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갈 길을 잃은 아포리아 시대에는 진정한 리더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지도자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텍스트가 있는데, "군주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군주의 거울은 시대마다 조금씩 바뀌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아래와 같은 네 권이다.

서문. 숙였던 고개를 들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고, 젊은이들 사이에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부재不在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리더십의 부재야말로 우리 시대의 질곡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틀입니다. 리더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부에는 그리스 고전이 기록된 그리스 아포리아 시대의 실감나는 현실이, 제2부에는 아포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가 성찰해야 할 가치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1부. 아포리아 시대의 기록 -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국가', '키루스의 교육'

1.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군주의 거울

비극은 왜 반복되는가?

아포리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Lack of Resources’, 즉 ‘길 없음Impasse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No Exit의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위기Crisis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위기 상황에서는 그래도 어떤 조치를 취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다. 아포리아 상태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한 채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

그리스에서 생겨난 이 말의 원래 뜻은 ‘막다른 곳에 다다름’이다. 그리스는 약 12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200개가 넘는 섬에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래서 도서島嶼 간 이동을 위한 항해술의 수준이 높았는데, 바람을 이용해 돛으로 파도를 타고 넘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만큼 해상 사고의 위험도 잦아졌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섬과 섬 사이를 항해하다가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즉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에 직면했을 때를 아포리아라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포리아 상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길 없음의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대형 참사와 총제적 리더십 부재를 경험하면서 아포리아 시대를 직감하고 있다. 어쩌면 ‘위대한 리더십’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아예 ‘리더’라는 단어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지금껏 우리는 리더란 조직이나 단체의 구성원을 이끌며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 또는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며 공동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근대적인 대형 참사들, 그에 따른 비합리적이며 무능한 처리 방식을 목격하면서 이제 그와 같은 이상적인 리더와 리더십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아포리아 시대의 필독서, 군주의 거울

이런 아포리아 시대에 우리가 함께 펼쳐보아야 할 책이 있다. 절망의 시대에 읽어야 할 인문학 장르의 도서들이다. 조직행동론Organizational Behavior에 기초한 기존의 경영학적 리더십 교재는 잠시 덮어두고, 참된 리더를 위한 인문학의 고전을 펼쳐보자는 것이다.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읽어야 할 인문학 고전을 ‘군주의 거울Mirror for Princes’이라 한다.

군주의 거울은 기원후 8세기, 유럽이 본격적으로 중세로 접어들던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문학의 리더십 교과 과정이다. 기원후 800년, 샤를마뉴Charlemagne(740~814)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로 취임한 뒤부터 단일 국가의 개념과 이를 떠받드는 봉건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국가 및 지역 간의 극심한 경쟁이 촉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중세의 봉건 제후들은 자신의 봉토를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인근 제후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탁월한 리더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싹트기 마련이다. 세상이 혼탁하면 할수록 대중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나라의 미래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 탁월한 리더를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기원후 8세기부터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탁월한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한 인문학 교과 과정이 개발됐다.

군주의 거울이 등장하기까지

로마의 건국자인 아이네아스는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군주의 거울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장차 알바롱가Alba Longa의 왕이 될 아들에게 닮고 배워야 할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모델이 바로 아버지인 자신과 트로이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외숙부 헥토르임을 밝힌다. 반인반신半人半神의 괴력을 지닌 아킬레우스의 창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던 헥토르의 용기를 기억하고, 허벅지에 박힌 화살촉을 뽑으며 적진으로 뛰어들던 아버지의 용기를 모범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왕자에게는 탁월한 리더의 모델이 필요한 법이고, 아스카니우스의 군주의 거울은 바로 아이네아스와 헥토르였다.

아이네아스가 그다음에 취한 행동은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손으로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거인처럼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4 ‘거인처럼’ 달려 나가는 모습을 통해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군주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장차 리더로서 살아가게 될 자신의 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군주의 거울이 됐다. 이렇게 멋진 아버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자신은 난장이처럼 살면서 자녀들에게는 거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는가. 아버지가 먼저 거인처럼 살아간다면 자식은 당연히 그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군주의 거울인 아버지를 통해 자신도 거인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이끄는 리더들에게 그리스 고전을 읽고 사숙할 것을 강조한 그(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지위에 오른 사람, 즉 리더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거 선인들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이 문장에서 처음으로 ‘거울’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후대 사람들이 군주의 거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성찰의 씨앗이 뿌려졌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제국의 리더들에게 플라톤Platon(B.C. 427~347),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B.C. 410~362), 리쿠르고스Lycourgos, 아게실라오스Agesilaus(B.C. 444~360)라는 탁월한 군주의 거울을 제시한다.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개선하고 언행을 삼가며 욕망을 자제하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철학자로, 에파미논다스는 테바이의 유능한 정치가로, 리쿠르고스는 전설적인 스파르타의 입법자로, 그리고 아게실라오스는 그리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왕으로 칭송받은 인물이다.

왜 하필 그리스일까?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노출된다. 그리스의 아포리아, 즉 길 없음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초, 즉 499~449년에 촉발된 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가 직면한 첫 번째 아포리아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자 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성 밖에 거주하는 노예를 모두 포함해도 최대 인구 30만 명 정도가 전부인 아테네 사람들에게 500만 명 이상의 강력한 군대가 공격을 감행한 사건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아포리아를 야기했다.

그리스에 밀어닥친 두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431~404년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그리스에 기원전 5세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테네의 황금기The Athenian Golden Age’인 동시에 참혹한 전쟁이 두 번이나 발발했던 죽음과 폭력의 시기였다. 그리스인들에게 펠로폰네소스 내전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함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읊던 동족끼리, 같은 헬라어를 쓰는 피붙이끼리, 올림픽이 열리면 함께 뛰고 달리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친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이 연속된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군주의 거울이 될 고전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고난 속에서 되새기는 고뇌의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길 없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현자들의 뼈를 깎는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두 번의 전쟁이 스쳐간 후에도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세기, 즉 두 번의 전쟁으로 얼룩진 기원전 5세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첫해에 그리스에 세 번째 아포리아가 찾아왔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399)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는 과거 두 번의 전쟁처럼 외부 요인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이 무엇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과 애제자인 크세노폰은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의 죽음 앞에서 분연히 펜을 들고 그리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왜 기원전 5~4세기 그리스에서 아포리아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위대한 통찰의 글을 남기고자 했다. 그들이 쓴 책이 바로 『국가』와 『키루스의 교육』이다. 장차 군주의 거울이 될 불세출의 명저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처한 아포리아는 너무도 치명적이고 심각하므로 이 시대의 인문학은 군주의 거울인 그리스의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난의 손가락을 타인에게 겨누지 말고 먼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성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어서 빨리 이 길 없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 충격과 절망의 아포리아가 있었기에 그 땅에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이 시련과 절망의 땅에서도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워야 하지 않겠는가.

2.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니아, 페르시아 전쟁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서부터 마라톤 전투(B.C. 490), 테르모필레 전투(B.C. 480), 살라미스 해전(B.C. 480)의 전개 과정을 설명한 뒤 결국 그리스에 패한 페르시아 군대가 본국으로 철수한 이야기를 끝으로 최초의 탐사 보고서를 마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크로이소스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힌다.4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이 방대한 책의 간단명료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추구했던 행복과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추구했던 행복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나라 리디아의 왕이나 큰 나라 페르시아의 왕은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자의 나라, 행복한 왕의 나라에 찾아온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이야기로 『역사』의 첫 장면을 풀어나간다. 이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엉뚱한 출발처럼 보일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아테네의 현자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전격 방문했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현자가 자신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자 크로이소스 왕은 내심 자신의 권력과 부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크로이소스는 국빈國賓인 솔론에게 자신의 넘쳐나는 보물창고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질문했다.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그대의 지혜에 관한 소문은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우리는 또 그대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세상을 구경하고자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는 말도 들었소. 그래서 나는 그대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진심을 묻고 싶소이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크로이소스 왕이시여, 단언컨대 이런 엄청난 황금과 권력을 가지신 폐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러나 솔론의 대답은 왕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는 크로이소스 왕에게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아테네 사람 텔로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지명하지 않은 솔론에게 화가 났지만, 짐짓 왕의 체면을 유지하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재차 물었다.

