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흔히 저지르는 일곱 가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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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에서 유소는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즉 여덟 가지 관찰법을 촘촘히 짜놓았다. 겉으로 드러난 인상에 속지 말고 상대가 편안할 때와 다급할 때, 기쁠 때와 화날 때를 두루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다 안다고 해서 사람을 보는 눈이 절로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 조작법을 안다고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듯, 문제는 대개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을 쥐고 있는 손, 곧 평가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에서 생긴다.
유소는 이 장에서 관점을 완전히 뒤집는다. 지금까지는 "상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보는 나는 어디서 자꾸 헛짚는가"를 묻는다. 아무리 팔관의 원칙을 외우고 있어도, 평가자 자신이 늘 걸려 넘어지는 자리가 일곱 군데 있다는 것이다. 유소는 이를 칠무(七繆)라 불렀다. 무(繆)는 그릇됨, 잘못됨을 뜻하는 글자다. 원문은 이 일곱 가지를 다음과 같이 못 박아 정리해두었다.
一曰察譽有偏頗之繆,二曰接物有愛惡之惑, 三曰度心有大小之誤,四曰品質有早晚之疑, 五曰變類有同體之嫌,六曰論材有申壓之詭, 七曰觀奇有二尤之失。
명성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다가 치우치는 잘못,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판단이 휘둘리는 잘못, 그릇의 크기를 헤아리다가 오판하는 잘못, 일찍 피는 사람과 늦게 피는 사람을 혼동하는 잘못, 나와 비슷한 부류를 무턱대고 편애하는 잘못, 그 사람이 처한 형편과 그 사람의 그릇을 뒤섞어 보는 잘못, 그리고 정말 비범한 인재와 그럴듯하게 꾸민 사람을 가려내지 못하는 잘못. 하나씩 들여다보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회사의 면접장에서, 정치판에서, 심지어 가까운 사람을 판단할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실수들이기 때문이다.
첫째, 소문만 듣고 판단하는 잘못 — 찰예유편파지무(察譽有偏頗之繆)
가상의 사례 하나를 그려보자. 한 스타트업의 인사담당자가 새 개발팀장을 뽑아야 했다. 마침 업계에서 "그 사람이 있던 팀은 무조건 잘된다"는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 있었다. 전 직장 동료들의 추천사도 화려했고, 콘퍼런스 발표 영상도 인상적이었다. 인사담당자는 별도의 실무 검증 없이 그를 채용했다. 몇 달 뒤 드러난 사실은, 그가 있던 팀이 잘된 것은 그 밑에 있던 다른 실력자 덕분이었고, 정작 본인은 그 실력자의 성과를 능숙하게 자기 것으로 포장하는 재주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유소가 짚은 첫 번째 잘못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 소문과 평판만으로 판단할 때, 그 평판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를 따지지 않으면 판단은 늘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다. 유소는 이런 태도를 가진 평가자를 두고, 제 눈으로 확인하는 대신 남의 귀동냥을 더 믿는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남들이 옳다고 하면 덩달아 옳다고 여기고 남들이 그르다고 하면 금세 마음을 바꾸니, 스스로는 아무 판단도 하지 않은 채 다수의 뒤를 쫓아다니는 셈이다.
더 고약한 것은 사랑과 미움의 감정까지 여기에 얹힐 때다. 명성을 좇는 것만으로도 이미 판단이 흔들리기 쉬운데, 거기에 호오의 감정까지 끼어들면 사람을 보는 눈은 걷잡을 수 없이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그래서 유소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이란 남에게 들은 말이 있어도 반드시 자기 눈으로 다시 확인하는 사람이고,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이란 직접 본 것이 있어도 남의 말 한마디에 그것을 내던지는 사람이라고 구분했다. 온 고을이 다 함께 칭찬한다고 그것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사귀는 이들 중 어느 한 부류에게서라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마땅히 살펴볼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다들 헐뜯는 사람 중에도 실은 무리와 어울리지 않아 미움을 산 것일 뿐, 속은 바른 사람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둘째,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휘둘리는 잘못 — 접물유애오지혹(接物有愛惡之惑)
전국시대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신하가 있었다. 위나라 법에는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탄 자는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밤중에 전해 듣자, 미자하는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그 수레를 몰고 나갔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임금 영공은 오히려 감탄했다. "효성이 지극하구나, 발꿈치 잘리는 죄도 잊을 만큼." 훗날 미자하가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베어 먹다가 유난히 달자, 먹던 것을 임금에게 그대로 건넸다. 영공은 이번에도 흐뭇해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지극하다니, 맛있는 것도 잊고 내게 먼저 권하는구나."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용모가 시들고 임금의 총애도 식자, 아주 사소한 일로 그가 밉보이게 되었다. 영공은 그제야 옛일을 다시 꺼냈다. "이자는 예전에 내 수레를 몰래 훔쳐 탄 적이 있고, 먹던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적도 있다." 미자하가 한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 사랑이 미움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유소는 이 이야기를 빌려, 사람을 대할 때 애증이 판단을 얼마나 쉽게 뒤집는지를 보여준다.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백 가지 흠이 있어도 그중 한 가지 통하는 구석만 보고 나머지 잘못을 잊어버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백 가지 장점이 있어도 단 하나의 어긋남 때문에 나머지 장점을 모두 지워버린다. 굽은 막대기도 필요할 때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고, 아껴 감춰둔 창도 마음이 돌아서면 반란의 흉기로 보이는 법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 자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감정이 사실 판단 위에 그대로 얹히는 순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된다.
