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갈 길을 잃은 아포리아 시대에는 진정한 리더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지도자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텍스트가 있는데, "군주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군주의 거울은 시대마다 조금씩 바뀌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아래와 같은 네 권이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
-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플라톤의 "국가"
-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Contents
서문. 숙였던 고개를 들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고, 젊은이들 사이에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부재不在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리더십의 부재야말로 우리 시대의 질곡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틀입니다. 리더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부에는 그리스 고전이 기록된 그리스 아포리아 시대의 실감나는 현실이, 제2부에는 아포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가 성찰해야 할 가치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1부. 아포리아 시대의 기록 -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국가', '키루스의 교육'
1.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군주의 거울
비극은 왜 반복되는가?
아포리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Lack of Resources’, 즉 ‘길 없음Impasse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No Exit의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위기Crisis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위기 상황에서는 그래도 어떤 조치를 취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다. 아포리아 상태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한 채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
그리스에서 생겨난 이 말의 원래 뜻은 ‘막다른 곳에 다다름’이다. 그리스는 약 12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200개가 넘는 섬에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래서 도서島嶼 간 이동을 위한 항해술의 수준이 높았는데, 바람을 이용해 돛으로 파도를 타고 넘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만큼 해상 사고의 위험도 잦아졌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섬과 섬 사이를 항해하다가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즉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에 직면했을 때를 아포리아라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포리아 상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길 없음의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대형 참사와 총제적 리더십 부재를 경험하면서 아포리아 시대를 직감하고 있다. 어쩌면 ‘위대한 리더십’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아예 ‘리더’라는 단어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지금껏 우리는 리더란 조직이나 단체의 구성원을 이끌며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 또는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며 공동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근대적인 대형 참사들, 그에 따른 비합리적이며 무능한 처리 방식을 목격하면서 이제 그와 같은 이상적인 리더와 리더십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아포리아 시대의 필독서, 군주의 거울
이런 아포리아 시대에 우리가 함께 펼쳐보아야 할 책이 있다. 절망의 시대에 읽어야 할 인문학 장르의 도서들이다. 조직행동론Organizational Behavior에 기초한 기존의 경영학적 리더십 교재는 잠시 덮어두고, 참된 리더를 위한 인문학의 고전을 펼쳐보자는 것이다.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읽어야 할 인문학 고전을 ‘군주의 거울Mirror for Princes’이라 한다.
군주의 거울은 기원후 8세기, 유럽이 본격적으로 중세로 접어들던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문학의 리더십 교과 과정이다. 기원후 800년, 샤를마뉴Charlemagne(740~814)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로 취임한 뒤부터 단일 국가의 개념과 이를 떠받드는 봉건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국가 및 지역 간의 극심한 경쟁이 촉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중세의 봉건 제후들은 자신의 봉토를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인근 제후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탁월한 리더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싹트기 마련이다. 세상이 혼탁하면 할수록 대중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나라의 미래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 탁월한 리더를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기원후 8세기부터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탁월한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한 인문학 교과 과정이 개발됐다.
군주의 거울이 등장하기까지
- “너는 장성하여 곧 성년이 될 것인즉 이를 깊이 명심해두어라. 네가 본보기로 친족들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아버지 아이네아스와 네 외숙부 헥토르가 너를 고무하게 되리라!”
로마의 건국자인 아이네아스는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군주의 거울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장차 알바롱가Alba Longa의 왕이 될 아들에게 닮고 배워야 할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모델이 바로 아버지인 자신과 트로이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외숙부 헥토르임을 밝힌다. 반인반신半人半神의 괴력을 지닌 아킬레우스의 창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던 헥토르의 용기를 기억하고, 허벅지에 박힌 화살촉을 뽑으며 적진으로 뛰어들던 아버지의 용기를 모범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왕자에게는 탁월한 리더의 모델이 필요한 법이고, 아스카니우스의 군주의 거울은 바로 아이네아스와 헥토르였다.
아이네아스가 그다음에 취한 행동은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손으로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거인처럼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4 ‘거인처럼’ 달려 나가는 모습을 통해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군주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장차 리더로서 살아가게 될 자신의 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군주의 거울이 됐다. 이렇게 멋진 아버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자신은 난장이처럼 살면서 자녀들에게는 거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는가. 아버지가 먼저 거인처럼 살아간다면 자식은 당연히 그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군주의 거울인 아버지를 통해 자신도 거인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이끄는 리더들에게 그리스 고전을 읽고 사숙할 것을 강조한 그(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 “(탁월함을 추구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어떤 사업을 하거나 관직에 취임하거나 행운을 잡거나 할 때, 자기들 눈앞에 펼쳐진 현재 또는 과거의 선인先人들을 놓고 깊이 성찰하는 것이 한결같은 습관이었지.”
어떤 지위에 오른 사람, 즉 리더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거 선인들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 “‘이 경우라면 플라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에파메이논다스(필자 주: 에파미논다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리쿠르고스 자신이나 아게실라오스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와 같은 거울들 앞에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치장하고 습관을 고치며, 천한 말을 자제하거나 정념의 발동을 끈다네.”
이 문장에서 처음으로 ‘거울’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후대 사람들이 군주의 거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성찰의 씨앗이 뿌려졌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제국의 리더들에게 플라톤Platon(B.C. 427~347),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B.C. 410~362), 리쿠르고스Lycourgos, 아게실라오스Agesilaus(B.C. 444~360)라는 탁월한 군주의 거울을 제시한다.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개선하고 언행을 삼가며 욕망을 자제하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철학자로, 에파미논다스는 테바이의 유능한 정치가로, 리쿠르고스는 전설적인 스파르타의 입법자로, 그리고 아게실라오스는 그리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왕으로 칭송받은 인물이다.
왜 하필 그리스일까?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노출된다. 그리스의 아포리아, 즉 길 없음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초, 즉 499~449년에 촉발된 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가 직면한 첫 번째 아포리아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자 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성 밖에 거주하는 노예를 모두 포함해도 최대 인구 30만 명 정도가 전부인 아테네 사람들에게 500만 명 이상의 강력한 군대가 공격을 감행한 사건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아포리아를 야기했다.
그리스에 밀어닥친 두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431~404년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그리스에 기원전 5세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테네의 황금기The Athenian Golden Age’인 동시에 참혹한 전쟁이 두 번이나 발발했던 죽음과 폭력의 시기였다. 그리스인들에게 펠로폰네소스 내전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함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읊던 동족끼리, 같은 헬라어를 쓰는 피붙이끼리, 올림픽이 열리면 함께 뛰고 달리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친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이 연속된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군주의 거울이 될 고전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고난 속에서 되새기는 고뇌의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길 없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현자들의 뼈를 깎는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 인류 최초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erodotus(B.C. 484~425 추정)는 페르시아 전쟁이 왜 발발했고, 이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장문의 역사 기록을 남겼다. 그 참혹한 전쟁을 주도한 주인공들이 승리하거나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전후좌우를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 역사물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당사자였던 여러 군주와 장군을 역사의 무대로 직접 소환해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배우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 것이다.
