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hFromm의 저작.

  1. 우리들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인가 Are We Sane?

  2. 병든 사회란 무엇인가 Can A Society Be Sick? - The Pathology of Normalcy

  3. 인간의 상황 The Human Situation - The Key to Humanistic Psychoanalysis

    1. The Human Situation

    2. Man's Needs - As They Stem from the Conditions of His Existence

      1. Relatedness vs. Narcissism

      2. Transcendence - Creativeness vs. Destructiveness
      3. Rootedness - Brotherliness vs. Incest
      4. Sense of Identity - Individuality vs. Herd Conformity

      5. The Need for a Frame of Orientation and Devotion - Reason vs. Irrationality
  4. 정신의 건강과 사회 Mental Health And Society

  5.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Man in Capitalistic Society

    1. The Social Character
    2. The Structure of Capitalism and the Character of Man

      1. 17~18c Capitalism

      2. 19c Capitalism

      3. 20c Society

        1. Social and Economic Changes

        2. Characterological Changes

          1. Quantification, Abstractification

          2. Alienation

          3. Various Other Aspects

            1. Anonymous Authoity - Conformity

            2. The Principle of Nonfrustration

            3. Free Association and Free Talk

            4. Reason, Conscience, Religion

            5. Work

            6. Democracy

        3. Alienation and Mental Health
  6. 그 밖의 다른 진단들 Various Other Diagnoses

    1. 19c

    2. 20c

  7. 여러가지의 해답 Various Answers

    1. Authoritarian Idolatry

    2. Super-Capitalism

    3. Socialism

  8. 정상상태로 가는 길 Road to Sanity

    1. General Considerations

    2. Economic Transformation

      1. Socialism as a Problem
      2. The Principle of Communitarian Socialism
      3. Socio-psychological Objections
      4. Interest and Participation as Motivation
      5. Practical Suggestions
    3. Political Transformation

    4. Cultural Transformation

  9. Summary - Conclusion

2장. 병든 사회란 무엇인가?

"두 사람이 서로 '감응성 정신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수백만명 사이에서도 '감응성 정신병'이 일어날 수 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악을 공유한다고 하여 이 악이 미덕이 될 수는 없고 모두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그 잘못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수백만명이 같은 형태의 정신이상을 나타냈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건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와 자발성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객관적인 목표라고 가정할 때, 어떤 한 사람이 자유와 자발성과 진정한 자기 표현력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심한 결함을 갖고 있다고 간주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이 현상을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결함으로 다룬다."

"반면 그런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경멸받거나 난처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간의 결함들은 문화적으로 보편화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행동하고 느끼는 사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실재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완전히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어떤 사람으로 행동하는 사람, 진짜 웃음을 한갖 가식된 웃음으로 바꾸어놓는 사람, 진지한 대화 대신 의미없는 재잘거림을 일삼는 사람, 진지하게 고통을 느껴야할 때 맥빠진 자포 자기의 상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대다수를 위해 문화란 병들지 않고 그저 결함이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문화가 그 스스로의 결함에서 파생되는 뚜렷한 노이로제 징후를 막도록 스스로 진정제를 마련해주는 것과 같다."

"노이로제와 사회가 만들어낸 결함의 차이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보면 사회가 뚜렷한 증상의 발생을 막는 진정제만 갖고 있는 한 별 탈은 없고 사회가 만들어낸 결함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회 기능은 원만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전체 국민이나 국민의 일부인 사회집단은 오랫동안 예속되고 착취당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반항한다'. 그들은 무관심을 보임으로써 반항하거나 봉사해야 할 그들의 지능과 자발성과 기술 등 모든 기능을 점차 감퇴시키는 방법으로써 반항한다. 또는 증오와 파괴성을 쌓음으로써 반항하며, 그 결과 자기 자신과 지배자 그리고 그들의 체제에 종말을 가져온다. 다시 그들의 반항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들의 창의력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하나의 건전한 사회라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일치하는 사회, 즉 인간이 자기 욕구라고 느끼는 것과 모두 일치하는 사회라는 말이 아니라 - 병적 욕구까지도 주관적으로는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 연구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객관적인 욕구와 일치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이 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첫 과제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간성과 사회와의 사이에서 계속 일어나는 갈등과, 특히 현대 사회에서 계속 일어나는 갈등과, 특히 현대사회에 관한 한 이같은 갈등이 빋어낼 결과뿐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연구하는 데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3장. 인간의 상황 - 인간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열쇠

인간의 상황

"진화된 동물일수록 행동약식이 유연하며 출생시의 구조적 적응이 불완전하다."

"동물은 자연의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삶이 주어진다'. 즉 동물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결코 자연을 초월하지 못한다."

"동물의 존재란 동물과 자연간에 생긴 일종의 조화이다."

"동물이 자연을 초월할 때, 동물이 생명체로서의 순전한 피동적 역할을 초월할 때, 생물학적으로 말해 가장 무력한 동물이 될 때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동물은 곧게 서는 자세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며 두뇌는 그 전에 가장 고등했던 동물보다 더욱 자라난다. 인간의 탄생은 수십만년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는 것, 생명이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아의 의식, 이성과 상상력은 동물 존재의 특성이 되는 '저화'를 파괴한다. 그렇게 된 다음 인간은 우주의 예외자이며 변종이 되었다. 인간은 물질적 법칙에 좌우되는 자연의 일부분이며 그 법칙을 변경시킬 수는 없으나 그 밖의 자연을 초월한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면서 따로 떨어져 있다. 인간은 고향이 없으면서 그러나 모든 다른 생명체와 공유하는 고향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우연한 장소와 시간에 내던져진 인간은 또다시 우연하게 그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탄생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는 안정된 상태를 포기하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태를 찾아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개의 서로 모순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는 자궁으로부터 즉 존재의 동물적 형태로부터 더욱 인간적인 존재로 나아가려는 경향, 다시 말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경향이며 또 하나는 자궁으로, 자연으로, 확실성과 안정을 향해 되돌아가려는 경향이다. 개인이나 인류의 역사에서는 진보적 경향이 더욱 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정신병의 현상이나 인류가 수 세대 전의 상태로 다시 물러서는 현상 등은 새로운 탄생이 있을 때마다 따라다니는 격렬한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조건에서 생기는 인간의 욕구

고착성 - 우애와 근친애

"출생이 자궁의 감싸주는 보호에서 떠남을 의미하듯 성장은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떠남을 뜻한다. 성인과 어린이는 큰 차이가 있지만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한때 존재했던 이같은 상황에 대한 갈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은 자기 발로 서고 자신을 돌보며 자기와 타인에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하지만 어린이는 이 모든 것을 해낼 능력이 없다. 그러나 늘어나는 삶의 고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단편성, 성인으로서의 우연성, 우리가 저지르는 불가피한 과오를 고려하면 성인의 상황과 어린이의 상황은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어떤 성인도 도움과 따뜻함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와 비교하여 여러모로 다른 점도 많지만 또 비슷한 점도 많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얻었던 안전과 정착감을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갈망하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느낌을 달리 찾지 못하는 한 그 절실한 갈망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신 병리학상으로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 현상이 널리 실증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근친애의 문제는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집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의 유대는 인간에게 결부감과 소속감을 주는 모든 자연의 혈통 가운데서 가장 기초적인 형태일 뿐이다. 혈통의 유대는 어떤 계통으로 맺어졌든 혈연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확장된다. '가족'과 '씨족' 그리고 그 후에는 국가 민족이나 또는 교회가 원래 어머니가 아이에게 작용했던 것과 동일한 기능을 맡는다. 개인은 거기에 의지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의 동일감을 갖는다. 동일한 씨족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낯설고 위험한 사람 - 그 씨족만이 갖는 동일한 인간의 자질을 나누지 않아 - 으로 간주된다."

"'프로이드'가 근친애적인 고착에서 부정적이고 병원적 요인만을 본 반면 '바코펜'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의 부정적 측면과 함께 긍정적인 측면을 명백히 보았다. '긍정적인 측면은 여가장적 구조에 넘치는 삶과 자유와 평등을 긍정하는 감각이다.' 인간이 자연의 아이이며 어머니의 아이인 이상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와 주장을 가지며 유일한 가치는 인생이라는 가치 뿐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낫다거나 또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기대에 부응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아이이기 때문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어린이들은 모두 비슷하며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을 권리도 같다. '바코펜'은 또 여가장적 구조의 부정적 측면도 명확하게 관찰했다. 즉 '자연과 피와 그리고 흙에 묶여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개성과 이성의 발전을 저지당한다. 따라서 그 인간은 언제나 어린이로 남으며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성은 아이를 만들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또 아이를 양육하고 보살피는 일을 맡고 있지 않아 여성보다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다. 남성은 자연에 덜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존재와 안전의 터전으로서의 자연 대신, 이성을 개발하고 사상과 원칙과 생산의 인위적인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에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강도가 없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는 달리 유아에 대한 전적인 포용과 보호와 사랑의 역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부자관계는 한편으로는 복종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항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항상 분리의 요인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가부장 콤플렉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상과 훈련과 양심과 개인주의이며 부정적 측면은 위계질서, 억압, 불평등, 복종이다.'"

"우리는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아이가 된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것은 해야한다' '저것은 하면 아노딘다'고 말한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버지는 꾸짖고 옳은 일을 칭찬한다.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반면 우리 안에 있는 어머니는 다르게 말한다. '너의 아버지가 너를 꾸짖는 것은 매우 옳다. 그러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내 아이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용서한다. 네가 한 일이 인생과 행복에 대한 너의 권리를 해칠 수는 없다'고 하는 듯한 말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리 말하고 사실 정반대로 말하는 듯하다. 사실 의무의 원칙과 사랑의 원칙의 모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양심간의 모순은 인간 존재에 고유한 모순이며 이 모순의 양면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의무의 명령만을 따르는 양심은 사랑의 명령만을 따르는 양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왜곡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내면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양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또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에 사랑을 느끼며 모든 범죄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안에서 들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비니즘은 구약성경의 순수한 가부장적 정신으로 되돌아가 종교의 개념에서 모성적 요인을 제거했다. 인간은 더 이상 교회와 동정녀의 모성적 사랑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인간은 완전히 굴복할 때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엄격한 신과 직면한 고독한 존재였다. 군주와 국가는 절대적으로 강력해졌고 그것은 신의 요청으로 시인되었다. 봉건적인 속박에서 풀려나는 해방은 고독과 무력감을 증대시켰지만 가부장적인 원칙의 긍정적 측면은 또한 합리적인 사상과 개인주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가장적 콤플렉스'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현대 서방세계에서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 평등사상, 생명의 신비, 자연의 열매를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구너리가 있다는 사상 등 그 긍정적 측면은 자연법 휴머니즘 계몽철학 민주사회주의의 목표 속에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에 공통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대지의 자식들이며 그녀의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에 도달하지 않고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것은 인간은 모두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의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부장과 여가장정신의 긍정적 측면이 혼합된 진보적 발전과 함께 두 원칙의 부정적 측면도 발전했다. 즉 인종과 민족의 우상이 결합된 국가숭배가 발전된 것이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는 국가와 씨족숭배의 그와 같은 혼합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것이며 이 두 원칙은 '총통'이라는 인물에서 구현되었다."

"만일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 사상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의도했던 대로 사태가 진전되었더라면 중세 가톨릭의 초민족적 세계의 와해는 보다 높은 형태의 가톨리시즘 즉 씨족숭배를 극복하는 인류보편주의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그러한 발전의 조건을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는 씨족우상의 새로운 형태로 물러섰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초기 기독교가 뿌리 뽑으려고 했던 바로 그런 방향이었다. 원래는 진보적 운동이었던 내소날리즘은 봉건주의와 절대주의의 속박에 대치되었다. 오늘날의 일반 사람들은 '인간의 아들'이라는 데서 보다는 어느 민족에 속해 있다는 데서 일체감을 얻는다. 그의 객관성, 즉 이성은 이러한 집착으로 왜곡되었다. '이방인'에 대한 판단 기준도 자기가 속해 있는 씨족구성원들에 대한 기준과 다르다. 이방인에 대한 감정도 똑같이 왜곡되어 있다. 혈연으로나 지연으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그들에 대한 편집병적인 망상은 사소한 일로도 폭발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근친애적 고착은 개인과 타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구성원들과의 관계와 또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해치는 것이다. 혈연과 지연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지 않은 사람은 인간으로 완전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과 이성의 능력이 불구의 상태이며 자기 자신과 동포를 인간의 실재로 체험하지 못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대혁명이 '~으로부터의 자유'를 '~에로의 자유'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한 이후 내쇼날리즘과 국가숭배는 근친애적 고착상태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후가 되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의 이성과 사랑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고, 인간적인 유대와 정의의 바탕 위에 이 세계를 건설하며, 만인이 형제라는 경험속에 자신도 몸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때문이, 인간은 새로운 인간적인 결속의 형태를 발견하고 이 세계를 참다운 인간의 가정으로 바꿔놓게 될 것이다."

일체감 - 개인화와 집단에의 동조성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이성과 상상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 '나는 나다'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살아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가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연과의 본원적인 유대를 잃었으며, 결단을 내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웃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자신의 행동주체로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성에 대한 욕구나 안정 또는 초월의 욕구와 관련해서 이 일체감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은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고는 건전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일체감은, 자기 자신과 자연 또는 어머니를 연결하는 '1차적 유대'로부터 차츰 탈피, 발전하는 과정을 밟는다. 자기를 하나로 느끼기 때문에 '나'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외계를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의식하고 나서야만 비로소 자신을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됐을 때라야 비로소 그는 그 자신을 '나'라고 일컫게 된다."

"'인류'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그 자신을 독자적인 존재로서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씨족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느냐는 정도와 그리고 개성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원시씨족의 성원은 자신의 일체감에 대한 감정을 '나는 우리다'라는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직 그 자신을 씨족을 떠나 존재하는 개인으로 의식하지 못한다."

"봉건제도가 무너지자 이 일체감이 흔들리게 됐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신랄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서구문화는 인간이 모든 분야에서 개성을 만끽하도록 하는 기반을 창조해 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개인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 스스로 사소하도록 교육함으로써, 인간을 권위주의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이 모든 것이 중심이며 자기활동 주체라는 의미에서 '나'를 느낄 수 있게 하고 개인은 각자 그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소수만이 이같은 새로운 '나'를 체험했다. 다수에게는 개인주의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그 배후에 있는 개별적인 일체감을 체득하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적 일체감에 대용할 많은 것들이 추구되어 왔고 또 발견됐다. 민족 종교 계급 직업 등이 일체감을 조성하는덴 봉사한다. 일체화가 사라지고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개별적인 일체감이 생기기 전까지는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개신교도다' '나는 사업가다' 등등의 인식이 일체감을 체험하게 하는 공식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일체화는 넓은 의미에서 지위의 일체화다."