셋째, 그릇의 크기를 잘못 재는 잘못 — 도심유대소지오(度心有大小之誤)
진나라 말, 훗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밀려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이 지나온 잔도(棧道)를 스스로 불태워 끊어버렸다. 겉으로만 보면 스스로 퇴로를 끊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천하를 다시 도모할 뜻도, 그럴 그릇도 없는 인물이라 여겼다. 반대로 항우는 스스로 강력한 초나라의 패왕이라 칭하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 겉모습만 보고 그가 곧 천하의 제후들을 호령할 것이라 짐작했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잔도를 불태운 유방의 그 조용한 행동에는 훗날을 도모하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고, 기세만 등등하던 항우는 결국 스스로 무너졌다.
유소가 지적하는 세 번째 잘못은 바로 이런 오판이다. 사람의 그릇, 곧 마음의 크기를 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작은 일 하나를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만 보고 "저 사람은 큰일은 못 할 그릇"이라 단정하거나, 반대로 배포가 크고 목소리가 우렁찬 모습만 보고 "저 사람은 뭐든 해낼 그릇"이라 넘겨짚기 쉽다. 그러나 유소는 정신이 그윽하고자 하면 세밀해야 신묘함에 이를 수 있고, 뜻이 크고자 하면 담대해야 큰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음이 세심하면서 뜻도 큰 사람이 가장 드물고 귀한 인물이며, 마음만 크고 뜻이 작으면 오만하고 방탕해지기 쉽고, 마음도 작고 뜻도 작으면 하나같이 작은 것에 얽매인 채 나약해진다. 이 네 가지 조합을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겉으로 드러난 세심함이나 대범함 하나만 보고 그릇 전체를 재단하는 것, 그것이 세 번째 함정이다.
넷째,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을 혼동하는 잘못 — 품질유조만지의(品質有早晩之疑)
가상의 사례를 하나 더 그려보자. 한 팀에 신입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한 명은 입사 첫 달부터 눈에 띄게 요령이 좋고 발표도 매끄러워 다들 "저 친구는 될 놈"이라며 기대를 걸었다. 다른 한 명은 말수도 적고 처음 몇 달은 성과도 더뎌서 "이 친구는 이 일이 안 맞나 보다"라는 평이 돌았다. 삼 년 뒤,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던 신입은 어느 순간부터 성장이 멈춘 채 늘 하던 수준에 머물렀고, 더뎠던 신입은 그사이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 팀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맡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소는 사람의 재질이 꽃 피는 시기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짚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찍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혜가 더디게 무르익어 늦게 이루는 사람도 있고, 아예 끝내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어려서부터 좋은 자질을 보이다가 나이 들수록 더욱 빛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찰력이 이 네 갈래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결과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그릇 전체를 재단해버리는 데 있다. 일찍 이룬 사람을 보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 믿고, 더디게 가는 사람을 보면 끝내 별볼일 없으리라 단정한다. 그러나 일찍 발휘되는 지혜는 작은 일을 빨리 알아채는 데는 강하지만 정작 깊은 이치까지 파고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늦게 이루는 지혜는 굼떠 보여도 결국 미묘한 데까지 헤아려내는 힘이 있다. 이 차이를 모르고 속도만으로 사람의 미래를 재단하는 것, 그것이 네 번째 잘못이다.
다섯째, 나와 비슷한 부류를 편애하는 잘못 — 변류유동체지혐(變類有同體之嫌)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 어느 부서장은 자신과 같은 학교 출신이거나, 일하는 방식이 자신과 닮았거나,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에 곧잘 동의하는 후배를 유독 아꼈다. 반대로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은 은근히 멀리했다. 몇 년이 지나자 그 부서에는 부서장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만 남았고, 다른 시각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둘 팀을 떠났다. 부서장 자신은 늘 "능력 있는 사람만 곁에 뒀을 뿐"이라 믿었지만, 실은 자신과 닮은 사람을 능력 있다고 착각해온 것이었다.