- 헤로도토스에 이어 다음 세대의 그리스 역사가로 활동했던 투키디데스Thucydides(B.C. 460~395 추정)도 펜을 들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자 이 전쟁의 시종始終과 전후前後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 비록 전쟁의 최종 국면까지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아테네를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게 한 리더의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했다. 위대한 영웅과 비열한 악한들의 이야기를 감정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에게 아포리아 상태에 직면했을 때 선택해야 할 리더의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두 번의 전쟁이 스쳐간 후에도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세기, 즉 두 번의 전쟁으로 얼룩진 기원전 5세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첫해에 그리스에 세 번째 아포리아가 찾아왔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399)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는 과거 두 번의 전쟁처럼 외부 요인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이 무엇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과 애제자인 크세노폰은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의 죽음 앞에서 분연히 펜을 들고 그리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왜 기원전 5~4세기 그리스에서 아포리아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위대한 통찰의 글을 남기고자 했다. 그들이 쓴 책이 바로 『국가』와 『키루스의 교육』이다. 장차 군주의 거울이 될 불세출의 명저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처한 아포리아는 너무도 치명적이고 심각하므로 이 시대의 인문학은 군주의 거울인 그리스의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난의 손가락을 타인에게 겨누지 말고 먼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성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어서 빨리 이 길 없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 충격과 절망의 아포리아가 있었기에 그 땅에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이 시련과 절망의 땅에서도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워야 하지 않겠는가.
2.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니아, 페르시아 전쟁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서부터 마라톤 전투(B.C. 490), 테르모필레 전투(B.C. 480), 살라미스 해전(B.C. 480)의 전개 과정을 설명한 뒤 결국 그리스에 패한 페르시아 군대가 본국으로 철수한 이야기를 끝으로 최초의 탐사 보고서를 마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크로이소스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힌다.4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이 방대한 책의 간단명료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추구했던 행복과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추구했던 행복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나라 리디아의 왕이나 큰 나라 페르시아의 왕은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자의 나라, 행복한 왕의 나라에 찾아온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이야기로 『역사』의 첫 장면을 풀어나간다. 이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엉뚱한 출발처럼 보일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아테네의 현자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전격 방문했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현자가 자신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자 크로이소스 왕은 내심 자신의 권력과 부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크로이소스는 국빈國賓인 솔론에게 자신의 넘쳐나는 보물창고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질문했다.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그대의 지혜에 관한 소문은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우리는 또 그대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세상을 구경하고자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는 말도 들었소. 그래서 나는 그대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진심을 묻고 싶소이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크로이소스 왕이시여, 단언컨대 이런 엄청난 황금과 권력을 가지신 폐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러나 솔론의 대답은 왕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는 크로이소스 왕에게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아테네 사람 텔로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지명하지 않은 솔론에게 화가 났지만, 짐짓 왕의 체면을 유지하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재차 물었다.
솔론의 두 번째 대답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솔론은, 자기 어머니를 헤라 여신의 축제장에 모시고 가기 위해 직접 멍에를 메고 먼 길을 달려 간 클레오비스Cleops와 비톤Biton 형제가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끝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나를 그런 평범한 자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다니 그대는 내 행복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요?”라고 소리치며 솔론을 질책했다. 솔론은 분노하는 크로이소스 왕 앞에서 참된 행복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크로이소스 전하,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 보아하니, 전하께서는 거부巨富에다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전하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사옵니다. 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중략) 그가 훌륭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전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 곧 행복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옵니다.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세월이 흘러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의 굴욕을 당하고, 결국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끔찍한 죽음을 기다리던 크로이소스는 문득 솔론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라고 말했던 솔론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려 14년 동안이나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엄청난 황금으로 자신의 보물창고를 채울 때는 그것이 세상 최고의 행복이라 믿었던 크로이소스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잠시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크로이소스는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솔론!”이라는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오, 솔론, 솔론, 솔론!”
키루스는 한 인간의 깊은 회환을 보면서 인생의 부질없음과 덧없음을 깨닫고 크로이소스의 화형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크로이소스와 같이 우매한 리더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권력에 도취되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의 노력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기준이거늘, 얼마나 많은 거짓 리더들이 권력과 부의 축적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또한 그들의 왜곡된 행복 추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가? 지금 헤로도토스는 한 어리석은 군주의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런 허황된 행복의 추구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인공 크로이소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등장하는 군주의 거울인 셈이다. 그는 우리가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의 첫 번째 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크로이소스 왕의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틴토레토의 그림을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카누스의 둥근 거울 때문이다. 틴토레토의 작품은 우리에게 불카누스의 둥근 거울을 보라고 요구한다. 그 거울 속에는 죽자고 일만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성공한 인물 대신 아내와 가정을 소홀히 한 남편 불카누스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일 뿐이다. 틴토레토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 기초 도안을 위한 스케치를 남겼다. 여기서도 의도적으로 거울의 이미지를 강조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불카누스의 가정에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카누스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과 아내를 돌보지 않은 불카누스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였다. 그 역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다를 바 없는 실수를 범했다. 불카누스처럼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크로이소스처럼 많은 황금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행복의 지표가 될 수는 없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지독한 반어법을 구사하며 우리에게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한다. 『역사』의 두 번째 주인공인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 바로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헤로도토스는 나름대로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시종일관 편견 없이 크세르크세스를 평가하려 애썼다. 그래서 『역사』에는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이유와 역사적 당위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쓴 이유다. 즉 『역사』의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란 뜻이고, 그의 이야기는 제7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에서 일견 현명하고 탁월한 군주의 자세를 엿보게 된다. 참모들의 찬반 의견을 모두 청취하고, 일시에 내린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를 즉각 수정할 줄 알며, 새롭게 내린 합리적인 결정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군주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그가 초기에 보여준 이런 신중한 행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훌륭한 면은 여기까지다. 그 뒤로 이어지는 크세르크세스의 판단과 행보는 본받지 말아야 할 군주의 부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크세르크세스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의 비극이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지도록 마음을 길들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 때문에 결국 크세르크세스 자신과 페르시아 백성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어이없는 짓을 일삼는 군주였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개꿈을 신의 현몽이라 착각할 만큼 우유부단했고, 아무 필요 없는 아토스 운하를 건설할 만큼 자기과시욕에 넘쳐났으며, 바닷물을 채찍으로 때릴 만큼 어리석은 군주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두 번째 군주 크세르크세스 역시 앞부분에 등장한 크로이소스 왕처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라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500만 대군을 진군시킬 만큼 그의 권력이 온 땅을 덮었으나 그의 오만과 명예욕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고, 그의 어리석은 행동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됐다.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역사』의 세 번째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의 공격으로부터 그리스와 아테네를 구한 테미스토클레스다. 그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를 헤쳐나간 아테네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언제나 돈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고 묘사한다.32 실제로 그는 우방 국가를 기만하고 뇌물을 받아 챙기기도 한 인물이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일찍이 테미스토클레스보다 더 야심 많은 사람은 없었다”고 일갈할 만큼 명예욕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증언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아테네 해군이 그리스의 구원자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이라는 전대미문의 아포리아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지략과 과감한 추진력 부분에서 후대의 군주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을 갖춘 군주의 거울이 됐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끝까지 읽어보면 이 대목에서부터 놀라운 반전이 펼쳐진다. 만약 헤로도토스가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집필을 마쳤다면 아마 그의 『역사』는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이후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했다는 놀라운 반전의 기록을 남겼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조국의 배신자가 됐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때부터 아예 노골적으로 해적질을 일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기록을 최고의 영웅이 아닌 최후의 변절자로 마무리한다. 권력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야심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정도를 넘어 결국 조국을 배신한 인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결론: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기원전 5세기 전반,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가 닥쳤을 때 헤로도토스는 대혼란의 이유와 리더십의 상관관계에 대해 천착穿鑿했다. 페르시아 전쟁과 같이 의미 없는 전쟁은 왜 발생하는가. 그 전쟁을 일으킨 군주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군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세 명의 리더인 크로이소스,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를 주인공으로 제시했다.