"개인주의 이전의 씨족과의 일체화 대신에 새로이 집단에의 일체화가 형성됐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확신으로서, 군중에 소속되어 있다는 일체감을 의미한다."

4장. 정신의 건강과 사회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듯 정신적으로 불건전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존재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본질적인 정신적 욕구는 어떤 형태로든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와 인간성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데에는 인간의 본성과 거기에서 생기는 욕구를 고려해야 하며 인간에 대한 사회의 촉진적인 충족과 억압적인 충격과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인간에 대한 근대사회의 적극적인 영향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이 측면에 대해선 주의를 덜 기울이고 어느정도 무시되어온 근대사회의 병적인 기능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5장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일반적 의미의 '사회'란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다르면서 확인될 수 있는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는 특정의 사회구조가 있을 뿐이다. 이들 사회구조는 확실히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할지라도 특정한 시대 안에서는 비교적 고정되어 있으며, 사회는 특별한 구조의 틀안에서 운영됨으로써만 비로소 존재한다. 사회의 구성원이나 사회에 있어서의 여러 계급이나 신분집단의 구성원은 사회체제가 요구하는 의미의 기능에 부합할 수 있는 방법에 한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성원의 에너지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적 성격의 기능이다. 즉 사회성원의 행동은 사회의 양식에 따르느냐 않느냐를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고, '사회성원이 행동해야 하는 바대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것이며 동시에 문화의 요구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만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특정의 사회가 지속적으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이 사회 인간들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연결해 주는 것이' 그 사회적 성격이 맡은 기능이다."

"노동과 시간엄수 정돈에 대한 필요성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내적인 충동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사회가 이와 같은 충동이 당연히 일어나도록 하는 사회적 성격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성격의 기원과 기능에 관한 이런 개념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난처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개인이 문화 속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역할에 의해 성격구조가 형성된다는 가정은 인간의 성격이 유년기에 형성된다는 가정과 모순되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가족은 '사회의 정신적인 대리점'이며 사회의 요구를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제도로 생각될 수 있다. 가족은 이 기능을 두가지 방법으로 수행한다.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라나는 어린이의 성격형성에서 양친의 성격이 주는 영향력이다."

"부모의 성격 뿐 아니라 일정한 문화에서 관습이 된 어린이 교육방법도 어린이의 성격을 사회가 바라는 방향으로 형성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인의 퍼스낼리티를 형성하고 그들의 정신건강의 장해를 일으키는 현대 산업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제요소, 산업시대에서의 '욕심많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자본주의의 구조와 인간의 특성

17세기와 18세기의 자본주의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대의 사회 경제적 구조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이지만 이에 앞서 20세기의 사회와 인간의 발전과는 차이가 있는 17,8세기의 자본주의, 그리고 19세기의 자본주의의 특성에 대해 간단히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술과 산업이 19세기와 20세기의 발전과 비교할 때 초창기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중세문화의 관습과 사상이 이 시대의 경제생활에 아직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상인이 고객을 낮은 가격이나 그밖의 유혹으로 다른 상인으로부터 꾀어 내려하는 것은 기독교도 답지 못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되었다."

"방금 언급한 여러가지 태도는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의 생활을 결정해온 여러 원칙에 ㅈ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칙은 사회와 경제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제적 발전도 그것이 사회내에 어떤 그룹을 해친다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ㅇ낳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개념은 전통적인 사회의 균형이 보존되어야 하고 어떤 교란도 해롭다고 믿는 점에서 전통주의자들의 사상과 밀접히 관련돼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자본주의

"19세기에 접어들자 18세기의 전통주의적인 태도는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는 급속히 변화한다. 욕망과 슬픔을 지닌 살아있는 인간이 체제 내에서 중심의 지위를 차츰 잃어가고 이 자리를 사업과 생산이 차지하게 된다. 인간은 경제적 영역에서는 '만물의 척도'가 되지 못하게 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우선 노동자에 대한 잔혹한 착취였다."

"지난 세기의 여러 제한적인 사상은 사라졌다. 상인들은 고객을 찾아 나서고 그의 경쟁자들보다 더 싸게 팔려고 하고 동료들간의 경쟁적 싸움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큼이나 잔혹하고 제약이 없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모두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인간행위의 지도적 원리가 되었다."

"주된 조절자로서의 시장은 19세기에 모든 전통적 제한 요소로부터 해방되고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득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시장법칙과 경제적 기계구조의 법칙에 의해 움직여지게 되었다. 자본가는 그가 원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의 사업을 확장해갔다. '카네기'가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확장의 지연은 퇴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시장의 법칙 뿐만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발전 역시 그 자신의 생명을 지니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오늘날의 과학의 문제와 조직은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과제를 선택하지 못하고 과제가 과학자에게 스스로를 강요하게끔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품을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밀려가고 강요될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끌고가는가? 그것은 자신을 초월하는 목적이나 목표를 갖지 않고 또한 인간을 자신의 부가물로 만들어버린 체제인 것이다."

"언제나 욕구가 사회생산의 총계보다 더 컸고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냔 하는데, 얼마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또 어떤 사람들이 그들 욕구대로의 만족을 얻어야 하고 어떤 계급은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느냐 하는 조절이 필요하게 된다."

"현재의 시장은 스스로 조절되는 분배의 메카니즘이다. 이 시장으로 인해 사회의 생산을 의도적 계획이나 전통적 계획에 따라 분배할 필요가 없게 됐고 따라서 사회내에서의 힘의 사용이 불필요하게 됐다. 물론 힘의 작용이 없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라기보다는 피상적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노동시장에서 그에게 제의된 임금수준을 수락해야만 하는 노동자는 그가 다른 방법으로는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장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자유'란 환상적이다. 그는 어떤 계약을 맺게끔 느를 강요하는 외부의 힘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또 사실상 그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시장의 법칙은 더욱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장 메카니즘에 의한 자본주의적 분배방식은 계급사회에서 지금까지 고안되었던 다른 어떤 방법보다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 개인의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시장의 경제적 기능은 노동시장이나 서비스 시장에서 노동이나 서비스를 팔려고 원하듯 상품시장에서 상품을 팔려고 원하고 여러 개인의 경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경쟁에 대한 경제적 필요성은 특히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더욱 경쟁적인 태도를 유발했다. 인간은 그의 경쟁자를 능가하려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봉건시대 특유의 태도와는 정반대되는 태도였다. 봉건시대에는 각자는 사회의 질서속에 그의 전통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에 만족해야만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는 이 체제에 있어서 모든 경제활동의 목적이 '이윤'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산의 이윤문제가 논의의 쟁점은 아니다. 문제는 생산의 동기가 사회적 유용성이나 노동과정에 있어서의 만족에 있지 않고, 투자로부터 얻어지는 이윤에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품이 소비자에 대하여 어떻게 유용한가 하는 점은 개개의 자본가로서는 전혀 관심을 가질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체제 아래서는 소득은 개인적인 노력이나 서비스와는 전혀 별개일 수 있다. 자본의 소유자는 일을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 소득을 얻기 위해 노력을 제공하는 인간 특유의 교환기능은 훨씬 많은 돈을 추상적으로 조작하도록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산업의 부재소유자의 경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사람이 기업 전체를 소유하고 있든 또는 일부 주식만을 소유하고 있든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어느 경우에나 부재소유자는 스스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자기의 자본과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해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노동을 하고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소득은 그들이 기울인 노력과는 아무런 합리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학교 교사의 경우 의사와 비교해 볼 때 그 사회적 기능은 꼭같이 중요하고 개인적인 노력도 결코 못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수입은 의사의 수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소득의 분배를 특징지워주는 것은 개인의 노력 및 노동과 이에 대해 베풀어지는 사회적 인정 - 재정적인 보상 - 간에 조화로운 균형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같은 불균형의 물질적 영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 심리적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노동, 즉 인간의 노력과 숙련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이득이 내가 기울이는 노력에 의해 한정되는 한, 내 욕망도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적 유대의 전통적인 원리가 무너지자 새로운 형태의 착취가 나타났다. 봉건사회에서는 군주는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신민들에게 봉사와 물질을 요구할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동시에 군주는 관습에 얽매여 있었으며 자기의 신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적어도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착취는 상호 인간적인 의무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졌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규제를 받았다. 경제적 착취는 19세기의 발달과정을 통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노동자, 아니 오히려 노동자의 노동은 자본가에게 팔리는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팔리는 다른 어떠한 상품과도 본질적으로 다를바 없었으며, 구매자에 의해 그 능력이 최대한 이용되었다. 노동은 노동시장에서 적당한 가격에 사게된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외에 호혜주의의 관념도 없었고 또한 자본가측에 아무런 의무감도 없었다. 설사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이 일거리가 없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노동자의 운수가 나쁘거나 재주가 모자란 결과이거나 또는 단지 사회와 자연의 법칙일 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착취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그대로 익명의 것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기아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개인의 의향이나 탐욕으로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의 법칙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이는 사회의 철칙의 문제로 다루어졌거나 아니면 그런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대의 자본가는 노동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19세기식 착취의 사회적 정치적 형태는 변화했다. 변하지 않은 점은 자본소유자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이용'이라는 기초적인 개념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잔인하다거나 잔인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용주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기본적인 사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이란 관념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느냐 또는 자기 자신을 이용하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이 생활하는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목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경제기구라는 비인격적인 거인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사실은 변함없이 남아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으려면 그의 애정 우정 및 동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용주와 고용인간의 관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봉사를 사들였으므로 그 대우가 아무리 인간적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루에 몇시간의 노동시간을 샀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죽은 과거로서의 자본이 살아있는 활력이며 현재의 힘인 노동을 고용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의 위계에 있어서는 자본이 노동보다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축적된 물질(즉 돈)이 생명의 표현(인간)보다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자본을 가진 사람이 '오로지' 생명과 인간적인 기능과 할력 그리고 창조적 생산력만을 가진 사람을 명령한다. '물질'이 인간보다 가치있는 것이다."

"착취와 이용이란 문제에 밀접히 관련되는 것은,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19세기 인간에 있어서의 '권위'의 문제이다. 인구의 어느 집단이 다른 집단의 명령을 받는 경우, 특히 후자가 소수인 경우에는 어느 사회체제든 틀림없이 강력한 '권위'의식, 가령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되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강력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증대되는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권위'란 것은 어떤 사람이 재산이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어느 누가 '갖고 있는' 자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인간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권위라고 불릴 수 있는 일종의 우열관계와 '억압적' 또는 비이성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우열관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예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잘 나타낼 것이다. 교사와 생도간의 관계 및 노예소유자와 노예간의 관계는 모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사와 생도간의 이해관계는 같은 방향이다. 만일 교사가 생도를 가르치는데 성공한다면 만족스러운 것이고,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그 실패는 교사와 생도의 실패가 된다. 이에 반해서 노예소유자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노예를 착취하고 싶어한다. 노예소유자는 노예로부터 더 많이 욹워내면 낼수록 그만큼 더 만족하게 된다. 동시에 노예도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할수 있는 한 자기의 요구를 지키려 애쓴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한편의 이익이 다른 편의 불이익이 되는 식으로 분명히 상반되고 있다. 두 경우 우월성은 상이한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는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을 돕기 위한 조건이며, 둘째는 착취를 위한 조건이다."

"이들 두가지 형태에서 나타나는 권위의 동태 역시 상이하다. 즉 학생이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교사와의 간격은 그만큼 좁혀진다. 학생은 점점 더 교사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리적 권위의 관계는 스스로 해소되어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월성이 착취의 기초가 되는 경우에는 그 거리는 그 지속기간 만큼 확대된다."

"심리적인 상황 역시 이들 개개의 권위의 상황에 따라 판이하다. 첫번째 경우에는 사랑, 칭찬 또는 고마움 등의 요소가 유력하다. 권위는 동시에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한가지 실례이다. 두번째 상황에 있어서는 착취자에 대한 원한이나 적개심이 일어나, 그 착취자에 대한 복종은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오는 곧잘 노예의 경우처럼 단지 승리의 기회도 없이 고통에 굴복하게 되는 갈등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증오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심지어 때로는 그 대신 맹목적인 칭찬의 감정으로 대치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증오라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감정을 제거해준다. 둘째로 굴욕의 감정을 완화시켜준다. 만일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원체 훌륭하고 완전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나보다도 훨씬 강하고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인 까닭에 나는 그와 동등하게 될 수 없다. 그 결과 억압적 권위에 있어서는 구너위에 대한 증오나 비합리적인 과대평가 및 칭찬이란 요소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합리적 권위에 있어서는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 점점 더 강력해져서 권위와 비슷해지는 정도에 직접비례하여 정서적인 유대의 강도가 감소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의 사회적 성격은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가 혼합된 좋은 예이다."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의 노동을 사들여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며,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은 아사라는 악조건 아래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유형과 오래된 유형의 위계적 성격간에 일종의 혼합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국가, 특히 군주제에 있어서는 복종과 순종이란 오래된 덕성을 함양시켜 이를 새로운 내용과 가치에 적용시켰다. 19세기의 중산계급사이에서는 복종은 여전히 기본적인 미덕의 하나였으며 불복종은 기본적인 악덕의 하나였다."

