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hFromm의 저작.
2장. 병든 사회란 무엇인가?
"두 사람이 서로 '감응성 정신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수백만명 사이에서도 '감응성 정신병'이 일어날 수 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악을 공유한다고 하여 이 악이 미덕이 될 수는 없고 모두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그 잘못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수백만명이 같은 형태의 정신이상을 나타냈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건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와 자발성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객관적인 목표라고 가정할 때, 어떤 한 사람이 자유와 자발성과 진정한 자기 표현력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심한 결함을 갖고 있다고 간주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이 현상을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결함으로 다룬다."
"반면 그런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경멸받거나 난처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간의 결함들은 문화적으로 보편화되어 버렸따. 오늘날 우리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행동하고 느끼는 사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실재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완전히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어떤 사람으로 행동하는 사람, 진짜 웃음을 한갖 가식된 웃음으로 바꾸어놓는 사람, 진지한 대화 대신 의미없는 재잘거림을 일삼는 사람, 진지하게 고통을 느껴야할 때 맥빠진 자포 자기의 상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대다수를 위해 문화란 병들지 않고 그저 결함이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문화가 그 스스로의 결함에서 파생되는 뚜렷한 노이로제 징후를 막도록 스스로 진정제를 마련해주는 것과 같다."
"노이로제와 사회가 만들어낸 결함의 차이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보면 사회가 뚜렷한 증상의 발생을 막는 진정제만 갖고 있는 한 별 탈은 없고 사회가 만들어낸 결함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회 기능은 원만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전체 국민이나 국민의 일부인 사회집단은 오랫동안 예속되고 착취당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반항한다'. 그들은 무관심을 보임으로써 반항하거나 봉사해야 할 그들의 지능과 자발성과 기술 등 모든 기능을 점차 감퇴시키는 방법으로써 반항한다. 또는 증오와 파괴성을 쌓음으로써 반항하며, 그 결과 자기 자신과 지배자 그리고 그들의 체제에 종말을 가져온다. 다시 그들의 반항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들의 창의력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하나의 건전한 사회라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일치하는 사회, 즉 인간이 자기 요고구라고 느끼는 것과 모두 일치하는 사회라는 말이 아니라 - 병적 욕구까지도 주관적으로는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 연구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객관적인 욕구와 일치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이 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첫 과제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간성과 사회와의 사이에서 계속 일어나는 갈등과, 특히 현대 사회에서 계속 일어나는 갈등과, 특히 현대사회에 관한 한 이같은 갈등이 빋어낼 결과뿐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연구하는 데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3장. 인간의 상황 - 인간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열쇠
인간의 상황
"진화된 동물일수록 행동약식이 유연하며 출생시의 구조적 적응이 불완전하다."
"동물은 자연의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삶이 주어진다'. 즉 동물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결코 자연을 초월하지 못한다."
"동물의 존재란 동물과 자연간에 생긴 일종의 조화이다."
"동물이 자연을 초월할 때, 동물이 생명체로서의 순전한 피동적 역할을 초월할 때, 생물학적으로 말해 가장 무력한 동물이 될 때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동물은 곧게 서는 자세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며 두뇌는 그 전에 가장 고등했던 동물보다 더욱 자라난다. 인간의 탄생은 수십만년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는 것, 생명이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아의 의식, 이성과 상상력은 동물 존재의 특성이 되는 '저화'를 파괴한다. 그렇게 된 다음 인간은 우주의 예외자이며 변종이 되었다. 인간은 물질적 법칙에 좌우되는 자연의 일부분이며 그 법칙을 변경시킬 수는 없으나 그 밖의 자연을 초월한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면서 따로 떨어져 있다. 인간은 고향이 없으면서 그러나 모든 다른 생명체와 공유하는 고향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우연한 장소와 시간에 내던져진 인간은 또다시 우연하게 그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탄생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는 안정된 상태를 포기하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태를 찾아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개의 서로 모순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는 자궁으로부터 즉 존재의 동물적 형태로부터 더욱 인간적인 존재로 나아가려는 경향, 다시 말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경향이며 또 하나는 자궁으로, 자연으로, 확실성과 안정을 향해 되돌아가려는 경향이다. 개인이나 인류의 역사에서는 진보적 경향이 더욱 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정신병의 현상이나 인류가 수 세대 전의 상태로 다시 물러서는 현상 등은 새로운 탄생이 있을 때마다 따라다니는 격렬한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조건에서 생기는 인간의 욕구
고착성 - 우애와 근친애