-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누렸던 권력과 부를 행복의 기준으로 착각한 인물이었고,
-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어리석고 우유부단했으며 쓸데없는 과시욕에 사로잡혀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다.
- 마지막으로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타고난 정치적 감각으로 승리를 쟁취했으나 권력을 향한 의지가 지나쳤고 재물 욕심을 억제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참혹했던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탐사 보고서를 작성하던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그 사회는 아포리아에 처하게 된다.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진 왕과 명예욕에 불타올라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군주,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군이 나라를 이끌면 그 나라는 쇄락을 면치 못하게 되고 온 국민이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부적절한 리더 때문에 아포리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함량 미달인 자는 함부로 리더의 위치에 오르지 말라!’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위대한 페르시아의 건국자인 키루스 대왕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키루스 대왕이 마침내 페르시아제국을 기원전 550년에 건국하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벌해나가자 한 신하가 대왕 앞에 엎드려 제국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간언을 올린다. 제우스 신이 키루스에게 거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선물로 주었으니, “지금 차지하고 있는 이 울퉁불퉁한 곳을 떠나 더 나은 곳을 차지하도록” 침략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신하의 주청을 가만히 듣고 있던 키루스 대왕은 그 제안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 제안대로 밀고 나가라”고 허락하면서, 대신 “그럴 경우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는 준엄한 경고를 내렸다.44 제국의 지리적 확장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속성상 확장의 속도를 멈출 수도 없으니 정복을 계속해보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럴 경우 “결국 지배 민족은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경고였다.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에 대한 탐사 보고서 『역사』는 다음 문장으로 끝이 난다.
- 그래서 페르시아인들은 그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고 물러났고, 자신들의 견해가 키루스의 견해보다 못하자,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남긴 『역사』의 제일 마지막 문장이다. 제국의 끝없는 확장을 위해 자신의 오만함을 숨기지 않았던 페르시아인들은 결국 자신들보다 한 세기를 먼저 살았던 키루스 대왕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오만했던 리더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는 뜻이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공통점은 바로 오만이다. 군주는 스스로 이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제국의 권력과 황금의 쾌락이 주는 오만의 유혹을 멀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군주의 거울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의 핵심이다.
3. 반복되는 역사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태풍 전의 고요함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 밀어닥친 첫 번째 아포리아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극복됐다. 페르시아의 주력부대는 크세르크세스 왕과 함께 줄행랑을 쳤고, 다른 방향으로 퇴각하던 잔류병도 모두 섬멸됐다. 아테네인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시기 아테네에는 소포클레스와 같은 뛰어난 비극 작가가 등장해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지 시작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인간이 가장 극한 상황에서 품을 수 있는 내면의 슬픔과 좌절을 개인과 공동체(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과 교차시켰다. 이 문화 융성의 시기에 발표된 다수의 비극 작품은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아테네의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리스의 비극은 단순히 감정적인 인간의 슬픔만을 이야기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부조리를 먼저 상정한다. 비극의 서사적인 원인은 개인과 공동체(국가)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그런 가치 충돌의 딜레마를 발견할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보고난 아테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포도주를 들이키며 극 중 안티고네가 선택한 결정에 대해 토론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빠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 안티고네가 혈육의 정을 지켰다고 칭찬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국가의 명령을 어긴 안티고네의 결여된 애국심을 비난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의 토론을 촉발시켰고, 결국 이런 공동체의 격조 높은 문화적 활동이 그들의 소속감과 연대감을 증대시켰다.
이 시기에는 비극뿐만 아니라 희극 작가들의 활동 또한 활발했다. 희극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금기시하는 영역에 대한 발칙한 도발을 감행할 때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게 된다. 비극이 공동체의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희극은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희극보다 비극이 더 주목을 받았고, 정치가들의 더 많은 후원을 받았다.
그리스의 두 번째 아포리아, 펠로폰네소스 전쟁
살라미스 해전 후 약 20년이 지난 뒤, 그리고 작가, 의사, 역사가 등의 등장으로 아테네의 황금기가 문화 융성의 정점으로 향하던 즈음, 그리스 전체에 영향을 미칠 두 번째 아포리아가 발생할 조짐이 보였다. 기원전 460년,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리스에 갑자기 밀어닥친 두 번째 아포리아의 조짐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출발했다. 같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문명의 정체성을 함께 향유하던 그리스의 두 맹주,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벌여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한 두 집단의 싸움과도 같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 사람들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것은, 전쟁 후에 발생한 희생자들에 대한 천륜을 저버린 처리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그리스인들은 전투가 끝나면 목숨을 잃은 적의 군사들을 그들 편에 넘겨주어 적절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예우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며 관례라고 여겼다. 그것이 상호 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부터 그런 관례가 사라졌고, 전장에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이 들짐승들에게 뜯어 먹히거나 썩어가는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지금껏 그리스 사회를 지탱해주던 절제의 미덕과 인간 가치에 대한 존중의 관념이 사라지면서 그리스에 두 번째 아포리아가 밀어닥친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서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를 넘어시대를 관통하는 인류 보편의 본성까지 파헤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고 있다.
