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사람을 살피는 여덟 가지

앞장에서 유소는 영재(英才)와 웅재(雄才)가 만나야 비로소 큰일을 이룬다고 했다. 지혜만 있고 담력이 없으면 결단하지 못하고, 담력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사고를 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지혜가 있는지, 담력이 있는지, 그것을 대체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아홉 가지 징후(九徵)로 바탕을 읽고, 체별(體別)로 치우침을 가리고, 재리(材理)로 논변의 성향을 살피고, 접식(接識)의 함정까지 다 배웠다 해도, 막상 눈앞에 있는 사람 하나를 마주하면 무엇부터 봐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 사람 보는 일의 실상이다.

9장 팔관(八觀)은 바로 이 막막함에 대한 유소의 답이다. 앞선 여덟 편이 사람에 관한 '이론'이었다면, 이 편은 그 이론을 현장에서 써먹는 '동작'이다. 유소는 사람을 여덟 개의 창(窓)으로 나누어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가 남의 것을 빼앗는지 구하는지, 상황이 바뀔 때 낯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평소 품은 뜻과 타고난 바탕이 서로 맞는지, 어떤 동기로 그 일을 하는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공경하는지, 마음속 어느 기틀을 건드리면 반응하는지, 그의 단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나 멀리 내다보는지. 이 여덟 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면 사람이 걸치고 있는 겉치레가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장은 인물지 전체에서 가장 손에 잡히는 장이다. 이론서를 덮고 오늘 당장 회의실에서, 면접장에서, 술자리에서 써먹을 수 있는 여덟 개의 질문이 여기 있다.

첫째, 빼앗는 것과 구하는 것을 보라 — 관탈구(觀奪救)

유소는 사람을 보는 첫 번째 창으로 뜻밖의 것을 고른다. 그 사람이 무언가를 '빼앗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구해주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一曰觀其奪救,以明間雜。
첫째, 그가 빼앗는 바와 구하는 바를 보아 그 안에 뒤섞인 감정을 밝혀낸다.

왜 하필 탈구(奪救)인가. 유소의 논리는 이렇다. 사람의 바탕에는 좋은 성분과 나쁜 성분이 함께 들어 있는데, 평소에는 좋은 성분이 앞에 나와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좋은 성분과 나쁜 성분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내 것을 내주어야 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나쁜 성분이 좋은 성분을 '빼앗아' 가버리면,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던 사람의 실체가 드러난다.

유소는 세 쌍의 짝을 제시한다. 자애로움(慈)과 어짊(仁)은 다른 것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애로움이지만, 정작 자기 것을 나눠줘야 할 때 인색해진다면 그는 자애롭기는 해도 어질지는 못한 사람이다. 인색함이 자애로움을 빼앗아 간 것이다. 측은해하는 마음(仁)과 몸을 던져 구하는 것(恤)도 다르다. 위급한 상황을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정작 뛰어들어야 할 때는 두려워하며 물러선다면, 두려움이 어짊을 빼앗아 간 것이다. 엄정한 낯빛(厲)과 진짜 굳셈(剛)도 다르다. 마땅치 않은 일 앞에서 낯빛은 근엄해지지만 자기 이익 앞에서는 속으로 물러진다면, 욕심이 엄정함을 빼앗아 간 것이다. 그래서 유소는 못 박는다. "자애로움이 인색함을 이기지 못하면 결코 어질다 할 수 없고, 어짊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결코 남을 구휼한다 할 수 없으며, 엄정함이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결코 굳세다 할 수 없다."

반대로 '구함(救)'도 살펴야 한다. 유소는 남의 것을 가져다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 과정에서 남에게 손가락질을 좀 받는다 해도 크게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소가 끌어오는 예화가 『논어』 「공야장」편의 미생고(微生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 오자 미생고는 자기 집에 없다고 하지 않고 몰래 이웃집에서 얻어다 주었다. 겉으로는 후덕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공자는 이를 두고 "미생고가 곧다고 누가 말하는가"라며 에둘러 비판했다. 없으면 없다고 해야 곧은 것인데,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남의 것까지 끌어다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소는 이 일화를 정반대의 맥락에서 다시 꺼내 쓴다. 남을 구제하려다 다소 무리해서 남의 것을 취하는 정도는 — 설령 '식초 빌려주기'라는 비아냥을 듣더라도 — 큰 탐욕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일화를 두고 공자는 '곧음의 순도'를 기준으로 나무랐고, 유소는 '해악의 크기'를 기준으로 감쌌다. 관점의 차이가 뚜렷하다.

