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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과정도 생산과정만큼이나 소외되어 있다. 첫째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물건을 손에 넣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물건을 획득하는 아주 독특한 방법일 뿐이다. 돈을 추상적인 형태로는 노동과 노력을 의미하지만 나 자신은 유산상속이나 사기 행운 또는 기타 여러가지 방법에 의해 돈을 획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돈이 반드시 나의 노동, 나의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 "반면 소비할 경우 돈은 노동이라는 추상적 형태로 변형되고 그 무엇과도 교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돈을 소유하고 있다면 무엇을 획득하는데 나의 노력이나 관심은 필요치 않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미술을 감상할 줄 모르더라도 훌륭한 그림을 가질 수 있고, 음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최고급 전축을 살 수 있으며 단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서재를 마련할 수도 있다." ... "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획득하고 또 그것을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 인간적인 획득의 방법은 내가 획득하는 물건과 질적으로 맞먹는 노력을 지불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획득과 소비의 과정에서 돈이 갖는 소외기능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화폐는 ... 참된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을 한갖된 추상적인 관념으로 바꿔놓고, 급기야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허무한 것과 관념적인 것, 즉 개인의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힘을 현실의 힘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획득의 방법을 떠나, 우리는 일단 물건을 획득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많은 물건의 경우 그러한 물건을 사용하는 구실마저 없다. 우리는 단지 그 물건을 갖기 위해 그것을 획득한다. 아무런 쓸모도 없으면서 소유 자체에 만족한다. 값비싼 식기, 깨질까봐 꺼내 쓰지조차 못하는 수정 꽃병, 쓰지 않는 방이 많이 딸리고 불필요한 승용차가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것들은 낮은 중류계층 가정의 값싼 골동품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갖는 재미만으로 갖는 예이다. 이렇게 물건 자체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현상은 19세기에 더욱 현저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냥 간직하기만 하는 물건모다 사용되는 물건을 소유하는데서 더욱 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이같은 점은 사용되는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 가운데에도 사회적 지위에 대한 만족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는 성질이나 출처를 모르는 사물로 둘러 쌓여 있다. 전화 라디오 전축 등을 비롯 기타의 복잡한 기계 등은 원시사회에서 나온 인간이 느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 정도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신비스러운 것이다. 즉 우리는 이같은 기계의 사용법만 알 뿐 학교 다닐 때 한번 배웠던 극히 어렴픗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들 기계의 기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 어떻게 빵이 만들어지며 옷감이 짜여지는지, 그리고 탁자가 만들어지고 유리가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물에 대한 구체적 연관성도 갖지 않은채 생산하듯이 그것을 소비하면서 살고 있다. 단지 이같은 사물과 맺고 있는 관계라는 것은 이들을 조작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이같은 소비방식에 따라 인간들은 만족을 모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사물을 망각한 채 인간들은 그저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물건을 소비하고 싶어하게 됐다." "중산층 사회의 오래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소유와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변화했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옛날 습관대로라면 사람과 그의 재산 사이에는 소유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같은 태도는 그의 몸에 배어들어 그는 이를 또한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소유한 물건을 극진히 간직했으며 만약 이들과 영원히 떨어져야 할 때에는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참으로 고통스럽게 여겼다. 요즘은 재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전혀 없어졌다. 그저 사들인 물건이 새것이라는 것만 좋아할 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서슴없이 이를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친구에 대한 현대인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서로를 이용하는 두 개의 추상적인 내용, 또는 두 개의 생명을 가진 기계의 관계이다. 고용주는 그가 고용한 사람을 이용하며 장사꾼은 고객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이용가치가 없으나 훗날 이용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우정을 가지고 대한다. 그래서 만인은 만인의 상품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 관계에서는 사랑이나 증오가 그리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상적인 우정, 그리고 피상적인 공정은 있지만 그 껍질 뒤에는 거리감과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또한 미묘한 불신도 상당히 있다." "인간 상호간의 소외는 일반적이며 사회적인 유대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관계란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이전의 사회의 특징이며 특히 중세사회의 커다란 특징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필자는 이 관계를 다른 책에서 시장적 정향(marketing orientation)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시장판에 매매하기 좋게 내걸린 어떤 물건이 된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적극적인 행위자 또는 인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이같은 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그저 시장에서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팔리게 한다는데 있다. 그의 자아의식도 사랑하고 생각하는 그런 개인으로서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그의 역할에서 비롯된다. 만약 물질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타자기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타자기올시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자동차는 '나는 자동차입니다' 또는 독특하게 '포드입니다' '빅크입니다' '캐딜락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에 대해 '당신은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그는 '나는 제조업자입니다' '나는 사무직원입니다' '나는 의사올시다' 또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올시다'라고 대답한다. 즉 그의 대답은 기계들이 응답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바로 자기자신을 사랑과 공포와 확신 의심 등을 가진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체제에서 어떤 기능을 충족시키고 있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과는 소외된 텅빈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의 가치관념은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을 후한 값에 팔 수 있는가, 자신을 당초와 비교해서 더 비싼 값에 내놓을 수 있는가, 요컨대 자신이 성공적인 존재인가의 여부에 가치의 기준이 놓여 있는 것이다." |
ErichFromm의 저작.
우리들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인가 Are We Sane?
병든 사회란 무엇인가 Can A Society Be Sick? - The Pathology of Normalcy
인간의 상황 The Human Situation - The Key to Humanistic Psychoanalysis
Man's Needs - As They Stem from the Conditions of His Existence
- Transcendence - Creativeness vs. Destructiveness
- Rootedness - Brotherliness vs. Incest
- The Need for a Frame of Orientation and Devotion - Reason vs. Irrationality
정신의 건강과 사회 Mental Health And Society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Man in Capitalistic Society
- The Social Character
The Structure of Capitalism and the Character of Man
- Various Other Aspects
- Anonymous Authoity - Conformity
- The Principle of Nonfrustration
- Free Association and Free Talk
- Reason, Conscience, Religion
- Work
- Democracy
- Alienation and Mental Health
그 밖의 다른 진단들 Various Other Diagnoses
- 19c
- 20c
여러가지의 해답 Various Answers
- Authoritarian Idolatry
- Super-Capitalism
- Socialism
정상상태로 가는 길 Road to Sanity
- General Considerations
- Economic Transformation
- Socialism as a Problem
- The Principle of Communitarian Socialism
- Socio-psychological Objections
- Interest and Participation as Motivation
- Practical Suggestions
- Political Transformation
- Cultural Transformation
- Summary - Conclusion
2장. 병든 사회란 무엇인가?
"두 사람이 서로 '감응성 정신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수백만명 사이에서도 '감응성 정신병'이 일어날 수 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악을 공유한다고 하여 이 악이 미덕이 될 수는 없고 모두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그 잘못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수백만명이 같은 형태의 정신이상을 나타냈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건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와 자발성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객관적인 목표라고 가정할 때, 어떤 한 사람이 자유와 자발성과 진정한 자기 표현력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심한 결함을 갖고 있다고 간주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이 현상을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결함으로 다룬다."
"반면 그런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경멸받거나 난처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간의 결함들은 문화적으로 보편화되어 버렸따. 오늘날 우리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행동하고 느끼는 사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실재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완전히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어떤 사람으로 행동하는 사람, 진짜 웃음을 한갖 가식된 웃음으로 바꾸어놓는 사람, 진지한 대화 대신 의미없는 재잘거림을 일삼는 사람, 진지하게 고통을 느껴야할 때 맥빠진 자포 자기의 상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대다수를 위해 문화란 병들지 않고 그저 결함이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문화가 그 스스로의 결함에서 파생되는 뚜렷한 노이로제 징후를 막도록 스스로 진정제를 마련해주는 것과 같다."