자신이 파헤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실체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그리스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한 기록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영원히 반복될 보편적 역사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반복되는 역사의 전후좌우를 살펴보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밝힘으로써 후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역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지도를 그려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
전쟁이 시작된 경위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분명히 그리고 아주 간략하게 자신의 견해를 미리 밝힘으로써 본인의 의도는 이것과는 다른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Lakedaimon(필자 주: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 전쟁의 발발 원인은 이미 알려져 있고 자신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전쟁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내전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인간 군상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 광범위한 개별적 행동의 스펙트럼 속에서 리더가 어떻게 바로 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책이 인류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연설문들이 각각 어떤 위기적 상황의 구조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거의 모든 위기의 구조적 특징이 드러났고, 투키디데스는 이런 위기의 구조적 패턴에 대응하던 이상적인 리더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준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투키디데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위기는 동일한 패턴으로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의 해법을 하나씩 소개한다. 그래서 미래의 리더들이 그 반복되는 위기의 패턴을 분별해 그 극복 방식을 배우라는 것이다.
진정한 군주의 거울, 영웅 페리클레스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영웅이 탄생했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그리스는 페리클레스Pericles(B.C. 495~429)라는 또 다른 영웅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역사에 등장했던 가장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 ‘페리클레스의 황금기Golden Age of Pericles’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페리클레스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위기 앞에서 사람들이 적에 대한 복수를 호언장담하고 출정 전날 포도주를 들이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을 때도 차분하게 앉아 전쟁의 예상 비용을 산출하던 사람이다. 사실 전쟁은 돈 싸움이다. 얼마나 많은 전쟁 자금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라지곤 한다. 전쟁을 위한 비상 국가 예산이 넉넉해야만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다.
페리클레스는 앞으로 전쟁이 지속될 기간을 예상하고 그 전쟁에 소요될 예산의 총액을 계산해본 결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페리클레스는 이런 계산을 마친 뒤 승리를 확신하며 아테네인들에게 전쟁에 임할 것을 요청했다. 집단적 위기에 처한 아테네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연설을 준비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위대한 조상들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전쟁을 위한 충분한 국가 비상 예산을 확보하고 있는 아테네에 승산이 있음을 주지시켰다.
자식을 잃고 길 없음의 아포리아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 앞에 서서 이런 연설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테네인들은 패전의 슬픔에 빠져 있었고, 졸지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전쟁을 독려했던 페리클레스 앞에서 원망을 쏟아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아포리아 상태에 리더가 취해야 할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테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는 시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그가 연설을 할 때마다 아테네 남자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용기를 얻었고, 아테네 여성들은 손바닥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의 연설에는 “용기를 북돋워주고, 노여운 마음을 달래 그들이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18
예상치 못한 첫 번째 전투의 패배 때문에 아테네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페리클레스는 다시 연단에 올라 격앙된 아테네 시민을 향해 연설을 이어갔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단순히 참전을 독려하려는 전쟁 담화문도 아니고,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가의 면피성 발언도 아니었다. 그의 연설에는 승전의 오만도, 패전의 좌절도 보이지 않았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위기의 순간에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군주의 덕목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패전의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희망의 길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 참된 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식견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사물의 순리를 간파할 수 있는 능력과 사태의 흐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식견을 갖춘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이것은 지도자에게 절대적인 덕목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참모의 역할이 아니다. 참모는 예측된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력을 갖추면 된다. 그러나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식견이 없는 지도자는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참모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 페리클레스는 지도자가 이런 식견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고 공동체의 일원들과 그 내용을 소통할 수 있어야만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지도자의 자격과 능력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소통하지 않는 지도자나 소통의 능력이 부족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런 부적격 지도자의 일반적 성향은 독선의 흑백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다.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독선은 자연스러운 소통의 흐름을 가로막는 바리게이트다.
- 페리클레스는 세 번째 덕목을 추가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그것이 조국이든 회사든 가정이든 학교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과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치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무자격 지도자의 탐욕일 뿐이다.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 구성원들을 존중하지 않는 지도자는 스스로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권력의 노예일 뿐이다. 원하지 않는 삶을 억지로 살아가야 하는 노예와 하등 다를 바 없다.
- 마지막 네 번째 덕목으로 페리클레스는 재물에 대한 초연한 마음을 제시했다.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밝히고, 권력을 부정한 방식으로 재물을 축적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 지도자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모방하게 될 것이고, 이런 탐욕의 악순환은 그 공동체를 타락으로 이끌게 된다.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이자 청렴결백하기까지 했기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다른 지도자들처럼 대중의 뜻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굴종시키지 않았고, 자신의 판단력을 믿고 이를 적절한 소통으로 관철시켰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면 이를 경계시켰고, 반대로 지나치게 낙담하면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는 거친 파도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대중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왼쪽에 서서 중심을 잡고, 반대로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에 서서 중심을 잡던 페리클레스야 말로 아포리아 시대에 본받아야 할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존재 때문에 일어섰고, 페리클레스의 부재 때문에 넘어졌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에 발진 티푸스로 추정되는 역병이 창궐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그 사망자 명단에는 페리클레스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전염병에 쓰러진 페리클레스의 병사病死와 더불어 아테네는 병들게 된다.
배신의 아이콘, 알키비아데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포리아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페리클레스가 전반부의 주인공이라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배신의 아이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B.C. 450~404)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가 일으켜 세웠고, 아테네의 악동 알키비아데스가 쓰러트렸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죽음으로 아테네의 몰락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몰락을 실질적으로 재촉한 인물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두 번째 주인공인 알키비아데스다. 알키비아데스가 없었다면 이른바 제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불리는 ‘시칠리아 원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시칠리아 원정이 아테네 쇠락의 결정타였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진심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나라나 조직이 흥하고 망하는 이유는 다 사람 때문”이라는 간결한 메시지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나 조직은 흥하게 되고,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그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원전 5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상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무릇 지도자란 특히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란, 페리클레스의 삶처럼 식견이 있어야 하고 그 식견을 공동체와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해야 하고, 사리사욕과 탐욕에 초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알키비아데스처럼 행동하는 지도자가 득세한다면 우리 시대는 아포리아의 먹구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누가 우리 시대의 페리클레스이고, 또 누가 우리 시대의 알키비아데스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알키비아데스가 아닌 페리클레스와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4. 철학으로 아포리아에 맞선 스승과 제자 - 플라톤의 '국가'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리스에 몰아닥친 세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399년에 발생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됐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아테네의 현자로 존경받으며 동시대 청년들을 탁월함의 세계로 인도하던 큰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테네 사람들은 한 시대의 종말을 직감했다. 그것은 한 국가가 철학에게 천인공노할 범죄를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어쩌다 아테네가 이런 암울한 시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포리아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한탄하며 철학이 살해당한 자신들의 시대를 슬퍼했다. 동족끼리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것도 모자라 지혜를 사랑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였던 한 시대의 현자를 그들 스스로 살해해버린 것이다. 그리스에 세 번째 아포리아가 발생한 이유는 외국과의 전쟁 때문도 동족끼리의 전쟁 때문도 아니었다.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악동의 등장도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구조적인 쇠락의 조짐이 이미 아테네에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테네 정신의 쇠락과 연관이 있다. 정신이 쇠퇴하면 나라도 망조가 들기 마련이다.