이 관법은 오늘날 조직에서 사람을 볼 때도 그대로 유효하다. 평소 후배들을 잘 챙기고 덕망 있어 보이던 팀장이, 막상 예산이나 인사 평가처럼 자기 몫을 내줘야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인색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라도 어려운 동료를 감싸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원칙 위반'이 탐욕에서 나온 것인지 온정에서 나온 것인지를 가려보아야 한다. 유소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 이 사람이 정말 시험받는 순간, 자기 것을 내줘야 하는 그 순간에 무엇이 무엇을 이기던가?

둘째, 낯빛과 말이 어긋나는 순간을 보라 — 관감변(觀感變)

二曰觀其感變,以審常度。
둘째, 그가 상황 변화에 감응하는 바를 보아 그 평소의 일정한 원칙을 깊이 들여다본다.

사람은 두터운 얼굴과 깊은 속을 갖고 있어서, 가만히 있을 때는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유소는 이럴 때 두 가지를 동시에 관찰하라고 말한다. 하나는 그가 하는 '말의 취지'(辭旨)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남의 말에 '호응하는 방식'(應贊)이다. 말의 취지를 듣는 것은 음색의 좋고 나쁨을 듣는 것과 같고, 호응하는 방식을 보는 것은 상대의 지혜가 능한지 아닌지를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두 가지를 겹쳐보면 사람이 여러 유형으로 갈린다. 논지가 명확하고 주장이 바른 사람은 '명백한 사람'(白)이고, 말과 응답을 제대로 하지 않고 속을 감추는 사람은 '의뭉한 사람'(玄)이며, 옳고 그름을 또렷이 갈라내는 사람은 '통달한 사람'(通)이고, 이랬다저랬다 정론이 없는 사람은 '뒤섞인 사람'(雜)이다. 나아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아는 사람은 성인(聖), 드러나지 않은 일을 추론해내는 사람은 예지력 있는 사람(叡), 아는 것을 아둔한 척 숨길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智)이라 했다.

그런데 이 관법에서 정말 실용적인 대목은 뒤에 나온다. 유소는 말과 낯빛이 어긋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근심이 있는 사람의 낯빛은 "피로하고 거칠다"(乏而且荒). 겉으로는 멀쩡한 척해도 속에 근심이 가득한 사람의 낯빛은 "어지럽고 때가 낀 것처럼 뒤섞인다"(亂而垢雜). 그리고 결정적인 문장이 나온다. "말투는 매우 즐거운 듯하지만 낯빛을 정밀히 살피면 실은 따르지 않으려는 자는, 마음속에 못마땅함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있지만 낯빛을 보면 진심으로 믿을 만한 자는, 그저 말재주가 서툰 것뿐이다." 말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성난 낯빛이 먼저 스치는 사람은 속에 분노가 끓고 있는 것이고, 반대로 말을 하려는 순간 일부러 화난 기색을 훅 날려 보내는 사람은 억지로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유소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마음이 움직이면 용모가 그것을 따른다. 아무리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려 해도 대략은 알아낼 수 있다."

가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회사에서 팀 재편안을 발표하는 자리, 한 직원이 "네, 좋습니다. 잘 알겠습니다"라고 흔쾌히 답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고 시선이 옆으로 빠진다면, 유소는 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낯빛'을 믿으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회의 내내 투덜대듯 말하지만 정작 눈빛과 자세는 흔들림 없이 협조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그저 말이 곱지 못할 뿐 마음은 신뢰할 만한 사람일 수 있다. 관감변의 핵심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말과 낯빛 '사이의 어긋남'을 읽는 데 있다.

셋째, 바탕과 기운이 빚어낸 이름을 보라 — 관지질(觀志質)

三曰觀其志質,以知其名。
셋째, 그가 품은 뜻과 타고난 바탕을 보아 그 명성이 어디서 왔는지를 안다.