"노이로제와 사회가 만들어낸 결함의 차이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보면 사회가 뚜렷한 증상의 발생을 막는 진정제만 갖고 있는 한 별 탈은 없고 사회가 만들어낸 결함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회 기능은 원만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전체 국민이나 국민의 일부인 사회집단은 오랫동안 예속되고 착취당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반항한다'. 그들은 무관심을 보임으로써 반항하거나 봉사해야 할 그들의 지능과 자발성과 기술 등 모든 기능을 점차 감퇴시키는 방법으로써 반항한다. 또는 증오와 파괴성을 쌓음으로써 반항하며, 그 결과 자기 자신과 지배자 그리고 그들의 체제에 종말을 가져온다. 다시 그들의 반항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들의 창의력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하나의 건전한 사회라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일치하는 사회, 즉 인간이 자기 요고구라고 느끼는 것과 모두 일치하는 사회라는 말이 아니라 - 병적 욕구까지도 주관적으로는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 연구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객관적인 욕구와 일치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이 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첫 과제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간성과 사회와의 사이에서 계속 일어나는 갈등과, 특히 현대 사회에서 계속 일어나는 갈등과, 특히 현대사회에 관한 한 이같은 갈등이 빋어낼 결과뿐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연구하는 데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3장. 인간의 상황 - 인간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열쇠
인간의 상황
"진화된 동물일수록 행동약식이 유연하며 출생시의 구조적 적응이 불완전하다."
"동물은 자연의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삶이 주어진다'. 즉 동물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결코 자연을 초월하지 못한다."
"동물의 존재란 동물과 자연간에 생긴 일종의 조화이다."
"동물이 자연을 초월할 때, 동물이 생명체로서의 순전한 피동적 역할을 초월할 때, 생물학적으로 말해 가장 무력한 동물이 될 때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동물은 곧게 서는 자세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며 두뇌는 그 전에 가장 고등했던 동물보다 더욱 자라난다. 인간의 탄생은 수십만년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는 것, 생명이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아의 의식, 이성과 상상력은 동물 존재의 특성이 되는 '저화'를 파괴한다. 그렇게 된 다음 인간은 우주의 예외자이며 변종이 되었다. 인간은 물질적 법칙에 좌우되는 자연의 일부분이며 그 법칙을 변경시킬 수는 없으나 그 밖의 자연을 초월한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면서 따로 떨어져 있다. 인간은 고향이 없으면서 그러나 모든 다른 생명체와 공유하는 고향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우연한 장소와 시간에 내던져진 인간은 또다시 우연하게 그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탄생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는 안정된 상태를 포기하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태를 찾아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개의 서로 모순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는 자궁으로부터 즉 존재의 동물적 형태로부터 더욱 인간적인 존재로 나아가려는 경향, 다시 말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경향이며 또 하나는 자궁으로, 자연으로, 확실성과 안정을 향해 되돌아가려는 경향이다. 개인이나 인류의 역사에서는 진보적 경향이 더욱 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정신병의 현상이나 인류가 수 세대 전의 상태로 다시 물러서는 현상 등은 새로운 탄생이 있을 때마다 따라다니는 격렬한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조건에서 생기는 인간의 욕구
고착성 - 우애와 근친애
"출생이 자궁의 감싸주는 보호에서 떠남을 의미하듯 성장은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떠남을 뜻한다. 성인과 어린이는 큰 차이가 있지만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한때 존재했던 이같은 상황에 대한 갈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은 자기 발로 서고 자신을 돌보며 자기와 타인에게까지도 책임을 지기도 하지만 어린이는 이 모든 것을 해낼 능력이 없다. 그러나 늘어나는 삶의 고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단편성, 성인으로서의 우연성, 우리가 저지르는 불가피한 과오를 고려하면 성인의 상황과 어린이의 상황은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어떤 성인도 도움과 따뜻함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와 비교하여 여러모로 다른 점도 많지만 또 비슷한 점도 많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얻었던 안전과 정착감을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갈망하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느낌을 달리 찾지 못하는 한 그 절실한 갈망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신 병리학상으로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 현상이 널리 실증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근친애의 문제는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집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의 유대는 인간에게 결부감과 소속감을 주는 모든 자연의 혈통 가운데서 가장 기초적인 형태일 뿐이다. 혈통의 유대는 어떤 계통으로 맺어졌든 혈연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확장된다. '가족'과 '씨족' 그리고 그 후에는 국가 민족이나 또는 교회가 원래 어머니가 아이에게 작용했던 것과 동일한 기능을 맡는다. 개인은 거기에 의지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의 동일감을 갖는다. 동일한 씨족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낯설고 위험한 사람 - 그 씨족만이 갖는 동일한 인간의 자질을 나누지 않아 - 으로 간주된다."
"'프로이드'가 근친애적인 고착에서 부정적이고 병원적 요인만을 본 반면 '바코펜'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의 부정적 측면과 함께 긍정적인 측면을 명백히 보았다. '긍정적인 측면은 여가장적 구조에 넘치는 삶과 자유와 평등을 긍정하는 감각이다.' 인간이 자연의 아이이며 어머니의 아이인 이상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와 주장을 가지며 유일한 가치는 인생이라는 가치 뿐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낫다거나 또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기대에 부응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아이이기 때문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어린이들은 모두 비슷하며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을 권리도 같다. '바코펜'은 또 여가장적 구조의 부정적 측면도 명확하게 관찰했다. 즉 '자연과 피와 그리고 흙에 묶여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개성과 이성의 발전을 저지당한다. 따라서 그 인간은 언제나 어린이로 남으며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성은 아이를 만들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또 아이를 양육하고 보살피는 일을 맡고 있지 않아 여성보다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다. 남성은 자연에 덜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존재와 안전의 터전으로서의 자연 대신, 이성을 개발하고 사상과 원칙과 생산의 인위적인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에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강도가 없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는 달리 유아에 대한 전적인 포용과 보호와 사랑의 역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부자관계는 한편으로는 복종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항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항상 분리의 요인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가부장 콤플렉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상과 훈련과 양심과 개인주의이며 부정적 측면은 위계질서, 억압, 불평등, 복종이다.'"
"우리는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아이가 된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것은 해야한다' '저것은 하면 아노딘다'고 말한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버지는 꾸짖고 옳은 일을 칭찬한다.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반면 우리 안에 있는 어머니는 다르게 말한다. '너의 아버지가 너를 꾸짖는 것은 매우 옳다. 그러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내 아이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용서한다. 네가 한 일이 인생과 행복에 대한 너의 권리를 해칠 수는 없다'고 하는 듯한 말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리 말하고 사실 정반대로 말하는 듯하다. 사실 의무의 원칙과 사랑의 원칙의 모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양심간의 모순은 인간 존재에 고유한 모순이며 이 모순의 양면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의무의 명령만을 따르는 양심은 사랑의 명령만을 따르는 양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왜곡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내면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양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또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에 사랑을 느끼며 모든 범죄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안에서 들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비니즘은 구약성경의 순수한 가부장적 정신으로 되돌아가 종교의 개념에서 모성적 요인을 제거했다. 인간은 더 이상 교회와 동정녀의 모성적 사랑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인간은 완전히 굴복할 때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엄격한 신과 직면한 고독한 존재였다. 군주와 국가는 절대적으로 강력해졌고 그것은 신의 요청으로 시인되었다. 봉건적인 속박에서 풀려나는 해방은 고독과 무력감을 증대시켰지만 가부장적인 원칙의 긍정적 측면은 또한 합리적인 사상과 개인주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가장적 콤플렉스'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현대 서방세계에서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 평등사상, 생명의 신비, 자연의 열매를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구너리가 있다는 사상 등 그 긍정적 측면은 자연법 휴머니즘 계몽철학 민주사회주의의 목표 속에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에 공통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대지의 자식들이며 그녀의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에 도달하지 않고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것은 인간은 모두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의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부장과 여가장정신의 긍정적 측면이 혼합된 진보적 발전과 함께 두 원칙의 부정적 측면도 발전했따. 즉 인종과 민족의 우상이 결합된 국가숭배가 발전된 것이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는 국가와 씨족숭배의 그와 같은 혼합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것이며 이 두 원칙은 '총통'이라는 인물에서 구현되었다."