아테네가 중심이 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된 이후 아테네는 제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 팽창의 논리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갑자기 막대한 부가 아테네로 집결되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와 문화적 자신감에 빠져 점점 더 속물화되어갔다. 황금이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믿게 된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 안에 있던 아테나 신상이 모두 금으로 도금되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아테네의 황금기라 부르지만, 사실 아테네인들이 ‘황금에 눈이 먼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아테네의 ‘골드러시’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다. 타소스 금광에서 막대한 양의 금이 채굴되어 도시로 유입되자 사람들은 황금의 가치에 눈이 멀었다. 황금이라면 주저 없이 목숨을 거는 사람들, 돈이라면 언제라도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로 인해 아테네는 점차 배금拜金의 도시로 변해갔다.
물질적 풍요가 가치 선택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함께 목격되는 것은 ‘몸의 숭배’ 현상이다. 황금이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이른바 ‘몸짱’과 ‘얼짱’이 각광을 받는다. 황금에 눈이 먼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청년들은 아테네의 건국 왕인 테세우스Theseus를 열렬히 숭배하기 시작했다. 근육으로 단련된 테세우스의 아름다운 몸을 숭배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스파르타에 헤라클레스가 있었다면 아테네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다. 덩달아 아테네 여성들도 변해갔다. 본격적으로 짙은 화장을 하고, 경쟁하듯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리를 배회하며 자신의 미모를 뽐냈다. 이른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 뒤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황금만능주의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잘생기지도 않고, 근육질 몸매도 아닌 한 남자가 아테네에 등장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황금에 눈이 멀어 있을 때 홀로 물질에 정신을 팔지 않던 사람, 그가 바로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다. 오히려 그는 지지리도 못생긴 사람이었으며, 매일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 “친애하는 판Pan 신과 이곳의 모든 신들이시여! 나의 내면이 더 아름다워지게 해주시고, 내 외적인 재산은 내 내면의 상태와 일치하게 하소서.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부자라고 믿고 싶으며, 내가 갖고 싶은 황금은 절도 있는 사람이 지니거나 가져갈 수 있을 만큼만 갖고 싶사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전에서 숭배되던 위대한 신에게도 기도하지 않았다. 자연 동굴 속에서 가난한 농부와 사냥꾼들이 숭배하던 평범한 판 신에게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황금을 찾아 길을 떠날 때, 자신만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걷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임을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황금에 눈멀지 않겠다는 한 철학자의 간절한 기도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에 ‘질문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했다. 그는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필자 주: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는 유명한 말을 남겨, 서양 철학의 위대한 아버지가 됐다.6 그는 청산유수처럼 말만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내면을 성찰하는 삶이 참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왜 그는 동시대의 아테네인들과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황금만능의 시대에 왜 그는 정신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왜 그는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지혜와 진리를 위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역사가들은 오랜 추적 끝에 그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의 증언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소크라테스의 성찰과 깨달음은 기원전 431년, 메가라 봉쇄령으로 촉발된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연관이 있다. 아테네의 시민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처럼 보병으로 징집되어 3년간 포티다이아Poteidaia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일반 보병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소크라테스와 같은 막사를 쓰며 싸웠던 전우가 바로 알키비아데스다. 전투에 함께 참전해 같은 막사를 쓴다는 것은 생사고락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당시 두 사람은 이른바 ‘파이데라스티아Paiderastia’의 관계였다. 이는 덕망을 갖춘 어른이 혈기왕성한 어린 소년과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를 지도하고 교화하는 관계를 말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새로운 성찰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목격했고, 현장에서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한 인간의 덕목으로 간주하던 탁월함, 즉 ‘아레테Aretē’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 “하루는 이분이 이른 아침에 한곳에 서서 무언가 사색하기 시작하셨는데, 사색해도 진척이 없자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서 탐색하시더군. 한낮이 되자 모두들 이분을 알아보고 감탄하며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이른 아침부터 무언가 사색에 잠겨 그곳에 서 있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네. 이윽고 저녁이 되자 몇몇 이오니아인들이 저녁을 먹고 나서 시원한 곳에서 잠도 자고(때는 여름이었으니까) 이분이 밤새도록 그곳에 서 계시는지 지켜볼 겸 거적을 들고 나오더군. 이분은 아닌 게 아니라 날이 새어 해가 뜰 때까지 그곳에 서 계시다가 해에 기도를 올리고 나서 떠나가셨네.”8
알키비아데스가 목격하고 플라톤이 글로 남긴 이 증언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전환 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적 증거다. 소크라테스는 밤새도록 포티다이아 평원에 서서 그동안 그리스인들이 이상적인 덕목이라 여겼던 ‘탁월함’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순간이 철학사에서 탁월함의 개념이 전환되는 시점이다.
포티다이아 평원 이전의 탁월함은 주로 신체의 아름다움이나 적 앞에서 기죽지 않는 군사적 용맹을 뜻했다. 전투에 임한 장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탁월함의 증표였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탁월함의 추구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이제 소크라테스의 탁월함은 외모 지상주의가 아니라 절제하고 헌신하는 자세로 바뀌었고, 진정한 용기는 남에게서 승리를 빼앗고 적을 살육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무엇보다 지혜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주인공이었던 소피스트들은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했고, 이를 위해 궤변과 장광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연설이 아니라 서로 생각을 나누며 질문하는 삶을 선택했고, 이것이 바로 지혜에 이르는 숙고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캐묻게 함으로써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런 대화를 통한 진리의 접근을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왜 아테네에 아포리아가 초래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며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이렇게 외친다.
- 내가 숨을 쉬고 그럴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철학으로 소일하는 일도, 여러분에게 조언하는 일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느 때처럼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당신은 아테나이인이오. 당신의 도시는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오. 하거늘 부와 명예와 명성은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당신 혼魂의 최선의 상태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부끄럽지 않소?”9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아포리아 시대의 사명이었다. 아테네의 아포리아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기 위해 안달하면서도 정작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포리아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는 쇠파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부도덕하고 탐욕에 찌든 아테네인들에게 부끄러운줄 알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의 통렬한 비판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확하게 유효하다.
득세한 아테네의 민주파들은 조국을 배신한 알키비아데스의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체포해 감금했다. 소크라테스는 극심한 혼란기에 흔히 자행되는 이른바 ‘속죄양’ 신세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동굴 같은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했다. 아테네가 철학에 범죄를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리스의 마지막 아포리아에 맞선 제자,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최초의 철학적 순교는 아테네 청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현자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지켜본 그의 제자 플라톤이 아마 가장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는 스승의 순교 장면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 과정을 책으로 기록했다.
플라톤은 이 충격적인 아포리아의 도래 앞에 정치가가 되려던 꿈을 접고 아테네를 떠나버린다. 그는 이집트와 시칠리아 등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우고, 이상 세계에 대한 숙고와 사색을 마친 뒤 아테네로 돌아온다. 이른바 ‘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를 설립하고 스승 소크라테스가 보여주었던 지혜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스승이 살해당했던 오명의 도시 아테네를 벗어나 아테네인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 오솔길 끝에 자리한 아카데메이아Akadēmeia에 학교를 열었다.
