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갈 길을 잃은 아포리아 시대에는 진정한 리더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지도자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텍스트가 있는데, "군주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군주의 거울은 시대마다 조금씩 바뀌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아래와 같은 네 권이다.


서문. 숙였던 고개를 들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고, 젊은이들 사이에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부재不在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리더십의 부재야말로 우리 시대의 질곡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틀입니다. 리더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부에는 그리스 고전이 기록된 그리스 아포리아 시대의 실감나는 현실이, 제2부에는 아포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가 성찰해야 할 가치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1부. 아포리아 시대의 기록 -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국가', '키루스의 교육'

1.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군주의 거울

비극은 왜 반복되는가?

아포리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Lack of Resources’, 즉 ‘길 없음Impasse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No Exit의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위기Crisis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위기 상황에서는 그래도 어떤 조치를 취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다. 아포리아 상태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한 채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

그리스에서 생겨난 이 말의 원래 뜻은 ‘막다른 곳에 다다름’이다. 그리스는 약 12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200개가 넘는 섬에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래서 도서島嶼 간 이동을 위한 항해술의 수준이 높았는데, 바람을 이용해 돛으로 파도를 타고 넘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만큼 해상 사고의 위험도 잦아졌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섬과 섬 사이를 항해하다가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즉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에 직면했을 때를 아포리아라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포리아 상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길 없음의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대형 참사와 총제적 리더십 부재를 경험하면서 아포리아 시대를 직감하고 있다. 어쩌면 ‘위대한 리더십’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아예 ‘리더’라는 단어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지금껏 우리는 리더란 조직이나 단체의 구성원을 이끌며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 또는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며 공동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근대적인 대형 참사들, 그에 따른 비합리적이며 무능한 처리 방식을 목격하면서 이제 그와 같은 이상적인 리더와 리더십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아포리아 시대의 필독서, 군주의 거울

이런 아포리아 시대에 우리가 함께 펼쳐보아야 할 책이 있다. 절망의 시대에 읽어야 할 인문학 장르의 도서들이다. 조직행동론Organizational Behavior에 기초한 기존의 경영학적 리더십 교재는 잠시 덮어두고, 참된 리더를 위한 인문학의 고전을 펼쳐보자는 것이다. 아포리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읽어야 할 인문학 고전을 ‘군주의 거울Mirror for Princes’이라 한다.

군주의 거울은 기원후 8세기, 유럽이 본격적으로 중세로 접어들던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문학의 리더십 교과 과정이다. 기원후 800년, 샤를마뉴Charlemagne(740~814)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로 취임한 뒤부터 단일 국가의 개념과 이를 떠받드는 봉건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국가 및 지역 간의 극심한 경쟁이 촉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중세의 봉건 제후들은 자신의 봉토를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인근 제후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탁월한 리더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싹트기 마련이다. 세상이 혼탁하면 할수록 대중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나라의 미래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 탁월한 리더를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기원후 8세기부터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탁월한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한 인문학 교과 과정이 개발됐다.

군주의 거울이 등장하기까지

로마의 건국자인 아이네아스는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군주의 거울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장차 알바롱가Alba Longa의 왕이 될 아들에게 닮고 배워야 할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모델이 바로 아버지인 자신과 트로이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외숙부 헥토르임을 밝힌다. 반인반신半人半神의 괴력을 지닌 아킬레우스의 창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던 헥토르의 용기를 기억하고, 허벅지에 박힌 화살촉을 뽑으며 적진으로 뛰어들던 아버지의 용기를 모범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왕자에게는 탁월한 리더의 모델이 필요한 법이고, 아스카니우스의 군주의 거울은 바로 아이네아스와 헥토르였다.

아이네아스가 그다음에 취한 행동은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손으로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거인처럼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4 ‘거인처럼’ 달려 나가는 모습을 통해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군주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장차 리더로서 살아가게 될 자신의 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군주의 거울이 됐다. 이렇게 멋진 아버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자신은 난장이처럼 살면서 자녀들에게는 거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는가. 아버지가 먼저 거인처럼 살아간다면 자식은 당연히 그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군주의 거울인 아버지를 통해 자신도 거인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이끄는 리더들에게 그리스 고전을 읽고 사숙할 것을 강조한 그(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지위에 오른 사람, 즉 리더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거 선인들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이 문장에서 처음으로 ‘거울’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후대 사람들이 군주의 거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성찰의 씨앗이 뿌려졌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제국의 리더들에게 플라톤Platon(B.C. 427~347),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B.C. 410~362), 리쿠르고스Lycourgos, 아게실라오스Agesilaus(B.C. 444~360)라는 탁월한 군주의 거울을 제시한다.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개선하고 언행을 삼가며 욕망을 자제하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철학자로, 에파미논다스는 테바이의 유능한 정치가로, 리쿠르고스는 전설적인 스파르타의 입법자로, 그리고 아게실라오스는 그리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왕으로 칭송받은 인물이다.