"만일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 사상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의도했던 대로 사태가 진전되었더라면 중세 가톨릭의 초민족적 세계의 와해는 보다 높은 형태의 가톨리시즘 즉 씨족숭배를 극복하는 인류보편주의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그러한 발전의 조건을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는 씨족우상의 새로운 형태로 물러섰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초기 기독교가 뿌리 뽑으려고 했던 바로 그런 방향이었다. 원래는 진보적 운동이었던 내소날리즘은 봉건주의와 절대주의의 속박에 대치되었다. 오늘날의 일반 사람들은 '인간의 아들'이라는 데서 보다는 어느 민족에 속해 있다는 데서 일체감을 얻는다. 그의 객관성, 즉 이성은 이러한 집착으로 왜곡되었다. '이방인'에 대한 판단 기준도 자기가 속해 있는 씨족구성원들에 대한 기준과 다르다. 이방인에 대한 감정도 똑같이 왜곡되어 있다. 혈연으로나 지연으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그들에 대한 편집병적인 망상은 사소한 일로도 폭발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근친애적 고착은 개인과 타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구성원들과의 관계와 또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해치는 것이다. 혈연과 지연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지 않은 사람은 인간으로 완전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과 이성의 능력이 불구의 상태이며 자기 자신과 동포를 인간의 실재로 체험하지 못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대혁명이 '~으로부터의 자유'를 '~에로의 자유'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한 이후 내쇼날리즘과 국가숭배는 근친애적 고착상태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후가 되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의 이성과 사랑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고, 인간적인 유대와 정의의 바탕 위에 이 세계를 건설하며, 만인이 형제라는 경험속에 자신도 몸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때문이, 인간은 새로운 인간적인 결속의 형태를 발견하고 이 세계를 참다운 인간의 가정으로 바꿔놓게 될 것이다."
일체감 - 개인화와 집단에의 동조성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이성과 상상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 '나는 나다'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살아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가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연과의 본원적인 유대를 잃었으며, 결단을 내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웃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자신의 행동주체로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성에 대한 욕구나 안정 또는 초월의 욕구와 관련해서 이 일체감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은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고는 건전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일체감은, 자기 자신과 자연 또는 어머니를 연결하는 '1차적 유대'로부터 차츰 탈피, 발전하는 과정을 밟는다. 자기를 하나로 느끼기 때문에 '나'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외계를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의식하고 나서야만 비로소 자신을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됐을 때라야 비로소 그는 그 자신을 '나'라고 일컫게 된다."
"'인류'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그 자신을 독자적인 존재로서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씨족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느냐는 정도와 그리고 개성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원시씨족의 성원은 자신의 일체감에 대한 감정을 '나는 우리다'라는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직 그 자신을 씨족을 떠나 존재하는 개인으로 의식하지 못한다."
"봉건제도가 무너지자 이 일체감이 흔들리게 됐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신랄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서구문화는 인간이 모든 분야에서 개성을 만끽하도록 하는 기반을 창조해 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개인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 스스로 사소하도록 교육함으로써, 인간을 권위주의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이 모든 것이 중심이며 자기활동 주체라는 의미에서 '나'를 느낄 수 있게 하고 개인은 각자 그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소수만이 이같은 새로운 '나'를 체험했다. 다수에게는 개인주의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그 배후에 있는 개별적인 일체감을 체득하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적 일체감에 대용할 많은 것들이 추구되어 왔고 또 발견됐다. 민족 종교 계급 직업 등이 일체감을 조성하는덴 봉사한다. 일체화가 사라지고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개별적인 일체감이 생기기 전까지는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개신교도다' '나는 사업가다' 등등의 인식이 일체감을 체험하게 하는 공식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일체화는 넓은 의미에서 지위의 일체화다."
"개인주의 이전의 씨족과의 일체화 대신에 새로이 집단에의 일체화가 형성됐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확신으로서, 군중에 소속되어 있다는 일체감을 의미한다."
4장. 정신의 건강과 사회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듯 정신적으로 불건전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존재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본질적인 정신적 욕구는 어떤 형태로든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와 인간성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데에는 인간의 본성과 거기에서 생기는 욕구를 고려해야 하며 인간에 대한 사회의 촉진적인 충족과 억압적인 충격과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인간에 대한 근대사회의 적극적인 영향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이 측면에 대해선 주의를 덜 기울이고 어느정도 무시되어온 근대사회의 병적인 기능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5장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일반적 의미의 '사회'란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다르면서 확인될 수 있는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는 특정의 사회구조가 있을 뿐이다. 이들 사회구조는 확실히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할지라도 특정한 시대 안에서는 비교적 고정되어 있으며, 사회는 특별한 구조의 틀안에서 운영됨으로써만 비로소 존재한다. 사회의 구성원이나 사회에 있어서의 여러 계급이나 신분집단의 구성원은 사회체제가 요구하는 의미의 기능에 부합할 수 있는 방법에 한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성원의 에너지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적 성격의 기능이다. 즉 사회성원의 행동은 사회의 양식에 따르느냐 않느냐를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고, '사회성원이 행동해야 하는 바대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것이며 동시에 문화의 요구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만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특정의 사회가 지속적으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이 사회 인간들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연결해 주는 것이' 그 사회적 성격이 맡은 기능이다."
"노동과 시간엄수 정돈에 대한 필요성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내적인 충동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사회가 이와 같은 충동이 당연히 일어나도록 하는 사회적 성격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성격의 기원과 기능에 관한 이런 개념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난처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개인이 문화 속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역할에 의해 성격구조가 형성된다는 가정은 인간의 성격이 유년기에 형성된다는 가정과 모순되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가족은 '사회의 정신적인 대리점'이며 사회의 요구를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제도로 생각될 수 있다. 가족은 이 기능을 두가지 방법으로 수행한다.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라나는 어린이의 성격형성에서 양친의 성격이 주는 영향력이다."
"부모의 성격 뿐 아니라 일정한 문화에서 관습이 된 어린이 교육방법도 어린이의 성격을 사회가 바라는 방향으로 형성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인의 퍼스낼리티를 형성하고 그들의 정신건강의 장해를 일으키는 현대 산업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제요소, 산업시대에서의 '욕심많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
자본주의의 구조와 인간의 특성
17세기와 18세기의 자본주의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대의 사회 경제적 구조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이지만 이에 앞서 20세기의 사회와 인간의 발전과는 차이가 있는 17,8세기의 자본주의, 그리고 19세기의 자본주의의 특성에 대해 간단히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술과 산업이 19세기와 20세기의 발전과 비교할 때 초창기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중세문화의 관습과 사상이 이 시대의 경제생활에 아직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상인이 고객을 낮은 가격이나 그밖의 유혹으로 다른 상인으로부터 꾀어 내려하는 것은 기독교도 답지 못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되었다."
"방금 언급한 여러가지 태도는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의 생활을 결정해온 여러 원칙에 ㅈ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칙은 사회와 경제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제적 발전도 그것이 사회내에 어떤 그룹을 해친다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ㅇ낳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개념은 전통적인 사회의 균형이 보존되어야 하고 어떤 교란도 해롭다고 믿는 점에서 전통주의자들의 사상과 밀접히 관련돼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자본주의
"19세기에 접어들자 18세기의 전통주의적인 태도는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는 급속히 변화한다. 욕망과 슬픔을 지닌 살아있는 인간이 체제 내에서 중심의 지위를 차츰 잃어가고 이 자리를 사업과 생산이 차지하게 된다. 인간은 경제적 영역에서는 '만물의 척도'가 되지 못하게 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우선 노동자에 대한 잔혹한 착취였다."
"지난 세기의 여러 제한적인 사상은 사라졌다. 상인들은 고객을 찾아 나서고 그의 경쟁자들보다 더 싸게 팔려고 하고 동료들간의 경쟁적 싸움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큼이나 잔혹하고 제약이 없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모두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인간행위의 지도적 원리가 되었다."
"주된 조절자로서의 시장은 19세기에 모든 전통적 제한 요소로부터 해방되고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득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시장법칙과 경제적 기계구조의 법칙에 의해 움직여지게 되었다. 자본가는 그가 원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의 사업을 확장해갔다. '카네기'가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확장의 지연은 퇴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시장의 법칙 뿐만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발전 역시 그 자신의 생명을 지니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오늘날의 과학의 문제와 조직은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과제를 선택하지 못하고 과제가 과학자에게 스스로를 강요하게끔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품을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밀려가고 강요될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끌고가는가? 그것은 자신을 초월하는 목적이나 목표를 갖지 않고 또한 인간을 자신의 부가물로 만들어버린 체제인 것이다."