솔론의 두 번째 대답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솔론은, 자기 어머니를 헤라 여신의 축제장에 모시고 가기 위해 직접 멍에를 메고 먼 길을 달려 간 클레오비스Cleops와 비톤Biton 형제가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끝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나를 그런 평범한 자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다니 그대는 내 행복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요?”라고 소리치며 솔론을 질책했다. 솔론은 분노하는 크로이소스 왕 앞에서 참된 행복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크로이소스 전하,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 보아하니, 전하께서는 거부巨富에다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전하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사옵니다. 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중략) 그가 훌륭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전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 곧 행복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옵니다.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세월이 흘러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의 굴욕을 당하고, 결국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끔찍한 죽음을 기다리던 크로이소스는 문득 솔론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라고 말했던 솔론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려 14년 동안이나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엄청난 황금으로 자신의 보물창고를 채울 때는 그것이 세상 최고의 행복이라 믿었던 크로이소스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잠시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크로이소스는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솔론!”이라는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오, 솔론, 솔론, 솔론!”

키루스는 한 인간의 깊은 회환을 보면서 인생의 부질없음과 덧없음을 깨닫고 크로이소스의 화형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크로이소스와 같이 우매한 리더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권력에 도취되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의 노력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기준이거늘, 얼마나 많은 거짓 리더들이 권력과 부의 축적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또한 그들의 왜곡된 행복 추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가? 지금 헤로도토스는 한 어리석은 군주의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런 허황된 행복의 추구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인공 크로이소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등장하는 군주의 거울인 셈이다. 그는 우리가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의 첫 번째 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크로이소스 왕의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틴토레토의 그림을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카누스의 둥근 거울 때문이다. 틴토레토의 작품은 우리에게 불카누스의 둥근 거울을 보라고 요구한다. 그 거울 속에는 죽자고 일만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성공한 인물 대신 아내와 가정을 소홀히 한 남편 불카누스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일 뿐이다. 틴토레토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 기초 도안을 위한 스케치를 남겼다. 여기서도 의도적으로 거울의 이미지를 강조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불카누스의 가정에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카누스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과 아내를 돌보지 않은 불카누스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였다. 그 역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다를 바 없는 실수를 범했다. 불카누스처럼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크로이소스처럼 많은 황금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행복의 지표가 될 수는 없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지독한 반어법을 구사하며 우리에게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한다. 『역사』의 두 번째 주인공인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 바로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헤로도토스는 나름대로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시종일관 편견 없이 크세르크세스를 평가하려 애썼다. 그래서 『역사』에는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이유와 역사적 당위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쓴 이유다. 즉 『역사』의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란 뜻이고, 그의 이야기는 제7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에서 일견 현명하고 탁월한 군주의 자세를 엿보게 된다. 참모들의 찬반 의견을 모두 청취하고, 일시에 내린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를 즉각 수정할 줄 알며, 새롭게 내린 합리적인 결정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군주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그가 초기에 보여준 이런 신중한 행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훌륭한 면은 여기까지다. 그 뒤로 이어지는 크세르크세스의 판단과 행보는 본받지 말아야 할 군주의 부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크세르크세스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의 비극이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지도록 마음을 길들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 때문에 결국 크세르크세스 자신과 페르시아 백성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어이없는 짓을 일삼는 군주였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개꿈을 신의 현몽이라 착각할 만큼 우유부단했고, 아무 필요 없는 아토스 운하를 건설할 만큼 자기과시욕에 넘쳐났으며, 바닷물을 채찍으로 때릴 만큼 어리석은 군주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두 번째 군주 크세르크세스 역시 앞부분에 등장한 크로이소스 왕처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라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500만 대군을 진군시킬 만큼 그의 권력이 온 땅을 덮었으나 그의 오만과 명예욕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고, 그의 어리석은 행동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됐다.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역사』의 세 번째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의 공격으로부터 그리스와 아테네를 구한 테미스토클레스다. 그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를 헤쳐나간 아테네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언제나 돈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고 묘사한다.32 실제로 그는 우방 국가를 기만하고 뇌물을 받아 챙기기도 한 인물이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일찍이 테미스토클레스보다 더 야심 많은 사람은 없었다”고 일갈할 만큼 명예욕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증언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아테네 해군이 그리스의 구원자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이라는 전대미문의 아포리아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지략과 과감한 추진력 부분에서 후대의 군주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을 갖춘 군주의 거울이 됐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끝까지 읽어보면 이 대목에서부터 놀라운 반전이 펼쳐진다. 만약 헤로도토스가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집필을 마쳤다면 아마 그의 『역사』는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이후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했다는 놀라운 반전의 기록을 남겼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조국의 배신자가 됐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때부터 아예 노골적으로 해적질을 일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기록을 최고의 영웅이 아닌 최후의 변절자로 마무리한다. 권력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야심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정도를 넘어 결국 조국을 배신한 인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결론: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기원전 5세기 전반,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가 닥쳤을 때 헤로도토스는 대혼란의 이유와 리더십의 상관관계에 대해 천착穿鑿했다. 페르시아 전쟁과 같이 의미 없는 전쟁은 왜 발생하는가. 그 전쟁을 일으킨 군주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군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세 명의 리더인 크로이소스,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를 주인공으로 제시했다.

참혹했던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탐사 보고서를 작성하던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그 사회는 아포리아에 처하게 된다.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진 왕과 명예욕에 불타올라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군주,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군이 나라를 이끌면 그 나라는 쇄락을 면치 못하게 되고 온 국민이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부적절한 리더 때문에 아포리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함량 미달인 자는 함부로 리더의 위치에 오르지 말라!’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위대한 페르시아의 건국자인 키루스 대왕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키루스 대왕이 마침내 페르시아제국을 기원전 550년에 건국하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벌해나가자 한 신하가 대왕 앞에 엎드려 제국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간언을 올린다. 제우스 신이 키루스에게 거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선물로 주었으니, “지금 차지하고 있는 이 울퉁불퉁한 곳을 떠나 더 나은 곳을 차지하도록” 침략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신하의 주청을 가만히 듣고 있던 키루스 대왕은 그 제안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 제안대로 밀고 나가라”고 허락하면서, 대신 “그럴 경우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는 준엄한 경고를 내렸다.44 제국의 지리적 확장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속성상 확장의 속도를 멈출 수도 없으니 정복을 계속해보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럴 경우 “결국 지배 민족은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경고였다.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에 대한 탐사 보고서 『역사』는 다음 문장으로 끝이 난다.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남긴 『역사』의 제일 마지막 문장이다. 제국의 끝없는 확장을 위해 자신의 오만함을 숨기지 않았던 페르시아인들은 결국 자신들보다 한 세기를 먼저 살았던 키루스 대왕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오만했던 리더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는 뜻이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공통점은 바로 오만이다. 군주는 스스로 이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제국의 권력과 황금의 쾌락이 주는 오만의 유혹을 멀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군주의 거울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의 핵심이다.

