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교육청 전자도서관 소장.

누가 경제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가

21세기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7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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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목표를 바꿔라
70년 이상 경제학자들은 GDP, 또는 국민 생산을 진보의 척도로 여겼고 이 개념이 고착되었다. 이는 소득과 부의 극단적인 불평등, 그리고 이에 따른 전례 없는 생명 파괴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21세기에는 더 큰 목표가 필요하다.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지구의 한계 안에서 모든 개개인의 인간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목표 말이다. 도넛 개념 안에 이런 목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할 일은 이 도넛의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으로 데려올 지역 경제와 세계 겅제를 창출하는 일이다. GDP의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이제 어떻게 균형을 이루며 번영할지를 찾아야 할 때다.
둘째, 큰 그림을 보라

주류 경제학은 경제 전체를 그저 '경제 순환 모델'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 그림의 여러 한계로 시장의 효율성, 국가의 무능함, 가정 경제의 의미에 대한 무시, 커먼스commons의 비극 등을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의 서사가 강화되었다. 이제 경제의 그림을 새로 그릴 때다. 사회 안, 또 자연 안에 포함되어 태양을 동력으로 돌아가는 경제 그림을. 새로운 그림은 새로운 서사를 불러온다. 시장의 힘, 동반자로서의 국가, 가계의 핵심적인 역할, 또 커멈스의 창의성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셋째, 인간 본성을 피어나게 하라
20세기 경제학의 핵심에는 합리적 경제인의 초상화가 들어앉아 있다. 이 초상화는 우리가 자기 이익에 몰두하고, 고립되어 있으며, 계산적이고, 취향도 고정된 데다, 지배자로서 자연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주입시켰다. 결국 우리는 이 초상화를 그대로 빼닮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 본성은 이보다 훨씬 풍부하다. 새로운 초상화의 밑그림에서 우리는 사회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며, 정확하게 계산하기보다는 근삿값에 근거해 행동하고, 신봉하는 가치도 유동적이고, 우리가 속한 생명 세계에 의존하는 존재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도넛의 안전하고도 정의로운 공간으로 들어갈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인간 본성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 시스템의 지혜를 배워라
수요 곡선과 공급 곡선이 교차하는 그림이야말로 모든 경제학과 학생들이 제일 처음에 배우는 다이어그램이지만, 이는 기계적 균형이라는 19세기의 잘못된 메타포에 뿌리를 둔 것이다. 경제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더 지혜로운 출발점은 단순한 되먹임 회로 한 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역동성을 경제학의 중심에 놓으면 금융 시장 과열과 붕괴부터 스스로 강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본질, 그리고 기후 변화의 티핑 포인트까지 전방위적으로 새로운 혜안이 열린다. 이제 경제를 무슨 단추나 레버 몇 개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기계로 보고 그 단추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짓은 그만둘 때다. 대신 경제를 영속적으로 진화하는 일종의 복잡계로 보아 돌보고 관리해야 한다.
다섯째, 분배를 설계하라