"언제나 욕구가 사회생산의 총계보다 더 컸고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냔 하는데, 얼마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또 어떤 사람들이 그들 욕구대로의 만족을 얻어야 하고 어떤 계급은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느냐 하는 조절이 필요하게 된다."
"현재의 시장은 스스로 조절되는 분배의 메카니즘이다. 이 시장으로 인해 사회의 생산을 의도적 계획이나 전통적 계획에 따라 분배할 필요가 없게 됐고 따라서 사회내에서의 힘의 사용이 불필요하게 됐다. 물론 힘의 작용이 없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라기보다는 피상적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노동시장에서 그에게 제의된 임금수준을 수락해야만 하는 노동자는 그가 다른 방법으로는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장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자유'란 환상적이다. 그는 어떤 계약을 맺게끔 느를 강요하는 외부의 힘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또 사실상 그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시장의 법칙은 더욱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장 메카니즘에 의한 자본주의적 분배방식은 계급사회에서 지금까지 고안되었던 다른 어떤 방법보다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 개인의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시장의 경제적 기능은 노동시장이나 서비스 시장에서 노동이나 서비스를 팔려고 원하듯 상품시장에서 상품을 팔려고 원하고 여러 개인의 경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경쟁에 대한 경제적 필요성은 특히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더욱 경쟁적인 태도를 유발했다. 인간은 그의 경쟁자를 능가하려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봉건시대 특유의 태도와는 정반대되는 태도였다. 봉건시대에는 각자는 사회의 질서속에 그의 전통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에 만족해야만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는 이 체제에 있어서 모든 경제활동의 목적이 '이윤'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산의 이윤문제가 논의의 쟁점은 아니다. 문제는 생산의 동기가 사회적 유용성이나 노동과정에 있어서의 만족에 있지 않고, 투자로부터 얻어지는 이윤에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품이 소비자에 대하여 어떻게 유용한가 하는 점은 개개의 자본가로서는 전혀 관심을 가질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체제 아래서는 소득은 개인적인 노력이나 서비스와는 전혀 별개일 수 있다. 자본의 소유자는 일을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 소득을 얻기 위해 노력을 제공하는 인간 특유의 교환기능은 훨씬 많은 돈을 추상적으로 조작하도록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산업의 부재소유자의 경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사람이 기업 전체를 소유하고 있든 또는 일부 주식만을 소유하고 있든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어느 경우에나 부재소유자는 스스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자기의 자본과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해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노동을 하고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소득은 그들이 기울인 노력과는 아무런 합리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학교 교사의 경우 의사와 비교해 볼 때 그 사회적 기능은 꼭같이 중요하고 개인적인 노력도 결코 못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수입은 의사의 수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소득의 분배를 특징지워주는 것은 개인의 노력 및 노동과 이에 대해 베풀어지는 사회적 인정 - 재정적인 보상 - 간에 조화로운 균형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같은 불균형의 물질적 영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 심리적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노동, 즉 인간의 노력과 숙련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이득이 내가 기울이는 노력에 의해 한정되는 한, 내 욕망도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적 유대의 전통적인 원리가 무너지자 새로운 형태의 착취가 나타났다. 봉건사회에서는 군주는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신민들에게 봉사와 물질을 요구할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동시에 군주는 관습에 얽매여 있었으며 자기의 신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적어도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착취는 상호 인간적인 의무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졌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규제를 받았다. 경제적 착취는 19세기의 발달과정을 통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노동자, 아니 오히려 노동자의 노동은 자본가에게 팔리는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팔리는 다른 어떠한 상품과도 본질적으로 다를바 없었으며, 구매자에 의해 그 능력이 최대한 이용되었다. 노동은 노동시장에서 적당한 가격에 사게된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외에 호혜주의의 관념도 없었고 또한 자본가측에 아무런 의무감도 없었다. 설사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이 일거리가 없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노동자의 운수가 나쁘거나 재주가 모자란 결과이거나 또는 단지 사회와 자연의 법칙일 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착취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그대로 익명의 것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기아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개인의 의향이나 탐욕으로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의 법칙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이는 사회의 철칙의 문제로 다루어졌거나 아니면 그런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대의 자본가는 노동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19세기식 착취의 사회적 정치적 형태는 변화했다. 변하지 않은 점은 자본소유자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이용'이라는 기초적인 개념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잔인하다거나 잔인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용주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기본적인 사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이란 관념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느냐 또는 자기 자신을 이용하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이 생활하는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목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경제기구라는 비인격적인 거인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사실은 변함없이 남아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으려면 그의 애정 우정 및 동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용주와 고용인간의 관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봉사를 사들였으므로 그 대우가 아무리 인간적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루에 몇시간의 노동시간을 샀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죽은 과거로서의 자본이 살아있는 활력이며 현재의 힘인 노동을 고용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의 위계에 있어서는 자본이 노동보다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축적된 물질(즉 돈)이 생명의 표현(인간)보다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자본을 가진 사람이 '오로지' 생명과 인간적인 기능과 할력 그리고 창조적 생산력만을 가진 사람을 명령한다. '물질'이 인간보다 가치있는 것이다."
"착취와 이용이란 문제에 밀접히 관련되는 것은,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19세기 인간에 있어서의 '권위'의 문제이다. 인구의 어느 집단이 다른 집단의 명령을 받는 경우, 특히 후자가 소수인 경우에는 어느 사회체제든 틀림없이 강력한 '권위'의식, 가령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되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강력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증대되는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권위'란 것은 어떤 사람이 재산이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어느 누가 '갖고 있는' 자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인간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권위라고 불릴 수 있는 일종의 우열관계와 '억압적' 또는 비이성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우열관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예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잘 나타낼 것이다. 교사와 생도간의 관계 및 노예소유자와 노예간의 관계는 모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사와 생도간의 이해관계는 같은 방향이다. 만일 교사가 생도를 가르치는데 성공한다면 만족스러운 것이고,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그 실패는 교사와 생도의 실패가 된다. 이에 반해서 노예소유자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노예를 착취하고 싶어한다. 노예소유자는 노예로부터 더 많이 욹워내면 낼수록 그만큼 더 만족하게 된다. 동시에 노예도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할수 있는 한 자기의 요구를 지키려 애쓴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한편의 이익이 다른 편의 불이익이 되는 식으로 분명히 상반되고 있다. 두 경우 우월성은 상이한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는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을 돕기 위한 조건이며, 둘째는 착취를 위한 조건이다."
"이들 두가지 형태에서 나타나는 권위의 동태 역시 상이하다. 즉 학생이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교사와의 간격은 그만큼 좁혀진다. 학생은 점점 더 교사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리적 권위의 관계는 스스로 해소되어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월성이 착취의 기초가 되는 경우에는 그 거리는 그 지속기간 만큼 확대된다."
"심리적인 상황 역시 이들 개개의 권위의 상황에 따라 판이하다. 첫번째 경우에는 사랑, 칭찬 또는 고마움 등의 요소가 유력하다. 권위는 동시에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한가지 실례이다. 두번째 상황에 있어서는 착취자에 대한 원한이나 적개심이 일어나, 그 착취자에 대한 복종은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오는 곧잘 노예의 경우처럼 단지 승리의 기회도 없이 고통에 굴복하게 되는 갈등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증오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심지어 때로는 그 대신 맹목적인 칭찬의 감정으로 대치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증오라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감정을 제거해준다. 둘째로 굴욕의 감정을 완화시켜준다. 만일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원체 훌륭하고 완전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나보다도 훨씬 강하고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인 까닭에 나는 그와 동등하게 될 수 없다. 그 결과 억압적 권위에 있어서는 구너위에 대한 증오나 비합리적인 과대평가 및 칭찬이란 요소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합리적 권위에 있어서는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 점점 더 강력해져서 권위와 비슷해지는 정도에 직접비례하여 정서적인 유대의 강도가 감소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의 사회적 성격은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가 혼합된 좋은 예이다."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의 노동을 사들여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며,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은 아사라는 악조건 아래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유형과 오래된 유형의 위계적 성격간에 일종의 혼합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국가, 특히 군주제에 있어서는 복종과 순종이란 오래된 덕성을 함양시켜 이를 새로운 내용과 가치에 적용시켰다. 19세기의 중산계급사이에서는 복종은 여전히 기본적인 미덕의 하나였으며 불복종은 기본적인 악덕의 하나였다."