세상에는 '명성'이라는 것이 돌아다닌다. 저 사람은 훌륭하다, 세차다, 유능하다, 맡길 만하다는 식의 평판이다. 유소는 이런 이름들이 아무렇게나 붙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타고난 바탕(質)과 기운(氣)의 조합에서 정확히 결정된다고 말한다. "몸가짐이 곧고 기운이 맑으면 아름답다(令)는 이름이 생긴다. 기운이 맑은데 힘까지 강하면 세차다(烈)는 이름이 생긴다. 지혜가 강한데 이치에 정통하면 유능하다(能)는 이름이 생긴다. 지혜롭고 곧고 굳세면 맡길 만하다(任)는 이름이 생긴다."

말하자면 유소는 평판을 일종의 '화학반응식'으로 본다. 곧음(直)과 맑음(淸)이 만나면 '영(令)'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맑음(淸)과 힘(力)이 만나면 '열(烈)'이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식이다. 이 관법의 실용적 함의는 이렇다 — 평판을 들었을 때 "이 사람 유능하다더라"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그 유능함이라는 이름이 대체 어떤 바탕과 기운의 조합에서 나온 것인지를 거슬러 올라가 보라는 것이다.

가령 두 명의 팀장이 똑같이 "일 잘한다"는 평판을 듣는다고 하자. 한 사람은 침착한 판단력과 정교한 논리에서, 다른 한 사람은 굽힐 줄 모르는 기세와 밀어붙이는 힘에서 그 평판을 얻었을 수 있다. 이름은 같아도 바탕은 전혀 다르다. 전자에게 위기 대응을 맡기면 매끄럽게 해내겠지만, 후자에게 똑같은 일을 맡기면 힘으로 밀어붙이다 부서질 수 있다. 유소의 말대로 "이름이 생겨난 바탕을 파고들어 그 맑고 흐림을 살피면, 각기 다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명백해진다." 평판이라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 평판을 만들어낸 원재료를 보라는 뜻이다.

넷째,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보라 — 관소유(觀所由)

四曰觀其所由,以辨依似。
넷째, 그가 말미암는 동기를 보아 사이비를 가려낸다.

이 장 전체에서 유소가 가장 공들여 설명하는 대목이 여기다. 세상에는 겉모습은 똑같은데 속은 정반대인 것들이 있다. 오로지 남의 잘못만 들춰내는 사람(純訐)은 얼핏 곧아 보이지만, 그가 파고드는 것은 결국 선량한 사람을 흠집 내는 일이다. 오로지 호탕하기만 한 사람(純宕)은 얼핏 도리에 통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절도를 잃고 오만하게 구는 것일 뿐이다. 유소는 이걸 '사이비'(依似) — 그럴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 — 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가. 유소의 기준은 뜻밖에 단순하다. "곧으면서도 능히 따뜻한 사람은 다움이 있는 사람이다(德). 곧기는 하지만 남의 잘못 들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편벽된 사람이다(偏). 남의 잘못을 들춰내면서 곧지도 못한 사람은 사이비다(依)." 도리에 통달함(通)과 그저 절도 없는 호탕함(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는 비슷해도, 그 뿌리에 절제와 중심이 있는지 없는지가 진짜와 가짜를 가른다.

여기서 유소는 아주 유명한 반전 사례들을 든다. 은나라 재상 이윤(伊尹)은 어린 임금 태갑(太甲)을 궁에서 내쫓았다. 신하가 임금을 내쫓다니, 얼핏 보면 간사한 짓(姦)이다. 그러나 이윤은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는 공을 이뤄냈다. 이것이 "얼핏 그렇지 않은 듯하지만 실은 그런 것"(似非而是)이다. 공자는 제자 안회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종일 이야기를 나눠도 내 말을 어기는 법이 없어서 어리석어 보였다. 그런데 물러난 뒤 사생활을 살펴보니 오히려 내가 하고자 한 바를 충분히 실행하고 있었다. 안회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얼핏 어리석어 보인다(大智似愚而內明)는 것이다.

반대 방향의 실수도 있다. 공자의 제자 자우(子羽, 담대멸명澹臺滅明)는 얼굴이 못생겨서 공자가 처음에 그의 재능을 낮춰 보았다. 그러나 훗날 자우는 몸가짐이 반듯하고 원칙 있는 처신으로 삼백 명의 제자를 이끄는 인물이 되었다. 공자는 스스로 인정했다. "말로 사람을 평가했다가 재여에게 실수했고, 얼굴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 한나라 때 목축업자였던 복식(卜式)은 흉노와의 전쟁 비용에 보태라며 재산의 절반을 조정에 바쳤다. 승상 공손홍(公孫弘)은 이것이 "인정에 맞지 않는다"며 의심하고 청을 물리치라 했다. 순수한 선의가 자칫 꿍꿍이로 오해받은 경우다.