"요컨대 19세기의 사회적 성격은 본질적으로 경쟁적, 저축적, 착취적, 권위주의적, 공격적, 개인주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으로 다룰 논의를 내다보면서 우리는 이미 여기서 19세기 자본주의와 20세기 자본주의 간의 커다란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엔 착취적 저축적 정향 대신에 수용적 시장적 정향을 보게 된다. 경쟁현상 대신에 협동작업을 지향하는 경향이 증대되는가 하면, 끝없는 이익증대를 추구하는 대신 착실하고 확실한 소득을 바란다. 착취 대신에 부를 함께 나누어 갖고 확산시키려는 경향 및 다른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교묘히 다루려는 경향이 나타나며,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이면서도 공공연한 권위 대신에 익명의 권위 - 여론과 시장의 권위를 보게 된다. 개인적 양심 대신에 적용하고 승인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되며 자부심과 지배의식 대신에 대체로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점점 증대하는 무력감이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19세기 인간의 병리학적인 문제들을 돌이켜 본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당연히 사회적 성격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착취적, 저축적 태도는 인간의 고통을 야기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또 유럽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유럽 자체의 노동계끕에 대해 무자비하게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착취하도록 해준 원인이었다. 19세기의 또 다른 병원적인 현상이었던 비합리적 권위의 역할과 이에 복종한다는 요구는 사회에 의해 금기로 되어 있던 사상과 감정을 억압하는 결과를 빚었다. 가장 뚜렷한 증상은 성에 대한 억압과 신체 동작 의복 건축양식 기타 모든 것에 대한 억압이었다. 이같은 억압은 프로이드가 고찰했듯이 온갖 형태의 신경증적 병상을 빚어냈다.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료하려고 애썼던 19세기 및 20세기 초의 개혁운동은 이들 주요 증세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무정부주의로부터 마르크스 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는 착취를 폐지하고 노동자를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존경받는 인간으로 전환시킬 필요성을 강조했다. 만일 경제적 고통이 철폐된다면, 그리고 노동자가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19세기의 적극적인 업적은 모두 완전히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반면에 악덕은 사라질 것이라고 그들은 미덩ㅆ다. 바로 이와 똑같은 생각에서 프로이드는 만일 성적인 억압이 상당히 줄어들면 그 결과 신경증 등 모든 형태의 정신질환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의 만년에는 당초의 낙관주의가 점점 감퇴되기는 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비합리적 권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새로운 황금시대를 예고해줄 것으로 믿었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정신분석학자들이 제시한 인간의 질병을 고칠 처방은 제각기 다른 것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특징적인 병상과 증세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착취와 경제적 고통을 철폐하거나, 성적 억압 및 비합리적 권위를 배제함으로써 인간이 19세기에 누렸던 것보다도 더 많은 자유와 행복과 진보가 약속된 시대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반세기가 지나자 19세기 개혁가들이 내세운 주요 요구는 성취되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고 있는 나라인 미국을 두고 말하자면 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는 마르크스 시대에는 몽상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사라졌다. 노동계급은 사회 전체의 경제적 발전에 낙오되는 대신 국부에서 점점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엄청난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후에는 미국에서 두드러진 빈곤은 사라지지라는 가정이 완전히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경제적 고통이 점점 철폐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은 노동자가 처한 인간적, 정치적 상황이 철저하게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는 대부분 노동조합을 통해 경영의 사회적 협동자가 되어 있다. 노동자는 30년 전의 처지처럼 혹사당하거나 해고당하거나 학대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노동자는 확실히 더 이상 자기의 상관을 마치 자기보다도 고귀하거나 우월한 존재로 존경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는 자기 상관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훨씬 선구적인 점을 부러워하겠지만 그렇다고 숭배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비합리적 권위에 대한 복종만 보더라도 양친-자식간의 관계에 관한 한, 양상은 19세기 이래 철저히 변화했다. 자녀들은 이젠 양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료이며, 설사 누군가가 약간이라도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식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질까 걱정하는 양친인 것이다. 산업에 있어서도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50년 전에는 믿을 수 없었을 정도로 협동작업과 평등의 정신이 모인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적 억압이 뚜렷이 줄어들었다. 1차대전 후 성의 혁명이 일어나 오래된 금지와 원칙이 버림 받았다.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생각은 시대에 뒤졌거나 불건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같은 태도에 대해서 얼마간 반발이 있긴 했었지만, 대체로 19세기식의 금기 및 억압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19세기의 기준에서 볼 때, 보다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거의 모든 일이 성취되었으며, 실제로 여전히 19세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계속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아울러 앞으로의 진보에 유일한 위협은 소련과 같은 권위주의적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소련사회는 보다 신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에 대해 무자비한 경제적 착취를 하고 착취의 계속에 필요한 무자비한 정치적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많은 면에서 초기 단계의 자본주의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19세기의 안목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19세기의 희망의 달성이 결코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물질적인 번영, 정치적 성적 자유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19세기의 세계보다도 훨씬 더 병들어 있는듯이 보인다. 실로 스티븐슨이 간명하게 갈파했듯이 우리는 이제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로봇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를 위협하는 공공연한 권위는 이제 없지만, 우리는 동조라고 하는 익명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개인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권위와 끝까지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울러 우리 자신에 확신을 전연 갖지 못하고 있으며 거의 아무런 개성이나 자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병리현상에 대한 진단이 19세기 방향을 따를 수는 없다. 우리는 서구세계를 증대일로에 있는 불건전성으로부터 구출하는데 필요한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에 이르기 위해 우리 시대의 특수한 병상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 항목에서는 20세기 서구인의 사회적 성격을 다루면서 이에 대한 진단을 시도해보겠다."

20세기의 사회

1. 사회적 경제적 변화

"미국의 자본주의는 유럽보다 더욱 강력하고 더욱 진보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자본주의가 발전해나가는 이상형태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이상형이라는 것은 유럽이 이를 모방하려해서가 아니라 봉건잔재와 그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본주의의 가장 진보된 형태이기 때문이다.명백히 부정적인 특성들을 제외하고 보면 봉건적 유습에는 순수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는 사람들의 태도와 비교해볼 때 지극히 매력적인 인간적 특성이 많이 있다. 미국에 대한 유럽의 비평은 근본적으로 아직껏 유럽에 생생히 살아있는 봉건주의적 인간의 낡은 가치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유럽 자체에서도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괌거의 권위로써 현재를 비평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 유럽과 미국의 차이는 자본주의의 묵은 단계와 새로운 단계의 차이, 곧 봉건 잔재가 혼합된 자본주의와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간의 차이다."

"생산 양식에 있어 기술적 변화는 우너래 자본집중의 증대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것은 또다시 자본집중의 증대를 불가피하게 했다. 소규모 회사의 수가 줄고 그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대규모의 경제적 거인이 증가하는 것에 정비례한다."

"20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봉건잔재의 소멸, 산업 생산의 혁명적 증가, 늘어가는 자본의 집중과 기업과 정부의 거대화, 숫자와 국민을 조작하는 인원의 증가, 기업경영과 자본소유의 분리, 노동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의 향상, 공장과 사무실에서의 새로운 업무처리 방식 등이 그것인데 이 변화들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기술해보자. 봉건적 요소의 소멸은 곧 불합리한 권위의 소멸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출생에 의하거나 신의 의지에 의하거나 혹은 자연법에 의해 이웃보다 자신의 신분이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인은 평등하고 자유롭다. 누구도 자연적인 권리에 의해 착취당하거나 명령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는다면, 그것은 명령하는 사람이 노동시장에서 명령받는 사람의 노동력 혹은 용역을 샀기 때문이다. 명령을 하는 것은 그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라서 계약 관계가 맺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합리적 권위와 함께 합리적인 권위 역시 무력해졌다. 만약 시장과 계약이 대인 관계를 규정짓는다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를 알 필요가 없게 된다. 필요한 것은 다만 이것들이 공정할 것, 즉 교환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일들이 잘 진행되고 제대로 기능을 다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큰 집단 안에서 유연히 잘 협동할 수 있고, 더욱 더 많이 소비하기를 원하며, 취미가 표준화되어 쉽게 전파되고 쉽게 그 사람의 행동이 예측될 수 있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이와 함께 필요로 하는 것은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돼 있는 것이라고 느끼면서 어떤 다른 권위나 원칙이나 양심에 굴하지 않고 언제든지 명령에 잘 따르려 하고 기대된 일은 해내고 마찰없이 사회기구에 잘 조화되는 인간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힘에 의하지 않고 지배되며 지도자 없이 이끌어지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다른 목적 없이도 행동할 수 있을까?"

2. 성격론적 변화

a. 수량화와 추상화

"아래의 분석에서 나는 소외의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 성격의 분석을 전개시키고자 한다. 그렇게 하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개념이 현대 인간성의 가장 깊은 근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이 현대의 사회 경제적 구조와 평균적인 개인의 성격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집중시킬 때 이 개념이 가장 적절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경제적 특징인 '수량화'와 '추상화'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소외를 논의해보기로 하자."

"중세의 장인은 비교적 몇 사람 안되는 잘 아는 고객들을 상대로 상품을 생산했다. 그가 매기는 가격은 그의 사회적 지위에 전통적으로 알맞는 양식의 생활을 꾸려나갈 소득을 얻으려는 욕구에 의해 결정되었다. 장인은 경험에 의해 생산비용을 알고 있었으며, 비록 몇몇 직공과 도제를 고용하기는 했지만, 공장을 운영하는데 상세한 부기방식이나 대차대조표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 기업들은 대차대조표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 기업은, 중세 장인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한 식으로 구체적이며 직접적 관찰 방법에 의존할 수는 없다. 생산물은 물론, 원료와 기계 노동의 비용은 같은 화폐 가치로 펴시될 수 있고 따라서 비교가 가능해지며, 대차대조표의 등식으로 나타내기에 적합하게 된다. 모든 경제적 거래내역은 엄밀하게 수량화할 수 있어야 하며, 숫자로 표시된 경제적 거래과정의 정확한 비교문서인 대차대조표만이 경영자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고 있는가, 다시 말해 어느 정도 보람 있는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말해준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실이 추상화되는 변화현상은 생산 영역에서 대차대조표와 경제적 사상의 수량화에 무밀지 않고 이를 초월하여 발전하고 있다. 현대기업은 수백만 달러의 돈 뿐만 아니라 수백만에 달하는 고객, 수천명의 주주와 수천명의 노동자, 고용원들을 상대로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기계조직의 부품으로 이 부품을 통제해야 하고 그 결과를 측정해내야 한다. 결국 각 개인은 추상적인 존재로 즉 숫자로 표시되며 이런 기초 위에서 경제현상이 예측되고, 추세가 측정되며 결정이 내려지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노동인구의 20% 정도만이 자영업을 하고 있는 때에는, 이밖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며, 한 사람의 일생은 그에게 임금이나 봉급을 지급하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의지한다기보다는 어떤 '것'에 의존한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은 어떤 조직체이며 경영자 역시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과 인간적인 접 촉을 갖는 인간이라기보다 기업의 비인격적인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교환이라고 하면 대부분 상품과 용역의 교환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든 노동은 화폐로 보상된다. 경제관계의 긴밀한 조직은 노동의 추상적 표현인 화폐로 규제된다. 우리는 상이한 질에 대해 상이한 양의 화폐를 받고,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다른 것들을 돈이라는 양으로 지불한다. 다시 말하면 질적으로 상이한 것을 다만 양적으로 상이한 것과 교환하는 것이다. 실제로 농업인구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노동에 내포된 추상적 성질을 가진 돈을 받지 않거나 쓰지 않고는 단 며칠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상화의 증대를 초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또 다른 측면은 노동의 분업이 증가한데에 있다." "중세경제에 있어서는 농업생산과 장인 노동사이에 분업이 있었다고는 해도 생산 자체의 영역에서는 분업이 별로 없었다. 의자나 탁자를 만드는 목수는 의자 전체나 탁자 전체를 만들었고, 그의 도제가 약간의 준비작업을 했다고 해도 생산의 통제나 전체적인 감독은 자신이 관장했다. 현대 기업에서 노동자는 어떤 식으로도 생산 전체와는 관련이 없다. 노동자는 어떤 전문화된 기능의 수행에만 종사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다른 기능으로 옮겨갈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 생산에 '전체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전문화된 기능을 개발한다. 이런 경향으로 보아, 현대 산업 노동자의 기능은 기계 작업이 고안되지 않았거나, 기계 작업이 인간 작업보다 비싸게 드는 활동분야에서 기계 같은 양식으로 노동한다고 정의될 수 있다. 생산 전체와 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은 경영자이다. 경영자에게 있어서 생산이란 추상적 개념일 뿐, 그 본질은 교환가치에 있다. 노동자에게는 생산이 구체적인 것이지만 그 자신은 생산 전체에 대한 작업은 하지 않는다."

"'3백만달러짜리 교량', '20센트짜리 담배', '5달러짜리 시계'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런 말은 단순히 제조업자의 관점이나 구매과정의 소비자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사물을 기술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점으로 쓰인다. '3백만달러짜리 교량'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교량의 유용성이나 아름다움 같은 구체적인 성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화폐량으로 나타낸 상품으로서의 교량의 교환가치를 뜻한다. 물론 다리의 유용성이나 아름다움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고, 대상물을 경험하는 방법에 있어 다리의 추상적 (교환) 가치에 밀려 그 구체적 (사용) 가치는 '2차원적인' 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을 사고 팔 때 뿐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행위가 모두 끝난 뒤에도 그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에서는 모든 사물이 교환 가치의 구현물인 상품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한 물건은 사고난 후에도 이런 의미에서 상품 가치를 잃는 법이 없으며, 항상 교환 가치의 특성을 지닌 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잘 설명해주는 예를 어느 중요한 과학기관의 행정간부가 낸 사무실 일지보고에서 볼 수 있다. 이 기관은 새로 빌딩을 사서 옮겨 들었다. 행정간부의 일지에 의하면, 빌딩으로 옮겨온지 며칠이 안되는 어느 날 그는 어떤 사람이 건물을 사고 싶어하며 건물을 보고 싶어한다는 부동산회사의 전화를 받았다. 비록 이사해온지 며칠도 안 되는 때에 건물을 팔 가망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건물을 산 이후 건물 값이 올랐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어 귀중한 시간을 내어 부동산업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건물에 들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움. 이런 가격 제의가 회계원이 사무실에 있을 때 들어온 것은 좋은 우연의 일치. 모두들 살 떄 값보다 훨씬 좋은 가격으로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면 이사회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데 의견 일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볼 것'

새로운 건물에 대해 느끼는 자랑과 기쁨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아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사용할 수 있으며 건물을 완전히 소유한다거나 사용한다는 애착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태도로는 자신이 산 자동차에 대해 갖는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자동차는 결코 산 사람이 완전히 애착을 쏟는 것이 되지 못하고 좋은 거래조건이라면 교환될 수도 있는 상품으로서의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자동차는 사용가치가 없어지거나 별로 감소되기도 훨씬 전인 1~2년 후에 팔린다."