20세기 경제학에는 쿠즈네츠 곡선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 곡선이 불평등 문제에 강력한 메세지를 던졌다. 불평등 문제가 개선되려면 그 전에 먼저 더 악화되는 국면을 거쳐야 하지만, 경제 성장을 거친 뒤에는 결국 다 개선될 거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불평등은 경제 논리에서 필연적인 게 아니라 설계 오류로 인한 길과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1세기 경제학자들은 경제에서 생겨나는 가치가 더 잘 분배되도록 설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이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플로우들의 네트워크network of flows'다. 소득 재분배에 그치지 않고 부를 재분배하는 여러 방법, 특히 토지, 기업, 기술, 지식, 화폐 창출 권력 등을 통제하는 데 깃들어 있는 부와 재산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여섯째, 재생하라
지금까지 오랫동안 경제학은 '깨끗한' 자연환경을 사치재로, 오로지 잘 사는 이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해왔다. 이런 관점을 강화시킨 것은 환경 쿠즈네츠 곡선이다. 오염 문제가 개선되기 전에 반드시 더 악화되는 국면을 거쳐야 하지만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 종국에는 다 깨끗해진다는 소리를 다시 한 번 속삭인다. 하지만 이런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 악화는 퇴행적인 산업 설계의 결과물일 뿐이다. 21세기에 필요한 경제학적 사고는 선형이 아니라 순환형 경제를 창출하게 해주는 사고, 나아가 인간이 지구의 생명 순환 과정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회복시켜줄 재생적인 설계를 풍부하게 내놓는 사고다.
일곱째, 성장에 대한 맹신을 버려라
경제학 이론에는 너무나 위험해 실제로는 한 번도 그려진 적 없는 다이어그램이 하나 있다. GDP 성장의 장기 경로 그림이다. 주류 경제학은 경제 성장을 지상 명령으로 보지만 자연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다. 저성장 고소득 사회에서 경제 성장에 대한 맹신에 저항하고 나선다면 어려운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이다. 더 이상 경제의 목표를 GDP 성장에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건 어렵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겅제 성장 중독에 빠진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은 훨씬 힘들 것이다. 오늘날 경제는 정작 우리 삶이 풍요롭게 피어나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성장만 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가 성장하든 말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경제다. 관점을 이렇게 근본적으로 뒤집으면 우리는 금융,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성장에 중독된 지금의 경제를 성장 맹신으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21세기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일곱 가지 방법에서 구체적인 정책 처방이나 제도적 해법 따위가 바로 나오지는 않는다. 무엇을 할지 즉답을 약속하지도 않고, 총체적이고 궁금적인 해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이 21세기가 요구하는 경제학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마련하는 초석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이 원리들은 새로운 경제사상가에게 모두의 삶이 피어나는 경제를 만드는 도구가 되어줄 것이며,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은 경제학자로서의 본성 역시 같은 방향으로 일깨워줄 것이다. 장래에 닥쳐올 변화의 속도와 규모, 불확실성을 생각해본다면 미래 사회에 적합한 정책과 제도 모두를 현 시점에서 미리 처방하려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다. 미래 사회의 맥락 또한 끊임없이 변할 것이므로, 미래 사회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실험하는 작업은 새로운 세대의 사상가들과 행동가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제대로 해내야만 하는 일은 지금 출현하는 사유 중 최상의 것들을 조합해 새로운 경제학의 사고방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결코 끝나는 법 없이 계속 진보해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다음 세대의 경제학을 생각하는 이들의 임무는 이 일곱 가지 사고방식을 실천 속에서 결합시켜나가는 것, 그리고 일곱 가지 외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대 많이 찾아내 추가하는 것이다.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21세기의 모험은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자, 배가 떠나려 한다. 서둘러 승선하시라.

1. 목표를 바꿔라. GDP에서 도넛으로

경제학 본연의 목표를 잃으면 엉뚱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20세기에 들어 경제학은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려는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그러자 목표를 잃은 경제학의 둥지를 GDP 성장이라는 뻐꾸기가 몽땅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경제학은 어쩌다 목표를 잃었는가

경제학이라는 말을 처음 발명한 이는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폰이었다. 그가 말하려 한 것은 가정 관리 기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를 따라 경제학과 재물 습득술chrematistics을 구별했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의미 없어 보인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학은 물론 재물 획득술도 일종의 기술로 보았으며, 그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2000년이 흘러 뉴턴이 운동 법칙을 발견한 뒤에는 모든 학문이 과학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유혹을 너무나 크게 느끼게 된다.

스코틀랜드 법률가 제임스 스튜어트가 '정치경제학' 개념을 처음 제안하면서 이를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자유로운 나라에서 국새 정착을 수립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애덤 스미스가 나타나 자기만의 정의를 선보였다. 스미스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은 뚜렷이 구별되는 목표 두 개를 갖고 있다.

  1. 첫째는 사람들에게 풍족한 수입 혹은 생계수단을 공급하는 것으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그런 수입 혹은 생계수단을 스스로 조달하게 해주는 것이다.
  2. 둘째는 국가나 전체 공동체 차원에서 각종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충분한 재원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의 정의는 경제적 사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밝혔으므로 이를 명심했다면 경제도, 경제학도 절대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스미스의 접근법은 얼마 가지 못했다.

70년이 지나, 이번에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경제학을 정의하면서 초점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인류가 부를 생산하기 위해 힘을 합쳐 작업하는 데서 생겨나는 사회 현상들의 여러 법칙을 추적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통해 밀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후에 많은 이가 이를 이어받아 더 나아가게 된다. 새로운 흐름이란 경제가 달성해야 할 여러 목적을 뚜렷이 하는 대신 경제에서 나타나는 여러 법칙을 발견하는 쪽으로 관점을 전환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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