가장 이상적인 문명사회의 모델로 자타가 칭송하던 아테네에서 현자 소크라테스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자 플라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연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나라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집단적인 아포리아 상태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문명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가져야 하고, 또 그런 이상적인 통치자를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까?’ 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상 국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담겨 있는 책이 『국가』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주저로 알려져 있는 『국가』는 관념론적인 철학책이 아니라 아포리아 시대에 직면한 한 철학자의 처절한 고뇌가 담긴 책인 동시에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을 보여주기 위한 실천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 인근 아카데메이아의 그늘진 산책길에서 플라톤이 제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던 주제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안 문제와 다르지 않다. 어쩌다가 나라꼴이 이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아포리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과 그의 저서 『국가』는 우리 시대의 군주의 거울로 삼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를 철학 책으로만 읽어왔다. 아포리아 시대에 『국가』를 읽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플라톤의 이 위대한 저서를 이데아론과 정의론 그리고 교육 철학에 대한 책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시대를 위한 군주의 거울로 읽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가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국가를 재건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나라의 수호자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상 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플라톤이 꿈꾸었던 『국가』는 궁극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한다.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이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플라톤의 해답은 직설적이다. 그는 암부로조 로렌체티의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로운 사회란 소속되어 있는 각 집단이 각각의 위치를 성실하게 지킬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통치자는 ‘지혜’를 추구하고, 수호자는 ‘용기’를 지녀야 하며, 시민들은 ‘절제’하는 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각각의 의무다. 통치자, 수호자 그리고 시민들이 각각 자신이 맡은 본분을 다하는 것이 ‘정의’이고 그것이 이상 국가의 기초라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구성원 간의 합의를 통해 이 절제의 덕목을 철저하게 지켜나간다. 특별히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런 절제의 미덕은 서구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서구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개방적인 체제를 유지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일단 지도자가 선택되면 철저하게 그 지도자의 통치에 따르는, 즉 절제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물론 이런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20세기 후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정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는 플라톤이야말로 한 사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막는 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통치자와 수호자가 참다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정의를 실현하는 이상 사회로 발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 나라는 독재의 왕국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칼 포퍼의 주장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이 통치자의 억압적인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타당한 논리를 갖추었다. 물론 이것은 히틀러의 만행을 목격한 비엔나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의 논리이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냉전 시대의 보수적 정치를 비판하기 위한 철학적 분석 논리이기도 하다.
시칠리아의 참주 디온Dion과 디오니시우스 2세Dionysius II(B.C. 395 추정~343)를 ‘철학자 왕’으로 길러 직접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이 대의를 위해 두 번씩이나 시칠리아에서 목숨을 걸었던 플라톤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플라톤을 보수적인 수구 반동 세력의 철학자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우리는 『국가』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제7권 이하를 주목해야 한다. 이상 국가의 수호자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한 플라톤의 제안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국가』의 앞부분이 정의에 대한 정치학적 접근과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면, 뒷부분은 그의 역동적인 ‘교육 철학’이 담겨 있다. 그 책의 백미는 바로 이 뒷부분에 있고 이 부분이 바로 『국가』의 군주의 거울에 해당한다.
플라톤은 자기 시대가 처해 있던 길 없음의 아포리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인들은 동굴의 암흑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집단이다. 그것도 쇠사슬에 묶인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불쌍한 죄수들이다. 그들은 앞만 바라볼 뿐 절대로 몸의 방향을 돌려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정면의 벽에 펼쳐진 환영을 참된 세상, 진짜 본질이라고 믿고 있다.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들, 반짝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와 착각이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불러온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뒤를 돌아보라고 요구한다. 횃불 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환영의 진짜 실체를 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믿고 있던 실체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사물의 본질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호소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을 꼼짝 못하도록 옥죄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버릴 용기도,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횃불을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이런 불편한 진실을 깨우쳤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동굴의 비유에서 아래와 같이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 “또한 그의 시력이 약해져 있는 동안(필자 주: 오랫동안 쇠사슬에 묶여 어두운 동굴에 갇혀 있었으므로), 그곳을 떠난 적이 없는 수감자들과 다시 그림자를 식별하는 경쟁을 해야 한다면, 시력이 회복되기 전에는-어둠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네-그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그들 두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는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눈이 상해서 돌아왔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쇠사슬을 풀어주며 위쪽으로 데려가려는 자는 잡아 죽일 수만 있으면 모조리 죽여야 해’라고 말일세.”
소크라테스는 쇠사슬을 끊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간 최초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데아, 즉 본질을 본 사람이다. 그러나 동굴 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아테네인들은 그런 자유로운 영혼이 위험한 존재라고 보았고, 결국 그에게 죽음을 안겼다. 이런 무지와 착각이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초래했다.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
당시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플라톤은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실제적인 주장을 펼쳐나간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플라톤은 교육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아테네의 아포리아가 초래된 이유는 잘못된 교육 방식 때문이다.
동굴 속 어둠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들에게 교육이란 “그들 사이에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중 어느 것이 앞서가고 어느 것이 뒤따라가고 어느 것이 같이 가는지 잘 기억해두었다가 가장 잘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와 찬사와 상을 주는 관습”이었다.23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교육 방식이다. 우리가 받았던 대부분의 교육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아포리아는 이런 교육 방식 때문에 초래됐다. 일방적인 암기식 교육, 교사가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 교육, 대학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에서의 교육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교육이 아니라 죽은 교육이며, 우리에게 길 없음의 아포리아를 떠안기는 치명적인 방식이다.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플라톤은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전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닐세”라고 말했다.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은 달라져야 한다. 단순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환영의 순서를 그대로 암기시키는 기술이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몸을 돌려 사물의 본질을 보게 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다. 아포리아를 극복하고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군주의 거울을 위한 참된 교육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기계적으로 학습한 내용을 암기하고, 시험을 잘 쳐서 100점을 받고, 그 성적으로 명문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교육이란 눈앞에 펼쳐지는 환영의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은 뒤 진정한 빛을 향해 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바라보는 것, 그래서 참된 진리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의 목적이어야 한다.
플라톤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부터 플라톤이 주창했던 군주의 거울 교육이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아포리아 시대의 지도자를 위한 교육, 다시 말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해나갈 지도자를 위한 군주의 거울은 최종 방향이 달라야 한다. 아포리아를 극복할 참된 군주는 먼저 몸의 방향을 돌리는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마주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포리아 시대를 헤쳐나갈 지도자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한다.