"그러나 이런 추상화와 수량화 태도는 사상의 영역을 훨씬 넘어가서 인간 역시 양적 교환가치를 구체화시킨 것에 불과한 것으로 경험된다. 한 인간을 '100만 달러짜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추상으로 보는 것이다. 신문이 어떤 인간의 사망기사에 '구두 제조업자 사망'이라는 제목을 달 때에 이와 같은 태도가 나타난다. 실제로는 어떤 인간적 성질을 지니고, 희망과 좌절감을 가지고, 처 자식을 거느린 한 '인간'이 죽었다. 그가 구두제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는 구두제조기계를 관리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을 소유하고 경영하였다. 그럼에도 '구두제조업자 사망'이라고 하면 풍요하고 구체적인 한 인생은 경제적 기능의 추상적 공식으로 표현되고 만다."

"우리가 새로운 우주상이나 이론물리학, 무조음악, 추상화 등에 대해서 생각하더라도 준거체계의 구체성과 명확성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않으며 천지창조의 목적물도 아니며, 다루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의 주인도 아니다. 우리는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하다. 또 우리는 그 무엇과도 하등의 구체적 관계가 없이 우주공간 어디엔가에 있는 가치없는 무엇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상은 근대적 파괴수단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느다. 현대전에서 일개인이 수십만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을 죽일 수 있다. 그는 단추 하나를 누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 "사람을 때리는 경우 그 구체적 상황이 다른 모든 정상인에게 공통이 되는 양심의 반응을 일깨워 주겠지만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경우는 그 행위와 목적이 행위자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양심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행위가 행위 자체의 생명과 책임을 갖기 때문이다. 과학도 사업도 정치도 인간다운 의미를 갖는 토대와 균형을 상실해버렸다. 우리는 이제 숫자와 추상개념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어느 것도 구체적인 것이 없는 이상 그 무엇도 현실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해서는 안된다는 일은 없다. 공상소설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다를 바가 없어졌으며 악몽이나 몽상이 다음 해엔 사실로서 실현되기도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애와 세상을 자주적으로 내다본다거나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어떤 자리로부터 쫓겨나버린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자기 자신이 만들었던 힘에 의해 점점 더 빨리 내몰리고 있다.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추상적인 개념에 매달려 구체적이 생활과는 점점 더 동떨어져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b. 소외

"소외란 스스로를 따돌림 당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험형식을 뜻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나가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체나 자기행위의 창조자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가 주인공이 되어 복종과 심지어 숭배까지 강요하게 된다. 소외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양식을 갖고 사물이 경험되어지는 바로 그대로 경험하지만,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를 생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 이론체계에 있어 소외란 '자기 자신의 행위가 자신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자기 위에 군림하여 자기의 뜻에 반하는 이질적인 힘이 되고 마는' 그러한 인간의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소외'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 개념은 훨씬 오래된 것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라고 자칭했던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우상숭배'라는 말의 의미를 검토해보면 '소외'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신교의 예언자들은 이교도들이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들을 함께 숭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일신교와 다신교의 본질적 차이점은 신의 수가 아니라 자기 소외라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예술적 재능을 기울여 우상을 만들고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바로 그 우상을 숭배한다. 즉 인간의 생명력이 '물체'에 날아들어 우상이 된 그 물체가 인간의 생산적 노력의 결과로서 경험되지 않고 인간 자신과는 별개의, 그리고 인간 위에서, 인간에 반하는 그 무엇으로서, 인간이 숭배하고 복종하는 그 무엇으로서 경험되는 것이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호세아서 14:8) '우리가 앗시리아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우상숭배자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에 무릎을 꿇는다. '그 우상은 소외된 형태의 자신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신교의 원리는 인간은 무한한 존재이며 인간에게는 속성의 부분 부분을 완전체로 인성화할 수 있는 그런 부분적인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일신교의 개념에 있어서 신이란 인식할 수도 정의를 내릴 수도 없는 것이다. 신은 '물체'가 아니다. 만약 인간이 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됐다면 그는 무한한 속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속성의 한 부분의 투사물에 고개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생명력 있는 사랑과 이성이라는 행위를 방사하는 중심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신들이 물체인 것처럼 자기 자신도, 자기의 이웃도 결국 물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사랑'이란 흔히 이같은 소외라는 우상숭배 현상의 일종으로 신이나 우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이런 식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복종적인 관계에 있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힘과 생각 모두를 상대방에게 쏟는다. 그리하여 그를 우월한 존재로 인식하고 완전한 복종과 숭배를 통해 만족을 느낀다. 이는 사랑하는 상대방을 실제의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실제의 자기 자신, 즉 생산적인 인간의 힘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알지 못함을 뜻한다. 종교적 우상숭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온갖 풍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그 풍요함이 자기 것인 그 무엇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진 그 무엇, 타인에게 복종하고 그에게 몰두함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정치적 지도자나 국가에 충성스런 복종을 하는 데서도 그대로 존재한다. 지도자와 국가는 실제 피통치자의 동의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그의 모든 힘을 지도자와 국가에 투사하고, 그들을 숭배하고, 복종과 숭배를 통해 그의 힘을 되돌려 받기를 희망할 때 그들은 우상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전체주의에 있어서나 루소의 국가론에 있어서나, 개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권리를 유일한 조정자인 국가에 넘기도록 되어 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소외된 개인이 우상의 제단에 참배한다. 이같은 우상이 국가이든 계급이든 집단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그 명칭에 아랑곳 없이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우상숭배, 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 남녀간의 맹목적인 사랑, 정치지도자나 국가에 대한 숭배, 그리고 비이성적 열정이 구체화된 맹목적인 숭배 등 모든 현상에 공통되는 것은 소외의 과정이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풍요함의 적극적인 소유자로서의 스스로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명있는 실체를 투사한 외부의 어떤 힘에 좌우되는 자신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소외는 거의 전면적인 것이다. 현대의 소외는 사람의 일, 소비하는 물건, 국가,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인간은 그 이전에는 결코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스스로 창조했다. 그는 그 자신이 만든 전문적인 기구를 이끌어갈 복잡한 사회기구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모든 창조물은 이제 그의 위에 서 있다. 그는 스스로를 창조자와 중심체로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골렘의 심부름꾼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놓여난 그 힘이 강력해지고 거대해질수록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더욱 더 무력해짐을 느낀다."

"경영자의 역할 또한 소외현상의 하나이다. 그가 부분이 아닌, 전체를 관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구체적이고 유용한 것인 그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과거의 소유자겸 경영자의 타입과 비교해볼 때 현대경영은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불되는 이윤의 크기보다는 기업의 효율적인 운영과 확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경영자의 목표는 타인이 투자한 자본을 수익성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 기업경영에서는 노사관계와 판매분야 - 즉 인간을 다루는 - 담당자들이 생산의 기술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료는 사물과 사람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이다. 관리대상인 조직체의 대형화와 그에 따른 추상화현상으로 관료의 대중에 대한 관계는 완전한 소외의 관계이다. 다스림을 받는 대중들이란 관료들이 사랑과 미움따위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비인격적으로 생각하는 대상물이다. 고급 관료는 자기의 직업활동에 관한 한 아무런 감정적 느낌없이 대중이 마치 숫자나 사물인양 그들을 조작해야 한다. 조직체가 대규모화하고 분업이 고도화하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는 전체를 볼 수 없는데다, 산업구조 내의 개인이나 집단상호간에 유기적이고도 자발적인 협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관료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 관료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기업을 움직여가는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그 기업은 조만간 붕괴될 것이다."

"관료정신이 기업과 정부의 행정조직 뿐 아니라 이미 영국 독일 프랑스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에까지 침투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소련에서 역시 관료적인 경영자와 그들의 소외정신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만일 일부 상황이 변화한다면, 소련에서도 사회적인 공포가 해소될 수 있겠지만 완벽한 관료화라는 체제 (=소외) 없이는 소련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기업 소유자의 자기 자산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그것은 거의 완전한 소외현상의 하나이다. 그의 소유권은 변동하는 화폐의 액면을 표시하는 한 장의 종이에 달려 있다. 그는 기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그 기업과는 어떤 식으로도 구체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이같은 소외의 태도는 주식소유자가 기업에 대해 갖는 태도를 묘사한 버얼과 민드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역력하게 나타나 있다.

  1. 소유권의 지위는 적극적인 대리의 지위에서 소극적인 대리의 지위로 변했다. 이제 소유자는 자기가 지휘권을 행사하고 책임을 졌던 실질적인 물적 자산 대신에 그 기업에 대한 권리와 기대를 표시하는 한 장의 종이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유자는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기업과 물질적 자산 - 즉 생산기구에 대해서는 통제권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그는 기업과 물적 자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지금까지는 말은 그 주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했다. 말이 살아있는 동안엔 여물을 먹여야 하고 죽으면 주인 손으로 묻어줘야 한다. 그러나 주주에게는 이같은 책임이 없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중요한 자산에 영향을 주는데는 실질적으로 무력하다.
  2. 과거에는 소유권에 수반되던 정신적 가치가 이제는 소유권으로부터 분리됐다. 소유자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물질적 자산은,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나오는 소득과는 별도로, 직접 소유자에게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퍼스낼리티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그러한 요소가 노동자에게서 사라졌듯이, 이변에는 기업혁명과 더불어 자산소유자에게서 그러한 요소가 사라져버렸다.
  3. 개인의 부의 가치가 그 자신이나 자신의 노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힘에 좌우되고 있다. 대신 그 가치는 한편으로는 기업을 이끌어가는 개인 - 그러나 그전 형태의 소유자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개인 - 의 행동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민감하고 변덕스러운 시장에서의 타인들의 행동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그 가치는 시장의 특징인 변덕과 조작에 달려 있다. 나아가서 그 가치는 조직화된 시장에서의 일반적인 가치 수준에 따라 달라지듯이 가까운 장래의 사회적 평가의 변동에 좌우된다.
  4. 개인의 부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니라 - 대부분의 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또 끊임없이 평가를 받게된다. 개인은 매순간마다 자기 자산에 매겨지는 가치평가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이는 자기 소득을 지출하거나 즐기는데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다.
  5. 개인의 부는 시장조직을 통해 극히 불안정한 것이 됐다. 그 부의 개인적인 소유자는 한순간 주의를 잘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부를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있으며, 또 시장기구가 질서있게 움직인다면 마지못해 팔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나타나는 큰 손실을 입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6. 소유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서의 부는 점점 적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부가 토지 형태일 경우 그 토지의 시장가치는 보잘것 없더라도 소유자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부는 그 특성때문에 시장에서 갖게 될 가치와는 상관없이 소유자에게는 주관적 가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새로운 형태의 부는 이같은 직접사용이 불가능하다. 시장판매를 통해서만이 소유자는 그것을 직접 사용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과거와는 달리 부의 행사에 있어서 시장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7. 마지막으로 과거에는 소유권의 뗄 수 없는 구성요소의 하나였던 권력 책임 및 재산 등이 이제는 통제권을 쥐고 있는 별개의 집단에게 넘어가버리고, 지금과 같은 주식회사체제에서의 산업상의 부의 '소유자'에게는 한갖 소유권의 상징만 남게 됐다.

주주의 소외현상에 대한 또다른 주요한 측면은 자기 기업에 대한 자신의 통제 문제이다. 법적으로 주주는 그 기업을 통제한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듯이, 그들은 경영간부를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개인의 출자몫이 너무 작고 또 적극적으로 주주총회에 나와 참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통제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한다."

"소비의 과정도 생산과정만큼이나 소외되어 있다. 첫째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물건을 손에 넣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물건을 획득하는 아주 독특한 방법일 뿐이다. 돈을 추상적인 형태로는 노동과 노력을 의미하지만 나 자신은 유산상속이나 사기 행운 또는 기타 여러가지 방법에 의해 돈을 획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돈이 반드시 나의 노동, 나의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 "반면 소비할 경우 돈은 노동이라는 추상적 형태로 변형되고 그 무엇과도 교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돈을 소유하고 있다면 무엇을 획득하는데 나의 노력이나 관심은 필요치 않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미술을 감상할 줄 모르더라도 훌륭한 그림을 가질 수 있고, 음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최고급 전축을 살 수 있으며 단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서재를 마련할 수도 있다." ... "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획득하고 또 그것을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 인간적인 획득의 방법은 내가 획득하는 물건과 질적으로 맞먹는 노력을 지불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획득과 소비의 과정에서 돈이 갖는 소외기능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화폐는 ... 참된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을 한갖된 추상적인 관념으로 바꿔놓고, 급기야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허무한 것과 관념적인 것, 즉 개인의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힘을 현실의 힘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획득의 방법을 떠나, 우리는 일단 물건을 획득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많은 물건의 경우 그러한 물건을 사용하는 구실마저 없다. 우리는 단지 그 물건을 갖기 위해 그것을 획득한다. 아무런 쓸모도 없으면서 소유 자체에 만족한다. 값비싼 식기, 깨질까봐 꺼내 쓰지조차 못하는 수정 꽃병, 쓰지 않는 방이 많이 딸리고 불필요한 승용차가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것들은 낮은 중류계층 가정의 값싼 골동품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갖는 재미만으로 갖는 예이다. 이렇게 물건 자체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현상은 19세기에 더욱 현저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냥 간직하기만 하는 물건모다 사용되는 물건을 소유하는데서 더욱 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이같은 점은 사용되는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 가운데에도 사회적 지위에 대한 만족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는 성질이나 출처를 모르는 사물로 둘러 쌓여 있다. 전화 라디오 전축 등을 비롯 기타의 복잡한 기계 등은 원시사회에서 나온 인간이 느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 정도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신비스러운 것이다. 즉 우리는 이같은 기계의 사용법만 알 뿐 학교 다닐 때 한번 배웠던 극히 어렴픗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들 기계의 기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 어떻게 빵이 만들어지며 옷감이 짜여지는지, 그리고 탁자가 만들어지고 유리가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물에 대한 구체적 연관성도 갖지 않은채 생산하듯이 그것을 소비하면서 살고 있다. 단지 이같은 사물과 맺고 있는 관계라는 것은 이들을 조작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이같은 소비방식에 따라 인간들은 만족을 모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사물을 망각한 채 인간들은 그저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물건을 소비하고 싶어하게 됐다."