"출생이 자궁의 감싸주는 보호에서 떠남을 의미하듯 성장은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떠남을 뜻한다. 성인과 어린이는 큰 차이가 있지만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한때 존재했던 이같은 상황에 대한 갈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은 자기 발로 서고 자신을 돌보며 자기와 타인에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하지만 어린이는 이 모든 것을 해낼 능력이 없다. 그러나 늘어나는 삶의 고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단편성, 성인으로서의 우연성, 우리가 저지르는 불가피한 과오를 고려하면 성인의 상황과 어린이의 상황은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어떤 성인도 도움과 따뜻함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와 비교하여 여러모로 다른 점도 많지만 또 비슷한 점도 많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얻었던 안전과 정착감을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갈망하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느낌을 달리 찾지 못하는 한 그 절실한 갈망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신 병리학상으로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 현상이 널리 실증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근친애의 문제는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집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의 유대는 인간에게 결부감과 소속감을 주는 모든 자연의 혈통 가운데서 가장 기초적인 형태일 뿐이다. 혈통의 유대는 어떤 계통으로 맺어졌든 혈연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확장된다. '가족'과 '씨족' 그리고 그 후에는 국가 민족이나 또는 교회가 원래 어머니가 아이에게 작용했던 것과 동일한 기능을 맡는다. 개인은 거기에 의지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의 동일감을 갖는다. 동일한 씨족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낯설고 위험한 사람 - 그 씨족만이 갖는 동일한 인간의 자질을 나누지 않아 - 으로 간주된다."
"'프로이드'가 근친애적인 고착에서 부정적이고 병원적 요인만을 본 반면 '바코펜'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의 부정적 측면과 함께 긍정적인 측면을 명백히 보았다. '긍정적인 측면은 여가장적 구조에 넘치는 삶과 자유와 평등을 긍정하는 감각이다.' 인간이 자연의 아이이며 어머니의 아이인 이상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와 주장을 가지며 유일한 가치는 인생이라는 가치 뿐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낫다거나 또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기대에 부응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아이이기 때문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어린이들은 모두 비슷하며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을 권리도 같다. '바코펜'은 또 여가장적 구조의 부정적 측면도 명확하게 관찰했다. 즉 '자연과 피와 그리고 흙에 묶여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개성과 이성의 발전을 저지당한다. 따라서 그 인간은 언제나 어린이로 남으며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성은 아이를 만들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또 아이를 양육하고 보살피는 일을 맡고 있지 않아 여성보다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다. 남성은 자연에 덜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존재와 안전의 터전으로서의 자연 대신, 이성을 개발하고 사상과 원칙과 생산의 인위적인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에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강도가 없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는 달리 유아에 대한 전적인 포용과 보호와 사랑의 역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부자관계는 한편으로는 복종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항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항상 분리의 요인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가부장 콤플렉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상과 훈련과 양심과 개인주의이며 부정적 측면은 위계질서, 억압, 불평등, 복종이다.'"
"우리는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아이가 된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것은 해야한다' '저것은 하면 아노딘다'고 말한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버지는 꾸짖고 옳은 일을 칭찬한다.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반면 우리 안에 있는 어머니는 다르게 말한다. '너의 아버지가 너를 꾸짖는 것은 매우 옳다. 그러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내 아이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용서한다. 네가 한 일이 인생과 행복에 대한 너의 권리를 해칠 수는 없다'고 하는 듯한 말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리 말하고 사실 정반대로 말하는 듯하다. 사실 의무의 원칙과 사랑의 원칙의 모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양심간의 모순은 인간 존재에 고유한 모순이며 이 모순의 양면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의무의 명령만을 따르는 양심은 사랑의 명령만을 따르는 양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왜곡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내면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양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또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에 사랑을 느끼며 모든 범죄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안에서 들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비니즘은 구약성경의 순수한 가부장적 정신으로 되돌아가 종교의 개념에서 모성적 요인을 제거했다. 인간은 더 이상 교회와 동정녀의 모성적 사랑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인간은 완전히 굴복할 때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엄격한 신과 직면한 고독한 존재였다. 군주와 국가는 절대적으로 강력해졌고 그것은 신의 요청으로 시인되었다. 봉건적인 속박에서 풀려나는 해방은 고독과 무력감을 증대시켰지만 가부장적인 원칙의 긍정적 측면은 또한 합리적인 사상과 개인주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가장적 콤플렉스'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현대 서방세계에서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 평등사상, 생명의 신비, 자연의 열매를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구너리가 있다는 사상 등 그 긍정적 측면은 자연법 휴머니즘 계몽철학 민주사회주의의 목표 속에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에 공통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대지의 자식들이며 그녀의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에 도달하지 않고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것은 인간은 모두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의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부장과 여가장정신의 긍정적 측면이 혼합된 진보적 발전과 함께 두 원칙의 부정적 측면도 발전했따. 즉 인종과 민족의 우상이 결합된 국가숭배가 발전된 것이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는 국가와 씨족숭배의 그와 같은 혼합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것이며 이 두 원칙은 '총통'이라는 인물에서 구현되었다."