"요컨대 19세기의 사회적 성격은 본질적으로 경쟁적, 저축적, 착취적, 권위주의적, 공격적, 개인주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으로 다룰 논의를 내다보면서 우리는 이미 여기서 19세기 자본주의와 20세기 자본주의 간의 커다란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엔 착취적 저축적 정향 대신에 수용적 시장적 정향을 보게 된다. 경쟁현상 대신에 협동작업을 지향하는 경향이 증대되는가 하면, 끝없는 이익증대를 추구하는 대신 착실하고 확실한 소득을 바란다. 착취 대신에 부를 함께 나누어 갖고 확산시키려는 경향 및 다른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교묘히 다루려는 경향이 나타나며,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이면서도 공공연한 권위 대신에 익명의 권위 - 여론과 시장의 권위를 보게 된다. 개인적 양심 대신에 적용하고 승인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되며 자부심과 지배의식 대신에 대체로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점점 증대하는 무력감이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19세기 인간의 병리학적인 문제들을 돌이켜 본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당연히 사회적 성격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착취적, 저축적 태도는 인간의 고통을 야기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또 유럽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유럽 자체의 노동계끕에 대해 무자비하게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착취하도록 해준 원인이었다. 19세기의 또 다른 병원적인 현상이었던 비합리적 권위의 역할과 이에 복종한다는 요구는 사회에 의해 금기로 되어 있던 사상과 감정을 억압하는 결과를 빚었다. 가장 뚜렷한 증상은 성에 대한 억압과 신체 동작 의복 건축양식 기타 모든 것에 대한 억압이었다. 이같은 억압은 프로이드가 고찰했듯이 온갖 형태의 신경증적 병상을 빚어냈다.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료하려고 애썼던 19세기 및 20세기 초의 개혁운동은 이들 주요 증세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무정부주의로부터 마르크스 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는 착취를 폐지하고 노동자를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존경받는 인간으로 전환시킬 필요성을 강조했따. 만일 경제적 고통이 철폐된다면, 그리고 노동자가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19세기의 적극적인 업적은 모두 완전히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반면에 악덕은 사라질 것이라고 그들은 미덩ㅆ다. 바로 이와 똑같은 생각에서 프로이드는 만일 성적인 억압이 상당히 줄어들면 그 결과 신경증 등 모든 형태의 정신질환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의 만년에는 당초의 낙관주의가 점점 감퇴되기는 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비합리적 권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새로운 황금시대를 예고해줄 것으로 믿었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정신분석학자들이 제시한 인간의 질병을 고칠 처방은 제각기 다른 것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특징적인 병상과 증세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착취와 경제적 고통을 철폐하거나, 성적 억압 및 비합리적 권위를 배제함으로써 인간이 19세기에 누렸던 것보다도 더 많은 자유와 행복과 진보가 약속된 시대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반세기가 지나자 19세기 개혁가들이 내세운 주요 요구는 성취되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고 있는 나라인 미국을 두고 말하자면 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는 마르크스 시대에는 몽상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사라졌다. 노동계급은 사회 전체의 경제적 발전에 낙오되는 대신 국부에서 점점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엄청난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후에는 미국에서 두드러진 빈곤은 사라지지라는 가정이 완전히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경제적 고통이 점점 철폐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은 노동자가 처한 인간적, 정치적 상황이 철저하게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는 대부분 노동조합을 통해 경영의 사회적 협동자가 되어 있다. 노동자는 30년 전의 처지처럼 혹사당하거나 해고당하거나 학대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노동자는 확실히 더 이상 자기의 상관을 마치 자기보다도 고귀하거나 우월한 존재로 존경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는 자기 상관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훨씬 선구적인 점을 부러워하겠지만 그렇다고 숭배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비합리적 권위에 대한 복종만 보더라도 양친-자식간의 관계에 관한 한, 양상은 19세기 이래 철저히 변화했다. 자녀들은 이젠 양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료이며, 설사 누군가가 약간이라도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식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질까 걱정하는 양친인 것이다. 산업에 있어서도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50년 전에는 믿을 수 없었을 정도로 협동작업과 평등의 정신이 모인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적 억압이 뚜렷이 줄어들었다. 1차대전 후 성의 혁명이 일어나 오래된 금지와 원칙이 버림 받았다.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생각은 시대에 뒤졌거나 불건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같은 태도에 대해서 얼마간 반발이 있긴 했었지만, 대체로 19세기식의 금기 및 억압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19세기의 기준에서 볼 때, 보다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거의 모든 일이 성취되었으며, 실제로 여전히 19세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계속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아울러 앞으로의 진보에 유일한 위협은 소련과 같은 권위주의적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소련사회는 보다 신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에 대해 무자비한 경제적 착취를 하고 착취의 계속에 필요한 무자비한 정치적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많은 면에서 초기 단계의 자본주의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19세기의 안목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19세기의 희망의 달성이 결코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물질적인 번영, 정치적 성적 자유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19세기의 세계보다도 훨씬 더 병들어 있는듯이 보인다. 실로 스티븐슨이 간명하게 갈파했듯이 우리는 이제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로봇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를 위협하는 공공연한 권위는 이제 없지만, 우리는 동조라고 하는 익명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개인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권위와 끝까지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울러 우리 자신에 확신을 전연 갖지 못하고 있으며 거의 아무런 개성이나 자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병리현상에 대한 진단이 19세기 방향을 따를 수는 없다. 우리는 서구세계를 증대일로에 있는 불건전성으로부터 구출하는데 필요한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에 이르기 위해 우리 시대의 특수한 병상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 항목에서는 20세기 서구인의 사회적 성격을 다루면서 이에 대한 진단을 시도해보겠다."
20세기의 사회
1. 사회적 경제적 변화
"미국의 자본주의는 유럽보다 더욱 강력하고 더욱 진보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자본주의가 발전해나가는 이상형태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이상형이라는 것은 유럽이 이를 모방하려해서가 아니라 봉건잔재와 그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본주의의 가장 진보된 형태이기 때문이다.명백히 부정적인 특성들을 제외하고 보면 봉건적 유습에는 순수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는 사람들의 태도와 비교해볼 때 지극히 매력적인 인간적 특성이 많이 있다. 미국에 대한 유럽의 비평은 근본적으로 아직껏 유럽에 생생히 살아있는 봉건주의적 인간의 낡은 가치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유럽 자체에서도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괌거의 권위로써 현재를 비평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 유럽과 미국의 차이는 자본주의의 묵은 단계와 새로운 단계의 차이, 곧 봉건 잔재가 혼합된 자본주의와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간의 차이다."
"생산 양식에 있어 기술적 변화는 우너래 자본집중의 증대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것은 또다시 자본집중의 증대를 불가피하게 했다. 소규모 회사의 수가 줄고 그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대규모의 경제적 거인이 증가하는 것에 정비례한다."