"중산층 사회의 오래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소유와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변화했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옛날 습관대로라면 사람과 그의 재산 사이에는 소유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같은 태도는 그의 몸에 배어들어 그는 이를 또한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소유한 물건을 극진히 간직했으며 만약 이들과 영원히 떨어져야 할 때에는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참으로 고통스럽게 여겼다. 요즘은 재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전혀 없어졌다. 그저 사들인 물건이 새것이라는 것만 좋아할 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서슴없이 이를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친구에 대한 현대인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서로를 이용하는 두 개의 추상적인 내용, 또는 두 개의 생명을 가진 기계의 관계이다. 고용주는 그가 고용한 사람을 이용하며 장사꾼은 고객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이용가치가 없으나 훗날 이용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우정을 가지고 대한다. 그래서 만인은 만인의 상품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 관계에서는 사랑이나 증오가 그리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상적인 우정, 그리고 피상적인 공정은 있지만 그 껍질 뒤에는 거리감과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또한 미묘한 불신도 상당히 있다."

"인간 상호간의 소외는 일반적이며 사회적인 유대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관계란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이전의 사회의 특징이며 특히 중세사회의 커다란 특징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필자는 이 관계를 다른 책에서 시장적 정향(marketing orientation)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시장판에 매매하기 좋게 내걸린 어떤 물건이 된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적극적인 행위자 또는 인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이같은 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그저 시장에서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팔리게 한다는데 있다. 그의 자아의식도 사랑하고 생각하는 그런 개인으로서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그의 역할에서 비롯된다. 만약 물질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타자기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타자기올시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자동차는 '나는 자동차입니다' 또는 독특하게 '포드입니다' '빅크입니다' '캐딜락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에 대해 '당신은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그는 '나는 제조업자입니다' '나는 사무직원입니다' '나는 의사올시다' 또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올시다'라고 대답한다. 즉 그의 대답은 기계들이 응답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바로 자기자신을 사랑과 공포와 확신 의심 등을 가진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체제에서 어떤 기능을 충족시키고 있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과는 소외된 텅빈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의 가치관념은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을 후한 값에 팔 수 있는가, 자신을 당초와 비교해서 더 비싼 값에 내놓을 수 있는가, 요컨대 자신이 성공적인 존재인가의 여부에 가치의 기준이 놓여 있는 것이다."

"밴덤의 쾌락과 고통에 관한 개념에서 이런 태도가 가장 비슷하고 가장 철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을 갖는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밴덤은 하나하나의 인간행동에서 쾌락이 고통보다 더 큰가 어떤가의 여부를 보여주는 일종의 계산서까지 냈다. 만약 쾌락이 고통보다 더 크다면 그 행동은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인생 전체는 상거래와 비슷한 것이었다. 예컨대 일정 시점에서 흑자가 나는 행동이면 그것은 해야 한다는 식의 비즈니스였던 것이다.

밴덤의 이같은 견해 자체가 일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하나 사람들의 태도는 점점 더 확고하게 밴덤이 갈파한대로 돼버렸다. 그래서 현대인의 마음 속에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었다. 즉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으로 이에 준해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실패라느니 또는 성공이라느니 하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인생을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경우 인생의 실패는 기업의 파산과 같아서 손실이 이익보다 클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인간은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으며 어떤 목적은 달성되고 또 어떤 목적은 달성되지 못할 때도 있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여주는 손익계산서는 있을 수 없다. 아마 이러한 계산서를 가지고 인생을 셈하다 보면 인생이란 결국 살만한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죽음으로 끝나게 마련이며 그 많던 우리의 꿈도 모두 깨지고 때로는 고통, 때로는 피나는 노력으로 점철되는 것이 인생일 터인데 이것을 손익계산의 관점에서 셈하다 보면 이 세상에 아예 태어나지도 말았거나 아니면 젖먹이 때 죽어 없어진 것이 훨씬 낫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c. 그밖의 여러가지 관점

i. 익명의 권위 - 동조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권위는 그 성격을 바꾸었다. 권위는 이제 공공연한 권위가 아니라 '익명의, 눈에 안보이는 소외된 권위'이다. 아무도 이제는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도 어떠한 생각도 도덕율도 강요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인 사회에 사는 인간들보다 더 잘 순응하고 있다. 실제로 '그것' 이외에는 권위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익, 경제적 필요, 시장, 상식, 여론 및 사람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익명의 권위의 법칙은 시장의 법칙처럼 눈에 안보이는 것이고 또한 논의의 여지가 없는 그런 법칙인 것이다. 누가 보이지 않는 것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반항할 수 있겠는가?"

ii.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방법

"나는 바로 '모든 욕망은 즉각 충족되어야 하며 어떠한 욕구도 좌절되어서는 안된다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리의 가장 뚜렷한 예를 우리는 할부 구입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 필요한 돈을 저축한 다음에 그것을 샀다. 오늘날에는 필요하거나 때로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외상으로 사들인다."

"현대인은 물건에 대해 대단한 탐욕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를 참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성이라고 막스 쉘러나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쾌락은 주로 소비와 획득의 충족에 있다. 상품, 경치, 음식, 음료, 담배, 대중강의 책, 영화 등 모든 것이 소비되고 삼켜져버린다. 세계는 우리의 입맛에 대한 커다란 목적물 즉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젖가슴이다. 우리는 영원히 희망하고 영원히 실망하면서 사는 젖먹이에 불과하다. 우리의 성장이 어머니 젖가슴에서 머물고 우리가 젖을 떼지 못한 채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로 남아 끝내 받아들이는 자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걱정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부적당함과 죄스러움을 느낀다. 사람들은 삶이 없는 삶을 살고 있고 인생이 모래처럼 그들의 손바닥 사이를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항상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성에서 연유하는 고민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은 또 다른 수동의 형태, 즉 계속해서 떠벌이는 것에 의해서이다. 권위와 소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한때는 생산적이었던 생각이 그 반대로 변해버렸다.

iii. 자유연상과 자유대화

iv. 이성 양심 종교

v. 노동

"인간은 타인을 착취하지 않는 한 살기 위해서는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 "노동은 또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며 인간을 사회적 독립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의 과정 즉 인간 외부의 자연을 주조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조하고 변화시킨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즉 협동과 이성의 힘, 미적 감각을 발전시킨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연과의 원초적인 일체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자연의 지배자, 자연의 건설자로서 자연과 자신을 다시 결합시킨다. 인간의 노동이 발전하면 할수록 개성도 더욱 발전한다."

"중세적 구조가 붕괴되고 근대적 생산양식이 시작되면서 노동의 의미와 기능은 특히 기독교 국가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 이러한 활동의 결과가 실패였는가 아니면 성공이었는가가 그의 구제를 결정짓고 그가 구제된 인간인가 아니면 구제받지 못한 인간인가를 가리는 기준이 되었다. '본래는 만족스럽고 유쾌한 활동이었던 노동이 하나의 의무가 되고 고착관념이 되어 버렸다'. 노동으로 부를 얻을 수 있으면 있을수록 노동은 부와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한 하나의 단순한 수단으로 화했다. 맑스 베버의 용어를 빌면 노동은 인간의 고독과 고립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내면 세계의 고행'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산업노동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산업노동자는 무엇인가를 생산키 위하여 하루 7~8시간씩 최선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살아가기 위하여 노동이 필요하지만, 그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그는 복잡하고 고도로 조직화된 생산과정 속에서 하나의 조그맣게 고립된 기능을 수행하며, 전체로서의 그의 생산품과 결코 대면할 수 없다. 그는 최소한 한 사람의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가게에서 그의 생산품을 살만한 돈이 있을 경우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만 생산품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물질적 측면에 있어서나 보다 광범한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제품 전체와 무관하다. 그는 어느 일정한 장소에 배치되어 일정한 과업을 수행해야만 하지만 노동의 조직이나 관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왜 다른 상품 대신 이 상품이 생산되는가, 그리고 그 상품이 전체 사회의 요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산업심리학 분야에 대한 연구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개개 노동자의 생산성이 증가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알력을 적게 하고 일을 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심리학은 '인간공학' 즉 노동자와 피용자를 기름을 잘 먹이면 더 잘 돌아가는 하나의 기계처럼 다루려는 기도에 봉사하고 있다. 테일러가 노동자의 체력을 기술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보다 나은 조직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대부분의 산업심리학자들은 주로 노동자의 심리 조종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관념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될 수 있다. 즉 노동자가 행복할 때 노동을 더 잘한다면, 생산고를 높이고 마찰을 줄이는 한 노동자를 행복하고 안전하고 만족스럽게 해주자는 것이다. '인간관계'라는 이름 하에 노동자는 완전하게 소외당한 인간에게 알맞는 모든 책략으로 다루어진다."

"소외당하고 심히 불만족한 노동의 특성은 두 가지 반응을 초래한다. 하나는 완전한 '게으름'의 전형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속 싶이 자리잡고 있어서 때로는 무의식적이기도 한 노동 및 노동과 관련된 모든 사람 모든 것에 대한 '적의'이다."

vi. 민주주의

"노동이 소외당하게 되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에 있어서 투표자의 의지의 표현도 소외된 표현이다. ... 이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시민은 정책결정을 하는데 똑같은 책임과 영향력을 갖는다."

"현실적으로는 새로 나타난 민주주의 체제는 하나의 중요한 모순에 빠져버렸다. 기회와 소득의 엄청난 불평등 상태에서 운용되었기 때문에 특권계급은 현상이 그들에게 부여한 특권, 즉 다수 무산대중의 의사가 완전히 표명되면 쉽게 상실될 특권을 잃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무산계급의 대다수는 선거권으로부터 제외되었으며, 제한조건과 자격규정 없이 모든 시민이 투표할 권리를 갖는 원칙은 매우 서서히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소외된 사회에서 국민들이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상품을 사는데에 있어서의 선택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선전의 북소리를 듣고 있으나 맹렬하게 주입되는 암시적인 소음과 비교해 볼 때 사실은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최근 우리는 공적 관계의 충고라는 지혜가 정치선전을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더욱 많이 보게 된다. 선전광고에 돈을 많이 뿌려 공중에게 물건을 사도록 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대중들은 정치적 이념이나 정치적 지도자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 비누를 선전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을 이용하듯이 정치인들을 선전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을 이용한다. 즉 판매에 있어서건 투표에 있어서건 효과가 문제이지 표현되는 합리성이나 유용성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 그렇게 하면 '그'가 표를 얻게 될 것이다. 원리상으로 이것은 유명한 스포츠맨이나 영화배우가 어떤 담배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실제로 민주국가에 있어서 정치기구의 기능은 상품시장에 있어서의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여러 정당들 역시 큰 상사들과 차이가 없고 직업적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자기들의 상품을 팔려고 한다. 그들의 방법은 고압적으로 강요하는 광고행위의 방법과 더욱 더 유사하다. 정치 경제 상황의 예리한 관찰자인 슘페터는 이런 과정을 특히 명쾌하게 도식화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18세기의 고전적 개념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즉 '민주적 방법이란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서 그 정치적 결정은 인민의 의사를 구현하기 위해 모일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써 인민들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여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슘페터는 공공의 복지문제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를 분석하고 위에서 개괄한 공식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에 도달한다. 즉 '그러나 우리가 가정의 사적 기업과 직장에서 한걸음 나아가 그러한 사적인 기업과 직접적이고 명백한 관계가 없는 국가적 국제적 사건들의 영역으로 머리를 돌릴 때 개인의 의지나 사실의 이해력, 추론의 방법은 고전적 이론의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문제의 핵심은 현실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사실이다. 보통 중대한 정치문제들도 전형적인 시민의 마음 속에서는 취미의 영역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여가시간의 관심사이거나 무책임한 잡담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문제들은 관심의 영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사업상의 생각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말하자면 위험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며 실감한다 해도 심각한 것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마치 가공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현실감각의 감소는 책임감의 감소와 효과적인 의지의 부재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물론 자신의 말투와 소원 공상 푸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좋고 싫은 것이 있다. 그러나 보통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 즉 목적성을 지닌 책임 있는 행동의 정신적 대응물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국가적인 사건들을 생각하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러한 의지를 가질 여지가 없으며 그 의지를 펼만한 일도 없다. 그는 일할 수 없는 위원회와 같은 전국민의 위원회의 일원이며, 그것이 그가 정치적 문제에 숙달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브릿지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유이다.'"

"슘페터는 자기의 분석의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의 정의에 도달하는데, 이 정의는 첫번째 정의보다 덜 고상하지만 확실히 보다 현대적이다. '민주적 방법이란 개개인이 국민의 투표를 얻기 위한 경쟁적 투쟁을 통해서 결정할 힘을 획득하는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되어온 바와 같이 오늘날 대기업의 소유권은 수십만의 개인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으며, 그 개인들은 각각 전체 주식의 극히 조그만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법적으로 얘기하자면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따라서 그들이 기업의 정책을 결정하고 경영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소유권에 거의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정규적인 수입에 만족하면서 경영진이 하는 일에 묵묵히 따른다. 대다수의 주주들은 회의에 귀찮게 참석하지 않으며, 요청받은 위임장을 기꺼이 경영진에게 보낸다. 위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대기업의 겨우 6퍼센트만이 전체 소유권자 혹은 다수의 소유권자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관리상황도 대기업의 관리상황과 다르지 않다. 50% 이상의 유권자가 개인적으로 투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는 두개의 정당기구 가운데 하나를 결정한다. 일단 한 정당이 투표에서 이겨 행정부에 들어가면 유권자들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사실상의 결정은 선거민의 이익과 희망을 대표하는 의원 개개인이 아니라 정당을 보고 내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결정은 민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영향력 있는 핵심 인물들에 의해서 내려진다. 개개의 시민이 그가 자기 나라의 제반 결정을 좌우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는 단지 보통의 주주가 그의 회사에 대한 지배에 참여하는 것보다 조금 낫게 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투표행위와 가장 중대한 고차원적인 정치적 결정과의 관계는 신비로운 데가 있다. 그들 사이에는 도대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최종 결정이 투표자의 의지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시민의 의지가 소외되어 표현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즉 투표를 하며, 또 그는 실제에 있어서는 그의 통제와 지식을 넘어선 힘에 의해서 결정이 내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양 받아들이며 자기가 결정의 창조자라는 환상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이 보통의 시민에게 정치문제에 있어서 깊은 무력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정치적 지능이 더욱 더 감퇴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마찬가지로 행동할 기회가 없을 경우 생각이 메마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경우에는 또한 생산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소외와 정신건강

"소외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그 대답은 물론 건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다라 달라진다. 즉 건강이란 말이 인간이 그의 사회적 기능을 완수하고 생산을 계속하며 생식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경우를 뜻한다면 소외된 인간도 아주 명백히 건강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자유로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하고, 사고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하다"