3. 반복되는 역사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태풍 전의 고요함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 밀어닥친 첫 번째 아포리아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극복됐다. 페르시아의 주력부대는 크세르크세스 왕과 함께 줄행랑을 쳤고, 다른 방향으로 퇴각하던 잔류병도 모두 섬멸됐다. 아테네인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시기 아테네에는 소포클레스와 같은 뛰어난 비극 작가가 등장해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지 시작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인간이 가장 극한 상황에서 품을 수 있는 내면의 슬픔과 좌절을 개인과 공동체(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과 교차시켰다. 이 문화 융성의 시기에 발표된 다수의 비극 작품은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아테네의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리스의 비극은 단순히 감정적인 인간의 슬픔만을 이야기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부조리를 먼저 상정한다. 비극의 서사적인 원인은 개인과 공동체(국가)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그런 가치 충돌의 딜레마를 발견할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보고난 아테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포도주를 들이키며 극 중 안티고네가 선택한 결정에 대해 토론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빠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 안티고네가 혈육의 정을 지켰다고 칭찬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국가의 명령을 어긴 안티고네의 결여된 애국심을 비난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의 토론을 촉발시켰고, 결국 이런 공동체의 격조 높은 문화적 활동이 그들의 소속감과 연대감을 증대시켰다.

이 시기에는 비극뿐만 아니라 희극 작가들의 활동 또한 활발했다. 희극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금기시하는 영역에 대한 발칙한 도발을 감행할 때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게 된다. 비극이 공동체의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희극은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희극보다 비극이 더 주목을 받았고, 정치가들의 더 많은 후원을 받았다.

그리스의 두 번째 아포리아, 펠로폰네소스 전쟁

살라미스 해전 후 약 20년이 지난 뒤, 그리고 작가, 의사, 역사가 등의 등장으로 아테네의 황금기가 문화 융성의 정점으로 향하던 즈음, 그리스 전체에 영향을 미칠 두 번째 아포리아가 발생할 조짐이 보였다. 기원전 460년,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리스에 갑자기 밀어닥친 두 번째 아포리아의 조짐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출발했다. 같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문명의 정체성을 함께 향유하던 그리스의 두 맹주,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벌여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한 두 집단의 싸움과도 같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 사람들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것은, 전쟁 후에 발생한 희생자들에 대한 천륜을 저버린 처리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그리스인들은 전투가 끝나면 목숨을 잃은 적의 군사들을 그들 편에 넘겨주어 적절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예우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며 관례라고 여겼다. 그것이 상호 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부터 그런 관례가 사라졌고, 전장에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이 들짐승들에게 뜯어 먹히거나 썩어가는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지금껏 그리스 사회를 지탱해주던 절제의 미덕과 인간 가치에 대한 존중의 관념이 사라지면서 그리스에 두 번째 아포리아가 밀어닥친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서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를 넘어시대를 관통하는 인류 보편의 본성까지 파헤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고 있다.

자신이 파헤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실체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그리스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한 기록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영원히 반복될 보편적 역사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반복되는 역사의 전후좌우를 살펴보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밝힘으로써 후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역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지도를 그려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

전쟁이 시작된 경위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분명히 그리고 아주 간략하게 자신의 견해를 미리 밝힘으로써 본인의 의도는 이것과는 다른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Lakedaimon(필자 주: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 전쟁의 발발 원인은 이미 알려져 있고 자신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전쟁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내전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인간 군상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 광범위한 개별적 행동의 스펙트럼 속에서 리더가 어떻게 바로 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책이 인류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연설문들이 각각 어떤 위기적 상황의 구조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거의 모든 위기의 구조적 특징이 드러났고, 투키디데스는 이런 위기의 구조적 패턴에 대응하던 이상적인 리더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준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투키디데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위기는 동일한 패턴으로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의 해법을 하나씩 소개한다. 그래서 미래의 리더들이 그 반복되는 위기의 패턴을 분별해 그 극복 방식을 배우라는 것이다.

진정한 군주의 거울, 영웅 페리클레스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영웅이 탄생했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그리스는 페리클레스Pericles(B.C. 495~429)라는 또 다른 영웅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역사에 등장했던 가장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 ‘페리클레스의 황금기Golden Age of Pericles’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페리클레스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위기 앞에서 사람들이 적에 대한 복수를 호언장담하고 출정 전날 포도주를 들이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을 때도 차분하게 앉아 전쟁의 예상 비용을 산출하던 사람이다. 사실 전쟁은 돈 싸움이다. 얼마나 많은 전쟁 자금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라지곤 한다. 전쟁을 위한 비상 국가 예산이 넉넉해야만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다.

페리클레스는 앞으로 전쟁이 지속될 기간을 예상하고 그 전쟁에 소요될 예산의 총액을 계산해본 결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페리클레스는 이런 계산을 마친 뒤 승리를 확신하며 아테네인들에게 전쟁에 임할 것을 요청했다. 집단적 위기에 처한 아테네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연설을 준비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위대한 조상들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전쟁을 위한 충분한 국가 비상 예산을 확보하고 있는 아테네에 승산이 있음을 주지시켰다.

자식을 잃고 길 없음의 아포리아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 앞에 서서 이런 연설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테네인들은 패전의 슬픔에 빠져 있었고, 졸지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전쟁을 독려했던 페리클레스 앞에서 원망을 쏟아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아포리아 상태에 리더가 취해야 할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테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는 시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그가 연설을 할 때마다 아테네 남자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용기를 얻었고, 아테네 여성들은 손바닥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의 연설에는 “용기를 북돋워주고, 노여운 마음을 달래 그들이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18

예상치 못한 첫 번째 전투의 패배 때문에 아테네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페리클레스는 다시 연단에 올라 격앙된 아테네 시민을 향해 연설을 이어갔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단순히 참전을 독려하려는 전쟁 담화문도 아니고,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가의 면피성 발언도 아니었다. 그의 연설에는 승전의 오만도, 패전의 좌절도 보이지 않았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위기의 순간에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군주의 덕목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패전의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희망의 길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이자 청렴결백하기까지 했기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다른 지도자들처럼 대중의 뜻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굴종시키지 않았고, 자신의 판단력을 믿고 이를 적절한 소통으로 관철시켰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면 이를 경계시켰고, 반대로 지나치게 낙담하면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는 거친 파도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대중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왼쪽에 서서 중심을 잡고, 반대로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에 서서 중심을 잡던 페리클레스야 말로 아포리아 시대에 본받아야 할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존재 때문에 일어섰고, 페리클레스의 부재 때문에 넘어졌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에 발진 티푸스로 추정되는 역병이 창궐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그 사망자 명단에는 페리클레스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전염병에 쓰러진 페리클레스의 병사病死와 더불어 아테네는 병들게 된다.

배신의 아이콘, 알키비아데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포리아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페리클레스가 전반부의 주인공이라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배신의 아이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B.C. 450~404)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가 일으켜 세웠고, 아테네의 악동 알키비아데스가 쓰러트렸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죽음으로 아테네의 몰락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몰락을 실질적으로 재촉한 인물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두 번째 주인공인 알키비아데스다. 알키비아데스가 없었다면 이른바 제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불리는 ‘시칠리아 원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시칠리아 원정이 아테네 쇠락의 결정타였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진심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나라나 조직이 흥하고 망하는 이유는 다 사람 때문”이라는 간결한 메시지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나 조직은 흥하게 되고,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그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원전 5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상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무릇 지도자란 특히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란, 페리클레스의 삶처럼 식견이 있어야 하고 그 식견을 공동체와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해야 하고, 사리사욕과 탐욕에 초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알키비아데스처럼 행동하는 지도자가 득세한다면 우리 시대는 아포리아의 먹구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누가 우리 시대의 페리클레스이고, 또 누가 우리 시대의 알키비아데스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알키비아데스가 아닌 페리클레스와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4. 철학으로 아포리아에 맞선 스승과 제자 - 플라톤의 '국가'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리스에 몰아닥친 세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399년에 발생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됐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아테네의 현자로 존경받으며 동시대 청년들을 탁월함의 세계로 인도하던 큰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테네 사람들은 한 시대의 종말을 직감했다. 그것은 한 국가가 철학에게 천인공노할 범죄를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어쩌다 아테네가 이런 암울한 시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포리아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한탄하며 철학이 살해당한 자신들의 시대를 슬퍼했다. 동족끼리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것도 모자라 지혜를 사랑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였던 한 시대의 현자를 그들 스스로 살해해버린 것이다. 그리스에 세 번째 아포리아가 발생한 이유는 외국과의 전쟁 때문도 동족끼리의 전쟁 때문도 아니었다.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악동의 등장도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구조적인 쇠락의 조짐이 이미 아테네에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테네 정신의 쇠락과 연관이 있다. 정신이 쇠퇴하면 나라도 망조가 들기 마련이다.

