연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생명의 망 속에 포함된 존재다.

이기적인 인간에서 호혜적인 인간으로

우리는 자기 이익을 살피는 동시에 남의 이익도 살피는 존재다. 낯선 사람이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돕고, 문을 열고 나갈 때는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기도 하며, 술과 음식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 먹고 싶어 하고, 전혀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선 기관에 돈을 내거나 헌혈을 하고 심지어 신체 일부를 내놓기까지 한다.

요컨대 우리에겐 타산적으로 거래하려는 성향만 있는게 아니다. ...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 아주 명확하게 메시지를 보낸다.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그리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고 잘 지내는 법을 배운다. ... 경제학자 샘 볼스 SamBowles와 허브 긴티스 HerbGintis에 따르면, 서구라는 '이상한' 지역 사람들은 이른바 '강력한 상호성'이라는 전형성을 보인다고 한다. 즉 우리는 조건부 협동가(남들이 협동하는 한 나도 협동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이타적 처벌자(배신자나 무임승차자는 개인적으로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처벌하려든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특징이 결합해 사회적인 대규모 협동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몰에 드나드는 이들은 다른 데서는 익명성 뒤로 숨으려 하면서 유독 제품의 별표 평가와 댓글 평가만큼은 활발하게 한다. 이베이에서 엣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터넷 쇼핑몰은 참여자 하나하나의 거래 기록을 추적해 그들의 평판을 만들어내고 누가 믿을 만한 거래자인지 밝혀낸다. 그리하여 비록 무임승차자가 있다 해도 이 조건부 협동자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풍부하게 경제 행위를 펼쳐나간다.

우리에게 협동하려는 성향과 배신자를 처벌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증명한 가장 유명한 예가 최후통첩 게임 Ultimatum Game이다. ... 만약 주류 경제학 이론이 가정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 이익에만 근거해 행동한다면, 제안하는 이가 어떤 비율을 내놓든 응답하는 사람은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를 거절했다가는 공짜 돈이 생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응답하는 사람들은 비율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제안을 거부한다. 돈을 전혀 얻지 못한다는걸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이가 이기적으로 굴면 이를 벌하려는 성향이 있다. 설령 비용이 든다 해도 그렇게 한다.

가장 흥미로운 건 각 사회마다 게임 방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다. '이상한' 사회의 전형인 미국과 캐나다 대학생을 보면 제안하는 이는 보통 상대방에게 45%를 주겠다고 하는 경향이 있고, 20% 이하를 주겠다고 하면 받는 사람은 거절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하지만 페루 아마존 지역에 사는 마치겡가Machiguenga 부족은 25%를 제안하는 경향이 있고 받는 사람은 그 몫이 적더라도 거의 늘 받아들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라멜라라 마을 사람들은 거의 항상 60%를 제안하는데 받는 사람이 거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렇게 문화마다 상호성의 규범이 크게 다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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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넛 경제학 (last edited 2023-09-04 14:10:09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