"휴머니즘의 의미에서 정신건강은,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가족과 자연에 대한 근친애적인 유대로부터의 탈피에 의해, 자기 능력의 주체와 행위자로서의 자아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경험에 토대를 둔 일체감의 인식에 의해, 우리 자신의 내외부적인 현실파악에 의해 즉 객관성과 이성의 발달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인생 자체를 열심히 사는 것으로, 완전하게 태어나서 완전하게 자각을 갖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애 같은 과장된 생각에서 빠져나와 비록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진정한 힘을 확신해야 하며, 우리들 각자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파리 한마리나 풀잎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역설도 수긍할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반면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죽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이 우리 인간에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에 관한 불확실성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하며, 반면에 우리 자신의 사상과 감정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들이 진정 우리 자신의 것인 까닭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로울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든가 지구상의 모든 동포와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불러들이는 우리 양심의 목소리에 따를 수 있어야 하는 반면, 그 양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알아들을 수 없고 따라서 거기에 따를 수도 없을 때 자기증오에 빠져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람은 사랑과 이성과 신앙에 의해 사는 사람이며, 자신의 생활과 타인의 생활을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이 장에서 설명하려고 했듯이, 소외된 인간은 건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와 타인들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투자대상으로서 체험하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식이 결핍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식의 결핍은 깊은 불안을 낳게 마련이다. 허무라고 하는 깊은 나락에 직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훨씬 더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다. 지옥에 대한 상상을 할 때 '나'는 벌받고 괴로운 느낌이 들며, 허무의 세계를 상상할 때 '나'는 곧 미쳐버릴 듯한 상태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나'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이 시대를 불안의 시대라고 불러서 큰 잘못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로 자아의 상실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 때문인 것이다. 내가 '당신이 바라는 그런 인간'인 한에는 내 존재란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불안하게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의존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소외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남들과 조화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열등의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타인들과의 동조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에 두기 때문에 자신이 이탈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를 느끼게 하는 어떤 감정 사상 행위 등에 의해서 자기감각이나 자존심에 위협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동인형이 아닌 인간인 이상 그는 이탈하지 않을 수없고 따라서 그는 늘 남들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느낌을 갖게 마련이다. 그 결과 그는 더욱 더 동조하고 인정을 받고 성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에게 힘과 안정을 주는 것은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집단과의 긴밀한 접촉을 잃지 않고 있다는 감정인 것이다."

"소외된 인간은 불행하다. 즐거움을 위한 소비는 자기가 불행하다는 의식을 억제해준다. 그는 시간을 아껴 쓰려고 노력하지만 반면에 자기가 저축한 그 시간을 보내느라고 고심한다."

6장. 그 밖의 다른 진단들

19세기

"20세기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오늘날처럼 그 병폐의 증상이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19세기에 살던 많은 사상가들이 이미 발표한 바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적인 진단과 예측이 20세기 사상가들의 그것과 많은 면에서 공통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 브루크하르트
  • 톨스토이
  • 프루동
  • 보들레르
  • 소로우
  • 재크 런던
  • 칼 마르크스

20세기

"타넨바움은 그의 저서 '노동의 철학' 결론 부분에서, '지난 세기의 중대한 과실은 전 사회가 경제적 동기, 즉 이윤에 의해 조직될 수 있다고 가정한 데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이 가정이 허구임을 입증했다.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가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기업은 단지 빵과 과자 밖에는 제공하지 못하며 참다운 좋은 생활을 추구하는 욕구는 충족시켜 주질 못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노동조합은 그 숱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조합 자체의 자연스러운 '사회'와 그 단결된 노동력, 그리고 참된 모든 사회가 갖는 의미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인생의 여정에서 인간에게 이상주의의 진수를 부여하는 의미를 기업체에 줌으로써 기업체를 살리고 그 능률을 크게 올리게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윤동기를 확장하는 것으로서는 그런 의미를 갖게 할 수는 없다. 기업이 진정으로 생존하려면, 경제적인 역할 이외에 세계에 있어서의 도덕적 역할을 부여 받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조의 경영진에 대한 도전은 오히려 유익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노동조합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와 현존 산업체제를 살리는 아마도 유일한 길일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기업과 노조세력은 협동체를 이루어야 하며, 분열을 일으켜 집안 싸움을 일삼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7장. 여러가지 해답

"19세기에 이미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황홀한 외면과 물질적인 풍요 그리고 정치권력의 이면에서 진행되는 타락과 비인간화의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야만주의로 되돌아가는 전환의 필연성을 운명처럼 받아들였고, 또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건 그 입장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사회 비평은 인간과 역사를 종교적이고도 인간주의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상대론자들은 흔히 사회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한 그것은 건전하고 좋은 사회이며 또한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는 한 그 개인은 건전하고 건강한 개인이라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당시의 사회비평가들은 그같은 상대론자들은 아니었다. 생각나는대로 예를 들자면 부르크하르트, 프루동, 톨스토이, 보들레르, 크로포트킨 같은 사람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며 도덕적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목적이지 절대로 수단으로 이용당할 수 없다. 물질의 생산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인간이 물질 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인간의 창의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역사의 목적은 사회를 개조하여 정의와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원칙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간에 근대자본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론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종교적이고도 인간주의적인 제반 원칙은 또한 보다 나은 사회를 부르짖는 갖가지 요청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 장의 주 목적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해결책 모색의 하나의 시도로 제시하려는 것이지만 이에 앞서 전체주의적 해결방안과 초자본주의라고 불러야 적합할 또 하나의 해결방안을 간략하게 검토해 보기로 한다."

권위주의적 우상숭배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의 공통되는 성격은 원자처럼 세분된 개개의 인간에게 새로운 피난처와 안전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제는 소외의 궁극적 결과이다. 항상 자신이 무력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도록 돼 있는 개인은 그가 복종하고 숭배해야 하는 지도자, 국가, 조국에 모든 힘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개인은 자유로부터 새로운 우상숭배로 도피하는 것이다."

"레닌도 마르크스와 같이 노동계급이 사회를 해방시킬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지만 노동계급이 그같은 목표를 자발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만약 노동계급이 소수의 잘 훈련된 직업적인 혁명가 그룹의 지도를 받기만 한다면, 그리고 이 훈련된 혁명가 그룹이 레닌이 파악한대로의 역사의 법칙을 실현하도록 강력히 추진만 한다면 혁명은 성공할 수 있고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로 끝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레닌의 견해에서 결정적인 점은 노동자와 농민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인간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자유주의적인 사상이나 교권주의적인 사상에서 레닌의 사상과 공통된 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결여이다. 이와는 달리 역사를 통틀어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인 모든 운동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신뢰야말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요건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결여한 '인류'에 대한 신뢰는 위선이거나 또는 위선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종교재판, 로베스삐에르의 테러, 레닌의 독재 등 비극적인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명백히 파헤친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민주주의를 택하느냐 관료주의를 택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경고했다. 러시아의 사태발전은 그녀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입증했다. 그녀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열렬한 자본주의 비판가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고 흔들릴 수 없는 신뢰를 갖고 있었다."

초자본주의

"'정관에 기술된 회사경영의 목적은 이윤을 벌어들이는 것이고 오로지 이윤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윤을 차지하는 사람은 주주 이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일반적으로 주주로서 회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이 사실인 이상 이윤이라는 목적은 노동자들의 열성을 유발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런 목적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너무 많은 이윤이 주주에게로 돌아갔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린컨(James F. Lincoln)의 이같은 이론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개인의 발전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린컨의 생각이었다. '선한 방향이든 악한 방향이든 인류를 현재의 상태로 만든 추진력은 이기주의이다. 따라서 인류가 발전하려면 그러한 추진력에 의존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유도해야 한다.' 린컨은 계속해서 우둔한 이기주의와 총명한 이기주의를 구분해서 설명한다. 전자의 이기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만들고 후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완성을 위해 투쟁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나은 번영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실효성이 있는 유일한 유인은 '우리의 동료들과 우리 자신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현실적 결과로서 린컨은 노동자가 '자신이 기여한 모든 업적에 대해 보상을 받고 자신이 남에게 뒤떨어질 때는 벌을 받는' 것으로 내용으로 하는 산업조직 방법을 제시했다. '노동자는 팀 속의 한 구성원이며 그가 받는 상과 벌은 경쟁에 이기기 위한 모든 기회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무엇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사원은 자신이 최근 쌓은 업적기록에 따라 승진하거나 뒤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원에 대한 평가는 일년에 세 차례 실시한다. 이 평가의 종합점수에 따라 상여금의 액수와 진급이 결정된다. 평가표를 사원들에게 나눠줄 때 사원이 자신의 평가 점수가 그렇게 매겨진데 대한 이유와 더 나은 점수를 받는 방법에 대해 묻고자 할 경우에는 책임 있는 고위 간부가 완전하고 상세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보너스의 액수를 정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율의 6%가 주주에 대한 배당금으로 지급된다. '배당 준비가 된 다음에는 회사의 장래를 위한 기금을 따로 떼어둔다. 이 기금의 액수는 현재의 경영상태를 근거로 해서 중역들이 결정한다. 이 기금은 사업 확장이나 사업 변경시에 쓰인다. 이윤에서 배당금과 기금을 공제한 나머지 액수는 모두 종업원과 경영진의 보너스로 분배 지급한다. 지난 16년간의 보너스 액수는 최소한 임금과 봉급의 20% 이상이었으며 많으면 28%에 해당됐다. 16년간 종업원 한 사람이 지급받은 보너스 총액은 평균 4만 달러였으며 1년에 2천5백 달러를 받은 셈이 된다. 보너스 이외에 노동자들은 기타 비슷한 업체에서 받는 것과 똑같은 기본급을 받는다. 1950년에 린컨 회사의 공장종업원 한 사람에게 지출된 평균 비용이 7701 달러였던데 비해 제너럴일렉트릭 회사는 3천 7백 5달러였다. 약 1천 명의 노동자와 종업원을 데리고 이러한 제도로 운영한 린컨 회사는 대단한 사업번창을 이룩했으며 종업원의 1인당 제품 판매액을 기타 전기제품회사와 비교하여 두 배나 더 많았다. 1934년에서 1945년까지 린컨 회사는 조업중단이 한 건도 없었는데 다른 전기제품 회사에서는 최소 11건에서 최대 96건까지의 조업중단사태가 발생했다. 린컨 회사의 이직율은 다른 모든 제조업계 이직율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이윤분배제도는 전통적 자본주의의 실제와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니다. 이 제도는 주주에게 지급되는 이익배당율의 중요성을 얼마간 무시하고 있는 미화된 형태의 도급제도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간 자체를 운위하면서도 작업에 대한 평가, 노동자가 받는 보너스의 금액, 배당금 액수 등 모든 것은 경영진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핵심이 되는 원칙은 '이윤의 분배'이지 '노동의 분배'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여러가지 원칙들이 비록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이윤분배 개념은 흥미를 끄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도 한 사람의 자본가이며 이 제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함으로써 노동자의 불만이 극복될 수 있는 초자본주의제도의 가장 논리적인 목표가 바로 이윤분배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 바뵈프 (Babeuf)
  • 푸리에 (CharlesFurier)

  • 오웬 (RobertOwen)

  • 프루동
  • 루이 블랑 (Louis Blanc)
  • 바쿠닌 (Michael Bakunin)
  • 크로포트킨 (Peter Kropotkin)
  • 란다우어 (Gustav Landauer)
  •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만일 노동자가 '고용되지' 않는다면 그가 하던 작업과정의 성격과 특징도 바뀔 것이라는 가정을 내세웠다. 노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힘을 의의 있게 표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사회당의 고타 강령(Gotha Program) 중의 어린이 노동 완전 철폐 제의를 비판하기까지 했던 사실을 생각해볼 때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위와 같은 노동의 새로운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던가는 자명해진다. 그도 물론 어린이 착취를 반대하기는 했지만 어린이는 전혀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도 반대하면서 손으로 하는 노동과 교육을 병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RobertOwen이 자세히 말해준 것처럼 미래의 교육이 싹트기 시작한 곳은 공장제도이다. 장래의 교육이란 것은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충분히 개발된 인간을 창조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일정한 나이의 모든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생산적인 노동에다 지식전달과 인간성 연구를 한데 합치는 교육을 말한다.'"

"인간적 열정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위험한 세 가지의 오류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첫째로 그는 인간 속에 내재하는 도덕적 요소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경제적 변천이 이뤄지기만 하면 인간의 선은 자동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그의 가정 바로 그것 때문에 도덕적인 변화의 과정을 마음 속으로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는 보다 나은 사회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새로운 도덕적 정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한 정향이 없이는 온갖 정치적 경제적 변혁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똑같은 원인에서 나타나는 그의 두번째 오류는 사회주의 실현의 기회를 이상하게도 틀리게 판단한 점이었다. 새로운 광명이 비치기 전에 서방세계를 휩싸게 될 암흑을 미리 예견한 프루동, 바쿠닌 같은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와 앵겔스는 좋은 사회가 곧 도래할 것으로 믿었고 공산주의 및 파시즘적인 권위주의나 전대미문의 파괴성을 지닌 전쟁의 형태를 취한 새로운 야만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오해 때문에 마르크스와 앵겔스 사상의 수많은 이론적 정치적 오류가 생겼는데 그것은 또한 레닌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주의의 파괴성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세번째의 오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 공동사회로 개조하는데 있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조건이라는 마르크스 개념이다. 이같은 오류의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또 합리적인 심상이 깔려 있다. 마치 프로이드가 부자연스럽고 지나치게 엄격한 성의 금기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정신적인 건강을 얻게 하는 길이라고 믿은 것처럼 마르크스도 착취로부터의 해방은 자동적으로 자유롭고 협동적인 인간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18세기의 백과사전파가 그랬던 것처럼 마르스크는 환경적 요소의 변화가 지니는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 변화에 의해서는 하루 이틀에 변화하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열정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요약해서 볼 때 마르크스 파의 사회주의가 내세운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사회주의 학파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에 의한 지배와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경제분야를 우선시하는 경향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사회생활의 최고목표의 위치에 인간을 복귀시키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사이의 새로운 조화를 조성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정상상태로 가는 길

일반적 고찰

"RobertOwen이나 프루동, 톨스토이나 바쿠닌, 뒤르껨과 마르크스, 아인슈타인과 슈바이처가 가장 관심을 갖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인간이었으며 산업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에 관한 모든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모두가 인간은 만유의 중심적 위치를 잃고 경제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었으며 동료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뜻있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외의 개념을 좀 더 부연함으로써, 그리고 소외의 심리적 결과는 무엇인가를 심리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생각을 표현해보려고 노력해 왔다. 즉 인간은 수동적으로 되고 시장정향적이며 비생산적으로 퇴보했으며 자기의식을 잃고 남이 인정해 주는 데에 매달리게 되고 타인과 동화하려 하지만 늘 불안을 느낀다. 인간은 늘 불만스럽고 짜증스럽고 걱정에 차있으며 이같은 불안을 보상하거나 은폐하려하는 데에 정력의 대부분을 낭비한다. 인간의 지능은 탁월하나 이성은 퇴화하였다. 인간은 그 기술적인 능력에서 볼 때, 문명의 존재와, 심지어는 인류의 존재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원인으로서 타당한 것은 현대인의 결함을 치료하는 방법으로서도 역시 타당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현대인의 병의 원인이 경제적 또는 정신적 심리적인 원인에서 기인한다고 믿는다면 바로 그 원인을 제거하면 낫게 될 것이라고 필연적으로 믿을 것이다. 반면 내가 여러 바른 측면들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면, 건전함이나 정신건강은 산업적 정치적 조직과 정신적 심리적 경향, 성격구조 그리고 문화적 활동 등등의 여러 영역에서 동시적인 변화를 일으켜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다른 영역들을 무시 또는 제외시킨 채 어느 한 가지 영역에만 노력을 집중시킨다면 오히려 모든 국면의 변화를 파괴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사실 인류의 진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기독교는 사회질서의 변화를 무시한 채 정신적 부활을 설교해 왔는데 사회적 변화 없이는 정신적 부활도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무효가 된다. 계몽시대에는 독자적 판닥과 이성을 최고규범으로 가정했다. 그러나 당시는 사회경제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정치적 평등만으로는 인류애가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정치적 평등을 가르쳤다."