"20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봉건잔재의 소멸, 산업 생산의 혁명적 증가, 늘어가는 자본의 집중과 기업과 정부의 거대화, 숫자와 국민을 조작하는 인원의 증가, 기업경영과 자본소유의 분리, 노동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의 향상, 공장과 사무실에서의 새로운 업무처리 방식 등이 그것인데 이 변화들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기술해보자. 봉건적 요소의 소멸은 곧 불합리한 권위의 소멸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출생에 의하거나 신의 의지에 의하거나 혹은 자연법에 의해 이웃보다 자신의 신분이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인은 평등하고 자유롭다. 누구도 자연적인 권리에 의해 착취당하거나 명령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는다면, 그것은 명령하는 사람이 노동시장에서 명령받는 사람의 노동력 혹은 용역을 샀기 때문이다. 명령을 하는 것은 그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라서 계약 관계가 맺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합리적 권위와 함께 합리적인 권위 역시 무력해졌다. 만약 시장과 계약이 대인 관계를 규정짓는다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를 알 필요가 없게 된다. 필요한 것은 다만 이것들이 공정할 것, 즉 교환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일들이 잘 진행되고 제대로 기능을 다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큰 집단 안에서 유연히 잘 협동할 수 있고, 더욱 더 많이 소비하기를 원하며, 취미가 표준화되어 쉽게 전파되고 쉽게 그 사람의 행동이 예측될 수 있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이와 함께 필요로 하는 것은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돼 있는 것이라고 느끼면서 어떤 다른 권위나 원칙이나 양심에 굴하지 않고 언제든지 명령에 잘 따르려 하고 기대된 일은 해내고 마찰없이 사회기구에 잘 조화되는 인간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힘에 의하지 않고 지배되며 지도자 없이 이끌어지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다른 목적 없이도 행동할 수 있을까?"
2. 성격론적 변화
a. 수량화와 추상화
"아래의 분석에서 나는 소외의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 성격의 분석을 전개시키고자 한다. 그렇게 하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개념이 현대 인간성의 가장 깊은 근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이 현대의 사회 경제적 구조와 평균적인 개인의 성격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집중시킬 때 이 개념이 가장 적절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경제적 특징인 '수량화'와 '추상화'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소외를 논의해보기로 하자."
"중세의 장인은 비교적 몇 사람 안되는 잘 아는 고객들을 상대로 상품을 생산했다. 그가 매기는 가격은 그의 사회적 지위에 전통적으로 알맞는 양식의 생활을 꾸려나갈 소득을 얻으려는 욕구에 의해 결정되었다. 장인은 경험에 의해 생산비용을 알고 있었으며, 비록 몇몇 직공과 도제를 고용하기는 했지만, 공장을 운영하는데 상세한 부기방식이나 대차대조표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 기업들은 대차대조표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 기업은, 중세 장인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한 식으로 구체적이며 직접적 관찰 방법에 의존할 수는 없다. 생산물은 물론, 원료와 기계 노동의 비용은 같은 화폐 가치로 펴시될 수 있고 따라서 비교가 가능해지며, 대차대조표의 등식으로 나타내기에 적합하게 된다. 모든 경제적 거래내역은 엄밀하게 수량화할 수 있어야 하며, 숫자로 표시된 경제적 거래과정의 정확한 비교문서인 대차대조표만이 경영자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고 있는가, 다시 말해 어느 정도 보람 있는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말해준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실이 추상화되는 변화현상은 생산 영역에서 대차대조표와 경제적 사상의 수량화에 무밀지 않고 이를 초월하여 발전하고 있다. 현대기업은 수백만 달러의 돈 뿐만 아니라 수백만에 달하는 고객, 수천명의 주주와 수천명의 노동자, 고용원들을 상대로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기계조직의 부품으로 이 부품을 통제해야 하고 그 결과를 측정해내야 한다. 결국 각 개인은 추상적인 존재로 즉 숫자로 표시되며 이런 기초 위에서 경제현상이 예측되고, 추세가 측정되며 결정이 내려지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노동인구의 20% 정도만이 자영업을 하고 있는 때에는, 이밖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며, 한 사람의 일생은 그에게 임금이나 봉급을 지급하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의지한다기보다는 어떤 '것'에 의존한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은 어떤 조직체이며 경영자 역시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과 인간적인 접 촉을 갖는 인간이라기보다 기업의 비인격적인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교환이라고 하면 대부분 상품과 용역의 교환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든 노동은 화폐로 보상된다. 경제관계의 긴밀한 조직은 노동의 추상적 표현인 화폐로 규제된다. 우리는 상이한 질에 대해 상이한 양의 화폐를 받고,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다른 것들을 돈이라는 양으로 지불한다. 다시 말하면 질적으로 상이한 것을 다만 양적으로 상이한 것과 교환하는 것이다. 실제로 농업인구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노동에 내포된 추상적 성질을 가진 돈을 받지 않거나 쓰지 않고는 단 며칠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상화의 증대를 초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또 다른 측면은 노동의 분업이 증가한데에 있다." "중세경제에 있어서는 농업생산과 장인 노동사이에 분업이 있었다고는 해도 생산 자체의 영역에서는 분업이 별로 없었다. 의자나 탁자를 만드는 목수는 의자 전체나 탁자 전체를 만들었고, 그의 도제가 약간의 준비작업을 했다고 해도 생산의 통제나 전체적인 감독은 자신이 관장했다. 현대 기업에서 노동자는 어떤 식으로도 생산 전체와는 관련이 없다. 노동자는 어떤 전문화된 기능의 수행에만 종사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다른 기능으로 옮겨갈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 생산에 '전체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전문화된 기능을 개발한다. 이런 경향으로 보아, 현대 산업 노동자의 기능은 기계 작업이 고안되지 않았거나, 기계 작업이 인간 작업보다 비싸게 드는 활동분야에서 기계 같은 양식으로 노동한다고 정의될 수 있다. 생산 전체와 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은 경영자이다. 경영자에게 있어서 생산이란 추상적 개념일 뿐, 그 본질은 교환가치에 있다. 노동자에게는 생산이 구체적인 것이지만 그 자신은 생산 전체에 대한 작업은 하지 않는다."
"'3백만달러짜리 교량', '20센트짜리 담배', '5달러짜리 시계'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런 말은 단순히 제조업자의 관점이나 구매과정의 소비자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사물을 기술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점으로 쓰인다. '3백만달러짜리 교량'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교량의 유용성이나 아름다움 같은 구체적인 성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화폐량으로 나타낸 상품으로서의 교량의 교환가치를 뜻한다. 물론 다리의 유용성이나 아름다움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고, 대상물을 경험하는 방법에 있어 다리의 추상적 (교환) 가치에 밀려 그 구체적 (사용) 가치는 '2차원적인' 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을 사고 팔 때 뿐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행위가 모두 끝난 뒤에도 그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에서는 모든 사물이 교환 가치의 구현물인 상품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한 물건은 사고난 후에도 이런 의미에서 상품 가치를 잃는 법이 없으며, 항상 교환 가치의 특성을 지닌 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잘 설명해주는 예를 어느 중요한 과학기관의 행정간부가 낸 사무실 일지보고에서 볼 수 있다. 이 기관은 새로 빌딩을 사서 옮겨 들었다. 행정간부의 일지에 의하면, 빌딩으로 옮겨온지 며칠이 안되는 어느 날 그는 어떤 사람이 건물을 사고 싶어하며 건물을 보고 싶어한다는 부동산회사의 전화를 받았다. 비록 이사해온지 며칠도 안 되는 때에 건물을 팔 가망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건물을 산 이후 건물 값이 올랐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어 귀중한 시간을 내어 부동산업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건물에 들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움. 이런 가격 제의가 회계원이 사무실에 있을 때 들어온 것은 좋은 우연의 일치. 모두들 살 떄 값보다 훨씬 좋은 가격으로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면 이사회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데 의견 일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볼 것'
새로운 건물에 대해 느끼는 자랑과 기쁨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아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사용할 수 있으며 건물을 완전히 소유한다거나 사용한다는 애착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태도로는 자신이 산 자동차에 대해 갖는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자동차는 결코 산 사람이 완전히 애착을 쏟는 것이 되지 못하고 좋은 거래조건이라면 교환될 수도 있는 상품으로서의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자동차는 사용가치가 없어지거나 별로 감소되기도 훨씬 전인 1~2년 후에 팔린다."
"그러나 이런 추상화와 수량화 태도는 사상의 영역을 훨씬 넘어가서 인간 역시 양적 교환가치를 구체화시킨 것에 불과한 것으로 경험된다. 한 인간을 '100만 달러짜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추상으로 보는 것이다. 신문이 어떤 인간의 사망기사에 '구두 제조업자 사망'이라는 제목을 달 때에 이와 같은 태도가 나타난다. 실제로는 어떤 인간적 성질을 지니고, 희망과 좌절감을 가지고, 처 자식을 거느린 한 '인간'이 죽었다. 그가 구두제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는 구두제조기계를 관리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을 소유하고 경영하였다. 그럼에도 '구두제조업자 사망'이라고 하면 풍요하고 구체적인 한 인생은 경제적 기능의 추상적 공식으로 표현되고 만다."