아테네가 중심이 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된 이후 아테네는 제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 팽창의 논리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갑자기 막대한 부가 아테네로 집결되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와 문화적 자신감에 빠져 점점 더 속물화되어갔다. 황금이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믿게 된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 안에 있던 아테나 신상이 모두 금으로 도금되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아테네의 황금기라 부르지만, 사실 아테네인들이 ‘황금에 눈이 먼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아테네의 ‘골드러시’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다. 타소스 금광에서 막대한 양의 금이 채굴되어 도시로 유입되자 사람들은 황금의 가치에 눈이 멀었다. 황금이라면 주저 없이 목숨을 거는 사람들, 돈이라면 언제라도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로 인해 아테네는 점차 배금拜金의 도시로 변해갔다.

물질적 풍요가 가치 선택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함께 목격되는 것은 ‘몸의 숭배’ 현상이다. 황금이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이른바 ‘몸짱’과 ‘얼짱’이 각광을 받는다. 황금에 눈이 먼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청년들은 아테네의 건국 왕인 테세우스Theseus를 열렬히 숭배하기 시작했다. 근육으로 단련된 테세우스의 아름다운 몸을 숭배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스파르타에 헤라클레스가 있었다면 아테네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다. 덩달아 아테네 여성들도 변해갔다. 본격적으로 짙은 화장을 하고, 경쟁하듯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리를 배회하며 자신의 미모를 뽐냈다. 이른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 뒤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황금만능주의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잘생기지도 않고, 근육질 몸매도 아닌 한 남자가 아테네에 등장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황금에 눈이 멀어 있을 때 홀로 물질에 정신을 팔지 않던 사람, 그가 바로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다. 오히려 그는 지지리도 못생긴 사람이었으며, 매일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전에서 숭배되던 위대한 신에게도 기도하지 않았다. 자연 동굴 속에서 가난한 농부와 사냥꾼들이 숭배하던 평범한 판 신에게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황금을 찾아 길을 떠날 때, 자신만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걷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임을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황금에 눈멀지 않겠다는 한 철학자의 간절한 기도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에 ‘질문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했다. 그는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필자 주: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는 유명한 말을 남겨, 서양 철학의 위대한 아버지가 됐다.6 그는 청산유수처럼 말만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내면을 성찰하는 삶이 참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왜 그는 동시대의 아테네인들과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황금만능의 시대에 왜 그는 정신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왜 그는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지혜와 진리를 위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역사가들은 오랜 추적 끝에 그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의 증언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소크라테스의 성찰과 깨달음은 기원전 431년, 메가라 봉쇄령으로 촉발된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연관이 있다. 아테네의 시민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처럼 보병으로 징집되어 3년간 포티다이아Poteidaia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일반 보병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소크라테스와 같은 막사를 쓰며 싸웠던 전우가 바로 알키비아데스다. 전투에 함께 참전해 같은 막사를 쓴다는 것은 생사고락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당시 두 사람은 이른바 ‘파이데라스티아Paiderastia’의 관계였다. 이는 덕망을 갖춘 어른이 혈기왕성한 어린 소년과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를 지도하고 교화하는 관계를 말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새로운 성찰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목격했고, 현장에서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한 인간의 덕목으로 간주하던 탁월함, 즉 ‘아레테Aretē’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알키비아데스가 목격하고 플라톤이 글로 남긴 이 증언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전환 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적 증거다. 소크라테스는 밤새도록 포티다이아 평원에 서서 그동안 그리스인들이 이상적인 덕목이라 여겼던 ‘탁월함’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순간이 철학사에서 탁월함의 개념이 전환되는 시점이다.

포티다이아 평원 이전의 탁월함은 주로 신체의 아름다움이나 적 앞에서 기죽지 않는 군사적 용맹을 뜻했다. 전투에 임한 장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탁월함의 증표였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탁월함의 추구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이제 소크라테스의 탁월함은 외모 지상주의가 아니라 절제하고 헌신하는 자세로 바뀌었고, 진정한 용기는 남에게서 승리를 빼앗고 적을 살육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무엇보다 지혜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주인공이었던 소피스트들은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했고, 이를 위해 궤변과 장광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연설이 아니라 서로 생각을 나누며 질문하는 삶을 선택했고, 이것이 바로 지혜에 이르는 숙고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캐묻게 함으로써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런 대화를 통한 진리의 접근을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왜 아테네에 아포리아가 초래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며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이렇게 외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아포리아 시대의 사명이었다. 아테네의 아포리아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기 위해 안달하면서도 정작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포리아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는 쇠파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부도덕하고 탐욕에 찌든 아테네인들에게 부끄러운줄 알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의 통렬한 비판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확하게 유효하다.

득세한 아테네의 민주파들은 조국을 배신한 알키비아데스의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체포해 감금했다. 소크라테스는 극심한 혼란기에 흔히 자행되는 이른바 ‘속죄양’ 신세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동굴 같은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했다. 아테네가 철학에 범죄를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리스의 마지막 아포리아에 맞선 제자,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최초의 철학적 순교는 아테네 청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현자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지켜본 그의 제자 플라톤이 아마 가장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는 스승의 순교 장면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 과정을 책으로 기록했다.

플라톤은 이 충격적인 아포리아의 도래 앞에 정치가가 되려던 꿈을 접고 아테네를 떠나버린다. 그는 이집트와 시칠리아 등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우고, 이상 세계에 대한 숙고와 사색을 마친 뒤 아테네로 돌아온다. 이른바 ‘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를 설립하고 스승 소크라테스가 보여주었던 지혜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스승이 살해당했던 오명의 도시 아테네를 벗어나 아테네인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 오솔길 끝에 자리한 아카데메이아Akadēmeia에 학교를 열었다.

가장 이상적인 문명사회의 모델로 자타가 칭송하던 아테네에서 현자 소크라테스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자 플라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연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나라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집단적인 아포리아 상태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문명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가져야 하고, 또 그런 이상적인 통치자를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까?’ 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상 국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담겨 있는 책이 『국가』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주저로 알려져 있는 『국가』는 관념론적인 철학책이 아니라 아포리아 시대에 직면한 한 철학자의 처절한 고뇌가 담긴 책인 동시에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을 보여주기 위한 실천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 인근 아카데메이아의 그늘진 산책길에서 플라톤이 제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던 주제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안 문제와 다르지 않다. 어쩌다가 나라꼴이 이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아포리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과 그의 저서 『국가』는 우리 시대의 군주의 거울로 삼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를 철학 책으로만 읽어왔다. 아포리아 시대에 『국가』를 읽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플라톤의 이 위대한 저서를 이데아론과 정의론 그리고 교육 철학에 대한 책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시대를 위한 군주의 거울로 읽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가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국가를 재건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나라의 수호자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상 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플라톤이 꿈꾸었던 『국가』는 궁극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한다.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이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플라톤의 해답은 직설적이다. 그는 암부로조 로렌체티의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로운 사회란 소속되어 있는 각 집단이 각각의 위치를 성실하게 지킬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통치자는 ‘지혜’를 추구하고, 수호자는 ‘용기’를 지녀야 하며, 시민들은 ‘절제’하는 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각각의 의무다. 통치자, 수호자 그리고 시민들이 각각 자신이 맡은 본분을 다하는 것이 ‘정의’이고 그것이 이상 국가의 기초라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구성원 간의 합의를 통해 이 절제의 덕목을 철저하게 지켜나간다. 특별히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런 절제의 미덕은 서구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서구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개방적인 체제를 유지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일단 지도자가 선택되면 철저하게 그 지도자의 통치에 따르는, 즉 절제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물론 이런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20세기 후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정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는 플라톤이야말로 한 사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막는 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통치자와 수호자가 참다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정의를 실현하는 이상 사회로 발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 나라는 독재의 왕국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칼 포퍼의 주장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이 통치자의 억압적인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타당한 논리를 갖추었다. 물론 이것은 히틀러의 만행을 목격한 비엔나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의 논리이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냉전 시대의 보수적 정치를 비판하기 위한 철학적 분석 논리이기도 하다.