"인간의 욕구와 사회 구조 사이의 갈등을 찾아보고 우리들의 갈등과 소외현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것이 바로 이 책 앞장의 목적이었다. 이 장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구조에 있어서 여러가지 실제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연구해 보는 일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란 생산적이고 소외되지 않은 인간이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써 세상과 관련시키는 인간,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는 인간, 자기를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존재로서 경험함과 아울러 동료와 일체감을 갖는 인간, 불합리한 일에는 절대 복종하지 않으며 양심과 이성의 합리적 권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 살아있는 한 생성의 과정에 있으며 인생이란 선물을 그가 가진 가장 귀중한 기회로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다."

"어떠한 사회가 이러한 정신건강의 목적에 부응하는 사회며 또 건전한 사회 구조는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는 누구도 남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예외없이 항상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는 사회다. 따라서 이같은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힘을 개발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는 아무도 이용될 수 없으며 자기 자신도 이용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는 인간이 모든 일의 중심이고 모든 정치 경제적 활동은 인간의 성장이라는 목적에 종속돼 있다. 건전한 사회는 탐욕, 착취욕, 소유욕, 나르시시즘 등이 강자의 위신을 높이거나 물질적 이익을 위해 활용될 수 없는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인간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기본적인 성품으로 간주되고 기회주의나 무원칙한 행동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또한 이 사회에서는 사회문제에 관련하는 것이 곧 개인문제에 관련하는 것이 되어 동료와의 관계가 개인적 측면에서의 관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더 나아가서 건전한 사회는 인간이 자신의 생활의 주인임과 동시에 사회생활에 능동적이며 책임감을 가진 참여자가 되도록 허용하는 사회이다. 건전한 사회는 인간의 단결을 증진하고 사회 구성원이 서로 사랑하도록 허용할 뿐 아니라 사랑하도록 조장하는 사회다. 건전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일에 생산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장하며 이성의 개발을 촉진시켜 집단적인 예술이나 의식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인 욕구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경제적 변혁

A. 사회주의의 문제점

"우리는 앞 장에서 오늘날의 광기에 대한 세 가지 해답, 즉 전체주의, 초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해답에 관해 논의하였다. 전체주의에 의한 해결책은 그것이 파시즘이든 스탈린주의든간에 광기를 증대시키고 비인간화에 이를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초자본주의에 의한 해결책은 자본주의 본래의 병리를 더욱 심화시킬 뿐 인간의 소외와 로보트화를 증대시켜 인간을 생산이라는 우상의 노예로 만드는 과정을 완성시킨다. 건설적 해결책으로 사회주의적 방식이 제시됐다. 그것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적인 유대와 이성, 생산성이 저해받지 않고 오히려 신장되는 사회질서를 창조하는 방향에서 우리의 사회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실제로 실시되어 온 사회주의의 결과는 실망적이라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같은 실패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실패를 피하고 건전한 사회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경제 사회적 재건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인가?"

B.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의 원리

"오웬주의자, 상디칼리스트, 무정부주의자, 길드 사회주의자 등 여러 파의 사회주의자들은 중요한 관심사에 있어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 그것은 노동에 있어서 노동자의 사회적 인간적 상황과 동료 노동자들과 관계지어지는 방식에 대한 관심사이다 (여기와 다음 여러 군데에서 내가 노동자라고 할 때 뜻하는 바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부가적인 이익을 얻지 않고 자기 자신의 노동을 바탕으로 하여 생활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적 사회주의라고 해도 좋을 이런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목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가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는 참가자가 되며 자본이 노동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산업조직이었다. 이들은 1차적으로 소유의 문제가 아닌 노동의 조직 및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강조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코올(G. D. H. Cole)의 공식을 인용하려 한다.

...

'정치적인 자유는 그 자체가 언제나 환상적인 것이다. 한 주일에 7일이 아니고 6일간이나 경제적으로 예속된 인간은 5년에 한 번 투표 용지에 찬성 도장을 찍는다는 것 하나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유가 보통 인간에게 그 어떤 의미가 있게 되려면 그것은 산업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라야만 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은 노동자의 자치적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그는 그 어떤 정치체제 속에서 살건 여전히 노예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임금노예의 개별적인 고용주에 대한 굴욕적인 관계를 일소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국가사회주의 역시 노동자를 폭군의 쇠사슬에 얽어매고 있으나 그것이 비개인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통이 덜하다는 이야기는 되지 않는다. 산업에 있어서의 자치는 단지 보충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치적인 자유를 쟁취하는 선봉장이 되는 것이다.'

...

'그러면 먼저, 영국 노동당이 노리는 이상이란 무엇인가?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산업의 지배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 두 단어, 즉 직접 관리로 요약된다. 기업을 실제 경영하는 일이 그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업의 주문 생산, 분배, 교환이 노동자에 속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산업자치를 성취하여 임원선출권을 행사하고 산업과 무역의 전문적인 메카니즘을 모두 이해하고 이를 충분히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경제면에서 사회의 신뢰할 수 있는 요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C. 사회심리학적인 반론

"사실 정신적인 고통의 가장 나쁜 형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이나 스스로의 인생을 꾸려 나가는데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알지 못하는 권태이다. 인간은 금전적인 또는 다른 보상이 없다 하더라도 무언가 의미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력을 소비하기를 열망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권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 경영자에 비하여 피고용자의 숫자가 늘어난데 대하여는 19세기 초기에는 취업인구 4/5가 크건 작건 자영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870년 경에는 1/3만이 이 부류에 속한데 불과하고 1940년에는 이와 같은 낡은 중산 계층이 취업인구 전체의 1/5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자영업자에서 피고용자로 변한 것은 본질적으로 노동의 만족을 감소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피고용자는 자영업자보다 소외된 입장에서 노동을 한다. 그들은 그 임금이 높건 낮건 독력으로 가치있는 일을 해내는 인간이 아니라 조직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D. 동기로서의 이익과 참여

"이제 산업심리학 부문에서 최근의 연구결과에 눈을 돌려보면 노동상황의 기술적 및 사회적 측면의 구별이 지니는 중요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 노동자가 자기의 일에 적극적이고 책임있게 참여하는 것이 활기와 싱기를 주는 효과가 있다는 많은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전체로서의 노동상황이 흥미가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만 하면 기술적으로 단조로운 노동도 흥미 있는 것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예로써 웨스턴 일렉스틱컴퍼니의 시카고 호손 공장에서 실시한 엘튼 메이요(Elton Meyo)의 고전적인 실험이 있다."

"메이요의 놀라운 실험 결과는 병이라든가 피로 또는 낮은 생산실적은 노동의 단조로운 기술적 측면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주로 노동상황의 사회적 측면에서 노동자가 노동상황 전체로부터 소외당하는 데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가 그 자신에 의미가 있고 자신이 발언권을 갖는 어떤 일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이 소외가 어느 정도 감소되게 되면 비록 그가 기술적인 측면에서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더라도 노동에 대한 그의 심리적 반응은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유럽에는 약 1백개 정도의 노동공동체가 있는데 주로 프랑스에 있고 또 일부는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에 있다. 이 노동공동체의 일부는 산업노동공동체이며 일부는 농업노동공동체이다. 이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지만, 기본 원리는 매우 유사해서 어떤 한 집단에 대한 설명만으로 전체 집단의 본질적 특징을 적절히 묘사할 수 있다."

"보와몽도는 시계부품 제각공장으로, 실제 이 공장은 프랑스에서 이 분야의 가장 큰 7개 공장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설립자 마르셀 바르뷔(Marcel Barbu)는 자신의 공장을 만들기에 충분한 돈을 저축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바르뷔는 그가 설립한 공장에 공장협의회를 처음으로 두었고 이익분배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 의해 승인된 임금율제도 도입했다. 그러나 이 개화된 온정주의는 바르뷔가 노렸던 것은 아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자, 바르뷔는 그가 마음 먹었던 해방을 향한 진정한 출발에 착수하고자 원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계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거리로 나가 이발사, 소시지 만드는 기술자, 급사 등 전문화된 산업기술자가 아닌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모두 30세 미만이었다. '바르뷔는 만일 그들이 그와 함께 고용주와 피고용인간의 구별이 없는 조직체를 탐색해 보는데 동의한다면 회중시계부품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요점은 탐색에 있었다.' '제일의 획기적인 발견은 종업원들이 서로 말을 거리낌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종업원들과 고용주 간의 이같은 언론의 완전한 자유는 경쾌한 신뢰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각자 거리낌 없는 대화는 토론으로 발전하고 작업에 있어 시간낭비라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만장일치로 매주 비공식적인 모임을 위한 일정한 시간을 따로 정해 의견의 차이와 갈등을 조정하도록 햇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무엇보다 좋은 경제조직을 이룩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획득하려 했기 때문에 토론은 기본적인 태도를 털어놓아버리는 방향으로 이끌어지게 마련이었다. 바르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곧 우리는 공통의 기초, 즉 그때부터 우리가 공통윤리라고 불러오는 것의 필요성을 알았다.'"

"이 집단이 두번째로 발견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체 교육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시간을 아껴 교육시간으로 선용할 수 있다고 궁리해냈다. 3개월 동안 생산량은 무척 늘어나서 그들은 1주 48시간 작업에 9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햇을까? 그들은 이 9시간을 교육시간으로 선용했으며 이 시간도 정상 노동시간으로 임금을 지불받았다."

"그들의 원리는 이렇다. '우리는 공장이나 인간의 기술적인 행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노동공동체에서는 함께 획득하는데 역점이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지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 함께 일하는데 역점을 둔다.' 그 목적은 생산성을 높이고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의 이점을 버리지 않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생활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음은 이 노동공동체와 또다른 노동공동체가 기초로 하는 원리들이다.

  1. 인간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가 하는 노등의 모든 성과를 향유해야 한다.
  2. 인간은 스스로를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한다.
  3. 인간은 인간의 능력에 맞는 직업집단(최대한도 1백 세대) 안에서 공동의 노력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4. 인간은 세계 전체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들을 음미해 보면 그것들은 생활의 문제의 중심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어떤 것을 만들고 획득하는 일로부터 인간적인 관계를 발견하고 조장하고 발전시키는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질의 문명으로부터 인간의 문명으로 승화, 더 나아가 인간 사이의 운동의 문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혼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중앙집권화와 지방분산화를 잘 혼합한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었으며 또 이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를 공장 일과 공동체의 생활에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게 참여하도록 만든 방안이다."

"보통 후보자는 높은 수준에서 지명되어 낮은 수준에서 그것이 수락되든가 거부되게 되어있다. 이것이 보스 정치나 권위주의를 막는데 효과가 있다고 멤버들은 말한다."

"이들 공동체의 우너리에 포함된 가장 뚜렷한 요점을 요약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싶다.

  1. 노동공동체는 모든 현대적인 산업기술을 이용하고 수공업적 생산으로 후퇴하려는 경향을 피하고 있다.
  2. 그들은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충분히 중앙집권화된 리더쉽에 모순되지 않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비합리적 권위는 합리적 권위에 의해 대체되었다.
  3. 이데올로기상의 차이점에 비하여 실제 생활에 대한 강조. 이같은 강조는 가장 다양하고 엇갈리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가 선포한 '올바른 의견'에 추종해야 하는 위험이 전혀 없이 형제애와 관용 속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준다.
  4. 노동, 사회적 문화적 활동의 통합. 노동이 기술적으로 매력이 없기는 하나 그것은 사회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고 매력도 있다. 예술과 과학의 활동은 전체의 상태에 대하여 없어서는 안될 부문이다.
  5. 소외의 상태는 극복되고 노동은 인간 에너지의 뜻 있는 표현이 되었으며 인간의 유대는 자유의 제한이나 동조의 위험을 초래하는 일 없이 성취된다."

E. 실제적인 제안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조건과 비슷한 조건이 현대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느냐가 문제다. 이런 조건을 만든다면 목표는 인간이 그에게 보람있는 어떤 일에 그의 전 생애와 온 정력을 바칠 수 있는 노동환경을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노동환경에서는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행해지는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동료와 격리되는 느낌보다는 일체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동환경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들이 아주 작은 그룹으로 구분되어 공장전체로서는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있다하더라도 각 개개인이 자신을 실재하는 구체적 인간으로서 그룹과 연관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모두에게 능동적 참여와 책임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필요한 만큼 연합된 지도체제를 창조할 수 있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혼합한 방법이 발견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노동자의 능동적 참여를 위한 첫째 조건은 노동자가 그 자신의 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전 업체의 운영에 정통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더 나아가서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을 기술적 과학적 연수 과정에 참여케 함으로써 이런 지식을 얻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연수 과정은 작업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도 실행되어야 한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행해지는 기술적 과정을 알게 되고 그것이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또 이런 지식으로 자신의 사고가 자극된다면 그가 수행해야 하는 단조로운 기술적 작업이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공정에 관한 기술적 지식과는 별도로 필요한 지식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일하는 사업이 경제적으로 어떤 기능을 가지며 사회 전반의 경제적 욕구와 문제에 어떤 관계를 갖느냐 하는데 대한 지식이다."