왜 하필 그리스일까?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노출된다. 그리스의 아포리아, 즉 길 없음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초, 즉 499~449년에 촉발된 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가 직면한 첫 번째 아포리아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자 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성 밖에 거주하는 노예를 모두 포함해도 최대 인구 30만 명 정도가 전부인 아테네 사람들에게 500만 명 이상의 강력한 군대가 공격을 감행한 사건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아포리아를 야기했다.

그리스에 밀어닥친 두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431~404년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그리스에 기원전 5세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테네의 황금기The Athenian Golden Age’인 동시에 참혹한 전쟁이 두 번이나 발발했던 죽음과 폭력의 시기였다. 그리스인들에게 펠로폰네소스 내전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함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읊던 동족끼리, 같은 헬라어를 쓰는 피붙이끼리, 올림픽이 열리면 함께 뛰고 달리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친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이 연속된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군주의 거울이 될 고전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고난 속에서 되새기는 고뇌의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길 없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현자들의 뼈를 깎는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두 번의 전쟁이 스쳐간 후에도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세기, 즉 두 번의 전쟁으로 얼룩진 기원전 5세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첫해에 그리스에 세 번째 아포리아가 찾아왔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399)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는 과거 두 번의 전쟁처럼 외부 요인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이 무엇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과 애제자인 크세노폰은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의 죽음 앞에서 분연히 펜을 들고 그리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왜 기원전 5~4세기 그리스에서 아포리아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위대한 통찰의 글을 남기고자 했다. 그들이 쓴 책이 바로 『국가』와 『키루스의 교육』이다. 장차 군주의 거울이 될 불세출의 명저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처한 아포리아는 너무도 치명적이고 심각하므로 이 시대의 인문학은 군주의 거울인 그리스의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난의 손가락을 타인에게 겨누지 말고 먼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성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어서 빨리 이 길 없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 충격과 절망의 아포리아가 있었기에 그 땅에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이 시련과 절망의 땅에서도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워야 하지 않겠는가.

2.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니아, 페르시아 전쟁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서부터 마라톤 전투(B.C. 490), 테르모필레 전투(B.C. 480), 살라미스 해전(B.C. 480)의 전개 과정을 설명한 뒤 결국 그리스에 패한 페르시아 군대가 본국으로 철수한 이야기를 끝으로 최초의 탐사 보고서를 마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크로이소스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힌다.4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이 방대한 책의 간단명료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추구했던 행복과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추구했던 행복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나라 리디아의 왕이나 큰 나라 페르시아의 왕은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자의 나라, 행복한 왕의 나라에 찾아온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이야기로 『역사』의 첫 장면을 풀어나간다. 이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엉뚱한 출발처럼 보일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아테네의 현자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전격 방문했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현자가 자신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자 크로이소스 왕은 내심 자신의 권력과 부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크로이소스는 국빈國賓인 솔론에게 자신의 넘쳐나는 보물창고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질문했다.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그대의 지혜에 관한 소문은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우리는 또 그대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세상을 구경하고자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는 말도 들었소. 그래서 나는 그대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진심을 묻고 싶소이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크로이소스 왕이시여, 단언컨대 이런 엄청난 황금과 권력을 가지신 폐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러나 솔론의 대답은 왕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는 크로이소스 왕에게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아테네 사람 텔로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지명하지 않은 솔론에게 화가 났지만, 짐짓 왕의 체면을 유지하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재차 물었다.

솔론의 두 번째 대답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솔론은, 자기 어머니를 헤라 여신의 축제장에 모시고 가기 위해 직접 멍에를 메고 먼 길을 달려 간 클레오비스Cleops와 비톤Biton 형제가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끝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나를 그런 평범한 자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다니 그대는 내 행복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요?”라고 소리치며 솔론을 질책했다. 솔론은 분노하는 크로이소스 왕 앞에서 참된 행복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크로이소스 전하,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 보아하니, 전하께서는 거부巨富에다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전하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사옵니다. 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중략) 그가 훌륭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전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 곧 행복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옵니다.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세월이 흘러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의 굴욕을 당하고, 결국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끔찍한 죽음을 기다리던 크로이소스는 문득 솔론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라고 말했던 솔론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려 14년 동안이나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엄청난 황금으로 자신의 보물창고를 채울 때는 그것이 세상 최고의 행복이라 믿었던 크로이소스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잠시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크로이소스는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솔론!”이라는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오, 솔론, 솔론, 솔론!”