"만일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 사상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의도했던 대로 사태가 진전되었더라면 중세 가톨릭의 초민족적 세계의 와해는 보다 높은 형태의 가톨리시즘 즉 씨족숭배를 극복하는 인류보편주의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그러한 발전의 조건을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는 씨족우상의 새로운 형태로 물러섰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초기 기독교가 뿌리 뽑으려고 했던 바로 그런 방향이었다. 원래는 진보적 운동이었던 내소날리즘은 봉건주의와 절대주의의 속박에 대치되었다. 오늘날의 일반 사람들은 '인간의 아들'이라는 데서 보다는 어느 민족에 속해 있다는 데서 일체감을 얻는다. 그의 객관성, 즉 이성은 이러한 집착으로 왜곡되었다. '이방인'에 대한 판단 기준도 자기가 속해 있는 씨족구성원들에 대한 기준과 다르다. 이방인에 대한 감정도 똑같이 왜곡되어 있다. 혈연으로나 지연으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그들에 대한 편집병적인 망상은 사소한 일로도 폭발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근친애적 고착은 개인과 타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구성원들과의 관계와 또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해치는 것이다. 혈연과 지연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지 않은 사람은 인간으로 완전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과 이성의 능력이 불구의 상태이며 자기 자신과 동포를 인간의 실재로 체험하지 못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대혁명이 '~으로부터의 자유'를 '~에로의 자유'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한 이후 내쇼날리즘과 국가숭배는 근친애적 고착상태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후가 되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의 이성과 사랑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고, 인간적인 유대와 정의의 바탕 위에 이 세계를 건설하며, 만인이 형제라는 경험속에 자신도 몸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때문이, 인간은 새로운 인간적인 결속의 형태를 발견하고 이 세계를 참다운 인간의 가정으로 바꿔놓게 될 것이다."
일체감 - 개인화와 집단에의 동조성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이성과 상상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 '나는 나다'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살아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가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연과의 본원적인 유대를 잃었으며, 결단을 내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웃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자신의 행동주체로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성에 대한 욕구나 안정 또는 초월의 욕구와 관련해서 이 일체감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은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고는 건전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일체감은, 자기 자신과 자연 또는 어머니를 연결하는 '1차적 유대'로부터 차츰 탈피, 발전하는 과정을 밟는다. 자기를 하나로 느끼기 때문에 '나'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외계를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의식하고 나서야만 비로소 자신을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됐을 때라야 비로소 그는 그 자신을 '나'라고 일컫게 된다."
"'인류'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그 자신을 독자적인 존재로서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씨족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느냐는 정도와 그리고 개성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원시씨족의 성원은 자신의 일체감에 대한 감정을 '나는 우리다'라는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직 그 자신을 씨족을 떠나 존재하는 개인으로 의식하지 못한다."
"봉건제도가 무너지자 이 일체감이 흔들리게 됐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신랄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서구문화는 인간이 모든 분야에서 개성을 만끽하도록 하는 기반을 창조해 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개인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 스스로 사소하도록 교육함으로써, 인간을 권위주의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이 모든 것이 중심이며 자기활동 주체라는 의미에서 '나'를 느낄 수 있게 하고 개인은 각자 그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소수만이 이같은 새로운 '나'를 체험했다. 다수에게는 개인주의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그 배후에 있는 개별적인 일체감을 체득하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적 일체감에 대용할 많은 것들이 추구되어 왔고 또 발견됐다. 민족 종교 계급 직업 등이 일체감을 조성하는덴 봉사한다. 일체화가 사라지고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개별적인 일체감이 생기기 전까지는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개신교도다' '나는 사업가다' 등등의 인식이 일체감을 체험하게 하는 공식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일체화는 넓은 의미에서 지위의 일체화다."
"개인주의 이전의 씨족과의 일체화 대신에 새로이 집단에의 일체화가 형성됐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확신으로서, 군중에 소속되어 있다는 일체감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