"우리가 새로운 우주상이나 이론물리학, 무조음악, 추상화 등에 대해서 생각하더라도 준거체계의 구체성과 명확성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않으며 천지창조의 목적물도 아니며, 다루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의 주인도 아니다. 우리는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하다. 또 우리는 그 무엇과도 하등의 구체적 관계가 없이 우주공간 어디엔가에 있는 가치없는 무엇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상은 근대적 파괴수단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느다. 현대전에서 일개인이 수십만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을 죽일 수 있다. 그는 단추 하나를 누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 "사람을 때리는 경우 그 구체적 상황이 다른 모든 정상인에게 공통이 되는 양심의 반응을 일깨워 주겠지만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경우는 그 행위와 목적이 행위자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양심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행위가 행위 자체의 생명과 책임을 갖기 때문이다. 과학도 사업도 정치도 인간다운 의미를 갖는 토대와 균형을 상실해버렸다. 우리는 이제 숫자와 추상개념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어느 것도 구체적인 것이 없는 이상 그 무엇도 현실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해서는 안된다는 일은 없다. 공상소설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다를 바가 없어졌으며 악몽이나 몽상이 다음 해엔 사실로서 실현되기도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애와 세상을 자주적으로 내다본다거나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어떤 자리로부터 쫓겨나버린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자기 자신이 만들었던 힘에 의해 점점 더 빨리 내몰리고 있다.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추상적인 개념에 매달려 구체적이 생활과는 점점 더 동떨어져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b. 소외
"소외란 스스로를 따돌림 당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험형식을 뜻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나가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체나 자기행위의 창조자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가 주인공이 되어 복종과 심지어 숭배까지 강요하게 된다. 소외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양식을 갖고 사물이 경험되어지는 바로 그대로 경험하지만,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를 생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 이론체계에 있어 소외란 '자기 자신의 행위가 자신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자기 위에 군림하여 자기의 뜻에 반하는 이질적인 힘이 되고 마는' 그러한 인간의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소외'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 개념은 훨씬 오래된 것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라고 자칭했던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우상숭배'라는 말의 의미를 검토해보면 '소외'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신교의 예언자들은 이교도들이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들을 함께 숭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일신교와 다신교의 본질적 차이점은 신의 수가 아니라 자기 소외라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예술적 재능을 기울여 우상을 만들고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바로 그 우상을 숭배한다. 즉 인간의 생명력이 '물체'에 날아들어 우상이 된 그 물체가 인간의 생산적 노력의 결과로서 경험되지 않고 인간 자신과는 별개의, 그리고 인간 위에서, 인간에 반하는 그 무엇으로서, 인간이 숭배하고 복종하는 그 무엇으로서 경험되는 것이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호세아서 14:8) '우리가 앗시리아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우상숭배자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에 무릎을 꿇는다. '그 우상은 소외된 형태의 자신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신교의 원리는 인간은 무한한 존재이며 인간에게는 속성의 부분 부분을 완전체로 인성화할 수 있는 그런 부분적인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일신교의 개념에 있어서 신이란 인식할 수도 정의를 내릴 수도 없는 것이다. 신은 '물체'가 아니다. 만약 인간이 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됐다면 그는 무한한 속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속성의 한 부분의 투사물에 고개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생명력 있는 사랑과 이성이라는 행위를 방사하는 중심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신들이 물체인 것처럼 자기 자신도, 자기의 이웃도 결국 물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사랑'이란 흔히 이같은 소외라는 우상숭배 현상의 일종으로 신이나 우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이런 식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복종적인 관계에 있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힘과 생각 모두를 상대방에게 쏟는다. 그리하여 그를 우월한 존재로 인식하고 완전한 복종과 숭배를 통해 만족을 느낀다. 이는 사랑하는 상대방을 실제의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실제의 자기 자신, 즉 생산적인 인간의 힘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알지 못함을 뜻한다. 종교적 우상숭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온갖 풍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그 풍요함이 자기 것인 그 무엇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진 그 무엇, 타인에게 복종하고 그에게 몰두함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정치적 지도자나 국가에 충성스런 복종을 하는 데서도 그대로 존재한다. 지도자와 국가는 실제 피통치자의 동의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그의 모든 힘을 지도자와 국가에 투사하고, 그들을 숭배하고, 복종과 숭배를 통해 그의 힘을 되돌려 받기를 희망할 때 그들은 우상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전체주의에 있어서나 루소의 국가론에 있어서나, 개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권리를 유일한 조정자인 국가에 넘기도록 되어 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소외된 개인이 우상의 제단에 참배한다. 이같은 우상이 국가이든 계급이든 집단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그 명칭에 아랑곳 없이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우상숭배, 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 남녀간의 맹목적인 사랑, 정치지도자나 국가에 대한 숭배, 그리고 비이성적 열정이 구체화된 맹목적인 숭배 등 모든 현상에 공통되는 것은 소외의 과정이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풍요함의 적극적인 소유자로서의 스스로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명있는 실체를 투사한 외부의 어떤 힘에 좌우되는 자신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소외는 거의 전면적인 것이다. 현대의 소외는 사람의 일, 소비하는 물건, 국가,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인간은 그 이전에는 결코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스스로 창조했다. 그는 그 자신이 만든 전문적인 기구를 이끌어갈 복잡한 사회기구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모든 창조물은 이제 그의 위에 서 있다. 그는 스스로를 창조자와 중심체로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골렘의 심부름꾼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놓여난 그 힘이 강력해지고 거대해질수록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더욱 더 무력해짐을 느낀다."
"경영자의 역할 또한 소외현상의 하나이다. 그가 부분이 아닌, 전체를 관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구체적이고 유용한 것인 그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과거의 소유자겸 경영자의 타입과 비교해볼 때 현대경영은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불되는 이윤의 크기보다는 기업의 효율적인 운영과 확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경영자의 목표는 타인이 투자한 자본을 수익성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 기업경영에서는 노사관계와 판매분야 - 즉 인간을 다루는 - 담당자들이 생산의 기술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료는 사물과 사람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이다. 관리대상인 조직체의 대형화와 그에 따른 추상화현상으로 관료의 대중에 대한 관계는 완전한 소외의 관계이다. 다스림을 받는 대중들이란 관료들이 사랑과 미움따위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비인격적으로 생각하는 대상물이다. 고급 관료는 자기의 직업활동에 관한 한 아무런 감정적 느낌없이 대중이 마치 숫자나 사물인양 그들을 조작해야 한다. 조직체가 대규모화하고 분업이 고도화하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는 전체를 볼 수 없는데다, 산업구조 내의 개인이나 집단상호간에 유기적이고도 자발적인 협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관료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 관료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기업을 움직여가는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그 기업은 조만간 붕괴될 것이다."
"관료정신이 기업과 정부의 행정조직 뿐 아니라 이미 영국 독일 프랑스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에까지 침투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소련에서 역시 관료적인 경영자와 그들의 소외정신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만일 일부 상황이 변화한다면, 소련에서도 사회적인 공포가 해소될 수 있겠지만 완벽한 관료화라는 체제 (=소외) 없이는 소련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기업 소유자의 자기 자산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그것은 거의 완전한 소외현상의 하나이다. 그의 소유권은 변동하는 화폐의 액면을 표시하는 한 장의 종이에 달려 있다. 그는 기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그 기업과는 어떤 식으로도 구체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이같은 소외의 태도는 주식소유자가 기업에 대해 갖는 태도를 묘사한 버얼과 민드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역력하게 나타나 있다.