유소는 이 어려움을 인정한다. "사이비를 살펴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재판을 심리하는 것과 같아서, 그 실상을 가려내기 어렵다. 천하에서 가장 정밀한 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 실상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방법은 있다. "뛰어난지 아닌지를 살피는 일은 결국 그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所依)에 달려 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의 뿌리, 즉 동기를 캐물으라는 것이다.

오늘날 조직에서도 이 관법은 유효하다. 규정을 어기고 결과를 낸 직원이 있다면, 그것이 이윤처럼 대의를 위한 결단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원칙을 무시하는 습성이었는지를 가려야 한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눈에 띄지 않는 신입이 있다면, 그가 정말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안회처럼 물러난 자리에서 조용히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인지 살펴볼 일이다. 관건은 늘 같다 —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렇게 행동하는가.

다섯째, 사랑과 공경 중 무엇이 앞서는지를 보라 — 관애경(觀愛敬)

五曰觀其愛敬,以知通塞。
다섯째, 그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바를 보아 마음이 통하는지 막히는지를 안다.

유소는 사람 사이의 도리 중 사랑(愛)과 공경(敬)보다 지극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둘은 성질이 다르다. 공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도리이고,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도리다. 그래서 유소는 다소 뜻밖의 처방을 내놓는다. "사랑이 공경보다 모자라서는 안 된다." 공경만 넘치면 청렴하고 절의 있는 소수의 사람은 그에게 귀의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곁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인가. "공경이 도리가 되는 까닭은 엄격해 서로를 떼어놓는 데 있으니 그 형세가 오래가기 어렵다. 사랑이 도리가 되는 까닭은 정이 가깝고 마음이 두터워서 깊이 남을 감동시킨다."

이 대목에서 유소가 끌어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조순(趙盾)은 예상(翳桑)이라는 곳에서 사냥을 하다가 굶어 죽어가는 영첩(靈輒)이라는 사람을 발견하고 밥을 먹여 살려주었다. 훗날 정적이 조순을 암살하려고 매복시킨 병사들 가운데 하필 그 영첩이 있었는데, 그는 창을 거꾸로 돌려세워 조순을 살려냈다. 공경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사랑은 얻어낸다. 유소는 이것을 "예상 사람이 창을 거꾸로 해 은덕에 보답했다"(翳桑之人倒戈報德)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렇다고 사랑만 있으면 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유소는 사랑과 공경이 "한순간도 없어서는 안 되는" 짝이라고 못 박는다. 다만 둘 중 하나를 조금 더 두어야 한다면 사랑 쪽에 무게를 두라는 것이다. 리더가 원칙과 격식만 앞세우면 조직은 정연해 보여도 속으로는 서로 등을 돌린다. 반면 다소 느슨해 보여도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리더 밑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창을 거꾸로 잡아줄 사람이 나온다. 오늘날 회사에서도 규정과 위계로만 팀을 관리하는 상사와, 사람에게 정을 쏟는 상사의 팀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떠올려보면 이 관법이 낡은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섯째, 마음의 여섯 방아쇠를 보라 — 관정기(觀情機)

六曰觀其情機,以辨恕惑。
여섯째, 그의 마음속 기틀을 보아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의혹을 품는지 가려낸다.