유소는 이 심리의 뿌리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데, 그 증명을 가장 손쉽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나와 성향이 같은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옳다고 인정받으면 곧 나도 옳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와 닮은 이는 제 몸처럼 아껴 추어올리고, 자기와 정반대인 이는 미워해 깎아내리며, 자기와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이는 그저 무심히 흘려본다. 심지어 나와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도 재주까지 비슷해지면 서로 경쟁자로 여겨 헐뜯게 되니, 곧은 사람이 자기보다 더 곧은 사람을 시기하고 눈 밝은 사람이 자기보다 더 눈 밝은 사람을 질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결국 "유유상종"이라는 익숙한 말 뒤에는, 내가 편애하는 대상이 실은 능력이 아니라 닮음이었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여섯째, 처지와 그릇을 뒤섞어 보는 잘못 — 논재유신압지궤(論材有申壓之詭)
전국시대의 유세객 소진(蘇秦)은 젊어서 여러 나라를 돌며 자신의 책략을 팔려 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왔다. 검은담비 갖옷은 다 해지고 노잣돈도 바닥난 채였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와 맞이하지도 않았고, 형수는 밥 한 끼 지어주지 않았으며, 부모조차 그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소진은 이를 갈며 다시 공부에 매진했고, 마침내 여섯 나라를 하나로 묶는 합종책을 완성해 여섯 나라 재상의 인장을 한 몸에 차는 자리에 올랐다. 훗날 그가 고향을 다시 지나가자, 그 형수는 이번에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얼굴조차 들지 못했다. 소진이 "예전에는 그리 오만하더니 지금은 어찌 이리 공손하십니까" 묻자, 형수는 솔직하게 답했다.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많아지셨으니까요." 소진의 그릇과 재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그가 놓인 처지, 곧 형세뿐이었다.
유소는 이 여섯 번째 잘못을 통해 사람의 형세와 사람의 그릇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한다. 부귀에 이르면 형세가 펴진 것이고 빈천에 떨어지면 형세가 눌린 것인데, 사람들은 흔히 이 형세의 펴짐과 눌림을 그 사람의 능력 자체로 착각한다. 형세가 좋을 때는 별다른 재주 없이도 일이 술술 풀리고 이름이 나며, 형세가 나쁠 때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비방이 쌓이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눈은 그 근본을 헤아리지 못한 채, 지금 펴져 있는 사람은 유능해서 그런 것이고 지금 눌려 있는 사람은 무능해서 그런 것이라 단정해버린다. 지위가 그 사람을 만든 것인지, 그 사람이 원래 그런 그릇이었는지를 가려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여섯 번째 함정이다.
일곱째, 진짜와 겉치레를 가려내지 못하는 잘못 — 관기유이우지실(觀奇有二尤之失)
한나라 문제 때 풍당(馮唐)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인물이었지만,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실력이 안으로 단단히 여물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좀처럼 티가 나지 않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낮은 낭관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의 주보언(主父偃)은 화려한 언변과 야심 찬 발언으로 단숨에 조정의 눈길을 사로잡아, 일 년 사이에 네 번이나 승진하는 파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보언의 그 화려함은 속이 꽉 찬 실력이라기보다 겉으로 타오르는 촛불에 가까웠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원한과 무리한 판단으로 몰락해 일족까지 화를 입었다.
유소는 이 마지막 잘못을 가장 어려운 함정으로 꼽았다. 겉모습이 수수하고 말수가 적으면 사람들은 그를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반대로 풍채가 좋고 말이 유창하면 대단한 인물로 떠받든다. 속내를 숨김없이 다 드러내면 실속 없는 사람으로 의심하고, 교묘하게 꾸며 말하면 오히려 신뢰할 만하다고 여긴다. 이렇게 사람들은 진짜 비범한 인재, 곧 안으로 정묘함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이와, 그럴듯하게 부풀려 있지만 속은 텅 빈 이를 좀처럼 구별해내지 못한다. 유소는 이런 이유로 사람을 너무 일찍 특별하다며 발탁하는 것보다 차근차근 검증하며 나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순리를 따르는 것이 늘 정답인 것도 아니어서, 초야에 묻힌 진짜 인재를 너무 늦게 알아본 것을 뒤늦게 후회하는 일도, 서둘러 발탁한 기재가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안목 없음을 자책하는 일도 역사에는 똑같이 되풀이되어왔다.
일곱 가지를 훑고 나면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해진다. 이 잘못들은 어리석은 사람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이 밝다고 믿는 이들일수록, 자신이 방금 명성에 흔들렸는지, 호오에 휩쓸렸는지, 그릇을 잘못 쟀는지, 속도만으로 재단했는지, 닮음을 능력으로 착각했는지, 처지와 그릇을 뒤바꿔 보았는지, 겉치레에 속았는지를 스스로 알아채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9장이 "이렇게 보라"는 적극적인 방법이었다면, 10장은 "이렇게 보다가도 이런 식으로 넘어지기 쉽다"는 겸허한 경고에 가깝다. 방법을 안다고 눈이 절로 밝아지지 않는다는 것, 사람을 안다는 일에는 끝내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칠무가 남기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함정을 피해가며 정말로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할 때, 그 알아봄은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유소는 다음 장에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아무리 애써도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는 태생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 그 어려움의 정체를 11장은 이야기한다.
원 편명: 칠무 제10(七繆第十) — 참고: 이한우, 『이한우의 인물지』(21세기북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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