키루스는 한 인간의 깊은 회환을 보면서 인생의 부질없음과 덧없음을 깨닫고 크로이소스의 화형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크로이소스와 같이 우매한 리더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권력에 도취되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의 노력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기준이거늘, 얼마나 많은 거짓 리더들이 권력과 부의 축적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또한 그들의 왜곡된 행복 추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가? 지금 헤로도토스는 한 어리석은 군주의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런 허황된 행복의 추구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인공 크로이소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등장하는 군주의 거울인 셈이다. 그는 우리가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의 첫 번째 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크로이소스 왕의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틴토레토의 그림을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카누스의 둥근 거울 때문이다. 틴토레토의 작품은 우리에게 불카누스의 둥근 거울을 보라고 요구한다. 그 거울 속에는 죽자고 일만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성공한 인물 대신 아내와 가정을 소홀히 한 남편 불카누스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일 뿐이다. 틴토레토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 기초 도안을 위한 스케치를 남겼다. 여기서도 의도적으로 거울의 이미지를 강조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불카누스의 가정에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카누스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과 아내를 돌보지 않은 불카누스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였다. 그 역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다를 바 없는 실수를 범했다. 불카누스처럼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크로이소스처럼 많은 황금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행복의 지표가 될 수는 없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지독한 반어법을 구사하며 우리에게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한다. 『역사』의 두 번째 주인공인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 바로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헤로도토스는 나름대로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시종일관 편견 없이 크세르크세스를 평가하려 애썼다. 그래서 『역사』에는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이유와 역사적 당위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쓴 이유다. 즉 『역사』의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란 뜻이고, 그의 이야기는 제7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에서 일견 현명하고 탁월한 군주의 자세를 엿보게 된다. 참모들의 찬반 의견을 모두 청취하고, 일시에 내린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를 즉각 수정할 줄 알며, 새롭게 내린 합리적인 결정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군주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그가 초기에 보여준 이런 신중한 행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훌륭한 면은 여기까지다. 그 뒤로 이어지는 크세르크세스의 판단과 행보는 본받지 말아야 할 군주의 부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크세르크세스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의 비극이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지도록 마음을 길들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 때문에 결국 크세르크세스 자신과 페르시아 백성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어이없는 짓을 일삼는 군주였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개꿈을 신의 현몽이라 착각할 만큼 우유부단했고, 아무 필요 없는 아토스 운하를 건설할 만큼 자기과시욕에 넘쳐났으며, 바닷물을 채찍으로 때릴 만큼 어리석은 군주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두 번째 군주 크세르크세스 역시 앞부분에 등장한 크로이소스 왕처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라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500만 대군을 진군시킬 만큼 그의 권력이 온 땅을 덮었으나 그의 오만과 명예욕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고, 그의 어리석은 행동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됐다.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역사』의 세 번째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의 공격으로부터 그리스와 아테네를 구한 테미스토클레스다. 그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를 헤쳐나간 아테네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언제나 돈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고 묘사한다.32 실제로 그는 우방 국가를 기만하고 뇌물을 받아 챙기기도 한 인물이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일찍이 테미스토클레스보다 더 야심 많은 사람은 없었다”고 일갈할 만큼 명예욕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증언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아테네 해군이 그리스의 구원자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이라는 전대미문의 아포리아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지략과 과감한 추진력 부분에서 후대의 군주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을 갖춘 군주의 거울이 됐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끝까지 읽어보면 이 대목에서부터 놀라운 반전이 펼쳐진다. 만약 헤로도토스가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집필을 마쳤다면 아마 그의 『역사』는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이후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했다는 놀라운 반전의 기록을 남겼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조국의 배신자가 됐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때부터 아예 노골적으로 해적질을 일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기록을 최고의 영웅이 아닌 최후의 변절자로 마무리한다. 권력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야심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정도를 넘어 결국 조국을 배신한 인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결론: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기원전 5세기 전반,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가 닥쳤을 때 헤로도토스는 대혼란의 이유와 리더십의 상관관계에 대해 천착穿鑿했다. 페르시아 전쟁과 같이 의미 없는 전쟁은 왜 발생하는가. 그 전쟁을 일으킨 군주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군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세 명의 리더인 크로이소스,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를 주인공으로 제시했다.

참혹했던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탐사 보고서를 작성하던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그 사회는 아포리아에 처하게 된다.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진 왕과 명예욕에 불타올라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군주,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군이 나라를 이끌면 그 나라는 쇄락을 면치 못하게 되고 온 국민이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부적절한 리더 때문에 아포리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함량 미달인 자는 함부로 리더의 위치에 오르지 말라!’는 것이다.

3. 반복되는 역사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 철학으로 아포리아에 맞선 스승과 제자 - 플라톤의 '국가'

5.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의 거울 -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2부. 아포리아 시대, 리더의 공부 - '키루스의 교육'

1. 정의의 수호자가 돼라

2. 세월의 변화를 직시하라

3. 불확실성에 의존하지 마라

4. 스스로 고난을 함께 나누라

5. 군주다움을 끝까지 지켜라

6. 군주의 아내도 군주다

7. 사람들은 군주의 뒷모습을 본다

8. 승리의 방식

9.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라

10. 레거시를 남겨라

11. 초심을 잃지 마라

12. 제국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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