시칠리아의 참주 디온Dion과 디오니시우스 2세Dionysius II(B.C. 395 추정~343)를 ‘철학자 왕’으로 길러 직접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이 대의를 위해 두 번씩이나 시칠리아에서 목숨을 걸었던 플라톤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플라톤을 보수적인 수구 반동 세력의 철학자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우리는 『국가』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제7권 이하를 주목해야 한다. 이상 국가의 수호자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한 플라톤의 제안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국가』의 앞부분이 정의에 대한 정치학적 접근과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면, 뒷부분은 그의 역동적인 ‘교육 철학’이 담겨 있다. 그 책의 백미는 바로 이 뒷부분에 있고 이 부분이 바로 『국가』의 군주의 거울에 해당한다.

플라톤은 자기 시대가 처해 있던 길 없음의 아포리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인들은 동굴의 암흑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집단이다. 그것도 쇠사슬에 묶인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불쌍한 죄수들이다. 그들은 앞만 바라볼 뿐 절대로 몸의 방향을 돌려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정면의 벽에 펼쳐진 환영을 참된 세상, 진짜 본질이라고 믿고 있다.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들, 반짝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와 착각이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불러온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뒤를 돌아보라고 요구한다. 횃불 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환영의 진짜 실체를 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믿고 있던 실체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사물의 본질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호소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을 꼼짝 못하도록 옥죄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버릴 용기도,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횃불을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이런 불편한 진실을 깨우쳤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동굴의 비유에서 아래와 같이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쇠사슬을 끊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간 최초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데아, 즉 본질을 본 사람이다. 그러나 동굴 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아테네인들은 그런 자유로운 영혼이 위험한 존재라고 보았고, 결국 그에게 죽음을 안겼다. 이런 무지와 착각이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초래했다.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

당시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플라톤은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실제적인 주장을 펼쳐나간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플라톤은 교육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아테네의 아포리아가 초래된 이유는 잘못된 교육 방식 때문이다.

동굴 속 어둠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들에게 교육이란 “그들 사이에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중 어느 것이 앞서가고 어느 것이 뒤따라가고 어느 것이 같이 가는지 잘 기억해두었다가 가장 잘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와 찬사와 상을 주는 관습”이었다.23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교육 방식이다. 우리가 받았던 대부분의 교육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아포리아는 이런 교육 방식 때문에 초래됐다. 일방적인 암기식 교육, 교사가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 교육, 대학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에서의 교육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교육이 아니라 죽은 교육이며, 우리에게 길 없음의 아포리아를 떠안기는 치명적인 방식이다.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플라톤은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전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닐세”라고 말했다.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은 달라져야 한다. 단순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환영의 순서를 그대로 암기시키는 기술이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몸을 돌려 사물의 본질을 보게 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다. 아포리아를 극복하고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군주의 거울을 위한 참된 교육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기계적으로 학습한 내용을 암기하고, 시험을 잘 쳐서 100점을 받고, 그 성적으로 명문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교육이란 눈앞에 펼쳐지는 환영의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은 뒤 진정한 빛을 향해 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바라보는 것, 그래서 참된 진리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의 목적이어야 한다.

플라톤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부터 플라톤이 주창했던 군주의 거울 교육이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를 위한 교육, 다시 말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해나갈 지도자를 위한 군주의 거울은 최종 방향이 달라야 한다. 아포리아를 극복할 참된 군주는 먼저 몸의 방향을 돌리는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마주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포리아 시대를 헤쳐나갈 지도자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주창한 군주의 거울이다. 아테네에 밀어닥친 세 번째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해, 아테네를 이상 국가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할 군주의 거울이다. 가장 탁월한 품성을 가진 미래의 지도자 후보들에게 용기를 내도록 독촉해야 한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의 태양을 보며 본질의 실체를 보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태양이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선善’은 윤리적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선이란 본질, 즉 이데아를 말한다. 아포리아 시대를 헤쳐나갈 군주는 현실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를 실재하는 것이라 믿지 말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으로 상징된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태양, 본질, 이데아를 충분히 본 뒤에는 반드시 다음 단계로 또 한 번의 방향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동굴 밖으로 나와 이데아를 보았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데아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아 말한다.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을 본 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즉 본질과 이데아를 본 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본질과 이데아의 세계를 발견한 그들이 취해야 할 두 번째 행동은 다시 한번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수감자들이 갇혀 있는 동굴 쪽으로 또 한번 인생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다시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료들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스스로 풀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아포리아 시대를 위한 군주의 거울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변화산의 비유와 비슷한 면이 있는듯 하다. "여기가 좋사오니...")

5.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의 거울 -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그리스 최고의 군주의 거울을 쓴 사람

플라톤과 크세노폰

크세노폰은 늘 플라톤과 비교되곤 한다. 『키루스의 교육』을 쓴 크세노폰도 소크라테스의 중요한 제자였다. 그러나 같은 스승을 모신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철학과 사상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두 사람 모두 격동의 시대를 살았지만 혼란의 시대 속에서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서양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플라톤은 아테네 근교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교하고, 제자들과 함께 심오한 토론과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시대의 격동과 혼란에 직접 자신의 몸을 던진 인물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 사이에서 그는 스스로 경계인經界人임을 자처했다. 아테네의 귀족 출신이었지만 페르시아 왕자가 고용한 용병대장으로 활약했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인생의 쓴 맛을 보았으며, 결국 조국 아테네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타지에서 비운의 인생을 살아간다. 무릇 경계선에 서 있거나 경계선 너머에 서 있는 주변인으로부터 새로운 통찰력이 나오는 법이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원정 당시 본인이 직접 경험한 눈물과 피를 찍어 글을 썼고, 올림피아에서 홀로 추방의 쓴 잔을 마시며 험난한 시대의 원인과 참된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통찰했다.

소크라테스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또 다른 제자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그리스 최고의 군주의 거울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철학과 관념의 세계에 머물렀다면, 크세노폰은 만인대와 함께 페르시아 고지를 오르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인물이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강조했다면, 크세노폰은 동굴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왜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지,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지도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남겼다.

플라톤이 사색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을 살았다면, 크세노폰은 실천적인 삶Vita activa을 살았다. 따라서 철학적인 플라톤의 『국가』와 달리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엄정하고 냉혹한 실상을 거칠게 다루는 현실적인 책이다. 그는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때로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사랑하는 부하를 읍참마속泣斬馬謖해야 하는, 군주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냉혹한 문제를 치밀하게 다룬다.

왕 중의 왕, 키루스 대왕은 왜 군주의 거울이 되었을까?

놀라운 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책에서 키루스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

위의 글은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거울에 해당하는 고대 세계의 이상적인 인물들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그는 키루스를 포함한 네 명의 군주를 소개한다. 모세Moses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종교적 인물이고, 로물루스Romulus와 테세우스는 각각 신화에 등장하는 로마와 아테네의 건국자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가장 뛰어난 군주로 열거한 네 명의 인물들 중 역사성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는 페르시아제국의 건국자 키루스 대왕뿐이다. 마키아벨리는 키루스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거울로 인정한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밝힌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이렇게 이어진다.