유소는 사람의 마음에 여섯 개의 방아쇠(六機)가 있다고 말한다. 원하는 바를 이루면 기뻐하고, 이루지 못하면 원망한다. 누가 자기를 앞질러 자랑하면 미워하고, 반대로 자기를 낮추며 겸손하면 좋아한다. 자기 결점을 지적당하면 서운해하고, 악의로 그 서운한 곳을 콕 찌르면 질투로 번진다. 유소는 이 여섯 가지가 결국 하나의 욕망으로 수렴한다고 말한다. "이 여섯 가지 기틀은 모두 남의 위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유소가 던지는 실전 조언은 명료하다. 군자는 남이 자기를 살짝 건드려도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犯而不校). 공자의 제자 증자가 안회를 두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있으면서 없는 듯이 하며, 남에게 침범당해도 따지지 않는 것." 왜 따지지 않는가. 세상 사람이 남을 이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작은 일로 부딪쳐 봐야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소인은 이 방아쇠를 볼 줄 모른다. 유소는 전한 말의 승상 공광(孔光)과 그를 총애한 애제(哀帝)의 신하 동현(董賢)의 일화를 든다. 공광이 고분고분 따르자 동현은 크게 기뻐했다. 소인은 자기 마음속 방아쇠가 당겨지는 줄도 모른 채 그저 남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기만 바라고, 우연히 누가 자기를 만나러 오지 않으면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여겨 깊은 원망을 품는다. 유소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소인은 기쁘게 해주기는 쉬워도 섬기기는 어렵다."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 회식 자리에서 후배가 자기 성과를 은근히 자랑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선배 한 명이 "그 정도는 나도 예전에 다 해봤지"라며 은근슬쩍 깎아내린다면, 이 선배는 후배의 마음속 방아쇠 — 남에게 자기 성취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 — 를 정확히 건드려 미움을 산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 겸손하게 공을 동료에게 돌리는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이 유독 그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관정기는 결국 그 사람이 '남의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는 관법이다. 그 방아쇠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고, 그 방아쇠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비루한 사람이다.

일곱째, 단점에서 장점의 씨앗을 보라 — 관소단(觀所短)

七曰觀其所短,以知所長。
일곱째, 그의 단점을 보아 장점을 알아낸다.

치우친 재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단점이 있다. 그런데 유소는 이 단점이 그저 흠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점이 남긴 '그림자'라고 말한다. 곧은 사람의 실수는 남의 잘못을 들추는 것(訐)이고, 굳센 사람의 실수는 남을 매몰차게 몰아세우는 것(厲)이며,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의 실수는 물러터지는 것(懦)이고, 기개 있는 사람의 실수는 어딘가에 지나치게 매이는 것(拘)이다.

유소는 각각의 실수에 실제 인물을 붙인다. 초나라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우리 마을에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사실을 증언한 곧은 아들이 있습니다"라고 자랑하자, 공자는 "우리 마을의 곧음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니, 곧음은 그 안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곧음이 지나치면 고자질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굳센 사람의 실수는,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칼을 들이대는 극단으로 치닫는 데서 드러난다. 우(虞)나라의 궁지기(宮之奇)는 진(晉)나라가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치려는 것을 막아섰지만("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고사) 임금이 듣지 않자 결국 가족을 데리고 나라를 떠났다 — 조화를 지키려는 성정이 지나쳐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사례다. 그리고 노나라의 미생(尾生)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나는데도 끝내 자리를 뜨지 않다가 교각을 끌어안은 채 죽었다 — 신의를 지키려는 기개가 융통성 없는 고집으로 변한 경우다.

여기서 유소가 던지는 통찰이 결정적이다. "곧은 사람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곧음을 이룰 수 없다. 이미 그의 곧음을 좋게 본다면 그의 지적질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 지적질이야말로 곧음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즉 단점을 완전히 도려내면 장점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반듯한 조직에서 유독 남의 실수를 잘 짚어내는 직원이 있다면, 그 까칠함을 나무라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 이 까칠함이 그의 곧음이 남긴 그림자는 아닌가. 물론 유소는 곧바로 단서를 단다. "단점이 있는 자라고 반드시 장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남의 잘못만 들추는 사람은 결코 곧아질 수 없다." 단점이 곧 장점의 증거는 아니다. 다만 진짜 장점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단점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 그러니 단점을 볼 때 그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피라는 것이 이 관법의 요지다.

여덟째, 얼마나 멀리 내다보는지를 보라 — 관총명(觀聰明)

八曰觀其聰明,以知所達。
여덟째, 그의 귀 밝음과 눈 밝음을 보아 그가 얼마나 멀리 통달하는지를 안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관법은 앞의 일곱 가지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다. 유소는 먼저 다섯 가지 다움의 구조를 세운다. "어짊은 다움의 바탕이고, 마땅함은 다움의 절도이며, 예는 다움의 드러남이고, 믿음은 다움의 견고함이며, 지혜는 다움을 이끄는 장수다." 그런데 이 지혜(智)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유소는 "지혜는 눈 밝음(明)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눈 밝음이란 낮에는 해를, 밤에는 촛불을 기다리는 것과 같아서, 그 밝기가 성대할수록 더 먼 곳까지 비출 수 있다.