"이론적 지식과 관심은 그것을 행동화할 방법이 없을 경우 시들기 마련이다. 그의 개인적 작업환경과 전 사업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만 노동자는 능동적이고 관심있고 책임있는 참가자가 될 수 있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그가 자본에 의해 고용되지 않을 때, 그가 명령의 대상이 아니고 자본을 사용하는 책임있는 주체가 될 때에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아니고 경영과 결정에의 참가이다. 정치 영역에서처럼 여기서 문제는 중앙의 계획과 지도가 결여된 무정부상태를 피하는 일이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된 권위주의적 경영이나, 무계획하고 서로 대등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경영이냐를 양자택일할 필요는 없다. 해답은 중앙집권과 지방분산의 혼합, 상의하달과 하의상달이 자유로운 결정의 종합에 있는 것이다."

"공동경영과 노동자 참여의 원리는 경영에 대한 책임을 중앙지도와 일반 사원간에 나누는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다. 정보에 정통한 소집단이 자기들 자신의 노동상황과 전체기업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 그들의 결정이 경영진에 전달되어 진정한 공동경영의 기초를 형성한다."

"공동경영과 고동결정의 원리는 소유권의 심각한 제약을 의미한다. 한 기업의 소유자는 그들의 자본투자에 대한 적당한 비율의 이윤은 취득하겠지만 이 자본이 고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무제한의 명령을 내릴 권리는 없다. 그들은 적어도 이 권한을 이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누어 가져야만 한다. 사실 대기업에 관한한 주주는 결정에 직접 참가함으로써 그들의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다. 노동자들이 결정의 권한을 경영진과 나누어 갖는다 해도 주주들의 실제적 역할은 기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 산업에서의 이익분배의 주창자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실업과 린컨(J. E. Lincoln)까지도 배당액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일정액 이상은 초과되지 않아야 하며 이 일정액을 초과하는 이득은 노동자들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제의하고 있다."

"탄넨바움(F. Tannenbaum)은 그의 저서 '노동의 철학'에서 또 다른 제의를 하였다. 그는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대표하여 충분한 주식을 구입함으로써 그들의 기업의 경영을 통제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논함에 있어 강조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러한 참여가 초자본주의형의 이익분배라는 생각으로 진전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기업의 노동자와 종업원들이 단순히 자기들의 기업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인간과 사회적 세력간의 소외는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남을 것이다. ... 자기들 아닌 외부인에 대한 적개심에 바탕을 둔 집단 내부의 사회적 결합은, 사회적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확대된 이기주의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 문제에 대한 논의를 끝내면서 반복의 위함을 무릅쓰면서까지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동을 인간화한다는 방향의 모든 시사가 경제적인 생산량 증가에 그 목적을 둔 것도 아니며 또한 노동 그 자체에서 한층 더 만족을 얻는데 목적을 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시사는 전적으로 구조가 다른 사회조직, 즉 경제적 활동이 사회생활의 일부로 여기에 종속적인 성격을 띨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노동 활동은 정치적 활동이나 여가의 선용, 개인의 사생활 등과 분리시킬 수는 없다. 생활의 다른 면이 인간다워지는 일 없이 노동이 흥미로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실은 생활의 인간화 없이는 노동이 즐거워질 수는 없다. 생활의 온갖 부분을 갈갈이 갈라놓고 낱낱이 구획화하는 것은 현대문화가 지닌 큰 폐단이다. 건전한 사회로의 길은 이와 같은 분열을 극복하고 사회 내에서나 각개 인간 내에서 새로 통일과 결합에 도달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앞서 사회주의가 실제 적용된 결과에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실망한다는 사실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점은 모든 노동자가 산업과 정치에 능동적으로 책임있게 참여하는 소외되지 않는 사회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과 공동재산의 대립을 잘못 강조하고 인간적 요소와 권태의 사회적 요소를 무시한데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차츰 높아가고 있다. 따라서 재산의 추상적 개념보다는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공동경영, 권한의 분산, 노동과정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겠다는 인식이 차츰 높아가고 있다. ... 사회주의 정당이 구성원 내에서 사회주의의 원리를 올바로 실감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이것은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노조의 특성이 산업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우선 그 기구 자체 안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노조기구가 보통 대기업들이 운영되는 방식과 다를바 없이 자본주의적 병폐라는 전철을 그대로 밟으며 운영되거나 혹은 그보다 더 고약한 방법으로 운영된다면 말이 안된다."

"알부(A. Albu)는 '산업의 조직'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 '최종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모든 구성원이 기꺼이 받아들일 정책결정과 실행기관에 대한 규약을 마련할 협상체제이다. 이 산업 민주주의의 개념을, 지난날에는 상디칼리스트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현대에 와서는 공동협의 문제에 관해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산업자치에 대한 보다 소박한 염원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많은 연구를 요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어느 한 기업에 고용된 전 종업원이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한 어떤 과정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즉 직접 선출된 대표를 중역회의에 참여시키든지 또는 상당한 권한을 가진 공동협상의 계층조직을 통하든지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든 후자의 경우든 기업의 하부조직 구성원들이 정책을 해석하고 그것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한느 정도는 증가될 것임에 틀림없다.'"

"스트래치(John Strachey)는 '영국 노동당의 임무와 업적'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주식회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가해지는 무책임한 독재이다. 이 독재는 명목상으로는 주주들로부터 오는 것으로 돼있지만 실상은 대부분은 스스로 임명되어 종신임기를 누리는 한 두명의 중역이 자행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회사활동에 종사하는 전체 종업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책임을 갖는 공적인 회사를 만든다면 이런 회사는 한 두 중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회사와는 아주 다른 종류의 기관이 될 것이다.'"

"공동경영을 제외하고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산업 전체가 끊임없이 확대되는 내부시장의 존재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들은 제각기 끊임없이 확대되는 시장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몫을 획득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판매고를 올리려고 기를 쓴다. 이 경제상황의 결과 각 산업은 대중의 구매욕을 부추기기 위해서, 정신 건강에 크게 해로운 수용적 정향을 만들어내고 강화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 똑같은 현상의 또 다른 측면은 낭비의 경향이다. 이런 낭비 경향은 대량 생산을 증가시키려는 경제적 필요에서 더욱 심화된다. 이 낭비로 빚어지는 경제적 손실은 차치하고라도 이것은 또한 중대한 심리적 효과를 갖는다. 즉 소비자로 하여금 노동과 인간 노력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하게 하며 또한 자기 자신의 나라, 혹은 더 가난한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낭비하는 물품을 귀중하게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낭비의 습관은 인간생활의 실제, 즉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경제적 투쟁에 대한 어린애같은 무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식민지 착취의 시대는 이제 끝났고 세계 각국은 백년 전의 한 대륙만큼이나 서로 밀접한 관련을 ㅁ재고 있으며 세계의 보다 부유한 나라의 평화는 이보다 가난한 나라의 경제발전에 의존하게 됐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길게 보아 서구세계의 평화화 자유는 아프리카와 중국의 기아와 질병과는 공존할 수 없다. 선진국들이 후진국들을 도우려면 자기나라에서의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해야만 한다. 선진국들은 평화를 원한다면 후진국들을 도와야만 한다."

"소득의 불평등은 소득의 차이가 인생의 경험의 차이를 유도하는 선을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될 것 같다. ... 그러나 약간의 소득격차가 있다 해도 그 격차가 일정한 선만 넘지 않는다면 기본적 인생 경험은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득이 얼마나 많고 더 적으냐 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느 점에서 소득의 양적인 차이가 인생경험의 질적인 차이로 변환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점을 찾아내는게 문제이다."

"자연법칙에 의해서건 사회법칙에 의해서건 어떤 사람도 국가의 부로부터 제외돼선 안된다는 것이 요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식하고 책임감이 부족하며, 요컨대 이와 같이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그런 비참한 환경에 빠져도 할 말이 있을 수 없다는 백년 전의 이론은 이제 유행되지 않는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조건 없이 최소생계비를 보장하는 제도만 확립된다면 사업상 혹은 개인적 관계에서 경제적 이유로 생겨나는 가장 근본적인 압박은 없어질 것이며 행동의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회복될 것이다."

정치적 변혁

"민주주의가 개인이 그의 확신을 피력하고 의지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선 개인이 확신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 전제가 된다. 그러나 현대의 소외된 개인은 자기의 의견과 편견을 가졌을 뿐 확신은 갖고 있지 않으며 호불호는 있을 망정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의 의견과 편견, 호불호는 취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선전장치에 의해 교묘히 조작되고 있다. 그가 광고나 그의 소외된 전 생활방식에 의해 이미 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놓여있다면 이 선전장치는 무력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거민이 정치적 관료체제의 결정에 대해서 행사하는 제약적 내지 촉진적 영향력은 직접적이라기보다는 훨씬 간접적인 영향력인데, 이것을 제외하면 개개의 시민이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권자가 일단 투표하고 나면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대표에게 위임한 것이며 대표자는 그의 특징인 책임감과 이기적인 직업적 관심을 혼함한 자세로 대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시민은 그 대표를 계속 그 관직에 앉혀 두든지 아니면 악한을 몰아내는 기회가 주어지는, 다음 선거때 투표하는 것 외에는 거의 속수무책인 것이다. 거대한 민주주의에서의 투표 과정은 점점 더 국민투표의 성격을 띠어가고 있어 유권자로서는 강력한 정치기구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를 표시하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에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맡겨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1. 진정한 의사결정이 대중투표의 분위기 속에서 이뤄질 수 없고 단지 어쩌면 옛날의 '부락회의'에 해당되거나 또는 5백명 정도로 구성된 소집단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같은 소집단에서는 현안 문제가 충분히 논읟될 수 있고 각 성원이 자기의 생산을 표현하고 남의 의견을 분별있게 들어서 토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가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에 선동적이고 비합리적인 영향을 주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2. 시민 개개인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생생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3. 시민이 소규모 대면집단의 성원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그것은 중앙에 선출된 의회의 집행부가 내리는 결정작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못하면 시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변변치 못한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중앙집권화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지방분권과 결합시킬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즉 '부락회의'의 원리를 현대산업사회에 재도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 가지 가능성은 전체인구를 주거지역이나 노동장소에 따라 약 5백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으로 조직하는 방안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집단은 가능한 한 사회구성에 있어서 일정한 다양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들 집단들은 이를테면 한달에 한 번 정도씩 장기적으로 회합을 열어 자기네를 위한 관공리와 위원들을 선출하게 되고 이들은 매년 한번씩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할 일은 지역적 및 전국적 관심사인 주요 정치문제를 토의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원칙에 따르면 그러한 토의가 합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에 관한 정보가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입수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적으로 독립된 문화기관이 그같은 토론에 자료로 이용될 사실에 관한 정보를 준비하고 출판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소규모의 대면집단은 정보를 입수하여 사안을 토론한 다음 투표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기술적인 장치의 도움을 받는다면 투표의 전체적인 결과가 짧은 시간에 아주 쉽게 기록될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이렇게 해서 얻은 결정을 어떻게 중앙정부에까지 전달시켜 결정작성을 하는 단계에 효과적인 것이 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같은 절차에 필요한 방식을 찾아낼 수 없는 이유는 전혀 없다. 의회제도의 전통상 우리는 통상 양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결정작성에 참여하지만 각기 다른 원칙에 따라 선출된다. 대면집단들의 결정은 진정한 '하원(House of Commons)'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는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로 구성된 의회 및 역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행정관과 권력을 나누어 갖게 된다. 결정작성은 이런 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도 끊임없이 흐르게 되며, 또한 시민 개개인의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는 생각에 바탕을 두게 된다. 소유모 대면집단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결정작성의 비합리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은 상당히 많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문제는 실제로 시민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시민 개개인이 투표라는 행사를 통해 자기를 넘어서는 권력에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양도하는 소외현상은 해소될 것이며 각 개인은 공동체 생활의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되찾게 될 것이다."

문화적 변혁

"인간이 세계에서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머리로써 뿐 아니라 모든 감각과 눈과 귀, 그리고 몸 전체로써 세계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두뇌로써 생각해낸 것을 몸으로 실행해내야 한다. 몸과 마음은 이런 면이나 다른 어떤 면에서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예술은 그 생산 및 소비에 있어서 개인주의적이다. '집단예술'은 공유하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의 있고 풍부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남과 함께 공감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생활에 부가된 개인적인 '여가'의 일이 아니라 절대 불가결한 생활의 일부이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부합되는 것이며 만일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마치 의의있는 사상적인 세계상을 기대하는 욕구가 실현되지 못한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해한다. 수용적 정향으로부터 생산적 정향으로 인간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철학적 및 과학적인 면 뿐 아니라 예술적인 면으로도 자기 자신을 세계와 관련시키도록 해야 한다. 만약 문화가 그것을 실현시켜주지 않으면 평균인은 수용적 내지 시장적 정향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우리는 소비자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영화 범죄보도 술 유희에 '탐닉하고' 있다.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참여도, 공통된 체험도 없고 인생에 대한 중요한 해답으로서의 의의있는 실천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젊은 세대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의의있고 공유하는 예술적 활동을 할 기회가 없을 때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음주, 영화관람 식의 백일몽, 범죄, 노이로제, 광기 속으로 도피하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 하겠는가? 만약 우리에게 전체의 퍼스낼리티를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없고 공통된 예술과 의식도 없다면, 거의 문맹이 없고 그 어느 때보다도 고등교육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는 사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직도 진정한 축제가 있고 공통된 예술적 표현을 공유하며 그러면서도 문자해독자는 전혀 없는 비교적 원시적인 촌락이야말로 의심할 나위 없이 교육을 받고 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듣는 우리의 문화보다 문화적으로 더욱 진보적이고 정신적으로도 더욱 건전한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일까? 의식을 고안해낼 수 있을까? 집단예술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들을 장려하기 시작하면 뿌린 씨는 자라나고, 낡은 형식에 새 형식을 더해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며 이같은 새로운 정향이 없었더라면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채 사라졌을뻔한 새로운 인재들이 나타날 것이다."

9장. 요약 - 결론

책/건전한 사회 (last edited 2020-12-23 06:13:46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