2부. 아포리아 시대, 리더의 공부 - '키루스의 교육'

1. 정의의 수호자가 돼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아펠레스의 중상모략>이라는 명작이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아펠레스Apelles(B.C. 4세기)는 그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 미술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나귀 귀를 가진 군주는 지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고, 손을 대기만 하면 무엇이든 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부자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꾀기 마련이다. 그의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주워먹으려는 사람들 혹은 군주나 부자를 현혹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영악한 사람들은 그 옆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당나귀 귀를 가진 군주도 ‘무지Ignorance’와 ‘의심Suspicion’을 상징하는 두 여인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 두 여인은 군주의 ‘당나귀 귀’에 대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지금 군주는 법정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며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무지와 의심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의 군주는 공정한 판결을 내릴 자신이 없는지 피곤에 지친 눈을 내리깔고 있다. 아예 공정한 재판을 포기한 모습이다. 나약한 군주 앞에서 왼손을 뻗치고 있는 남자는 ‘질투심Envy’을 상징한다. 군주는 무지와 의심에 휘둘릴 때나 질투심을 가지고 있을 때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왼손에 횃불을 든 채 죄 없는 남자 피고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는 젊은 여성은 ‘중상모략Calumny’을 상징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것은 중상모략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거짓의 세계에서는 낮이 밤이 되고, 또 어둠은 빛이 된다. 중상모략은 항상 그럴 듯하고 멋져 보여야 하므로 두 명의 여성이 중상모략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이 두 여인은 각각 ‘사기Fraud’와 ‘음모Conspiracy’를 상징한다. 중상모략을 하는 이유는 무언가 사기를 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어떤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다.

한편 ‘정직Honesty’을 상징하는 젊은 남자는 중상모략에 의해 머리카락을 휘어잡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다. 정직한 인간은 숨길 것이 없다. 그래서 알몸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직한 사람은 늘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선한 자는 독한 마음을 품고 악당에게 대항할 용기가 없기에 늘 무기력하게 당하기 일쑤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정직처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작품 속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면 왼쪽에 두 명의 여인이 더 보인다. 한 명은 완전한 나체고, 다른 여성은 검은 옷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가렸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누드의 여성은 ‘진실Truth’을 상징한다. 진실 또한 벌거벗은 ‘정직’처럼 숨길 것이 없으므로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옆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노파는 ‘후회Repentance’를 상징한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않은 광경을 지켜보던 후회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진실의 여신을 바라본다. 무언가 진실을 증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그녀는 일말의 양심으로 약간의 후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정의로운 군주는 정직한 인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상모략을 당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는 정직한 인간을 보호해주는 것이 군주의 첫 번째 임무다. 정의의 수호자, 그것이 바로 군주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그런데 지금 보티첼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주는 무지와 의심에 사로잡혀 공정한 심판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보티첼리의 작품은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이며, 군주는 어떻게 정의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키루스 대왕의 어린 시절

친정 나들이를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가기로 한 키루스의 어머니는 키루스에게 페르시아로 함께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외할아버지가 있는 메디아에 좀 더 머물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키루스는 외할아버지의 궁궐에 남아 말 타기를 좀 더 배운 뒤 페르시아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페르시아에는 좋은 말馬도 없고, 말이 힘껏 달릴 수 있는 넓은 평원도 없으니 메디아에서 좀 더 훈련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그럼, 메디아에서 정의는 어떻게 배울 것이냐?”라고 물었다. 키루스의 어머니는 왜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크세노폰이 이 질문을 『키루스의 교육』의 첫 부분에 배치한 이유는 바로 플라톤의 『국가』를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모두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셨지만, 철학적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크세노폰은 지금 플라톤의 『국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정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상 국가에서의 정의란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통해 구현된다.3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각 개인에게 주어진 덕목인 지혜와 용기 그리고 절제를 실현함으로써 정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었다. 지금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 첫 부분에서 플라톤의 사상을 반박하며 새로운 정의관을 제시한다.

키루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군주들에게 군주의 거울이 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모든 정의는 법에 근거해야 하며, 법에 근거하지 않은 판단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군주가 지켜야 할 정의의 원칙

“권리의 평등”이 참된 정의라고 가르친 어머니의 교육은 사실 플라톤이 말했던 정의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정의는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신분 계급의 덕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권력은 통치자와 수호자에 종속되고, 일반 시민들은 절제해야만 정의가 구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어머니를 통해 권리의 평등이야말로 참된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며, 참된 군주의 덕목은 “국가에서 명령하는 것을 가장 먼저 실천하고 법으로 공표된 것을 수용”하는 태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법을 지키고,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군주의 거울임을 밝힌 것이다.

보티첼리의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정직은 중상모략에게 늘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정직은 나약하고 외로운 반면, 중상모략은 사기와 음모의 도움을 받아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꾸미고 은밀한 함정을 파서 손쉽게 정직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은 경제학의 논리만이 아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인류의 역사는 악한 인간이 선한 사람보다 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한 사람은 사악한 인간에게 대적할 만큼의 용기를 가지지 못해 유약한 경우가 많고, 반면에 악한 인간은 다른 사람의 평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쁜 짓을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철면피인 경우가 많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 한 나라의 운영을 책임진 군주의 첫 번째 임무는 선한 사람을 악한 인간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중상모략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선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맛 나는 세상, 살아갈 만한 이유가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정의로운 군주는 권리의 평등이 참된 정의라고 확신하며 무지와 의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법이 엄중히 정한 바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2. 세월의 변화를 직시하라

결국 전투는 키루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고, 그 뒤를 따르던 메디아의 군인들은 키루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큰소리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메디아 사람들은 키루스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그들의 왕인 아스티아게스나 왕자인 키악사레스보다 페르시아 왕자인 어린 소년 키루스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메디아 군인들의 환호성 속에서 키루스는 갑자기 자신의 나라인 페르시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메디아 군사들이 목청을 높여 자기 이름을 연호하면 할수록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살 염려가 있었다. 사실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외손자의 인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통치권에 도전이 될 만큼 키루스가 메디아 백성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손자의 귀환을 허락했다.

키루스는 그렇게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고 메디아를 떠났다. 그는 자신이 떠나야 할 시간을 알고 있었다. 배워야 할 전쟁의 기술을 이미 다 터득했고 실전 경험까지 쌓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메디아를 통치하던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경계와 질투를 받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고, 물론 다시 메디아로 돌아와 취할 행동도 미리 염두에 두었다. 키루스는 메디아를 떠나면서 동시에 다시 돌아와서 메디아를 차지할 계획을 세워두었고, 그래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두 메디아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가 웃으면서 했던 “눈을 깜박일 필요도 없이 마음껏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장차 메디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해 페르시아제국으로 합병되는 운명을 겪게 된다.

군주는 세월의 변화를 직시해야 하며, 시간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해야 한다. 지금이 머물 때인지, 아니면 떠나야 할 순간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3. 불확실성에 의존하지 마라

키루스의 아버지 캄비세스는 처음으로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행군을 시작하는 아들에게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그 어떤 상황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위급할 경우 페르시아의 군사들을 위해서 군수품을 지원하겠다는 메디아의 왕 키악사레스의 말도 믿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무리 그가 키루스의 외삼촌이라고 해도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아무도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통제불능 상태가 초래될 수 있으므로 자립으로 군수품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참된 군주는 남의 호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늘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스스로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실패자로 몰리고, 어제까지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곤욕을 치르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기에 국제 정치 무대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힘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을 거듭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군주는 이 전쟁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절대로 행운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제어하고, 스스로 불확실성을 통제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포르투나가 초래하는 광풍과 파도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지혜의 언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수밖에 없다. 뱀과 족제비와 거북이를 경계해야 한다. 불확실성의 여신 포르투나를 제압하는 길은 이 세 가지 동물적 본능을 제거해나가는 것이다. 뱀과 같은 욕심을 버려야 하고, 족제비처럼 요령을 부려 직면한 문제를 피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또한 거북이의 게으름을 경계해야 한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서 거북이가 보여주는 게으름과 나태는 실패의 원인이 될 뿐이다.