- “따라서 국가의 건설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장 우수한 품성들에게 앞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한 것에 도달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네. 우리가 앞서 말한 저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 선을 보도록 강제하는 것이라는 말일세. 그러나 일단 올라가 충분히 본 다음에는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네.” “그게 뭐지요?”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말일세” 하고 내가 말했네. “그들은 다시 저 수감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보잘 것 없는 일이건, 중대한 일이건 간에, 수감자들의 고통이나 명예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단 말일세.”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주창한 군주의 거울이다. 아테네에 밀어닥친 세 번째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해, 아테네를 이상 국가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할 군주의 거울이다. 가장 탁월한 품성을 가진 미래의 지도자 후보들에게 용기를 내도록 독촉해야 한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의 태양을 보며 본질의 실체를 보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태양이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선善’은 윤리적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선이란 본질, 즉 이데아를 말한다. 아포리아 시대를 헤쳐나갈 군주는 현실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를 실재하는 것이라 믿지 말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으로 상징된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태양, 본질, 이데아를 충분히 본 뒤에는 반드시 다음 단계로 또 한 번의 방향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동굴 밖으로 나와 이데아를 보았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데아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아 말한다.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을 본 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즉 본질과 이데아를 본 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본질과 이데아의 세계를 발견한 그들이 취해야 할 두 번째 행동은 다시 한번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수감자들이 갇혀 있는 동굴 쪽으로 또 한번 인생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다시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료들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스스로 풀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아포리아 시대를 위한 군주의 거울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변화산의 비유와 비슷한 면이 있는듯 하다. "여기가 좋사오니...")
5.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의 거울 -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그리스 최고의 군주의 거울을 쓴 사람
플라톤과 크세노폰
크세노폰은 늘 플라톤과 비교되곤 한다. 『키루스의 교육』을 쓴 크세노폰도 소크라테스의 중요한 제자였다. 그러나 같은 스승을 모신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철학과 사상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두 사람 모두 격동의 시대를 살았지만 혼란의 시대 속에서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서양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플라톤은 아테네 근교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교하고, 제자들과 함께 심오한 토론과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시대의 격동과 혼란에 직접 자신의 몸을 던진 인물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 사이에서 그는 스스로 경계인經界人임을 자처했다. 아테네의 귀족 출신이었지만 페르시아 왕자가 고용한 용병대장으로 활약했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인생의 쓴 맛을 보았으며, 결국 조국 아테네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타지에서 비운의 인생을 살아간다. 무릇 경계선에 서 있거나 경계선 너머에 서 있는 주변인으로부터 새로운 통찰력이 나오는 법이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원정 당시 본인이 직접 경험한 눈물과 피를 찍어 글을 썼고, 올림피아에서 홀로 추방의 쓴 잔을 마시며 험난한 시대의 원인과 참된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통찰했다.
소크라테스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또 다른 제자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그리스 최고의 군주의 거울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철학과 관념의 세계에 머물렀다면, 크세노폰은 만인대와 함께 페르시아 고지를 오르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인물이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강조했다면, 크세노폰은 동굴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왜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지,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지도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남겼다.
플라톤이 사색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을 살았다면, 크세노폰은 실천적인 삶Vita activa을 살았다. 따라서 철학적인 플라톤의 『국가』와 달리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엄정하고 냉혹한 실상을 거칠게 다루는 현실적인 책이다. 그는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때로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사랑하는 부하를 읍참마속泣斬馬謖해야 하는, 군주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냉혹한 문제를 치밀하게 다룬다.
왕 중의 왕, 키루스 대왕은 왜 군주의 거울이 되었을까?
놀라운 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책에서 키루스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
- 행운 또는 타인의 호의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군주가 된 인물들을 살펴볼 때, 저는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등과 같은 인물들이 가장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글은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거울에 해당하는 고대 세계의 이상적인 인물들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그는 키루스를 포함한 네 명의 군주를 소개한다. 모세Moses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종교적 인물이고, 로물루스Romulus와 테세우스는 각각 신화에 등장하는 로마와 아테네의 건국자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가장 뛰어난 군주로 열거한 네 명의 인물들 중 역사성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는 페르시아제국의 건국자 키루스 대왕뿐이다. 마키아벨리는 키루스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거울로 인정한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밝힌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이렇게 이어진다.
- 지적인 훈련을 위해서 군주는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데, 특히 위인들의 행적을 조명하기 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한 방법을 터득하며, 실패를 피하고 정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의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고찰하고, 무엇보다도 우선 위대한 인물들을 모방해야 합니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찬양과 영광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선배들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킬레스(필자 주: 아킬레우스)를 모방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모방했으며, 스키피오는 키로스(필자 주: 키루스)를 모방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항상 선배들을 자신들의 행적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로스의 생애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키피오의 생애와 행적을 고려할 때, 크세노폰의 저작에 기록된 대로 키로스를 모방함으로써 스키피오가 영광을 성취하는 데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을 받았는지, 그리고 스키피오의 성적인 절제, 친절함, 예의 바름, 관후함이 얼마나 많이 키로스의 성품을 모방함으로써 얻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현명한 군주라면 항상 이와 같이 행동하며, 평화 시에도 결코 나태하지 않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부지런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함으로써 역경에 처할 때를 대비합니다. 그 결과 운명이 변하더라도 그는 운명에 맞설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2부. 아포리아 시대, 리더의 공부 - '키루스의 교육'
1. 정의의 수호자가 돼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아펠레스의 중상모략>이라는 명작이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아펠레스Apelles(B.C. 4세기)는 그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 미술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나귀 귀를 가진 군주는 지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고, 손을 대기만 하면 무엇이든 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부자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꾀기 마련이다. 그의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주워먹으려는 사람들 혹은 군주나 부자를 현혹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영악한 사람들은 그 옆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당나귀 귀를 가진 군주도 ‘무지Ignorance’와 ‘의심Suspicion’을 상징하는 두 여인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 두 여인은 군주의 ‘당나귀 귀’에 대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지금 군주는 법정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며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무지와 의심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의 군주는 공정한 판결을 내릴 자신이 없는지 피곤에 지친 눈을 내리깔고 있다. 아예 공정한 재판을 포기한 모습이다. 나약한 군주 앞에서 왼손을 뻗치고 있는 남자는 ‘질투심Envy’을 상징한다. 군주는 무지와 의심에 휘둘릴 때나 질투심을 가지고 있을 때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왼손에 횃불을 든 채 죄 없는 남자 피고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는 젊은 여성은 ‘중상모략Calumny’을 상징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것은 중상모략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거짓의 세계에서는 낮이 밤이 되고, 또 어둠은 빛이 된다. 중상모략은 항상 그럴 듯하고 멋져 보여야 하므로 두 명의 여성이 중상모략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이 두 여인은 각각 ‘사기Fraud’와 ‘음모Conspiracy’를 상징한다. 중상모략을 하는 이유는 무언가 사기를 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어떤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다.