- 소유권의 지위는 적극적인 대리의 지위에서 소극적인 대리의 지위로 변했다. 이제 소유자는 자기가 지휘권을 행사하고 책임을 졌던 실질적인 물적 자산 대신에 그 기업에 대한 권리와 기대를 표시하는 한 장의 종이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유자는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기업과 물질적 자산 - 즉 생산기구에 대해서는 통제권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그는 기업과 물적 자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지금까지는 말은 그 주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했다. 말이 살아있는 동안엔 여물을 먹여야 하고 죽으면 주인 손으로 묻어줘야 한다. 그러나 주주에게는 이같은 책임이 없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중요한 자산에 영향을 주는데는 실질적으로 무력하다.
- 과거에는 소유권에 수반되던 정신적 가치가 이제는 소유권으로부터 분리됐다. 소유자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물질적 자산은,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나오는 소득과는 별도로, 직접 소유자에게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퍼스낼리티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그러한 요소가 노동자에게서 사라졌듯이, 이변에는 기업혁명과 더불어 자산소유자에게서 그러한 요소가 사라져버렸다.
- 개인의 부의 가치가 그 자신이나 자신의 노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힘에 좌우되고 있다. 대신 그 가치는 한편으로는 기업을 이끌어가는 개인 - 그러나 그전 형태의 소유자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개인 - 의 행동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민감하고 변덕스러운 시장에서의 타인들의 행동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그 가치는 시장의 특징인 변덕과 조작에 달려 있다. 나아가서 그 가치는 조직화된 시장에서의 일반적인 가치 수준에 따라 달라지듯이 가까운 장래의 사회적 평가의 변동에 좌우된다.
- 개인의 부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니라 - 대부분의 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또 끊임없이 평가를 받게된다. 개인은 매순간마다 자기 자산에 매겨지는 가치평가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이는 자기 소득을 지출하거나 즐기는데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다.
- 개인의 부는 시장조직을 통해 극히 불안정한 것이 됐다. 그 부의 개인적인 소유자는 한순간 주의를 잘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부를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있으며, 또 시장기구가 질서있게 움직인다면 마지못해 팔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나타나는 큰 손실을 입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소유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서의 부는 점점 적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부가 토지 형태일 경우 그 토지의 시장가치는 보잘것 없더라도 소유자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부는 그 특성때문에 시장에서 갖게 될 가치와는 상관없이 소유자에게는 주관적 가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새로운 형태의 부는 이같은 직접사용이 불가능하다. 시장판매를 통해서만이 소유자는 그것을 직접 사용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과거와는 달리 부의 행사에 있어서 시장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과거에는 소유권의 뗄 수 없는 구성요소의 하나였던 권력 책임 및 재산 등이 이제는 통제권을 쥐고 있는 별개의 집단에게 넘어가버리고, 지금과 같은 주식회사체제에서의 산업상의 부의 '소유자'에게는 한갖 소유권의 상징만 남게 됐다.
주주의 소외현상에 대한 또다른 주요한 측면은 자기 기업에 대한 자신의 통제 문제이다. 법적으로 주주는 그 기업을 통제한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듯이, 그들은 경영간부를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개인의 출자몫이 너무 작고 또 적극적으로 주주총회에 나와 참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통제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한다."
"소비의 과정도 생산과정만큼이나 소외되어 있다. 첫째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물건을 손에 넣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물건을 획득하는 아주 독특한 방법일 뿐이다. 돈을 추상적인 형태로는 노동과 노력을 의미하지만 나 자신은 유산상속이나 사기 행운 또는 기타 여러가지 방법에 의해 돈을 획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돈이 반드시 나의 노동, 나의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 "반면 소비할 경우 돈은 노동이라는 추상적 형태로 변형되고 그 무엇과도 교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돈을 소유하고 있다면 무엇을 획득하는데 나의 노력이나 관심은 필요치 않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미술을 감상할 줄 모르더라도 훌륭한 그림을 가질 수 있고, 음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최고급 전축을 살 수 있으며 단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서재를 마련할 수도 있다." ... "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획득하고 또 그것을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 인간적인 획득의 방법은 내가 획득하는 물건과 질적으로 맞먹는 노력을 지불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획득과 소비의 과정에서 돈이 갖는 소외기능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화폐는 ... 참된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을 한갖된 추상적인 관념으로 바꿔놓고, 급기야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허무한 것과 관념적인 것, 즉 개인의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힘을 현실의 힘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획득의 방법을 떠나, 우리는 일단 물건을 획득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많은 물건의 경우 그러한 물건을 사용하는 구실마저 없다. 우리는 단지 그 물건을 갖기 위해 그것을 획득한다. 아무런 쓸모도 없으면서 소유 자체에 만족한다. 값비싼 식기, 깨질까봐 꺼내 쓰지조차 못하는 수정 꽃병, 쓰지 않는 방이 많이 딸리고 불필요한 승용차가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것들은 낮은 중류계층 가정의 값싼 골동품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갖는 재미만으로 갖는 예이다. 이렇게 물건 자체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현상은 19세기에 더욱 현저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냥 간직하기만 하는 물건모다 사용되는 물건을 소유하는데서 더욱 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이같은 점은 사용되는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 가운데에도 사회적 지위에 대한 만족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는 성질이나 출처를 모르는 사물로 둘러 쌓여 있다. 전화 라디오 전축 등을 비롯 기타의 복잡한 기계 등은 원시사회에서 나온 인간이 느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 정도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신비스러운 것이다. 즉 우리는 이같은 기계의 사용법만 알 뿐 학교 다닐 때 한번 배웠던 극히 어렴픗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들 기계의 기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 어떻게 빵이 만들어지며 옷감이 짜여지는지, 그리고 탁자가 만들어지고 유리가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물에 대한 구체적 연관성도 갖지 않은채 생산하듯이 그것을 소비하면서 살고 있다. 단지 이같은 사물과 맺고 있는 관계라는 것은 이들을 조작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이같은 소비방식에 따라 인간들은 만족을 모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사물을 망각한 채 인간들은 그저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물건을 소비하고 싶어하게 됐다."
"중산층 사회의 오래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소유와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변화했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옛날 습관대로라면 사람과 그의 재산 사이에는 소유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같은 태도는 그의 몸에 배어들어 그는 이를 또한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소유한 물건을 극진히 간직했으며 만약 이들과 영원히 떨어져야 할 때에는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참으로 고통스럽게 여겼다. 요즘은 재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전혀 없어졌다. 그저 사들인 물건이 새것이라는 것만 좋아할 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서슴없이 이를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친구에 대한 현대인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서로를 이용하는 두 개의 추상적인 내용, 또는 두 개의 생명을 가진 기계의 관계이다. 고용주는 그가 고용한 사람을 이용하며 장사꾼은 고객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이용가치가 없으나 훗날 이용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우정을 가지고 대한다. 그래서 만인은 만인의 상품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 관계에서는 사랑이나 증오가 그리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상적인 우정, 그리고 피상적인 공정은 있지만 그 껍질 뒤에는 거리감과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또한 미묘한 불신도 상당히 있다."
"인간 상호간의 소외는 일반적이며 사회적인 유대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관계란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이전의 사회의 특징이며 특히 중세사회의 커다란 특징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필자는 이 관계를 다른 책에서 시장적 정향(marketing orientation)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시장판에 매매하기 좋게 내걸린 어떤 물건이 된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적극적인 행위자 또는 인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이같은 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그저 시장에서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팔리게 한다는데 있다. 그의 자아의식도 사랑하고 생각하는 그런 개인으로서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그의 역할에서 비롯된다. 만약 물질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타자기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타자기올시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자동차는 '나는 자동차입니다' 또는 독특하게 '포드입니다' '빅크입니다' '캐딜락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에 대해 '당신은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그는 '나는 제조업자입니다' '나는 사무직원입니다' '나는 의사올시다' 또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올시다'라고 대답한다. 즉 그의 대답은 기계들이 응답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바로 자기자신을 사랑과 공포와 확신 의심 등을 가진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체제에서 어떤 기능을 충족시키고 있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과는 소외된 텅빈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의 가치관념은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을 후한 값에 팔 수 있는가, 자신을 당초와 비교해서 더 비싼 값에 내놓을 수 있는가, 요컨대 자신이 성공적인 존재인가의 여부에 가치의 기준이 놓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