4. 스스로 고난을 함께 나누라

지혜를 추구하는 군주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군주를 따르게 될까. 어떻게 해야 팔로워는 자발적으로 리더에게 충성하게 될까. 이른바 자발적인 충성심은 어떻게 유도해내야 할까.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이것을 군주가 훈련받아야 할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하들의 자발적인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보다 더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아버지는 미래의 군주가 될 아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지적한다. 군주가 ‘지식이 많다’는 것으로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저해하는 요소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지식의 과잉일 때가 많다. 많은 지도자들이 쉽게 “내가 그것을 이미 해봤기 때문에 잘 아는데······”라는 말을 내뱉는데, 이는 자신의 지식 정도를 과시하는 데서 문제가 그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군주의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판단을 멈추고, 군주가 가진 지식의 정도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지금 키루스의 아버지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참된 군주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키루스는 아버지 캄비세스에게 “어떻게 하면 지혜롭다는 명성을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물은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급하게 답을 기다리는 아들에게 “빠른 길은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군주가 지혜를 얻는 길은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지혜를 얻는 길에 특별한 왕도는 없으며 부지런히 노력하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잘 알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찾아가 정보를 얻는 데 소홀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그런 행동이 너를 “남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발적인 복종과 수사학

키루스의 아버지 캄비세스는 군주가 부하들로부터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법에 대해 계속해서 가르친다. 사실 지혜를 가진 군주라 해도 언제나 백성들로부터 자발적인 충성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군주의 지혜는 전제조건일 뿐이다. 자발적인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군주는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백성들과 함께 아픔과 고난을 감내하며 백성들보다 더 인내하는 모습을 보일 때 군주는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다.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종은, 그들에게 권력을 휘둘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하다. 그들을 피지배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섬기고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려고 노력할 때 가능하다.

지혜와 용기

탁월한 군주에게는 논리를 동원하는 것도 중요하고, 열정을 더해 연설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로고스와 에토스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숨에 뛰어넘는 탁월한 군주의 덕목은 파토스적인 삶을 인내로 살아가는 것이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먼저 고난을 감내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탁월한 군주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보다 더욱더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자발적인 복종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군주에게 바치는 백성들의 선물이다. 그것은 절대로 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러나는 것이다. 자발적인 복종은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지식보다 지혜를 사랑하고, 백성들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참고 견디는 군주에게 헌정되는 존경과 찬사다. 키루스는 그 점에서 지혜와 용기를 가진 군주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5. 군주다움을 끝까지 지켜라

'햄릿'의 명대사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키루스 대왕은 일반 시민과 귀족들을 차별하지 않고, 전쟁에서 시민과 귀족이 같은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며, 시민과 귀족이 공을 세우면 차별 없이 동일하고 공정한 보상을 해주리라고 약속했다. 이것은 단순히 신분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크세노폰은 플라톤을 다시 비판하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수호자 계급은 귀족 출신의 장군들이다. 그들은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늘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에 전쟁에 나갈 때마다 “가슴에는 흉갑을 차고, 왼팔에는 방패를, 오른손에는 군도나 언월도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4 플라톤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문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일반 시민들에게 귀족 출신 장군들이 들고 다니던 무기를 지급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흉갑을 찰 수 있도록 해주면서 용기를 촉구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이런 감동적인 연설 후에 일어난 변화를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티그라네스는 키루스의 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아르메니아를 통째로 바치고, 앞으로 키루스와 페르시아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페르시아 군대의 장수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키루스는 티그라네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하 선택의 기준

탁월한 군주의 거울을 보여준 키루스는 신하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했다. 군주 옆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할 사람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해야 한다. 단순하게 금전적인 보상을 바라며 의무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군주 곁에 있다면, 그 군주는 절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강요에 의해 업무를 수행하는 자는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해보려는 다른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키루스는 선의와 우정을 가진 신하들을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에게 호레이쇼라는 친구가 있었듯이, 페르시아의 왕자 키루스에게는 주군에게 “선의와 우정을 의무”로 여기는 신하들이 즐비했다. 명군名君 곁에 명장名將이 있기 마련이며, 그 선택은 반드시 군주의 것이어야 한다.

6. 군주의 아내도 군주다

케네디 암살, 그 기록

아르메니아 왕실 여인의 기품과 위엄

수사 왕실 여인의 기품과 위엄

저격수의 총탄이 날아드는 긴박한 현장에서도 남편을 지키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운 재클린 케네디, 의기소침해 있던 남편에게 용기를 불어넣던 아르메니아의 왕비, 그리고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에게 군주답게 명예롭게 싸우다가 죽으라고 말하고 운명을 함께한 수사의 왕비 판테아에게서 우리는 군주는 절대로 혼자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참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군주의 아내도 군주처럼 행동하고 기품과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군주는 결코 혼자 되는 것이 아니다.

7. 사람들은 군주의 뒷모습을 본다

비너스 효과

사람들은 지금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키루스 대왕은 먼저 적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구체적인 전투 계획을 수립한 뒤 실제로 전투에서 최전선을 담당할 장군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다.

키루스 대왕은 자신이 내린 명령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뒤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부하들을 격려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부하들은 전투부대의 제일 앞에 나가 싸우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떤 때는 앞장서서 힘차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힘차게 승전가를 불렀고, 함께 싸우던 군사들은 앞서가는 키루스 대왕을 따르며 그의 노래를 복창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는 뒷모습일 때가 많다. 물론 그들은 나의 앞모습도 본다. 나의 눈을 보고, 나의 얼굴을 보고, 내가 입은 옷도 본다. 그들은 내 앞에서 항상 미소 지으며 나의 능력에 대한 찬사를 쏟아낸다. 약간의 호의에도 감사함을 표한다. 촌스럽게 옷을 입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입술에 꿀을 바른다. 많은 경우 그들은 내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거나 대놓고 험담을 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뒷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군주는 특히 그렇다. 항상 문제는 군주의 등 뒤에서 일어난다. 군주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군주에 대한 험담이 쏟아지고, 능력에 대한 평가절하가 일어나며, 애써 베풀어준 호의에도 침을 뱉는다. 비록 군주라 해도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대업을 수행하는 군주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큰일을 도모하려는 사람 뒤에서 욕을 하고, 불평을 하고, 험담을 하는 것은 범부凡夫들의 일상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키루스 대왕과 같은 군주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군주의 얼굴을 작은 거울을 통해서 볼 뿐이다. 그것은 나의 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은 각도에서 대상을 보고, 그 사람을 해석하고, 그 인물됨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키루스 대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태도와 표정, 말을 통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차피 사람들은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므로 그 뒷모습 또한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군주의 몫이다. 키루스는 늘 적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키루스 대왕이 거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키루스의 진짜 모습을 영원히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는 것은 거울에 비친 키루스의 부분적인 모습과 뒷모습이었다. 키루스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거울을 보는 군주의 거울이 된 것이다. 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추종자들이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면 과장된 행동도 불사했다.

8. 승리의 방식

세계의 화약고로 가다

신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대결

전쟁이 불가피할 경우 군주는 어떤 방법으로 전쟁을 이끌어가야 할까. 고대 그리스 시대의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었던 키루스 대왕은 전쟁의 네 가지 원칙을 보여주었다.