그리고 유소는 아주 인상적인 위계를 세운다. "배움은 재주에 못 미치고, 재주는 이치에 못 미치며, 이치는 지혜에 못 미치고, 지혜는 도리에 못 미친다." 부지런히 배운다고 반드시 재능을 갖추는 것은 아니고, 재능이 정밀하다고 반드시 이치에 닿는 것은 아니며, 이치에 밝다고 반드시 현묘한 지혜에 이르는 것은 아니고, 지혜롭게 일을 경영한다고 반드시 큰 도리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늘날로 옮기면 이렇다. 자격증을 많이 딴다고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반드시 일의 이치를 꿰뚫는 것은 아니며, 이치에 밝다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고, 지혜롭다고 반드시 큰 그림을 보는 것은 아니다. 네 단계는 서로 다른 능력이고, 뒤로 갈수록 드물다.

그래서 유소는 눈 밝음이 없는 사람의 네 가지 실패상을 그린다. "이름나기만 좋아하고 실제 능력이 없으면 텅 빈 사람(恢)이 되고, 말싸움을 좋아하면서 이치가 따르지 못하면 번잡한 사람(煩)이 되며, 법을 좋아하면서 생각이 깊지 못하면 각박한 사람(刻)이 되고, 술수를 좋아하면서 계책이 모자라면 거짓말쟁이(僞)가 된다." 이 넷은 모두 겉으로는 총명해 보이지만, 실은 눈 밝음이 뒷받침되지 않은 껍데기다.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 두 임원이 같은 위기 상황에 대응한다. 한 사람은 즉각 회의를 소집하고 강경한 대책을 쏟아내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언뜻 유능해 보인다. 다른 한 사람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짧고 정확한 한마디로 판을 정리한다. 유소라면 전자에게 '번잡한 사람'(煩)이라는 평을 내릴 수도 있다. 말과 대책은 많은데 이치가 따르지 못하면 소란만 남기 때문이다. 눈 밝음은 얼마나 많은 것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멀리, 정확하게 보느냐의 문제다.

유소는 이 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각자 홀로 행할 때는 어짊이 으뜸이 되지만, 여럿을 합쳐 함께 쓸 때는 눈 밝음이 장수가 된다. 눈 밝음으로 어짊을 이끌면 품어 안지 못할 것이 없고, 눈 밝음으로 마땅함을 이끌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으며, 눈 밝음으로 이치를 이끌면 통하지 않을 바가 없다." 앞의 일곱 가지 관법으로 아무리 세밀하게 사람을 뜯어보아도, 그것을 하나로 꿰어 멀리 내다보는 눈이 없다면 결국 조각난 관찰에 그친다. 그래서 관총명은 여덟 관법의 마지막 자리에서, 앞선 일곱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여덟 개의 창을 다 열어보았다. 빼앗음과 구함에서 뒤섞인 감정을 읽고, 낯빛의 미세한 어긋남에서 평소의 원칙을 읽고, 명성의 뿌리에서 바탕과 기운을 읽고, 행동의 동기에서 사이비를 가려내고, 사랑과 공경의 비율에서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지 막히는지를 읽고, 마음속 방아쇠에서 그 사람의 그릇을 읽고, 단점에서 장점의 흔적을 읽고, 마지막으로 눈 밝음에서 그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읽는다. 유소는 이 여덟 가지를 한 번에 다 갖춘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을 볼 때 이 여덟 개의 창 중 어느 하나라도 열어보라고, 그러면 겉치레 너머의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유소 자신도 다음 장에서 곧바로 인정하듯이, 이 여덟 개의 창을 손에 쥐고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잘못 본다. 아는 것과 실제로 잘 보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큰 틈이 있다. 그 틈이 다음 장의 주제다.


원 편명: 팔관 제9(八觀第九) — 참고: 이한우, 『이한우의 인물지』(21세기북스, 2023)

개요로 돌아가기 | 이전: 8장. 영재와 웅재 | 다음: 10장. 흔히 저지르는 일곱 가지 잘못

유소의 인물지/9장 사람을 살피는 여덟 가지 (last edited 2026-07-22 00:01:23 by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