한편 ‘정직Honesty’을 상징하는 젊은 남자는 중상모략에 의해 머리카락을 휘어잡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다. 정직한 인간은 숨길 것이 없다. 그래서 알몸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직한 사람은 늘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선한 자는 독한 마음을 품고 악당에게 대항할 용기가 없기에 늘 무기력하게 당하기 일쑤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정직처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작품 속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면 왼쪽에 두 명의 여인이 더 보인다. 한 명은 완전한 나체고, 다른 여성은 검은 옷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가렸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누드의 여성은 ‘진실Truth’을 상징한다. 진실 또한 벌거벗은 ‘정직’처럼 숨길 것이 없으므로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옆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노파는 ‘후회Repentance’를 상징한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않은 광경을 지켜보던 후회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진실의 여신을 바라본다. 무언가 진실을 증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그녀는 일말의 양심으로 약간의 후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정의로운 군주는 정직한 인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상모략을 당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는 정직한 인간을 보호해주는 것이 군주의 첫 번째 임무다. 정의의 수호자, 그것이 바로 군주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그런데 지금 보티첼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주는 무지와 의심에 사로잡혀 공정한 심판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보티첼리의 작품은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이며, 군주는 어떻게 정의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키루스 대왕의 어린 시절
친정 나들이를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가기로 한 키루스의 어머니는 키루스에게 페르시아로 함께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외할아버지가 있는 메디아에 좀 더 머물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키루스는 외할아버지의 궁궐에 남아 말 타기를 좀 더 배운 뒤 페르시아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페르시아에는 좋은 말馬도 없고, 말이 힘껏 달릴 수 있는 넓은 평원도 없으니 메디아에서 좀 더 훈련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그럼, 메디아에서 정의는 어떻게 배울 것이냐?”라고 물었다. 키루스의 어머니는 왜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크세노폰이 이 질문을 『키루스의 교육』의 첫 부분에 배치한 이유는 바로 플라톤의 『국가』를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모두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셨지만, 철학적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크세노폰은 지금 플라톤의 『국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정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상 국가에서의 정의란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통해 구현된다.3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각 개인에게 주어진 덕목인 지혜와 용기 그리고 절제를 실현함으로써 정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었다. 지금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 첫 부분에서 플라톤의 사상을 반박하며 새로운 정의관을 제시한다.
키루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군주들에게 군주의 거울이 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모든 정의는 법에 근거해야 하며, 법에 근거하지 않은 판단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군주가 지켜야 할 정의의 원칙
“권리의 평등”이 참된 정의라고 가르친 어머니의 교육은 사실 플라톤이 말했던 정의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정의는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신분 계급의 덕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권력은 통치자와 수호자에 종속되고, 일반 시민들은 절제해야만 정의가 구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어머니를 통해 권리의 평등이야말로 참된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며, 참된 군주의 덕목은 “국가에서 명령하는 것을 가장 먼저 실천하고 법으로 공표된 것을 수용”하는 태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법을 지키고,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군주의 거울임을 밝힌 것이다.
보티첼리의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정직은 중상모략에게 늘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정직은 나약하고 외로운 반면, 중상모략은 사기와 음모의 도움을 받아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꾸미고 은밀한 함정을 파서 손쉽게 정직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은 경제학의 논리만이 아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인류의 역사는 악한 인간이 선한 사람보다 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한 사람은 사악한 인간에게 대적할 만큼의 용기를 가지지 못해 유약한 경우가 많고, 반면에 악한 인간은 다른 사람의 평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쁜 짓을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철면피인 경우가 많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 한 나라의 운영을 책임진 군주의 첫 번째 임무는 선한 사람을 악한 인간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중상모략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선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맛 나는 세상, 살아갈 만한 이유가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정의로운 군주는 권리의 평등이 참된 정의라고 확신하며 무지와 의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법이 엄중히 정한 바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2. 세월의 변화를 직시하라
루돌프라는 이름의 슬픈 황제
시간의 흐름과 세월의 변화를 읽은 소년 키루스
결국 전투는 키루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고, 그 뒤를 따르던 메디아의 군인들은 키루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큰소리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메디아 사람들은 키루스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그들의 왕인 아스티아게스나 왕자인 키악사레스보다 페르시아 왕자인 어린 소년 키루스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메디아 군인들의 환호성 속에서 키루스는 갑자기 자신의 나라인 페르시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메디아 군사들이 목청을 높여 자기 이름을 연호하면 할수록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살 염려가 있었다. 사실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외손자의 인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통치권에 도전이 될 만큼 키루스가 메디아 백성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손자의 귀환을 허락했다.
키루스는 그렇게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고 메디아를 떠났다. 그는 자신이 떠나야 할 시간을 알고 있었다. 배워야 할 전쟁의 기술을 이미 다 터득했고 실전 경험까지 쌓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메디아를 통치하던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경계와 질투를 받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고, 물론 다시 메디아로 돌아와 취할 행동도 미리 염두에 두었다. 키루스는 메디아를 떠나면서 동시에 다시 돌아와서 메디아를 차지할 계획을 세워두었고, 그래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두 메디아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가 웃으면서 했던 “눈을 깜박일 필요도 없이 마음껏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장차 메디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해 페르시아제국으로 합병되는 운명을 겪게 된다.
군주는 세월의 변화를 직시해야 하며, 시간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해야 한다. 지금이 머물 때인지, 아니면 떠나야 할 순간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3. 불확실성에 의존하지 마라
키루스, 처음으로 전쟁을 지휘하다
불확실성과 포르투나
불확실성에 의존한다는 것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것과 같다. 탁월한 장수는 자신의 운명을 불확실한 행운에 의지하지 않는다. 특히 나라와 같은 큰 집단을 책임지고 백성들을 이끌고 가야 하는 키루스와 같은 군주에게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태도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불확실성과 행운에 의존한다는 것은 군주의 책임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은 포르투나의 불확실성을 통제할 수 없다. 결국 욕심내지 말고, 요령 피우지 말고, 게으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에나 두오모 성당의 바닥 그림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지혜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이 포르투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법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지혜의 언덕에 오르기 위해
4. 스스로 고난을 함께 나누라
지혜를 추구하는 군주
자발적인 복종과 수사학
지혜와 용기
5. 군주다움을 끝까지 지켜라
'햄릿'의 명대사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신하 선택의 기준
6. 군주의 아내도 군주다
케네디 암살, 그 기록
아르메니아 왕실 여인의 기품과 위엄
수사 왕실 여인의 기품과 위엄
7. 사람들은 군주의 뒷모습을 본다
비너스 효과
사람들은 지금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8. 승리의 방식
세계의 화약고로 가다
신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대결
9.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라
사이렌의 유혹과 오디세우스
아라스파스의 임무
아라스파스의 최후
10. 레거시를 남겨라
독일의 리더십과 유럽
레거시를 남긴 비스마르크와 키루스 대왕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11. 초심을 잃지 마라
바빌론 강가에서
키루스 실린더
정복 전쟁이 종결된 후
키루스의 취임 연설
12. 제국은 사람이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다
제국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