  1. 키루스 대왕의 첫 번째 원칙은 적의 아군부터 먼저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적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무엇보다 먼저 적의 아군부터 찾아내 궤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적은 우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가할 것이다.
  2. 키루스 대왕의 두 번째 원칙은 수비가 아니라 공세를 선택하는 것이다. 키루스는 키악사레스의 전쟁 방식을 비판하며 선제공격만이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승리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적의 공격을 웅크린 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로 하여금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키루스에게 승리의 전략은 “우리가 그들을 더욱 두렵게 하고, 우리를 더욱 용감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는 언제나 수비보다는 공세가 더 전투에 유리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3. 키루스의 세 번째 전쟁 원칙은 적에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고 싸우는 것이 적에게 더 많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키루스는 믿었다. 일종의 전쟁 심리학을 펼친 것이다.
  4. 키루스의 네 번째 전쟁 원칙은 병사들의 사기를 최대로 고취시켜 전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결국 최후의 백병전에 달려 있다. 아무리 전략을 잘 짠다 해도 최후의 일전에서 군사들이 용감히 싸우지 않으면 적진에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없다. 키루스는 일반 병사들보다 앞서 달리면서 스스로 열정에 사무쳐 소리 질렀다. “누가 나를 따를 것인가? 누가 진짜 용감한 자인가? 누가 제일 먼저 아시리아 군사를 쓰러트릴 것인가?” 그러자 대열에서 키루스의 뒤를 따르던 페르시아의 병사들도 앞으로 달리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누가 제일 먼저 아시리아 군사를 쓰러트릴 것인가?”

키루스 대왕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던 페르시아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9.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라

사이렌의 유혹과 오디세우스

군주는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는 사람이다. 군주라면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 밧줄에 묶일 각오를 해야 하고,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호메로스는 사이렌의 유혹에 노출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통해서 단순히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군주나 지도자도 처음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는다. 초심은 누구에게나 단호하고 거룩한 결단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한결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결박되어 있는 자신의 몸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거나 명령”하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심을 잃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사이렌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은 서둘러 자신을 돛대에 묶는 행동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그 불편한 밧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거나 명령”하게 된다는 인간의 본성을 깨닫는 일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서 있다고 자만하는 자는 곧 넘어지게 된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언젠가는 내가 넘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라스파스의 임무

아라스파스의 최후

결국 아예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키루스의 선택이 옳았다. 스스로 자제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자신의 욕망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아라스파스는 결국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군주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있다. 사이렌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군주 곁을 맴돌며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그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하라고,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된다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군주가 가지고 있는 부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때문에 군주는 오히려 더 지독한 운명의 장난에 내던져질 확률이 높다.

군주의 자질이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망한다. 지금도 사이렌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당신은 키루스의 처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라스파스의 처신을 선택할 것인가.

10. 레거시를 남겨라

독일의 리더십과 유럽

얄타 회담과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두 번씩이나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던 독일이 어떻게 다시 불사조처럼 부활해 EU의 맹주국이 될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독일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어젠다Agenda가 제기되거나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면 국민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Bismark Do)?”1 우리에게는 ‘철혈鐵血 재상’으로 알려져 있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1815~1898)는 독일의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변치 않는 군주의 거울이 된 셈이다.

레거시를 남긴 비스마르크와 키루스 대왕

귀환 명령을 내린 키악사레스 왕의 백성들인 메디아인들조차 키루스 곁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일종의 반란이고 역모였다. 메디아인들은 앞으로 나와 키루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이곳에 데리고 온 사람은 키루스 당신입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우리를 데리고 가십시오.”6

이것이 바로 키루스가 남긴 레거시다.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히르카니아 그리고 메디아의 장군들과 군사들 모두는 키루스를 ‘군주 중의 군주’로 보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와 함께할 것을 자발적으로 결의했다. 자국과 동맹국 그리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키악사레스의 백성들까지 모두 키루스의 뒤를 따르겠다고 충성 선언을 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왜 모든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키루스 대왕의 뒤를 따르겠다고 외쳤을까. 이런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크세노폰은 아시리아의 귀족 고브리아스Gobryas를 작품 속에 등장시킨다.

마침내 아시리아의 귀족 고브리아스는 키루스 대왕의 레거시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들이 모두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 영원한 군주의 거울이 된 키루스는 늘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골몰했다. 그러나 키루스는 모든 백성들이 그와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나서고, 고브리아스가 이런 칭찬을 늘어놓음에도 불구하고 제우스신에게 아래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11. 초심을 잃지 마라

바빌론 강가에서

키루스 실린더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키루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취임사와는 전혀 다른 바빌로니아의 방식으로 제국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이다. 우선 그는 페르시아의 언어가 아니라 바빌로니아제국의 언어로 자신의 취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또한 자신의 바빌로니아 정복이 마르둑이라는 바빌로니아 신의 결정이었다고 공표했다. 이것은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정복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페르시아의 군주였던 그는 페르시아의 언어로, 페르시아의 방식에 따라, 페르시아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복을 정당화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 정복한 바빌로니아제국에서, 바빌로니아 방식대로, 바빌로니아의 언어로,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의 이름으로 자신의 취임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니까 <키루스 실린더>의 내용은 키루스 대왕이 제국의 붕괴를 슬퍼하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발표한 것이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복을 정당화했으며,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는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키루스는 이 작은 점토판을 통해서도 전쟁의 승리자가 갖추어야 할 군주의 거울을 남겼다.

정복 전쟁이 종결된 후

서쪽으로는 리디아, 남쪽으로는 이집트의 나일 강 상류, 북쪽으로는 흑해와 카스피 해, 그리고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미 페르시아는 거대한 제국이었고 자신이 제국을 통치하는 정식 황제로 취임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러나 키루스는 스스로 왕관을 쓰지 않았다. 그는 먼저 “친구들의 동의를 받아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3 그리고 친구들의 동의를 받기 위해 그는 바빌론 점령 이후부터 “근엄하게 행동하고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횟수를 줄여 친구들의 질투심을 최대한 적게 유발”하도록 처신했다.

키루스의 취임 연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초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권력의 맛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지고, 욕심이 이성을 앞지르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거칠고 까다롭게 군다. 업적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 공으로 돌리고, 함께 경쟁했던 사람들의 질투심은 소인배의 것이라 치부한다. 미래의 군주들은 키루스의 취임 연설에서 군주의 거울을 발견해야 한다. 제국을 얻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얻은 후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욱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승리는 용기를 가진 자에게도 가끔 주어지지만, 승리를 쟁취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절제와 인내 그리고 엄청난 주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12. 제국은 사람이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다

제국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키루스의 인재등용 방식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인 만큼 키루스의 남다른 인재등용 방식 또한 훌륭한 군주의 거울로 남게 된다.

  1. 키루스의 인재등용 첫 번째 원칙은,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인재를 찾는다는 것이다. 키루스는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신앙심 일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떤 종교를 믿든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절제심이 강하고 도덕적 기준이 높다고 본 것이다.
  2. 두 번째 기준은 ‘자제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키루스가 어떤 인재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페르시아의 고위직에 오르게 될 터였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인재로 등용되어야 하고, 그들이 그 사회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크세노폰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그의 경쟁 동료였던 플라톤은 사려 깊은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보았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눈에 비친 키루스 대왕의 위대한 점은 사려 깊은 사람보다 자제심이 강한 사람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려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띌 때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지만,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도 그런 짓을 삼가기” 때문이다.5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키루스는 자제심이 강한 사람을 인재로 등용했다.
  3. 마지막 기준은 ‘탁월함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맡겨지지 않은 일에도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사람이 있다. 키루스는 “각자 맡은 분야에서 탁월하도록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는 선물과 힘 있는 자리, 온갖 종류의 편의를 보장했다”고 한다.6 그렇게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키루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실한 야망을 부추겨 키루스가 보기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키루스가 꿈꾸던 페르시아제국은 건물의 총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고, 인재였으며, 그런 인재를 모으는 방식은 본인 스스로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키루스가 남긴 마지막 ‘군주의 거울’은 그의 삶,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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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last edited 2022-03-01 14:58:32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